if 1899.8
 갑작스럽게 그 틈바구니에 끼어든 어린 소녀의 모습이 환영처럼 일렁였다. 
 아. 그는 본능적으로 지팡이의 방향을 모로 꺾었다.



if 1899.12
 "미안해."
 "……이제 와서 할 소리야?"

 인사도 없이 그렇게 떠나놓고서, 몇달 만에 갑자기 찾아와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마주한 눈매가 서늘할만큼 차분하고 침착했다. 낯설기 짝이 없는 이질감이었다. 지난 몇 개월간 봐왔던 상대와는 사뭇 다른 인물처럼 느껴지는 거리감이 무형의 방패처럼 자신을 밀어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널 잘 알고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가? 입안이 바싹바싹 메말랐다. 마지막이 마지막이었던터라, 쉽게 받아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완고한 반응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는데. 그렇게 헤어지고 겨우 한 계절 남짓이 흘렀을 뿐인데 다시 만난 소년은 낯설기 짝이 없었다. 훨씬 파리해진 듯한 뺨과 한뼘 위로 올라온 듯한 눈높이, 얼어붙은 겨울 호수의 밑바닥처럼 가라앉은 눈동자.

 "용서해달라는 말을 하려고…… 다시 네 앞에 나타난 건 아니야."
 "그럴 생각도 없어. 너는…… 내 남동생에게 용서받지 못할 저주를 썼고, 내 여동생도 거의 죽일 뻔했지."
 "알버스, 나는──"
 "돌아가줬으면 좋겠어. 겔러트."
 "알버스."
 "솔직히 널 다시 보는 게 너무 괴로워. 네 이름을 부르는 것도, 너와 이렇게 마주보고 있는 것 자체도."

 이제껏 가면을 쓴 듯 무표정을 고수하던 앳된 얼굴 위로 한 줄기 균열이 스쳐지나간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한 소년이 제게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널 좋아했었지만, 지금은 그게 후회돼."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영국에 발을 디딘 이유는 자신 역시 알 수 없었다. 너는 나를 다시 보고싶어하지 않을텐데. 네 동생들을 해칠 뻔 한데다 한 마디 인사도 남기지 않고 그대로 네 곁을 떠나버리기까지 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에서 싸늘한 가을로, 가을이 찬 겨울로 바뀌는 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훅 떠나버렸던 것이 정말로 옳은 일이었는지, 널 그곳에 내버려두고 온 것에 대해 수백 수천번씩 다시 곱씹었다. 이만 돌아가줘, 등을 돌리려는 상대의 손목을 자신도 모르게 붙잡았다. 기억보다 가느다란 촉감에 잠깐 멈칫하던 것도 잠시, 서로 눈이 마주쳤다. 낯선 눈매였다. 한때 그토록 열렬하던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해오던 소년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버석버석한 눈매였다. 늦가을 길거리에 나뒹구는 낙엽처럼 건조하고 메마른.

 "미안해."
 "……뭐가?"
 "전부."

 그러니까, 제발. 알버스. 제발. 한번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으나 간절하게 속삭였다.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입안에서 단어와 단어가 아무렇게나 서로 부딪히고 수십수백개의 문장이 완성되지 못한 채 뭉개졌다. 그는 난생 처음 문장을 머릿속에서 어떻게 구성하고 내뱉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생소한 기분을 느끼며 몇번이고 반복했다.



if 1900
 날 평생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럴 수 있었다면 그때 널 다시 받아주지도 않았어. 나지막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깍지끼듯 마주잡은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if 1902
 "교수로 일하기로 했어. 오는 9월부터."
 "호그와트에서?"
 "당연하지. 내 모교가 아니면 어디겠어?"
 "축하해. 담당과목은 뭔데? 원서 내겠다는 말만 하고서 그건 안 알려줬었잖아."
 "변신술."
 "잘됐네, 너 변신술 잘 하잖아. 전에 썼다던 관련 논문도 학계에서 유명했댔고. 사실 너니까 무슨 과목이든 잘 가르칠 것 같지만. 학기 시작이 9월 1일이지? 그때 데려다줄까?"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데려다줄게. 첫 직장 첫 출근이잖아."
 "그럼…… 부탁할게."
 "좋아."



if 1904
"겔러트 오빠랑 결혼하고 싶어."

 아. 조금 있으면 다른쪽에서 폭탄이 떨어지겠군. 겔러트는 느지막히 대비했다. 귀를 막아버릴까 했지만 그랬다가는 더 난리를 칠 것 같아서 참았다.

 "──야, 너 내 동생한테 무슨 개소리 했어."
 "말이 심하네. 내가 대체 무슨 헛소리를 했다고 그래? 원래 네 여동생은 나 좋아하잖아. 원래 그 나이 또래 여자애들은 나처럼 잘생긴 사람을 좋아하고."
 "너 진짜 짜증난다, 너 때문에 내 여동생이 죽을 뻔했던 거 몰라? 양심도 없지."
 "그래서 사죄의 뜻으로 '고쳐'줬잖아. 난 네 귀여운 여동생에게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그리고 네 사랑스러운 형한테도 역시 최선을 다하고 있지."

 역효과만 날 것을 알면서도 꼭 마지막 문장을 덧붙이고나자 속이 시원했다. 야!! 한박자 늦게 외마디 소리가 고막을 때린다. 역시나 예상을 빗겨나가지 않는군. 그는 느긋하게 알버스의 귀가를 기다렸다.



if 1912
 이 학교에 소망의 거울이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순간부터 매번 그 생각을 했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람의 가장 내밀한 소망을 투영해준다는 거울을 보게 되면 과연 어떤 모습이 비쳐보일까.
 그래서 날 네 학교로 부른 거야? 같이 보자고? 처음으로 호그와트의 복도를 밟은 겔러트가 어린 소년처럼 눈을 반짝였다. 처음 만났던 순간 이후로 10년이 넘게 흘렀건만 특유의 명랑한 미소는 그대로였다. 어차피 부활절 휴가라서 성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별로 없고, 딱 좋잖아. 그렇다고 너같은 모범생이 부외자인 나를 학교로 끌어들이다니 놀랍네. 아직도 날 그런 식으로 취급하는 건 너밖에 없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 여기야. 문고리를 비틀어 열자 빈 교실에 어울리지 않는 장식품처럼 서 있는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웬만한 성인 남성의 전신을 비출 수 있을 정도로 큰 거울이었다. 알버스 네가 먼저 봐. 이제까지 한번도 안 봤다며. 내가 먼저? 나도 궁금하니까, 네 소망이란 게 뭔지. 못 이긴 척 이제껏 단 한번도 들여다 본 적 없던 소망의 거울 앞에 섰다. 눈을 감았다가 도로 떴을 때 거울에 비친 풍경은 낯익었다.
 ─별 다를 거 없는데? 똑같아. 뭐? 잠깐만, 나도. 겔러트가 냉큼 알버스의 옆에 와서 섰다. 특유의 버릇대로 눈을 가늘게 뜨고 한동안 거울을 응시하던 청년이 아, 짧은 탄성을 흘렸다. 나도 그래. 그냥 일반 거울처럼 너랑 나밖에 안 비쳐보이는데. 이 거울 하도 안 쓰이다보니 기능에 문제 생긴 건 아니지? 그런 건 아닐거야. 평범한 거울과 별 다를 것 없이 두 청년의 상을 그대로 비추고 있는 소망의 거울을 바라보며 알버스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알기로 소망의 거울이 이렇게 기능하는 경우는……



if 1937
 그 아이를 보는 순간 자네 생각이 나더군. 묘하게 닮아있다는 느낌을 받았어. 지금의 자네가 아닌…… 조금 더 어릴 적의 자네 말이야. 십대 시절의.

 "그래서 어떻게 했지?"
 "어떻게 했냐니, 당연히 호그와트의 규칙을 알려주고 그러한 행동은 교내에서 용납되지 않을 거라고 했지.  동행을 제안했더니 혼자 다이애건 앨리에 가서 물건을 사오겠다고 하던데."
 "특이한 아이군. 정말 그런 꼬마를 학교에 받아들여도 되는 거야?"
 "내 선에서 함부로 아이의 입학 유무를 결정할 수는 없으니까."
 "너야 사람의 선의를 믿으니까 그런 거겠지. 내가 갔으면 그런 쎄한 녀석 따위 그냥 내버려두고 돌아왔을걸. 참, 그 아이 이름이 뭐라고?"
 "리들. 톰 마볼로 리들."



if 1971
 "교장이 된 것을 축하해."
 "고마워. 겔러트 자네야말로 이번에야말로 호그와트에서 일해보는 건 어때? 이젠 내가 교장이니까 남 밑에서 일하기 싫다는 핑계를 또 대지는 않겠지."
 "알버스, 나는 가르치는 데는 자질이 없어. 알잖아."
 "그건 직접 겪어봐야하는 거지. 그리고 내 신조는 끔찍한 선생에게도 배울만한 점은 있다는 것이라서."
 "……자네 학생들에게는 참으로 안타까운 신념이로군."
 "자네가 아무리 형편없는 선생이라도 뭔가 가르쳐주기는 하겠지. 그리고 난 자네가 그렇게 끔찍한 교수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어디 보자. 마침 비어있는 자리가──"

 잠시 고심하던 상대가 곧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올려 시선을 맞춰왔다.

 "어둠의 마법 방어술, 어때?"



if 1977
 사람은 누구나 변하기 마련이란다. 느리게 차를 타며 노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달그락, 하는 소리와 함께 찻잔이 다시 탁상 위에 놓여졌다. 나쁜 쪽으로 변할 수도 있지만, 좋은 방향으로 변할 수도 있지. 포터도 마찬가지야, 에반스. 붉은빛이 도는 갈색 머리채를 귀 뒤로 얌전하게 넘긴 여학생이 난처한 듯 고개를 수그렸다. 하지만요, 교수님. 전 그애를 정말 좋아하지 않았는걸요. 정말로? 희끗희끗해진 금발을 뒤로 단정하게 빗어넘긴 노교수가 고민을 털어놓는 제자를 응시했다. 정말로 포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느냐? 네가 아까 털어놓았지 않니. 포터가 막 빗자루에서 내려온 것처럼 머리를 흐트러뜨리는 행위나 스니치를 가지고 장난치는 것, 쓸데없이 정의감에 넘쳐서 슬리데린 학생들과 부딪히는 것이며 다른 여학생들의 시선을 즐기는 게 싫다고. 포터가 정말로 싫었다면 왜 그 녀석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보고있었던 게냐? 게다가 그건 네 입으로 몇년전 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일일이 기억하고 있다니 대단하구나. 역시 우등생은 남달라. 아, 교수님…… 그건. 말꼬리를 흐리는 소녀를 향해 나이든 교수가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는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믿는 편이란다. 특히 너희 또래의 아이들이라면 더욱 그렇지. 듣기로는 요새 녀석도 전보다는 철이 든 느낌이라던데? ……전보다는요. 그래도, 작년까지 그애가 했던 일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저도 머글 태생이기에 학교 밖에서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요, 바로 제가 당할 수도 있는 일들이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터에게 마음대로 슬리데린 학생들을 징벌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건 그렇지. 포터가 정말로 바뀌었는지는 아무래도 에반스 네가 직접 판단할 일인 것 같구나. 내 생전 없을 일이라고 생각했건만 제자들의 연애상담도 꽤나 재미있군. 여, 연애상담이라니요! 그런 것 아녜요! 소녀가 도리질을 치며 뺨을 붉혔다. 그럼 우리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처음 약속대로 오늘 오간 대화는 비밀로 해주마. 알버스한테도 끝까지 함구하지. 노교수는 누군가의 익숙한 버릇처럼 손끝을 모으며 우아하게 대답했다.



if 1980.8
 제자가 성장하고, 성숙하며 자리잡아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스승으로서의 소소한 기쁨이다. 특히 아끼던 제자들이라면 더욱 그랬다. 제임스 포터와 릴리 에반스는 졸업 후 꽃 피는 봄에 결혼했고 태양이 가장 뜨거운 여름, 7월의 마지막 날 그들의 첫 아이가 태어났다.

