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버스가 가족에 의해서 발목이 잡히는 것은 아주 잦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우연히 지나가던 숲속에 거대한 성이 있었고, 마침 그와 가족들은 여행중 길을 잃었기에 지치고 추위에 떠는 상태였으며, 마침 성안에 들어섰을 때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는 우연의 일치들에 대해서는 불평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차려져 있던 호화로운 음식들을 먹고 마시며 벽난로 앞에서 몸을 녹이던 때까지는 괜찮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애초에 그렇게 관리가 잘 되어있는 성이 주인 없는 빈 성이라는 착각은 하지 말았어야만 했는데…… 원래 사람이 여유가 없어지면 주위를 돌아볼 수 없게 되는 법이다. 나라도 들어가지 말자고 말렸어야 했나. 이제와서는 아무 소용 없는 이야기였지만. 알버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성의 성주가 길잃은 여행자를 박대하는 고약한 성미일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인간일거라고는 생각했었지.

 "무슨 생각을 하지?"
 "네 생각."
 "널 여기 내버려두고 떠나버린 네 가족들을 원망해?"
 "아니, 원망하지 않아."

 가족 때문에 주저앉는 건 익숙했고, 역시 이런 고성에 인외의 형상을 한 집주인과 단둘이 남겨진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는 가족을 사랑했으니까. 가족을 위해서. 가족. 가족이란 대체 무엇일까? 가족 때문에 발목이 잡히는 건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입학 직전 감옥에 갇혔을 때가 처음이었었다. 그로 인해서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제게 주홍글씨가 붙었던 것을 극복하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는데, 이제 그 학교도 졸업 못 할지도 모르겠네. 성의 주인이 영영 내보내주지 않는다면 돌아갈 수 없을테니. 알버스는 흘낏 상대에게 시선을 던졌다. 처음에야 놀랐지, 이젠 익숙해져서 그가 아무 소리없이 옆에 다가와도 그다지 놀라지 않는다는 것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 수 없었다.
 알버스의 가족들이 지친 몸을 의탁했던 고성의 주인의 등 뒤로 긴 꼬리가 공중에서 채찍처럼 유영했다. 그리고 네 발로 지면을 디디고 선 늘씬하고 유연한 동체. 한발짝씩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늬가 아로새겨진 털가죽 아래 탄탄한 잔근육들이 물결쳤다. 웬만한 성인 남성보다 훨씬 거대한 재규어였다. 앞발로 가볍게 후려치기만해도 사람의 목뼈 정도는 간단히 부러질 것 같았다. 그나마 새파란 눈동자에서 읽히는 냉정한 이성의 흔적만이 평범한 맹수와 그 궤를 달리하게 만들었다. 이 성의 주인은 인간이 아닌 야수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인간의 말을 거침없이 구사하는데서 그냥 단순한 짐승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하지만. 며칠 지난 지금이야 익숙해졌다지만 처음 봤을 때는 정말이지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충격이었다. 갑작스럽게 실내의 불이 꺼지고, 창문들이 일제히 열리며 분위기가 일변한 와중 푸른 눈의 네발짐승이 천천히 걸어들어오던 그 순간의 기분을 알버스는 기억했다.

 "누구 마음대로 이 곳에 들어왔지?"

 아마 그렇게 말했던가. 짐승 특유의 거친 그르렁거림이 섞여있었지만 목소리 자체는 젊었다. 청년, 혹은 소년의 것처럼. 빈 성인줄 알았던 곳에서 말하는 맹수와의 조우라니 경악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옆에 있던 남동생이 어린 여동생을 보호하듯 끌어안았고 어머니는 자신의 앞을 가렸었다.

 "그저…… 길을 잃었을 뿐이에요. 아무도 없는 줄 알아서,"
 "그래? 정작 주인인 나는 허락한 적 없는데."

 노골적으로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에 소름이 돋았다. 집채만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움직일때마다 소리 하나 나지 않는 것 역시. 맹수가 시퍼런 안광을 빛내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송곳니가 위협적일만치 희게 빛났다.

 "여기서 꺼져,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아── 그 전에 한 명은 여기에 남아."
 "…예?"
 "한 명만 남으라고. 귀 멀었나? 그럼 나머지는 무사히 돌려보내줄테니까."