 "아들이에요. 아이 이름은…… 해리, 라고 지을까 해요."

 팔에 갓난아이를 안은 릴리가 사랑스러운 듯 제 아들을 내려다보며 은사의 물음에 대답했다. 젊다기보다 어리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앳된 외모였으나, 아이를 쳐다보는 시선에서 진한 모성과 애정이 읽혔다. 불사조 기사단의 유능한 전력이자 이제는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된 제자. 그런 그녀와 그녀의 남편을 더할나위없이 아꼈던 두 스승은 울지도 않고 곤히 잠들어있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마디가 길고 주름진 손이 아이의 통통한 뺨을 스치듯 매만졌다.

 "해리, 해리 포터…… 좋은 이름이구나. 아이의 대부는 정했느냐?"
 "시리우스가 해리의 대부가 되어주기로 했어요."
 "아쉽구나, 에반스. ──아니. 이제는 포터인가? 용서하거라, 스승은 제자들의 옛 이름을 쉬이 잊지 못하는 법이니. 혹시 아직 대부를 구하지 못했다면 자원해 볼까 했는데 한발 늦었군."
 "어머, 만약 해리에게 동생이 생긴다면 그때는 꼭 그린델발트 교수님께 부탁드릴게요."
 "교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해리에게 동생을 만들어주기 위해 힘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릴리, 한 2년 터울이면 적당하겠지?"
 "제임스!"

 장난스레 아내의 어깨를 감싸안는 제임스와 남편을 타박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꺄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릴리, 그것은 마치 그림처럼 행복한 부부의 모습이었다. 그 무엇과도 견주어 비교할 수 없는. 그들은 가장 사랑했던 제자들이자 이제 믿음직한 동료가 된 젊은 부부의 모습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if 1991.7.31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경첩에서 떨어져 나간다. 폭풍우를 뒤로 한 채 들어선 오두막에서는 바닷가 특유의 짠내가 강렬하게 풍겼다. 알버스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살면서 평생 발도 붙이기 싫은 장소였으나 어쩔 수 없지. 몇 걸음 내딛기가 무섭게 어둑어둑한 거실에 앉아있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열살 남짓 되어보이는 어린 소년이었다. 그가 알기로는 오늘 열한살 생일을 맞았을 텐데, 소년은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작고 말라보였다. 한번 부러진 바람에 기워붙인 것처럼 보이는 안경, 마른 체격과 어울리지 않는 헐렁한 옷, 헝클어진 듯 보이는 흑발. 일어서봤자 기껏해야 그의 가슴팍 정도밖에 오지 않을 듯한 사내아이가 눈을 들어 그를 응시해왔다. 아몬드 모양의 눈매와 밝은 녹색 홍채가 유달리 낯익었다. 익숙할 수밖에, 다름아닌 그 릴리 에반스의 눈매였고 눈동자였으니까. 백합의 이름을 지녔지만 활짝 만개한 오월의 장미처럼 아름답고 강인했던 소녀를 기억했다. 누구나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두 사람─ 릴리와 제임스 포터가 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흔적, 그들의 하나뿐인 아들이 그의 앞에 있었다. 외모 자체는 제임스 포터의 어린 축소판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그 눈만은 릴리 에반스 포터를 빼닮아있는.

 "아버지를 닮았지만 눈은 영락없이 어머니의 눈이군. 그래…… 네가 바로 릴리와 제임스의 아들이로구나."

 진부하기 짝이없는 첫인사라고 생각했으나, 그는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을 그대로 입밖으로 흘렸다.

 "해리 포터, 살아남은 소년.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구나. 나는 너를 찾아왔단다."



if 1995.2
 "챔피언들로 하여금 그들의 소중한 사람을 호수에서 구출하게 하다니, 정말이지 특이한 시험이야. 포터의 위지는 위즐리, 디고리의 위지는 챙, 보바통 챔피언의 위지는 여동생이고…… 오. 덤스트랭 챔피언은 그레인저였군. 벌써 그렇게 깊은 사이가 되다니 놀라운걸."
 "'가장 소중한 대상'의 범위가 가족, 연인, 친구까지 다양하다는 것이 꽤나 흥미롭지 않나?"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설마 그 시험 내용, 알버스 자네가 고안한 거야?"
 "글쎄. 온전히 나만의 아이디어냐고 묻는 거라면 그건 아닐세."

 그 주인이 가볍게 고개를 젓는 동시에 횃대에 앉아있던 불사조가 나지막히 목을 울렸다. 마치 교장실에 걸려있는 익숙한 초상화들처럼, 일종의 정물처럼 느껴지던 새는 가끔씩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는 했다. 퍽스. 상대가 낮은 목소리로 불사조를 달래는 광경을 응시하며 그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내뱉었다.

 "안타깝게도 우리 때는 트리위저드 시합이 개최되지 않았었지. 만약 그랬다면 자네나 내가 챔피언으로서 더 일찍 만났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운 일이야. 그렇지 않나? 우리가 조금 더 일찍 만났다면 많은 것이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달라졌겠지. 아마 더 일찍 헛된 꿈을 버렸을 수도 있고."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에 대해 만약을 가정하는 것만큼 헛된 일이 없다고 할지라도,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그는 확신했다. 아주 많은 것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현재 자체는 변하지 않았을지언정, 현재에까지 이르는 과정은 매우 달라졌을 터.

 "만약 자네가 챔피언이었다면 누가 자네의 위지였을까?"
 "아마 경기가 진행될 수 없어서 방식을 바꿔야했을걸. 덤스트랭의 챔피언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호그와트의 챔피언이었을 테니까."
 "그래……? 호그와트의 챔피언 역시 마찬가지였을테니, 아예 시합이 진행될 수가 없었겠어. 챔피언 둘을 호수 속에 집어넣고 서로를 구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었겠는걸."

 두 노마법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 마주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if 1996
 "이게 그 호크룩스인가? 보기에는 그저 평범해 보이는데."
 "그래보이지만 볼드모트 경의 영혼 조각이 봉인되어있는 호크룩스가 맞다네. 혹시라도 그 반지 손가락에 끼워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
 "아, 마침 잘 말해줬어. 거의 그럴 뻔 했는데."

 농담 아니야, 그랬으면 자네 정말로 죽었어. 보기 드물게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반지를 도로 가져간 상대가 그것을 서랍안에 밀어넣었다.

 "어쨌든 그게 정말로……?"
 "맞아. 곤트의 반지에 박혀있는 것이 세 가지 죽음의 성물 중 하나인 부활의 돌일세. 어릴 적 자네와 내가 찾으려고 했었던……"

 한때의 치기이자 열병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을 정말로 마주할 날이 오다니. 한때 찾고자 집착했던 것이라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 그는 닫혀버린 서랍을 계속해서 응시했다. 딱총나무 지팡이, 부활의 돌, 투명 망토. 삼형제 이야기 속에서 나올만한 완벽한 투명 망토는 이미 본 적 있었으므로, 굳이 따지자면 성물을 처음으로 본 것은 아니었는데도 그러했다. 애초에 십대 시절에도 투명 망토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였을지도 몰랐다. 그도 알버스도 투명 망토의 도움 없이 스스로를 숨기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으므로. 그래도 제임스 포터가 가지고 있던 투명 망토를 직접 보았을 때는 조금 놀라긴 했었다. 현재에 비교하면 보잘 것 없는 충격이라 할지라도.

 "겔러트? 설마 지금까지도 인페리우스 군단에 미련이 남아있는 건 아니라고 믿고 싶은데."
 "아니야."
 "너무 열렬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길래 농담 좀 했어. 사실 자네가 성물 중에서 제일 갖고 싶어했던 건 딱총나무 지팡이였으니까. 투명 망토와 부활의 돌이 실존하는 걸 보니 딱총나무 지팡이도 분명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겠지……"
 "그렇겠군. 젊은 시절이라면 당장이라도 찾아 나서고 싶어했을 테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왼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를 가볍게 휘둘러보였다. 날갯짓하는 송골매처럼 유려한 동작이었다.

 "지금은 내 지팡이로 충분히 만족해."



if 1997.6
 "왜 포터와 단둘이서 가겠다는 거야? 나도 동행하게 해줘."
 "안 돼. 자네까지 따라오면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학교는 누가 지키고?"
 "유능하고 믿을만한 교감이 있지않나. 그 꼬마와 단둘이 가면 만일의 상황에서 자네는 누가 지키지? 보나마나 자넨 포터를 감쌀 거잖아."
 "겔러트. 몇번이고 말했지만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해."
 "그래서 그 꼬맹이가 몇번씩 자넬 해치려는 시도를 해도 그냥 내버려뒀었나 보지?"
 "말포이 군은 볼드모트 경에게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니. 사실상 내게 해를 끼치지도 못했지않나."
 "자네에겐 직접 해를 가하지 못했어도 하마터면 위즐리와 벨이 죽을 뻔했어. 그 녀석은 그 집단에 적극적으로 소속되길 바랬고 이제는 사람까지 해치려고 하고 있어. 난 자네가 그 꼬맹이를 방치하고 있는 이유를 영 모르겠단 말이지……"
 "말포이 군의 영혼은 아직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지는 않았을 걸세."
 "영혼은 사람 눈에 안 보여. 아무리 자네라고 해도 타인의 영혼의 순도를 판별하겠다는 건 오만이야."
 "늙은이의 오만이라고 해도 좋지만…… 겔러트 자네나 나나 사람 보는 눈은 있지 않나? 처음 만난 순간 자네와 내가 서로 동류라는 것을 알아봤던 것처럼."
 "그 이야기를 지금 끼워넣는 건 반칙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자네는 어려서부터 반칙을 좋아했지. 이제와서 내가 한두개 반칙을 저지른다고 지적할 셈인가?"
 "……어쨌든, 나는 자네가 위험에 빠지는 걸 보고싶지 않을 뿐이야."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약속할게. 그럼 만족하겠어?"
 "반쯤은."
 "좋아. 그럼 다녀오겠네."
 "꼭 약속 지켜야 해. 알버스."



if 1998.5.2
 볼드모트는 끝내 몰락했고, 살아남은 소년은 다시 한번 살아남았다.



if 2017.9.1
 ──포터, 알버스!
 어둠의 마왕을 물리친 영웅, 해리 포터의 친자식들 중 할머니의 눈을 지닌 유일한 아이는 제 이름이 호명되자 천천히 걸어나와 마법의 분류 모자를 들어올렸다. 모자를 쓰기 전, 어린 소년과 동일한 이름을 지닌 노마법사의 시선이 서로 교차했다. 단상 위에 앉아있던 호그와트의 교장은 가장 아끼던 애제자의 차남을 향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줍게 눈을 내리깐 소년이 곧 분류모자를 머리에 썼다.
 모든 것이 괜찮았다. 괜찮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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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은 상대의 답장을 기다리는 행위 자체에는 아주 익숙했다. 알버스가 평소 서신을 주고받는 상대들은 당대 명망이 높거나 저명한 학자들이 대다수였으며, 당연하게도 그들은 평소에도 아주 바빴다. 아직 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어린 학생 -아무리 그 학생이 한세기에 한번 나올까말까한 천재라고 할지라도- 과의 대화에만 온전히 몰두할 수 없는 위치의 인물들이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랬기에 국내외 명사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것은 항상 느지막한 속도로 진행되었다. 짧게는 1주일, 길게는 보름에서 한달까지. 부엉이 편에 편지를 보내고 나면 그 정도는 기다려야 비로소 상대의 답신이 도착하고는 했다. 그렇기에 편지를 보내고 나서 다시 답장이 올 때까지 쭉 기다려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며, 알버스는 단 한번도 답신의 도착여부와 속도에 있어 조바심을 내 본 적 없었다. 적어도 올해 여름까지는.

 "……"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고 서명까지 한 후 알버스는 제가 쥐고 있던 깃펜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분명 이른 아침에 만나 주위에 엷은 낙조가 깔리기 시작할 즈음이 되어서야 겨우 헤어졌을텐데, 왜 귀가하고나면 하지못했던 이야기들이 또 떠오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겔러트. 기적처럼 제 앞에 나타난 또래 소년. 자신만큼이나 똑똑하고, 또 자신만큼이나 영리한…… 그와 만난 이후로 학계의 유명인사들과 서신을 주고받던 교류는 거의 중단하게 되었다. 졸업 전부터 꾸준히 교류를 지속해오던 이들이 대다수였으나 별로 아쉽지는 않았다. 지금 당장, 제 눈앞에 알버스 자신만큼이나 총명하면서 대화가 잘 통하는 동년배가 있는데 굳이 그래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으므로. 자신보다 나이가 몇배 이상 많은 마법사 혹은 마녀들과 학술적 교류를 시작한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또래 소년소녀들 중에는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이제는 아니지 않은가. 당장 그와 나누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고 그와 함께 보내는 1분1초가 소중했기에 자신의 시간과 열정을 다른 곳에 쪼개어서 쏟아붓고 싶지 않기도 했다. 어차피 내일 해가 떠오르면 다시 만나게 될 상대였다. 내일도, 모레도. 하지만 밤이 흐르는 동안 자신이 하고 싶은 말, 그와 나누고 싶은 화젯거리를 하나라도 놓쳐버리게 될까봐 내일까지 기다리기는 어려웠다. 당장이라도 네게 전하지 않으면. 지난 17년간 항상 낮과 밤의 길이는 같았을진대 이번 여름밤은 유난히 길고도 지루했다. 밤이 이토록 길게 느껴지는 때가 이제껏 또 있었던가? 그렇기에 알버스는 상대와 방금 헤어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집에 돌아와서 도로 펜을 집어드는 것을 택했다. 편지에 담긴 내용은 다양했다.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토론 주제도 있었고, 현 사회의 부조리와 그에 대한 비판도 있었으며, 가끔씩은 서로가 알지 못하고 흘려보낸 각자의 학창시절과 지난 과거들에 대한 고백같은 편지도 있었다. 그리고 오늘 보내려고 쓴 편지. 한쪽 다리를 쭉 내뻗고 대기하고 있는 부엉이에게서 잠깐 눈을 뗀 채 자신이 쓴 편지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것이 바로 네가 덤스트랭에서 저지른 실수였어! 하지만 난 불평하지 않아. 네가 그 학교에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결코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알버스.

 …너무 솔직하게 썼나? 마지막 문구를 지워버릴까 잠시 고민하다 말고 알버스는 그대로 편지를 봉했다. 어쨌든 그 문장 자체는 진심이었다. 네가 퇴학당한 게 기쁘다는 듯 지나치게 들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않았으면 바랄 뿐. 만약 겔러트가 덤스트랭에서 쫓겨나지 않고 그대로 쭉 학교를 다니다가 졸업했다면 이 고드릭 골짜기까지 올 일은 영영 없었을 터. 변덕처럼 중간에 대고모 댁에 들리게 되었다 해도 최소한 올해 여름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게는 올해 여름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었겠지. 평소처럼 그에게 잘 전달해 줘, 알겠지? 수리부엉이의 다리에 편지를 매단 후 작게 속삭이자마자 부엉이가 홰를 치며 열린 창밖으로 날아갔다. 겔러트가 머무르고 있는 그의 대고모, 바틸다 백셧의 집은 알버스의 집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부엉이가 편지를 전달받아야 할 상대에게 잘 찾아가길 바라며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 응시하게 되는 건 왜인지 스스로도 이유를 잘 알 수 없었다. 어느덧 창밖에는 새까맣게 어둠이 내려앉아있었다. 밤공기를 가르고 날아가는 부엉이의 뒷모습이 이내 여름밤의 찬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아마 몇분 지나지 않아 부엉이는 겔러트의 손에 자신이 쓴 편지를 떨어뜨릴 것이고, 그가 답장을 쓰기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가 답신과 함께 돌아올 것이다. 이제까지 항상 그랬듯이.
 이제까지 단 한번도 편지를 보낸 후 그 답신이 최대한 빨리 도착하길 간절하게 바라본 적은 없었다. 아무리 학계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고 편지를 주고받는 것 자체를 영광으로 여겨야하는 거물들이었다고 해도 그랬다. 어차피 기다리면 언젠가는 답장이 도착할 것이고, 서두를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알버스와 교류하는 명사들 중에는 먼 해외에 거주하는 이들도 무수했고, 외국인 마법사들 역시 많았다. 하지만 왜 바다 건너 머나먼 곳에 사는 이들의 답신을 기다리는 것보다 바로 옆집에 살고 있는 또래 소년의 답신을 기다리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인지. 막 떠오른 생각들을 편지로 옮길 당시에는 들떠 있었다고해도, 겔러트에게 편지를 보낸 이후 답장이 도착하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언제나 불안하고 초조했다. 너무 늦게 보냈나. 혹시 이미 잠들어 있을까, 내가 부엉이를 보내서 괜히 자고있던 널 깨우게 되는 건 아닐까. 알버스는 벽시계를 흘낏 응시했다. 신경쓰지 않고 있는 사이 이미 자정이 훨씬 지나있었다. 이제까지 자정을 넘긴 시간에 편지를 보낸 적은 없었는데, 역시 너무 늦은 시간이라 자고 있을까? 자신 역시 그냥 자러가는 게 나을까 싶기도 했으나 정신이 말짱한 탓에 잠은 전혀 오지 않았다. 방을 이리저리 서성거려 보기도 하고, 겔러트를 만난 후 내팽개쳐 놨던 상장들 위에 뽀얗게 낀 먼지를 털어내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려고 애썼지만 다시 시계를 보았을 때 여전히 십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만약 답장이 온다고 해도 최소 이삼십분은 더 걸릴 텐데. 알버스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올해 여름밤은 길고도 길었다.
 그 순간 창가에서 뭔가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답신이 오기엔 아직 이른 것 같은데, 설마 부엉이가 벌써 돌아왔나? 반신반의하며 돌아선 알버스의 눈에 의외의 광경이 비쳤다.

 "─겔러트?"
 "안녕. 알버스. 이것 좀 열어줄래?"

 여름밤을 배경으로 더욱 화려하게 반짝이는 금발과 환하게 미소짓고 있는 잘생긴 얼굴. 마치 큰 새처럼 창가에 도사리고 앉아있는 십대 소년이 다시한번 창유리를 똑똑 두드렸다. 상대의 모습이 신기루나 환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 순간, 갑작스레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너 대체…… 어떻게?"
 "답장 쓰다가 갑자기 오고 싶어져서. 대고모님이 주무시고 계시길래 몰래 빠져나왔어. 이 시간에 방문하는 건 처음인 거 같다, 그렇지?"
 "그렇네, 정말……"
 "그러니까 창문 열어주지 않을래?"
 "아, 미안해. 지금 열어줄게."

 그저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인데 본인이 직접 나타나서 놀란 것도 잠시, 자신이 겔러트를 창밖에 내버려두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알버스가 허둥지둥 창가로 다가갔다. 지팡이를 집어들 생각도 나지 않아 떨리는 손으로 몇차례 헛손질까지 해가며 잠겨있던 창문고리를 어렵사리 풀었다. 딸칵, 하고 창문고리가 풀려나가는 금속성과 함께 겔러트가 가볍게 방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놀랐지? 미안해. 오겠다는 말도 미리 안 하고 와버려서."
 "아니야. 어차피 네 편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하긴 알버스 너도 내 답장보다는 내가 직접 오는 게 더 좋지?"

 이국에서 온 소년이 새하얀 달빛 아래에서 달빛보다 더 화사하게 웃었다. 눈부신 것을 본 사람처럼 알버스는 의식적으로 눈꺼풀을 깜박였다. 꿈이 아니라 현실이건만, 마치 생생한 자각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단 한번도 밤에 만난 적이 없었던가. 항상 해가 떠 있을 때 만났고 해가 지기 전 헤어져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기에 월광과 짙은 어둠을 배경으로 조우한 상대는 다소 낯설게 보였다. 잠깐 방안 풍경을 둘러보는 듯하던 겔러트가 예고없이 오른손을 뻗어왔다.

 "잠깐 밖에 나갔다 올래? 우리 밤에 만나는 건 또 처음이잖아."
 "지금? 당장?"
 "응. 공기도 선선하니 좋던데, 네 동생들도 다 자고 있지 않아?"
 "그건 그렇지만 이 시간에 나가는 건……"
 "서신으로 보내는 것보다 직접 얼굴 보고 이야기하고 싶어서 찾아왔단 말이야. 내일 아침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어. 그러니까 오늘 하루만, 알버스……"

 애교라도 부리는 것처럼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알버스를 재촉해왔다. 이제까지 깨어있던 이유도 겔러트의 편지를 기다리기 위해서였으니 본인이 직접 방문했다면 당연히……
 그런데 겔러트. 나 지금 잠옷 입고 있는데. 아, 뭐 어때. 밤인데 누가 밖을 보고있겠어. 정 신경쓰이면 투영마법 걸어줄까? 아니, 됐어. 네 말대로 누가 보겠어. 못 이기는 척 손을 내뻗어 마주잡은 손바닥의 감촉은 건조하고 서늘했다. 아까 보냈던 네 편지 여기 있어, 겔러트가 생글 웃어보이며 다른 손에 든 편지를 내보였다. 아. 새삼 아까 자신이 보냈었던 편지를 확인하자 민망한 기분이 들어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내가 덤스트랭에서 실수한 것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는다고 했지? 나도 마찬가지야, 어쨌든 학교가 날 내쫓아준 덕분에 여기 와서 알버스 널 만날 수 있었으니까."
 
 자신이 써보냈던 문구에 대한 화답을 활자도 아닌 목소리로 전달받자니 새삼 뺨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럼 가볼까? 물이 흐르는 듯 산뜻한 목소리가 자신을 재촉했다. 제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티가 날 만큼 많이 붉어지지 않았기만을 바라며 알버스는 낮게 속삭였다.

 "오늘 하루만이야."
 "고마워."