 한 사람만 여기에 남으라고. 뜬금없는 요구였다. 딱 한 명만.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알버스는 제가 남겠다고 자원했고 남은 가족들을 모두 무사히 내보냈다. 지금쯤은 집에 돌아가고도 남았겠지, 잘 돌아갔어야 할텐데.
 꽤나 고결하시네. 그런 상황에서 쉽게 나서기가 어려웠을텐데? 재규어가 비아냥거렸다. 그런 게 아니야. 알버스는 생각했다. 아버지는 감옥에 있고, 여동생은 매우 병약하다. 남동생은 아직 철이 없고. 그애들에겐 어머니가 필요하니 당연히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동생들한테 이 맹수와 단둘이 빈 성에 남으라는 것도 말이 안되지. 가족을 사랑하기도 했지만, 철저한 소거법의 논리에 따른 결과 결국 남아야 하는 사람은 알버스 자신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미 익숙하니까. 그가 대답하지 않자 흥이 깨져버리기라도 한 듯 재규어가 돌아섰다.
 재규어와의 생활은 생각보다 단조롭고 반복적이었다. 성 안에서 다른 사람은 머리카락 끄트머리도 보지 못했고, 사용인의 흔적은 전혀 없었는데도 세끼 식사는 꼬박꼬박 준비되어 나왔다. 최소한 그의 평소 가정식보다는 호화로운 식사였다. 또한 제가 머무르도록 배정받은 거처는 저녁에 돌아갈 때마다 청결하게 정리되어있었다. 딱히 알버스에게 주어진 침실만 그런게 아니라 크고 고풍스러운 성의 복도와 방들은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것처럼 항상 깔끔히 관리되어있었다. 설마 그가 직접 일일이 하는 것은 아니겠지. 잠깐 떠오른 상념을 고개를 저어 떨쳐버린 알버스는 제가 아직까지도 상대의 이름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평범한 짐승이 아니라면 당연히 이름도 있을텐데 이제까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 역시 굳이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고. 나중에 마주치면 꼭 물어봐야지, 알버스는 홀로 식사를 하며 결심했다. 그러고 보니 상대는 단 한번도 자신과 같이 식사를 하려들지 않았다. 혼자 식사하는 걸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식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는걸까. 앞발로 식기를 잡을 수 있긴 한걸까? 그는 인간처럼 식사할까, 아니면 정말 짐승처럼 날고기를 먹을까? 식재료는 어디서 조달해오는 거지? 나는 왜 붙잡아두는거야? 한번 떠오른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생각해보면 알버스는 저를 억류하고 있는 상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처음에 두려움 탓에 아무것도 묻지 못했고, 재규어 역시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으므로. 기묘하기 짝이 없는 한 지붕 밑의 동거였다.
 사실 성에 있는 동안 몸만은 편안하고 안락했다. 인질처럼 잡혀있는 것이 아닌 단순한 휴가였다면 정말 좋았을텐데. 알버스는 가끔씩 그렇게 생각했다. 여기선 누구도 알버스에게 완벽한 모범생이기를 강요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시간에 맞춰 수면을 취하고 식사를 하며 남는 시간에는 내키는대로 성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성의 주인은 오직 서쪽 탑에의 출입만을 금지했을 뿐이었다. 성의 전반적인 지리를 얼추 파악하고 어느정도 재규어에 대한 두려움이 가라앉은 일주일쯤 되었을 때, 참다못해 지루함을 호소하자 재규어는 서재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성의 규모와 어울리는 수천, 수만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는 거대한 서재였다. 그것은 잠깐 동안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잊을 정도로 압도적인 풍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지식에 대한 갈증은 여전하다니, 실소가 났다. 나는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기는 한 걸까.
 그가 재규어와 다시 마주치게 된 것은 그날 밤의 일이었다. 두꺼운 책을 두세권 옆에 낀 채, 자신에게 주어진 침실 앞에서.

 "이름? 그런 게 궁금해? 너도 참 특이하네."
 "같이 지내는 상대 이름 정도는 알고싶은 게 당연한 거 아닐까."
 "나는 널 당장이라도 죽여버릴 수 있는데?"
 "…안 그럴 거잖아."