 겔러트의 가벼운 손짓에 다시 창문이 비스듬히 열렸다. 쏟아지는 달빛은 시리도록 희었으며 뺨을 스치는 밤공기는 시원했고, 어딘가에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두 소년은 손을 맞잡은 채 여름밤의 일탈과도 같은 첫 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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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은 숲이 시작되는 어귀에 자리잡고 있었다. 오래되어 보이는 성당은 그만큼 겉에서부터 고색창연한 인상을 풍겼다. 홀로 높게 솟아있는 뾰족한 첨탑이 유독 고고하고 우아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외벽에 새겨진 양각의 부조가 눈에 들어왔다. 가운데 서 있는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군상 개개인의 표정마저 표현되어있을 정도로 섬세한 부조였다. 아마도 머글들이 숭상하는 경전에 등장하는 장면이겠거니, 막연하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던 도중 성당 입구 옆에 서 있는 흰 성모상에 시선이 멎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성모는 처연한 표정을 띠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이방인을 환영하는 듯 자애로워 보이기도 했다. 겔러트는 다시 몇 발짝 앞으로 내딛었다. 손끝이 금속제 문고리에 닿았다. 관리가 잘 되어 있었는지, 오크 재질의 묵직한 성당문은 귀에 거슬리는 마찰음 없이 매끄럽게 열렸다.
 오후의 성당 내부는 조용하고 한적했다. 평소 사제가 서서 미사를 집전하는 제단도, 신도들이 앉아 있어야 할 회중석도 역시 텅 비어 있었기에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색색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과한 일광이 일렬로 놓여진 목재 의자들에 유유하게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높은 천정을 지탱하는 듯한 수개의 아치형 기둥들, 신도석을 좌우로 양분하며 제단까지 쭉 이어진 중앙 회랑에 길게 깔린 붉은 카페트, 제대 뒤쪽 벽에 매달려 있는 거대한 십자가. 그리고 코끝을 맴도는 오래된 성당 특유의 향취. 그는 결코 머글들을 좋아하지 않는 소년이었으나, 마법 없이 나름대로 일구어낸 머글들의 문화는 항상 그를 감탄케 만들었다. 문학과 건축, 음악과 같은 무수한 예술…… 이런 일개 건축물을 감상하자고 먼 이국까지 온 것은 아니었으나, 잠깐의 여유를 즐기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을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히기까지 그리스도가 겪은 수난을 무려 열네장에 걸쳐서 나눠 그린 듯한 성화를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회중석 가장자리에 앉아있던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당황함도 잠시, 상대의 모습이 겔러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제 나이 또래의 앳된 소년이었다. 그리고 머리를 덮고 어깨까지 흘러내린 반투명한 재질의 검은 미사보. 검은 미사보도 있었던가? 자신을 돌아보는 소년의 상반신 위로 스테인드 글라스 너머에서 쏟아지는 햇빛이 영롱한 색채를 흩뿌렸다. 상대 역시 낯선 불청객의 등장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근거리는 아니었으나, 기이하게도 소년의 모습은 화인을 찍듯 시야에 또렷하게 들어찼다. 마치 성당에 들어서기 전 보았었던 부조처럼. 일자로 곧게 뻗은 아미와 아몬드 모양의 눈매, 살짝 벌어진 입술의 모양새, 그리고 은방울꽃같은 흰 얼굴. 미사보 너머로 설핏 드러난 목줄기의 실루엣이 사슴처럼 가늘고 곧았다. 상대의 눈동자가 자신의 것보다 한 톤 더 옅은 빛깔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몇 초 정도가 지나서였다. 푸르다기보다는 차라리 하늘색에 가까운.
 소녀가 아닌 소년이었고, 머리에 쓰고 있는 것마저 흰색이 아닌 검은색의 미사보였지만 기이하게도 낯선 소년의 모습은 뜬금없는 장면을 연상케했다. 마치─ 식장에 들어서는 새신부가 등 뒤로 길게 드리운 순백의 면사포처럼 보여서. 겔러트는 착시와도 같은 상념을 떨쳐버리기 위해 의식적으로 눈꺼풀을 몇번 깜박였다. 여전히 베일을 쓴 상대는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제 착각은 쉽게 스러지지 않았다. 첫 대면이었다.



* * *
 마법사들은 머글들의 종교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게 종교에서 파생된 예술품들은 언제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무수한 건축물들, 낮게 울려퍼지는 화음이 매력적인 성가와 수많은 예술가들에 의해서 그려진 성화, 나이든 여인들이 소중히 들고 있던 로사리오. 겔러트가 태어나고 자란 중부 유럽에는 머글들이 세운 성당들이 무수히도 많았다. 으레 끄트머리에 십자가가 세워진 높은 탑과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혹은 성모 마리아 상, 열두 사도와 유명한 성인들이 조각된 부조들, 성인의 유해와 같은 성유물, 오색의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되어있는. 신앙심은 전혀 없지만, 겔러트는 성당 특유의 정적인 분위기를 좋아했다. 다소 독특한 취향이라는 생각은 줄곧 해왔지만…… 적어도 나는 미사보를 직접 써 본 적은 없었지.

 "그렇지만 조금 놀랐어. 보통 마법사들은 머글들의 문화에는 관심이 없는 게 보통이니까. 게다가 그 미사보는 또 뭐였어?"

 그 미사보는 어머니가 간직하시던 거야, 알버스가 겸연쩍은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 어머니는 머글 태생이셨으니까, 학교 입학 통지서를 받기 전까지 어쨌든 평범한 머글 가정의 딸이었다고 해. 남들이 믿는 만큼 평균치의 신실한. 우리 세계에 발을 디딘 이후 더이상 신앙생활은 하지 않으셨다고 하지만.

 "그리고 나도 겔러트 너처럼 성당 특유의 분위기는 꽤 좋아해서…… 앉아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거든. 그땐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었던 시기기도 했고."

 너와 만난 이후로는 영 다시 가본 적 없는 것 같네, 말을 덧붙이며 알버스는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특유의 수줍어하는 듯한 온화한 미소였다. 그 위로 첫 조우의 순간, 미사보를 쓰고 자신을 뒤돌아보던 소년의 모습이 찰나 겹쳐졌다. 신부가 드리운 베일을 떠올리게 하던 그 모습.

 "그런데 네가 다시 미사보 쓴 모습 보고싶어."
 "미사보? 그걸 왜?"
 "그냥."

 그때 너무 인상깊었었나봐, 어깨를 으쓱해보이자 알버스가 눈동자를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놔뒀던 지팡이를 가볍게 휘두르자 옆에 놓여있던 탁상 서랍장에서 미사보 주머니가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소년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알버스가 주머니를 열기 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겔러트가 팔을 뻗어 제지했다.

 "아, 그런데 내가 씌워줘봐도 돼?"
 "? 안될 거야 없지만……"

 장미 자수가 입구 주변에 아로새겨져있는 미사보 주머니를 가볍게 열어젖히자 곱게 접혀있는 미사보의 형태가 드러났다. 두 장이었다. 그때 보았었던 검은 미사보와 좀 더 보편적인 흰 미사보. 그는 흰 미사보를 들어올렸다. 끄트머리만 세심한 자수로 마감되어있을 뿐, 전반적으로 비치는 재질인 미사보는 흡사 거미줄로 자아낸 것처럼 얇고 가벼웠다. 겔러트는 미사보를 펼친 후 알버스의 머리 위로 조심스럽게 가져갔다. 씌워주기가 무섭게 하늘하늘한 미사보가 풍성하게 흘러내려 알버스의 머리와 어깨를 가렸다. 반투명한 미사보 아래로 붉은기가 도는 갈색 머리칼이, 반듯한 이마가 고스란히 비쳐보였다. 너울거리는 베일에 감싸인 단정한 얼굴이 흔들림 없이 그를 응시해온다. 본래 여성용이라고는 하지만, 미사보를 쓰고 얌전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년의 모습은 묘한 기분을 자아냈다. 최초에 연상했던 신부의 모습같기도 했고, 그게 아니면──
 다시 벗겨줄게, 서둘러 속삭인 후 그는 다시 미사보에 손을 댔다. 순간 알버스의 머리에서 베일이 느리게 떨어져내렸다. 채도와 명도가 다른 두 쌍의 벽안이 근거리에서 다시 교차했다. 고작 머리와 얼굴을 가리고 있는 반투명한 얇은 천 하나 벗겨주는 것 뿐인데…… 왜? 목이 탔다. 바닥에 미끄러져 떨어진 미사보를 주울 겨를도 없이 겔러트가 상대의 이름을 낮게 속삭였다. 알버스. 돌아오는 대답은 평온했다. 응. 언제나처럼 차분한 톤의 낮은 목소리, 흔들림 없는 눈동자. 타인은 그렇지 않은데 자신 홀로 동요하는 것 같은 기분은 낯설었고, 또 익숙하지 않았다. 겔러트는 베일을 쓰지 않은 소년의 앳된 얼굴에서 제 시선을 억지로 떼어냈다. 누군가를 바라보면서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만 같아서.




*Elisabeth- Der Schleier fällt(The Veil Desc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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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라니. 책에서만 존재하는 그런 감정을 나는 비웃었다. /윤정은, 갑을의 시





 사랑은 그저 덧없는 환상에 불과하다.
 항상 그렇게 생각해왔다. 아주 오래전부터 품었던 생각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열망과 간절함을 읽어낼 때의 기분은 성가셨고, 때로는 귀찮았다. 왜 나를 사랑할까, 나는 널 사랑할 생각 따위 전혀 없는데. 그가 보기에 사랑은 사람을 무모하고 어리석게 하는 요소일 뿐이었다. 사랑에 빠져서 멍청해질 뿐이라면, 사랑은 차라리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질병에 가깝지 않은가. 그것도 인류 대다수를 전염시킬만큼 전염성이 매우 강한 병증. 오래전 유년기에 읽었던 한 동화*를 기억한다. 그 동화의 주인공은 사랑에 빠지는 것을 염려한 나머지 어둠의 마법을 통해 자신의 심장을 적출하고, 따로 상자에 가둬서 보관한다. 결코 사랑이라는 감정에 빠지지 않도록. 애초에 동화니까 나올만한 이야기이고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기도 했다만, 그는 그 동화의 주인공 역시 어리석다고 판단했다. 자신을 얼마나 신뢰하지 못했기에 스스로의 심장을 꺼내어 봉인까지 한단 말인가? 굳이 심장을 밖으로 적출하지 않는다해도 그는 살면서 사랑에 빠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 책 속에서나 존재할 하잘 것 없는 감정 따위.
 자신은 절대 사랑에 빠질 생각이 없었지만 학창시절 내내 동경과 연정이 섞인 시선은 항상 따라다녔고, 상대의 눈빛에서 자신을 향한 특유의 감정을 읽어내는 것은 익숙했다. 그렇기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의 눈에서 그러한 흔적을 읽는 것은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알버스. 퇴학 직후 성물의 흔적을 추적하기 위해 들렀던 이국에서 만난 의외의 소울메이트. 아마 영혼에도 특유의 빛깔과 모양새가 있다면 알버스의 영혼은 자신과 쌍둥이처럼 닮아있으리라 그는 확신했다. 자신만큼이나 똑똑하고 뛰어난 어린 천재. 이제까지 자신과 대화가 통하는 또래는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알버스와의 만남은 더욱 특별했다. 성물의 행방을 좇겠다던 본래의 목적은 온데간데 없이 하루종일, 혹은 밤을 새워서까지 수십여 가지 주제들에 대해 토론하고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좋을 만큼. 우리가 함께한다면 아무것도 우릴 막을 수 없을 거야, 우리는 이 사회를 개혁할 수 있어. 매번 확신에 차서 속삭일 때마다 때이른 승리감과 고양감이 척수를 짜릿하게 관통했다. 나의 유일무이한 벗이고 친우이며 이 세상에 하나뿐일 동등한 존재. 언젠가 우리 이름이 역사책에 실리겠지, 모두가 우릴 존경하고 경애할 거야. 위대한 젊은 혁명가들이라고 우러러보면서. 그래야 할 터였다. 가장 자신을 사랑해서는 안될 인물이 있다면 그건 알버스였다. 우리는 서로의 천재성을 공유하는 하나뿐인 동류니까. 너만큼은 나를 사랑해서는 안 됐는데.
 처음에는 착각이겠거니 치부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부정하기 힘들 만큼 상대의 연심은 또렷하게 엿보였다. 익숙한 눈이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 특유의 달뜬 눈빛, 눈매, 눈동자. 갈망과 갈구, 열기가 어지러이 뒤섞여 있는……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구나, 대체 왜? 몇번이고 자문했으나 알 수 없었다. 왜 나를 사랑하지? 어째서 나를 사랑해? 네가 날 사랑하지만 않았어도 우린 계속 친구로서, 파트너로서 유대를 유지할 수 있었을텐데. 겔러트 본인과 유일하게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상대가 자신을 사랑한다니. 정말이지 당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의문하고 동정하면서도 연민했다. 대체 왜 나를 사랑하게 된 것인지에 대한 의문과 나를 사랑해버린 너에 대한 연민,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또? 하는 안타까움. 너는 나만큼이나 똑똑하잖아, 알버스. 그렇다면 너 역시 사랑이 얼마나 헛되고 의미없는 환영인지 잘 알고 있을 터인데…… 그런데 왜? 사랑은 그저 착각이고, 일개 망상이며 인간을 약하게 하는 전염성 강한 병증에 가까울 뿐인 감정이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여름의 끝무렵이 되어 일어난 모종의 사건 탓에 영국을 떠나게 되고나서도 그의 믿음은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아마 평생동안 그랬을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누멘가드의 가장 높은 탑, 그는 느리게 눈을 떴다. 반백년 가까이 아무도 방문하지 않았던 곳에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래, 네가 왔구나. 올 줄 알고 있었지…… 언젠가는 말이야. 하지만 헛걸음했구먼. 난 결코 그걸 가진 적이 없었다."

 불을 보듯 뻔한 거짓말이었다. 그는 눈앞의 상대가 활동하기 이전, 가장 위험한 어둠의 마법사라 불렸던 인물이었으며 1945년 결투에서 패배하여 이 누멘가드에 유폐되었다. 그리고 그때 그를 패배시켰던 인물의 이름은 마법세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소유자의 패배를 통해서 소유권이 옮겨가는 지팡이의 행방은 분명해진다. 자신이 딱총나무 지팡이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이미 알고 방문한 상대였다. 역시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을 터. 거짓을 말해보았자 통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어쨌든 그의 입을 통해서 바라던 것을 얻어갈 수는 없을 테니까.

 "어서 나를 죽여, 볼드모트. 난 기꺼이 죽음을 맞이할 테니! 하지만 내가 죽는다고 해서 네가 찾는 것을 얻지는 못할걸……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너무 많아……"

 친히 이 누멘가드에 발을 들인 불청객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다고 해서 얌전히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원하는 답을 들었다고 해도 그대로 순순하게 퇴장하지는 않겠지. 한때 '죽음의 지배자'라는 칭호를 꿈꾼 적 있었으나 죽음은 더이상 두렵지 않다. 어차피 생에 미련은 없었다. 그저 생존이라는 단편적인 가치에만 얽매여 있을 너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겠지, 한때 젊은 시절의 자신이 그러하였듯.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아직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한 절대 승리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랬었듯이.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때 저를 향해 사랑에 빠진 시선을 보내던 십대 소년 역시 자신처럼 나이를 먹었고, 심지어 이 세상 사람조차 아니게 되었지만- 그래도 최소한 그 무덤이 훼손되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한때 벗으로서의 마지막 신의라고 해도 좋았고, 말년의 얄량한 회개라고 해도 좋았으며 그 감정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는 진심을 담아 상대를 비웃었다. 우습고도 안타까웠다. 비록 먼 길을 돌아오기는 했으나 그가 뒤늦게 깨달은 것을 상대는 아직까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게 뻔하게 보여서.

 "나를 죽여, 어서! 넌 이기지 못할거야. 넌 이길 수 없어! 그 지팡이는 결코, 네 것이 될……"

 녹색 불빛이 좁은 감방 안을 비추는 낙뢰처럼 번쩍였다.
 한때 사랑이란 감정 자체를 부정하고 비웃었던 소년이 그것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최후를 맞이하기까지, 꽤나 긴 세월이 흘렀다. 1899년의 여름, 그 후 99년이 지나서의 일이었다.



*음유시인 비들이야기 - 마술사의 털난 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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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때로 자신의 영혼이 여전히 1899년의 여름에 붙들려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정확히는 1899년의 여름, 영국 고드릭 골짜기에. 그곳에 머물렀던 기간은 겨우 두어달 남짓이었고, 도망자처럼 급박하게 떠났던 이후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근처를 스쳐지나간 적조차 없었다. 이미 몇십년도 더 지나버린 오래된 이야기였다. 그러나 지층처럼 켜켜히 묻어두었다고 생각했던 기억은 뜬금없는 순간 부유하는 유령처럼 되살아나 그의 뇌리를 정처없이 방황하고는 했다. 1899년의 그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고, 학교에서 퇴학처분을 받은 후 이제껏 한번도 밟아본 적 없던 이국의 땅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났던 인물은 그의 인생에서 조우한 최초의 변수였다.
 그는 타고난 천재였고, 따라서 주위 상황과 인물들, 때로 자기자신마저도 거대한 체스판 위에 올려놓은 채 이용하고 조종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의 인생은 항상 철저히 통제된 상수로 점철되어 있었다. 미처 예기치 못한 요인에 의해 벌어지는 돌발상황 정도야 가볍게 해결할 자신도, 능력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삶은 언제나 씨실과 날실처럼 조밀하고 촘촘하게 짜여진 설계도 내지 청사진 아래 펼쳐져 진행되었다. 1899년까지만 해도, 그의 지난 16년은 항상 그러했다. 자신이 미리 예상한 방향에서 결코 일탈하지 않는 삶. 지루하다고 평할 수도 있겠으나 그는 자신의 방식에 만족했다. 심지어 졸업장도 받지 못하고 중간에 덤스트랭에서 쫓겨났을 때조차 그러했다. 퇴학 역시 그의 변수가 되지 못했다. 어차피 학교에서 더이상 배울 것은 없었다. 그것이 학문이 되었든, 인간을 다루는 기술이 되었든. 차라리 아무데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의 몸이 되어 제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 낫다. 그 즈음의 그에게는 이미 새로운 목표가 존재했다. 피브렐 가문의 일원들이 소유했었다던 세가지 죽음의 성물. 마법사들이 오히려 머글들을 피해서 숨어야하는 모순덩어리 현 사회를 개혁하고, 나아가 죽음의 지배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마침 이그노투스 피브렐이 살았다던 지역에 저명한 학자인 대고모가 살고 있었기에 찾아가는 것 역시 용이했다. 방학을 맞아 시간을 내어 먼 친척을 방문한 사랑스러운 소년, 그것이 그가 고드릭 골짜기에서 택한 대외적인 가면이었다. 목표는 오직 세 가지 성물의 행방을 추적하는 것─ 그리고 낯선 땅에서 그는 마침내 만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의 생에 있어 처음으로 등장한 변수, 차마 예측하지 못했던 분계점이자 최초의 이변이 될 또래 소년을.

 "안녕. 네 이름이…… 오, 알버스?"

 기억하고 있다. 때는 7월 초순이었으며 우거진 녹음은 청량했고, 하얗게 작열하는 일광은 따가울 정도로 내리쬐었다. 영국의 여름은 그의 고향이나 그가 다닌 학교에서 겪은 것과는 사뭇 다른 계절이었다. 그러한 계절에 두 소년은 마주했다. 상대의 이름을 소리내어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서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생전 처음 느끼는 감각이 척추를 타고 가파르게 흘렀다. 낯선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너는, 나와 '동류'구나. 너도 나와 같다고. 자신만큼이나 똑똑하고 총명하며 천재적이고 뛰어난 존재. 알버스. 그는 다시한번 입속으로 상대의 이름을 굴렸다. 그것은 이름 주인의 외모만큼이나 부드러운 어감이었다. 알버스와의 조우는 그의 삶에 있어 첫번째 특이점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만나버린 쌍둥이별자리의 나머지 반쪽. 찰나 제가 왜 이곳에 왔는지 망각하고 온전히 상대에게 빠져들 정도로, 자신과 동등한 존재와의 대화는 즐거운 일이었다. 기존에 맺어왔던 인간관계들과 다르게 통제도, 조종도 없이 그저 호감과 친근감으로 지속되는 관계. 어떻게 보면 생애 처음으로 사귄 진정한 의미의 '친구' 아닌가. 원래 성물의 행방을 파악할 때까지 잠깐 몇주정도만 머무를 생각이던 원래의 계획은 어느덧 뒤로 밀려나 있었다. 매일같이 마주하는 상대의 눈빛에 어느덧 갈구하는 듯한 열기가 깃들어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 그때서야 그는 자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두번째 변수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애초에 제어할 생각조차 없었던 첫번째 변수가 연이어 변이를 일으켰다.
 왜 그런 사랑에 빠진 눈으로 날 바라보는 거지, 네가 나를 사랑하면 안 될텐데. 차라리 티가 덜 났다면 무시라도 할 수 있었을테지만 알버스의 속내는 너무나도 선연하게 엿보였다. 흡사 손에 잡히기라도 할 것처럼. 왜 너는 나를 사랑할까. 제게 품은 연심을 채 숨기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질질 흘리는 앳된 얼굴을 무심하게 응시하며 그는 생각했다. 익숙한 눈빛이고 표정이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 특유의 갈망하는 듯한 눈매. 이미 그러한 시선은 그동안 지겹도록 겪어왔다. 하지만 처음으로 사귀다시피한 친구가, 또래 여자애들이 보내오던 바로 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꽤나 낯선 감각이었다. 이제까지 항상 자신이 짜온 판 내에서 이루어졌던 삶이 어느순간부터 걷잡을 수 없이 낯선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제게 연정을 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제와서 매몰차게 거절하기엔 이미 늦었다. 앞으로의 그의 계획, 이 사회를 개혁하고 죽음의 지배자가 되기 위한 청사진에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버렸기에. 꼭 거절할 필요가 있나? 그는 자문했다. 상대가 자신을 좋아한다면 오히려 잘 된 터였다. 그는 통제하고 조종하며 이용하는 데 익숙한 종류의 인간이었으며,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기라도 한다면 더 간단했다. 이제까지는 그저 친구로서 허물없이 대했다해도, 널 유용하게 써먹어줄게. 넌 날 사랑하니까.
 비록 예상치 못했던 예외로 점철된 여름이었으나 이제는 제 궤도를 찾게 될 것이다. 그는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 자신을 사랑하는 소년이 필요했고, 상대 역시 자신을 열망했으므로. 어쩌다 손끝이라도 스치게 되면 흠칫 굳어버리거나 파르르 어깨를 떠는 모습을 모른 척 하면서, 그는 처음 만났던 순간처럼 상냥한 태도를 견지했다. 이미 애정의 권력관계가 끼어든 이상 두 소년의 관계는 더이상 초반처럼 동등하지는 않았으나, 겉으로나마 아슬아슬하게나마 유지되고 있었기에.
 아마 이번에는 그의 계획이 엇나가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다른 돌발상황이 벌어지지만 않았다면. 아픈 여동생마저 함께 데리고 여정을 떠나겠다는 말에 알버스의 남동생이 강하게 반발하고, 고성이 몇번 오간 이후 언쟁이 지팡이가 동반되는 싸움으로 번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어디까지나 사고였다. 누군가의 지팡이에서 발사되었는지 모를 주문을 맞고 끈 떨어진 마리오네트처럼 느리게 지면으로 무너져내리는 어린 소녀의 모습을 보며 퍼뜩 정신이 들었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분명 계획에 없었던 일이었다. 삼자간의 싸움으로 커진 것 자체도, 알버스의 여동생이 죽은 것도, 전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무릎을 꺾은 채 주저앉은 소년의 눈동자에 더이상의 열기는 엿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거의 동물적인 감각에 가까운 예지였다. 자신의 계획은 이미 글렀다는 것을. 알버스는 그와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낙심한 채 떨면서 영국을 떠났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처참했던 실패였다. 길고도 짧았던 여름의 막바지에 벌어졌던 일이었다.
 그가 살면서 마주했던 변수와 이변, 실패의 기억들은 대부분 1899년 여름 한 철에 집중적으로 포진되어 있었다. 유일하게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었던 태풍의 눈 중심에 있었던 한 소년. 이상하게 너와 있을 때만은 내 뜻대로 잘 되지 않았지. 그는 나지막히 서류 중간즈음에 적혀있는 이름을 읊조렸다. 알버스, 덤블도어. 잊지 못했다. 잊을 수도 없었다. 타고난 통제광이었던 그에게 예외만을 안겨주었던 상대. 애초에 나도 그쪽도 신문 1면에 나란히 이름이 같이 실리는 유명인사니, 억지로 잊을래야 잊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군. 그는 쓴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3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갑작스럽게 나타나 내가 짜놓은 체스판을 무너뜨리는데는 여전히 최고구나. 유일한 나의 변수. 알버스. 여기서까지 네 이름을 마주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취조실의 조명이 유난히 서늘했다. 눈앞의 젊은이는 긴장한 듯 딱딱하게 굳은 채 시선을 옆으로 떨구고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손끝을 서로 모은 채 입을 뗐다. 언젠가 알고지냈던 소년의 버릇처럼.