 호오, 하는 탄성을 흘리며 재규어가 꼬리를 몆번 탁탁 바닥에 내리쳤다. 자주 마주한 건 아니지만 이제 어느정도 표정은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인간이라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는 느낌의 표정. 별로 알려주고싶지 않은 건가 싶은 순간 재규어가 한마디 툭 내뱉었다.

 "겔러트, 그린델왈드."
 "나는…… 알버스."
 "알아, 네 가족이 널 뭐라고 부르는지는 진작 들었으니까 이제와서 알려줄 필요는 없지. 새삼 자기소개하는 시간도 아니고 말이야."

 어째 새침하게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그나저나 이름은 확실히 인간같은데. 이 지역의 인명과 유사한 느낌의 풀네임을 입안에서 굴리며 알버스는 서재에서 들고 나온 책들을 침대 머리맡에 쌓아놓았다. 그러고보니 왜 재규어- 겔러트는 이곳에서 홀로 살고있는 것인지 새삼스레 의구심이 밀려들어왔다. 인간의 이름을 가지고,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며, 인간의 성에서 홀로 살고있는 황금빛 맹수. 넌 대체 누구야, 겔러트? 침대에 누워서도 한동안 그 상념은 알버스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 * *
 왜 그는 서쪽 탑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걸까. 어느날 부득불 떠오른 의혹은 들불처럼 알버스의 마음을 빠르게 침식해갔다. 겔러트 그린델왈드는 첫날부터 어느 곳에도 들어가도 좋지만 서쪽 탑에만은 절대 출입하지말라고 경고했었다. 왜? 그곳에 무엇이 있길래? 옛말에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고 했었던가. 알버스는 고양이가 아니었지만 이 성의 주인 앞에서는 고양이와 비슷한 수준의 연약한 존재에 불과했다. 안락한 생활을 하고있긴하지만 애초에 그는 일종의 포로이자 인질 신세였다.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듯이 성문 바깥으로 나가는 것 역시 금지되어있었고. 그러나 식사를 하면서도, 평소처럼 서재에 들려 책을 고르면서도 서쪽 탑에 대해 곤두세운 신경은 쉽사리 식지 않았다. 서쪽 탑은 왜 유일하게 성내에서 금지된 구역인 것일까.

 "……"

 결국 안절부절 못하던 것도 하루를 지나지 못했다. 어쩌면 왜 이 성에 인간의 말을 구사하는 맹수가 살고있는지 알 수 있는 단서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영원히 이 성 안에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언젠가는 나가야 했다. 그가 변덕스럽게 내보내주든, 알버스 스스로가 자력으로 탈출하든. 아마 후자의 확률이 더 높겠지. 그리고 서쪽 탑은 저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겔러트와의 동선이 자주 맞물리는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하루종일 털끝도 마주하지 못하는 날이 허다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감은 왔다. 성안을 돌아다니다보면 가끔씩 그와 조우하곤했지만 유독 저녁 이후로는 그와 만나기 어려웠으니까. 그렇기에 저녁식사 이후 알버스는 평소처럼 서재로 향하는 것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발을 돌렸다. 금지된 서쪽 탑.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느릿느릿하던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갈수록 빨라졌다. 길게만 느껴지던 복도를 지나고, 수개의 방을 지나 탑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에 도착하기까지 장애물은 전혀 없었다. 알버스는 잠시 눈앞의 계단을 응시했다. 더없이 유혹적인 풍경이었다. 아직까진 발각되더라도 길을 잘못 들었다거나, 그런 어줍잖은 핑계를 댈 수 있겠지만 이 계단을 밟는순간 겔러트의 유일한 경고를 어기는 셈이 된다. 망설이던 것도 잠시 알버스는 계단에 발을 디뎠다.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나선형 계단을 숨가쁘게 오르던 것도 잠시, 어느덧 최상층에 도달해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철문. 저 안에 성 주인의 어떤 비밀이 숨겨져있을까. 알버스는 심호흡을 한 후 문고리를 비틀어열었다.
 문 너머의 방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한동안 손길이 닿지 않은 듯 다소 너저분했고, 곳곳에 널브러진 부서진 가구 위에 뽀얀 먼지가 쌓여있는 것이 육안으로도 보였다. 그리고 모퉁이에 세워진 길쭉한 전신거울과 벽에 걸린 찢겨진 초상화…… 초상화? 알버스는 홀린 듯이 초상화에 다가갔다. 마치 날카로운 것으로 갈기갈기 찢어발긴 것처럼 난도질되어 있었기에 초상화 속의 인물이 누구이고 어떻게 생겼는지는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아마도 남성이고, 머리카락은… 금발. 특히 인물의 얼굴 부분이 집중적으로 찢겨나가긴했으나 그나마 오른쪽 눈 부분의 형태는 온전히 보존되어있었다. 길쭉하니 옆으로 시원스레 트인 아몬드형의 눈매였다. 섬세하게 드리워진 속눈썹과 보석처럼 새파란 홍채가 아름다웠다. 그런데 저 눈동자, 분명 어디에서 본 것 같은──