 "오직 한 교수만이 네 퇴학에 반대했더군. 그래서…… 알버스 덤블도어가 왜 널 아꼈지?"

 알버스, 그 이름을 발음하는 순간 환시처럼 오래된 풍경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을 간절히 바라보던 사랑에 빠진 눈, 저를 향해 해사하게 웃어보이던 수국꽃다발같은 흰 얼굴. 자신이 나이를 먹었듯 상대 역시 나이를 먹고 중년에 접어들었을텐데도, 그가 떠올리는 인물은 언제나 열일곱 소년의 용모를 하고 있었다. 벌써 고드릭 골짜기를 떠난지도 몇십년이 흘렀으나 자신을 사랑했던 소년의 얼굴만은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몸은 오래전 그곳을 떠나왔어도 제 영혼의 중심은 여전히 그해 여름에 매여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제 상념을 씹어삼키며 겔러트 그린델왈드는 청년의 대답을 기다렸다.
*

 해리는 아무 데나 책을 펼쳤다. 책 한 면에 걸쳐 실려있는 십대 소년 두 명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을 찍을 당시 바람이라도 불었었는지 소년들의 머리칼이 산들산들 흩날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울창한 녹음을 배경으로 서로 약간 거리를 둔 채 떨어져서 서 있었다. 이 소년이, 정말로 십대 시절의 덤블도어일까? 해리는 찰나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빛바랜 사진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열여섯 살, 아니면 열다섯 살? 사진 속의 얼굴은 앳되다 못해 어렸다. 소년이라는 단어 자체를 인간의 형상으로 체화시킨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인상. 그의 기억 속 온화한 노인이 한때 이토록 청초한 분위기의 소년이었으리라고, 두 사람을 연결시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붉은빛이 감도는 갈색 머리칼과 단정한 이목구비, 상냥해보이는 눈매와 수줍은 듯 입가에 희미하게 걸려있는 옅은 미소. 그리고 소년이 걸치고 있는 것은 베스트와 흰 셔츠였다. 열린 셔츠 깃 사이로 사슴처럼 가느다란 목줄기가 길게 뻗어있었다. 사진 속의 십대 덤블도어 -로 추정되는 소년- 는 제 두 손을 앞에 겹쳐서 얌전히 모아쥔 채 해리를 유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약간 미쳤지만 위대한 마법사였던 은발 현자에게도 한때 소년 시절이 있었다니, 역시 멍청한 헤르미온느나 온순한 폭탄꼬리 스크루트처럼 어색하고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그 과거의 파편이 지금 해리의 눈 앞에 떡하니 존재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해사하고 예쁘장한 십대 소년의 모습으로.
 한편 어린 덤블도어 곁에 서 있는 금발의 소년은 덤블도어와 다르게 제법 성숙한 청년 티를 풍겼다. 그는 덤블도어보다 몇 뼘 정도 더 늘씬하게 키가 컸다. 소년의 곱슬거리는 머리칼은 색이 바랜 사진 속에서도 선연하게 반짝이는 금빛이었다. 약하게나마 미소를 머금고 있는 덤블도어에 비해 그는 무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문 입매와 사람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은 그의 잘생긴 얼굴을 더 오만하고 냉랭하게 보이게 했다. 목까지 꽉꽉 채워입은 검은 상의와 제복 내지 군복을 연상시키는 모양새의 군청색 겉옷, 뒷짐을 지고 있는 자세 역시 고압적인 분위기에 한몫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 속 소년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여신이 사랑했다던 오래된 신화 속의 미소년처럼. 십대 시절 덤블도어에게 이렇게 잘생긴 친구가 있었단 말인가? 해리가 알고 있는 덤블도어의 가까운 지인이라고는 도지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 도지가 젊어서 이런 출중한 외모였으리라고는…… 막 사진 밑에 붙어있는 설명을 확인할 틈도 없이, 사무실 문이 왈칵 열렸다.


*

 이제 해리는 등잔을 높이 든, 땅딸막한 그레고로비치의 뒤를 따라서 어두운 복도를 서둘러 걸어가고 있었다. 그레고로비치는 복도 끝에 있는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대패질한 부스러기와 흔들리는 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황금이 보였다. 그리고 창턱에는 금발 젊은이 하나가 거대한 새처럼 도사리고 앉아있었다. 그의 손에는 가느다란 지팡이가 들려있었다. 힐끗 열린 문 쪽을 돌아본 잘생긴 청년은 곧 고개를 돌려 비 내리는 창밖으로 거침없이 뛰어내렸다. 그의 화려한 금발과 긴 코트자락이 바람결에 나부꼈다.


*

 해리가 마지막으로 양초를 발견한 곳은, 수많은 사진들이 세워져있는 앞부분이 둥근 서랍장 위였다. 불꽃이 살아나 춤을 추자, 반사된 빛이 먼지 낀 유리와 은 액자 사이로 일렁였다. 그는 사진들이 아주 살짝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바틸다가 불을 지피기 위해 주섬주섬 장작을 주워모으는 동안, 그는 "테르지오"하고 속삭였다. 그러자 사진들을 뒤덮고 있던 먼지가 싹 사라졌다. 해리는 즉시 가장 커다랗고 장식이 화려한 액자들에 끼워져있던 예닐곱 장의 사진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과연 바틸다나 혹은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없앴을까 의아해하고 있을 때, 뒤쪽에 있는 사진 하나가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해리는 재빨리 그것믈 잡아챘다.
 그레고로비치의 창턱 위에 도사리고 있던 바로 그 젊은이, 금발의 잘생긴 도둑이 은 액자 안에서 해리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해리는 저도 모르게 불씨를 들고 있었던 손을 액자 가까이에 가져다 댔다. 불씨의 움직임에 따라 사진 속 인물의 고개가 미미하게 옆으로 움직였다. 귀족적이면서도 묘하게 수성(獸性)을 숨기고 있는 듯한 용모였다. 조각같은 이목구비에 음영이 짙게 드리워진 탓에 청년은 몹시 강렬한 인상을 풍겼다. 해리는 이 젊은이를 전에 어디서 보았는지 퍼뜩 생각났다. <알버스 덤블도어의 삶과 거짓말>에서 이 젊은이는 십대 소년이었던 덤블도어의 곁에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그렇다면 사라진 사진들이 모두 어디에 있는지 이제 명확해졌다. 바로 리타의 책에 실린 것이다.


*

 해리는 사진을 찾기 위해 책장을 휙휙 넘겼다. 거의 단박에 그가 찾고 있던 그 사진이 딱 눈에 들어왔다. 다시 봐도 놀라울만큼 청순한 외모의 어린 덤블도어와 그의 잘생긴 친구가 마치 오늘 처음 만난 사이처럼 미묘한 거리를 두고 서 있는 사진이었다. 해리는 재빨리 사진 밑에 실린 설명을 보았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의 알버스 덤블도어
 그의 친구인 겔러트 그린델왈드와 함께


*

 해리는 나이든 교장 선생님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다른 의자에 앉았다. 덤블도어의 긴 은색 머리카락과 턱수염, 반달 모양의 안경알 너머 꿰뚫어보는 듯한 하늘빛 두 눈과 휘어진 코, 모든 것이 그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심지어 그의 양손 모두 다친 데 하나 없이 깨끗했다. 하지만……

 "그런데 교수님, 어려서 제 생각보다 훨씬 예쁘셨더라고요."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아차 싶었으나 정작 덤블도어 본인은 별로 기분이 상하지는 않은 눈치였다. 익숙한 노인의 얼굴이 다정한 웃음을 머금은 채 해리를 돌아보았다. 이제껏 몇년간 봐왔던 그 얼굴 뒤로 언뜻 그 사진 속 소년의 청신한 이목구비가 스쳐지나가는 것 같아, 해리는 잠깐 눈을 깜박였다.

 "네가 그랬다면 정말 그랬겠구나, 해리."
 "어…… 죄송해요, 교수님. 그렇지만 정말 너무 의외여서……"
 "너무 오래전이어서 예전의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잊고 있었는데."

 덤블도어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기억을 되새기는 듯 먼 곳을 바라보는 눈매를 바라보며 해리는 불현듯 깨달았다. 그 사진 속에서 소년 시절의 덤블도어가 정면을 향해 보내고 있던 눈길, 그것은 다름아닌 사랑에 빠진 듯한 눈이었다. 그리고 그 연정이 향했을 대상은 아마……
 "겔러트, 이거."
 "이게 뭐야?"
 "부활절 계란. 안 받을거야?"

 작은 바구니에 소담스럽게 담겨있는 알록달록한 계란들을 응시하며 겔러트는 새삼 날짜를 되새겼다. 아, 그러고보니 오늘이 부활절이었던가. 전혀 신경쓰지 않고 지내다보니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부활절, 그리고 부활절 계란. 알버스의 손끝에 달랑달랑 들려있는 바구니를 받아들며 그는 내용물을 빤히 바라보았다. 보라색, 옅은 녹색, 분홍색, 푸른색 등 화려한 빛깔의 계란들을 보고있자니 새삼 오늘이 부활절이라는 기분이 났다. 꼼꼼하게 칠해진 밑색이나 고운 문양들이 꽤나 섬세하고 예뻤다. 본인이 직접 꾸민걸까? 아마 그렇겠지? 바로 지금까지 완전히 잊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절 계란들을 보고있자니 완연하게 실감이 들기 시작한다. 손톱으로 계란의 표면을 리드미컬하게 톡톡 두드려 본 후 겔러트는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고마워, 그런데 난 깜박하고 따로 준비 못 했는데 어떡하지."
 "괜찮아. 나도 잊고있다가 어제 저녁에 생각난 거라서."
 "그래도. 그냥 넘어가려니까 좀 미안하잖아. 알버스 네가 다 일일이 꾸민 거 같은데."
 "내가 하고싶어서 한 거니까,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돼."

 타고난 천재로서 어려서부터 칭찬과 찬사엔 익숙한 삶을 살아왔을 애치고는 유독 자신의 말에 한결같이 민망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색한 듯, 수줍은 듯 웃고있는 앳된 얼굴을 보고있자니 갑자기 뜬금없는 생각이 치고 올라왔다. 전부터 얘를 볼 때마다 들었던 상념이기는 했는데.

 "그럼 오늘은 네가 내 부활절 토끼야?"
 "……? 난 사람인데?"

 갑작스러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모양새나 눈꺼풀을 깜박거리는 모습이 정말로 토끼처럼 보이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풋 새어나왔다. 다소 짓궃은 취미일지도 모르지만, 항상 단정하고 평온한 흰 얼굴에 당황이나 놀람 등의 감정이 깃드는 것을 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상대가 겔러트 자신만큼이나 천재적이고 강한 마법사라는 건 알지만 어째 이미지는 토끼나 사슴같은 초식동물 류에 가까운 느낌이란 말이지. 게다가 오늘은 부활절이고, 무려 부활절 계란까지 가져다줬으니까 그야말로 부활절 토끼가 따로 없었다. 그것도 오직 나만의 부활절 토끼겠네.

 "아니, 그러니까 알버스 네가 나한테 계란 줬잖아."
 "응……"
 "그리고 원래 부활절 토끼는 부활절에 착한 아이들의 집에 방문해서 계란을 나눠준다고 하니까─ 아니다, 알버스 넌 이럴 때가 제일 귀여워. 이해 못 했어도 괜찮으니까 그냥 내 토끼하자."
 "…어, 네 토끼?"
 "착하지. 이리 와, 토끼야."

 깨지기라도 할까 달걀이 담긴 바구니를 조심스레 고쳐쥔 채 다른 팔로 허리를 감고 끌어당겼다. 영문을 모르는 표정을 한 채로 딸려와 순순히 안긴 알버스가 눈동자를 굴리며 저와 시선을 맞춰왔다. 아직도 왜 뜬금없이 자길 토끼라고 부르는지 이해를 못 한 얼굴인데. 어려운 논문이나 난해한 서적들은 술술 읽어내리고 외부 대회에서 매번 상장을 싹쓸이해 온 괴물인 주제에, 이런 단순한 농담들에는 삐걱삐걱 어색하게 반응하는 게 정말이지…… 아, 진짜 귀엽네. 얘 정말 뭘 먹고 이렇게까지 귀엽지. 이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씹어먹고 싶을만큼 사랑스러웠다. 한 손에 든 계란 바구니만 아니었으면 두 팔로 끌어안았을텐데. 소소한 아쉬움을 뒤로 하며 그는 생긋 미소지어 보였다.

 "Happy Easter."

 품 안에는 내 귀여운 부활절 토끼도 얌전히 안겨있고, 부활절 토끼에게서 받은 부활절 계란도 있고. 그야말로 더할나위없이 완벽한 부활절이었다. 내년 부활절에는 진짜로 토끼 귀라도 한쌍 달아줄까나. 알버스가 레질리먼시로 꿰뚫어보았다면 아마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생각을 하면서 겔러트는 자신의 부활절을 만족스럽게 만끽했다.



* * *
 "알버스, 넌 어려서 그런 것들 믿었어? 이빨 요정이라던가 산타클로스, 부활절 토끼 같은 존재들 말이야."
 "아니. 부모님이 다음 크리스마스 선물은 뭘로 할까 밤중에 나누시는 이야기를 너무 어린 나이에 들어버리는 바람에. 여동생에게 그 얘기를 해주지 말았어야했는데, 산타클로스가 없다니까 바로 울어버려서 달래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나."
 "그래? 난 믿은 적 있었는데."
 "겔러트 네가? 정말? 꽤 의외인걸."
 "사실을 고백하자면, 지금까지도 믿어. 적어도 부활절 토끼의 존재만큼은."
 "……?"
 "지금 바로 내 앞에 있잖아. 알버스, 너."
https://twitter.com/oasis52520/status/849515919760142337?s=09 기반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한 사람의 개인이 희생되어야만 한다면? 공리주의적으로 보자면 당연히 세계를 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일개 개인이 전 세계보다 더 중요한 무게를 지니고 있을 리가 없으므로. 하지만 그 개인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면, 세계를 등지고서라도 지키고 싶은 상대라면. 그가 없는 세계에서 홀로 살아가게 되느니 차라리 그 상대와 같이 세계의 멸망을 지켜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는 늘 그렇게 생각해왔다. 누군가의 희생으로만 뒷받침될 수 있는 세계라면 애초에 그렇게 지켜져야 할 가치조차 없다고.

 "……그러니까, 말했잖아. 알버스. 예전부터 쭉."
 "겔러트."
 "너 혼자서 세상을 구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어. 이 세계에는 그럴만한 가치도 없고."

 시시하고 하찮은 이야기다. 그는 곱씹었다. 그런 류의 이야기는 이미 차고 넘치게 많았다. 위기에 처한 세상을 구하기 위해 한 개인이 스스로를 희생하고, 세계는 구원받는다. 그리고 모두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 끝. 진부하고도 하잘 것 없었다. 과연 남은 사람들 중 몇이나 그 세계가 누군가의 희생을 딛고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것이며 감사할 것인가. 아마 다음날이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톱니바퀴와도 같은 기존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게 될 것이다.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텐데. 그런 수고 따위는.
 겔러트는 고개를 들어 상대를 응시했다. 나의 하나뿐인 벗, 나의 이해자, 쌍둥이 별자리와도 같은 나의 반쪽. 알버스. 물에 빠진 사람처럼 핏기없이 창백한 얼굴 가운데 눈매만이 또렷했다.

 "난 너 안 죽여. 아무리 세계의 안위가 달려있다고 해도 말이지. 누군가 한 사람이 십자가를 메야만 비로소 돌아갈 수 있는 세계라면 그게 더 비정상이라고. 진작 망했어야 해."

 애초에 그 전제 자체가 우습기 짝이 없었다. 5분 내로 널 죽이지 않으면 지구가 멸망할 거라고? 그럼 멸망해 버리라지. 겨우 이런 세상 따위를 구하기 위해서 내가 그렇게 행동할 것 같아보였나. 겔러트는 오른손에 들고 있었던 피스톨을 망설임없이 지면에 내던졌다. 총신이 바닥에 부딪히는 둔탁한 금속성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세상의 마지막 순간을 단둘이 함께할 수 있는 것도 꽤나 로맨틱한 경험이겠는데. 안 그래?"

 처음부터 비교할 가치조차 없었다. 어차피 네가 없는 세계는 내게 있어 더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는데. 제가 바닥에 떨어뜨린 권총에 알버스의 시선이 물끄러미 머물렀다. 그 시선을 가로막기라도 하듯 겔러트는 앞으로 한발짝 내딛었다.

 "친애하는 알버스, 그렇게해서까지 네가 세계를 구원해야할 이유는 없어."
 "겔러트. 제발."
 "이 세계 따위에, 네가 이렇게 몸바쳐서까지 구해야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네가 그렇게 간절하게 몸 바쳐 세계를 구하고자 한다면 세계야말로 널 위해 바쳐져도 된다고 생각해."
 "나, 나는……"
 "조금 더 이기적으로 굴어도 괜찮아. 넌 성자일 필요도, 영웅이어야 할 필요도 없고 메시아가 되지 않아도 괜찮아. ─그러니까 울지 마. 알버스."

 울지 마, 그는 다시 한번 속삭였다. 팔을 뻗자 상대의 눈가에 닿았다. 손끝에 선연하게 물기가 묻어났다. 너는 그게 문제야. 항상 제일 앞에서 나서서 뭐든 짊어지려고 하니까. 때로는 강박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책임감이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데. 왜 항상 네가 모든 걸 해결해야하는지 전부터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꼭 네가 전부 해야 해? 남들에게 하라고 해. 네 노고를 그들이 알아주기나 할 것 같냐고, 그렇게 말하면 분명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웃어보일 것 같지만.
 아이러니하지만 오히려 이런 기회가 찾아와서 다행인 것일지도 몰랐다. 나에게는 네가 제일 소중한데, 그동안 너는 세상에 헌신하느라 너무 바빴으니까. 아마 나와 이 세계를 저울질해야만 한다면 넌 틀림없이 세계를 고르겠지. 내게 조금은 미안해할 것이고 슬퍼도 할 것이다. 그래도 그 결정을 철회하지는 않겠지만. 하지만 나는 아니야. 내겐 네가 제일 중요해, 이 세계 전체보다도 더. 소리없이 울고 있는 상대를 그대로 끌어당겨 안았다.

 "괜찮아."

 알버스의 등을 토닥여주며 그는 힐끗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어느덧 분침은 1분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럼 이제 최후의 1분을 어떻게 보내야 잘 보냈다는 소리를 들을까. 이정도면 생을 마감하는 방법으로 그다지 나쁜 결말은 아니다, 되새기며 겔러트는 곧 다가올 마지막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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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



 소름끼치는 소음과 함께 항상 거울처럼 매끄러웠던 호수의 표면에 서서히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채 눈치채기도 어려운 미미한 진동이었으나, 점차 흰 포말이 날리며 작은 파도가 형성될 정도로 검은 호수 전체가 요동치고 있었다. 호수의 정중앙에서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하여 그 중심에서 뭔가가 솟아오르는 것이 눈에 보였다. 물체가 어느정도 호수 표면 밖으로 드러난 후에야 해리는 그 실루엣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돛대였다. 거대한 배의 크기에 알맞게 길쭉하게 뻗은 돛대였다. 하긴 아무도 덤스트랭 역시 보바통과 같이 마차로 도착할 거라고는 하지 않았었지만…… 배라니? 덤스트랭의 배는 막 건져올린 난파선처럼 뼈대만 남아있는 듯, 묘하게 기이한 인상을 풍겼다. 몽롱한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둥근 유리창은 유령의 눈처럼 보이기도 했다. 철벅철벅 물을 튀기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면서 배는 완전히 호수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한동안 파문이 이는 호수 위에서 출렁거리던 배는 느릿느릿 둑을 향해 미끄러지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닻이 내려지고, 호수 둑 위로 널빤지가 묵직한 소음과 함께 내려진다. 드디어 유령선같은 덤스트랭의 배에서 사람들이 내리고 있었다. 이번 트리위저드 시합에 참가하게 될 세번째 학교의 학생들이.
 멀리서 보이는 덤스트랭 학생들은 묘하게 덩치가 커 보였다. 그러나 잠시 후 현관 복도 불빛이 비치는 곳에까지 그들이 다가왔을 때 해리는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덤스트랭 학생들은 한결같이 모두 두터운 모피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제일 앞에서 학생들을 성으로 인솔하고 있는 남자 -교장으로 추측되는- 역시 은빛이 감도는 모피를 걸치고 있었다. 선두에 서서 언덕을 따라 올라오던 그가 덤블도어를 향해 힘차게 인사를 건넸다.

 "덤블도어, 안녕하십니까?"
 "아주 잘 지냈소. 고맙소, 카르카로프."
 "그리운 호그와트…… 아, 여기 아직까지 계셨군요. 그린델발트 교수님. 아니- 선배님?"

 성을 올려다보며 실크처럼 매끄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던 남자, 카르카로프의 안면이 문득 굳어졌다. 그의 시선이 못박힌 곳은 다름아닌 덤블도어의 옆에 태연히 서 있던 그린델왈드 쪽이었다. 카르카로프를 무시한 채 먼 발치를 응시하고 있던 그린델왈드가 이제서야 상대를 발견했다는 듯 과장스레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신가, 카르카로프. 썩 좋지는 못한 밤이로군."
 "……여전하시군요. 선배님께서 아직까지 호그와트에 붙어 계실 줄은 몰랐는데."
 "이 늙은이가 가긴 어딜 가겠나."
 "가실 곳이 없다면 이번 기회에 덤스트랭에나 한번 들리시지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비록 말투는 유들유들하지만 전혀 웃고 있지 않은 눈매를 한 그린델왈드가 바로 맞받아쳤다. 이미 덤스트랭 학생들은 모두 배에서 내려 교장의 뒤에 열을 맞춰 서 있는 듯했으나 카르카로프는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정말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신가요? 덤스트랭의 벽에 아직도 선배님이 퇴학당할 때 남기셨던 그 문장이 남아있습니다. 언제 들리셔서 지우시고 가시죠."
 "오, 이런. 카르카로프. 이제와서 내가 퇴학당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줄 필요는 없네. 그리고 내가 그걸 새기고 나온 건 열여섯 살 때의 일이었을텐데? 100년 가까이 된 일이라 까마득히 잊고 있었군. 덤스트랭은 고작 열여섯 꼬마의 흔적조차 알아서 처리하지 못하는가?"

 채 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열여섯 살 짜리의 서투른 마법을 백년동안 내버려두다니, 내 그리운 모교의 수준도 어지간히 낮아졌군그래. 그린델왈드의 노골적인 빈정거림에 애써 웃는 낯을 유지하던 카르카로프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사실 졸업장도 받지 못하고 퇴학당하셨으니 굳이 따지면 제가 선배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할 이유도 없겠죠."
 "아, 나도 자네에게 선배 호칭같은 건 그다지 듣고 싶지 않았다네. 그럴 이유도 없고. 어차피 내 졸업장은 덤스트랭이 아닌 호그와트가 줬고 말일세. 여기서 교수 노릇을 하려면 일단 졸업장은 있어야 하니 말이야."
 "글쎄, 교수라고요? 제가 전해듣기로는── 당신은 일개 트로피일 뿐이라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자신이 제대로 한 방 먹였다고 생각했는지 카르카로프의 얇은 입술이 위로 말려올라갔다. 그러나 상대가 내뱉은 문장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 그린델왈드가 새파란 눈을 깜박였다.

 "트로피라니? 내가 말인가? 대체 무슨 소식통을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난생 처음 듣는 소식이로군."
 "원래 발 없는 소문은 빠르죠. 그린델발트. 덤블도어 교수가 트로피를 들였다는 흥미로운 이야기 말입니다."
 "그래? 재미있군. 어디한번 계속 말해보게."

 오, 별로 좋지 않은데. 해리의 옆에 바짝 붙어 서 그 신경전을 관전 중이던 론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린델발트 교수님이 저렇게 사람을 코앞에 두고 눈을 가늘게 뜨는 건 정말 불길한 징조라고. 해리 역시 지난 몇년간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가차없이 T를 날리거나 거슬리는 학생을 상대로 20점씩 감점을 해버릴 때의 그 표정이었다.

 "학교 졸업장도 변변히 없고, 한때 어둠의 마법에 깊이 탐닉하기까지 했던 당신을 기꺼이 거둬준 것이 덤블도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요. 사실 불을 보듯 뻔하죠, 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쫓겨났던 당신이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기나 하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허울뿐인 교수이고 사실은 그의 트로피라 이 말인가?"
 "그게 아니면 뭡니까? 비록 당신이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다고 해도 허우대나 실력은 봐줄만 하니까 교장의 트로피로는 제법 걸맞지 않나요? 마치 덤블도어 교수가 교장실에서 키우고있다는 그 불사조처럼 말이죠─"

 상대의 속을 박박 긁어 불쾌하게 만들었음을 확신하듯 카르카로프가 입술 끄트머리를 비스듬하게 끌어올렸다. 그린델왈드 교수의 평소 성격대로라면 타학교 교장마저도 그의 학생들 앞에서 허공에 거꾸로 매달아버리고도 남을 것 같은데. 비단 해리만 그런 걱정을 한 것이 아니었는지, 보바통과 덤스트랭의 잇따른 등장으로 묘하게 들떠 있었던 분위기는 어느덧 불안한 기류로 바뀌어 있었다. 해리는 나지막히 헤르미온느에게 속삭였다.

 "헤르미온느, 만약 그린델발트 교수님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덤스트랭의 교장을 공격이라도 하게 되면-"
 "오, 너희 둘 다 바보같은 소리 좀 하지 마. 너흰 4년째 그를 겪고 있으면서 아직도 교수님 표정을 못 읽는단 말이야?"
 "그게 무슨……?"

 대답 대신 헤르미온느가 여전히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지는 듯한 전방의 풍경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보란듯이 조소를 머금고 있는 카르카로프와, 자신의 교직원이 외국에서 막 도착한 귀빈과 기싸움 중인데도 유독 평온해보이는 덤블도어, 그리고 상대를 빤히 응시하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그린델왈드 교수…… 잠깐, 웃음을 터뜨려? 얼떨떨해진 해리의 눈앞에서 반백의 노신사가 우아하게 손을 내저었다.

 "저런, 저런. 카르카로프. 설마 방금 나를 모욕할 목적으로 그러한 언사를 내뱉은 거라면 오산이라고 하고 싶군. 트로피라, 나쁘지 않은데."
 "네? 잠깐-"
 "비록 나이는 먹었지만 아직까지 여러모로 쓸만하다고 까탈스러운 자네에게 직접 인정받은 셈 아닌가? 이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찬사가 있나."
 "그린델발트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인상쓰지 말게. 안 그래도 자네가 나보다 더 늙어보이는데 안면에 주름까지 생기면 쓰나."

 카르카로프의 안면이 형용할 수 없게 일그러지는 것이 똑똑히 보이는 통에 해리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 그린델왈드가 카르카로프에게 저주를 쏴버릴까봐 걱정해야하는지, 카르카로프가 그린델왈드를 공격할까 걱정해야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 간의 날선 분위기는 제삼자의 중재로 인해 무너졌다.

 "자자, 두 분 다 이쯤하고 이만 안으로 들어가시죠. 계속 학생들이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껏 방관하다시피 바로 앞에서 벌어지는 기싸움을 내버려두던 덤블도어가 매끄럽게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미묘하게 유쾌한 듯한 어조였다.
 그리고 먼저 숙이고 들어간 것은 카르카로프 쪽이었다.

 "예…… 제가 조금, 여정 탓에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던 것 같군요. 어쨌든 이곳에 오니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좋은지……"
 "진심인가? 카르카로프?"
 "당연히, 진심이지요. 실례지만 먼저 이동해도 되겠습니까? …빅터! 자, 서둘러라.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구나. 아까 감기 기운이 있다고 하지않았니? 어서 따뜻한 곳으로 가자."

 여전히 굳은 얼굴을 한 카르카로프가 덤스트랭 학생들 가운데 한 명에게 손짓했다. 마치 지금까지 말싸움한 상대와 1초라도 더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다는 듯, 그는 불려나온 남학생을 데리고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그 남학생이 옆을 지나가는 순간 해리의 시야에 두드러진 매부리코와 짙은 눈썹이 흘낏 들어왔다. 그리고 그가 누군지 알아채는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방금까지 목격한 광경을 잊어버릴 만큼, 믿기 어려운 상대였다. 론이 해리의 팔꿈치를 툭 치면서 귀에 속삭였다.

 "해리, 크룸이야!"


* * *
 "우리는 규칙을 따라야만 합니다. 그리고 규칙에는 분명히 불의 잔에서 이름이 나온 사람은 이 시합에 참가해야만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우리 학생들의 이름도 다시 제출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다시 한번 불의 잔을 세우시오. 우리는 각 학교에서 모두 두 명의 챔피언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이름을 집어넣겠소. 그것이 유일하게 공정한 방법이오, 덤블도어."
 "하지만 카르카로프, 그럴 수는 없어요. 불의 잔은 조금 전에 꺼졌단 말입니다. 다음 시합이 시작될 때까지는 절대로 다시 타오르지 않을 거요."
 "이런 식이라면 다음 시합에 덤스트랭은 절대 참가하지 않겠소!"

 베그만의 설명에 카르카로프가 결국 벌컥 화를 냈다.

 "그토록 수많은 회의와 협상과 타협을 거쳤는데,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싶은 심정이오!"
 "그런 식으로 협박하지 말게, 카르카로프."

 문이 삐그덕 열리는 동시에 낯익은 음성이 해리의 귓전을 스쳐지나갔다. 그린델왈드가 성큼성큼 방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흡사 큰 새와 같은 인상의 노신사는 걸음걸이마저도 흔들림없이 우아하고 유려했다. 어깨 너머로 그의 검은 망토자락이 펄럭였다. 카르카로프가 질린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또 당신입니까? 그린델발트?"
 "이미 시합은 시작되었네. 알버스가 말하지 않았나? 챔피언들은 마법의 계약에 묶였다고. 아주 편리한 방법 아닌가?"
 "편리하다고요? 무슨 소리인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만?
 "아주 간단하지. 불의 잔에서 이름이 나오면 반드시 트리위저드 시합에 참가해야한다는 사실을 알고있는 누군가가 그 잔에 포터의 이름을 넣은 것일 터."
 "분명히 누군가 호그와트에게 사과를 두번 베어먹을 기회를 주고 싶었던 거죠!"

 맥심 부인이 끼어들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맥심 부인. 저는 마법부와 국제 마법사 연맹에 항의서를 보낼 생각……"
 "이 중에서 불평을 할 사람이 있다면 바로 포터 아닌가?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포터는 한 마디도 없는데 주위에서만 시끄럽군."
 "포터가 왜 불평을 하겠습니까? 그린델발트, 당신 학생이라고 해서 감싸주거나 하는 것은 공정하지──"
 "이것이 어둠의 마법의 개입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고 어떻게 부정할 수 있는가? 아마 누군가 시합 도중 포터가 죽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지."

 한동안 공기 중에 긴장과 침묵이 감돌았다.

 "그린델발트 교수님. 방금 하신 말씀은,"
 "그린델발트 교수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을까요? 그는 과거 저희 덤스트랭에서도 퇴학당했던 인물입니다. 바로 그 어둠의 마법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다른 동급생들에게 해를 끼칠 뻔한 실험 때문에 말이죠. 이제 어둠의 마법에 대한 열망을 버리고 정착한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입니다? 아직도 모든 것을 어둠의 마법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한 것을 보면 말이죠."
 "내 과거를 끌어와서 현 상황을 혼란케 하려고 하지 말게나. 조금만 머리를 굴려도 생각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포터의 이름을 집어넣은 자는 아주 뛰어난 마법사 내지 마녀일 걸세. 불의 잔처럼 강력한 마법의 물건을 현혹시킬 정도로."
 "그린델발트. 무척 천재적인 이론이긴 합니다만, 과거 어둠의 마법에 깊이 미혹되었던 당신의 말을 제가 귀담아듣지 않는다고 해도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한때 어둠의 마법에 가까이 접근했었던 만큼 내가 그것에 대해 아주 소상하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카르카로프. 이 방 안에서 오직 나만 그랬던 게 아니란 것을 자네가 제일 잘 알고 있겠지만……"
 "겔러트!"

 덤블도어가 그를 제지하듯 소리쳤다. 알 수 없는 이유에 의해 얼굴이 달아오른 카르카로프에 비해 그린델왈드는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언쟁이 강제로 종료되자, 이내 덤블도어는 모여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하지만 이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세드릭과 해리 모두 이 시합에 참가하도록 선택을 받았고, 따라서 그들은……"
 "하지만 덤블도어."
 "친애하는 맥심 부인. 혹시 대안이 있으시다면 기꺼이 들어보고 싶군요."

 더이상의 반론은 제기되지 않았다. 맥심 부인, 카르카로프, 플뢰르와 크룸 역시 마땅찮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아무도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나마 이 방 안에서 가벼운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은 베그만과 그린델왈드 뿐이었다. 해리와 그린델왈드의 시선이 순간 마주쳤다.
 벌써 4년째 그의 어둠의 마법 방어술 수업을 듣고 있었지만 교장인 덤블도어보다 더 멀리 느껴지는 존재였다.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버겁고 까다롭기 짝이 없는 수업, 호그와트 재학생이라면 누구나 악랄하다고 평가하는 극악한 시험 난이도, 툭하면 남발되는 감점과 빈말로도 결코 유하다고 할 수 없는 성미. 고상한 외모와 다르게 꽤나 불같은 성정은 아직 열댓 살밖에 되지않은 학생들에게 다가가기 어려운 장벽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오늘 유일하게 해리의 편에 서준 인물이었다. 아마 오늘밤 자신이 불의 잔에 이름을 넣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고 있을 만한 사람은 오직─ 해리에게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여보인 그린델왈드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요? 우리의 챔피언들에게 바티가 시험문제를 설명해줄 겁니다!"

 찰나의 눈맞춤 후 해리를 다시 현실로 끌고 돌아온 것은 베그만의 기운찬 말소리였다. 원하지 않았던 시합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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