 "내가 분명 경고했었지. 여긴 절대 들어오지 말라고."
 "……!"

 분노를 눌러참은 듯한 사나운 목소리가 뒤편에서 으르렁거렸다. 아. 찰나 전신이 그대로 얼어붙는 듯한 감각이 엄습했다. 알버스는 창백하게 질린 채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거대한 재규어가 눈에서 새파란 귀화를 뚝뚝 흘리다시피하면서 무섭게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흉흉하다고 느꼈던 최초의 조우에서의 모습은 애교였다. 살기에 가까운 위협적인 기세에 바로 턱 밑에 날붙이를 가져다 대고있는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그는 명백히 분노하고 있었다. 아마, 자신이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왜 기껏 말해줘도 못 알아듣는거지?"
 "나…… 나는,"
 "입 다물어."

 찌를 듯 살벌한 기세에 알버스의 입이 다물렸다. 여기서 이대로 죽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짐승의 예리한 송곳니와 발톱에 목덜미가 찢어발겨질 것만 같아 온몸이 덜덜 떨렸다.

 "꺼져."
 "……게,ㄹ"
 "꺼지라고! 당장!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죽여버리기 전에!"

 거의 짐승의 포효와도 같은 고함이 알버스의 귓전을 세차게 후려갈겼다. 그리고 얼어붙어있던 알버스는 그와 함께 놀란 사슴처럼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고, 복도를 지나, 계속해서 달렸다. 발이 꼬일 뻔하고 다리가 후들거렸는데도 멈추지 않고 쭉 뛰었다. 역시 출입이 금지되어있던 성의 정문을 벗어나 언젠가 가족들과 함께 들어섰던 대로를 따라서. 자신이 어느덧 성을 벗어나 성을 둘러싸고 있던 숲에 들어서 있다는 것을 자각한 것은 얼마 후의 일이었다.

 "……아."

 빽빽하게 펼쳐진 수해(樹海). 이미 해가 저물어서인지, 원래 푸르른 녹음을 머금고 있어야 할 숲은 으스스할정도로 어둡고 적막했다. 오싹함을 느끼기도 전 이른 해방감이 낯설게 엄습했다. 성에서 나왔다. 그 성의 주인인 재규어가 쫓아오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이렇게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거였나? 이렇게 간단하게? 설마 내 눈앞에서 사라지라는 말이 놓아준다는 의미였던 건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앞에서 꺼지라고…… 새삼 가슴 한켠이 욱신거렸다. 이제 집으로,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영 그 감각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잡혀있는 것과 다름없는 주제에 설마 정이라도 들었었나. 어쨌든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다. 이제 그 지긋지긋한 성과도, 말하는 재규어와도 영영 작별이니까. 이제 돌아가면 두번다시 이 지역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며 알버스는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 이 숲에 들어올 때도 마차를 타고 한창 헤맸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도보로 걸어서 빠져나가기에는 너무나 까마득했다. 고작 열댓살 먹은 어린 소년의 보폭이라면 더더욱. 솔직히 방향도 잘 모르겠다. 숲 속에서 길이라도 잃게 되면 큰일인데…… 아니, 이미 잃었나?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어. 알버스는 난감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솔직히 그 나무가 그 나무인 거 같고 아까 지나갔던 곳인지도 모르겠고. 그는 촉망받는 우등생이었지만 맨몸으로 낯선 숲에 떨어졌을 때 어떻게 탈출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설상가상이라고 했던가, 주변에서 떨어진 나뭇잎을 밟는 듯한 기척이 들리는 바람에 알버스는 긴장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설마, 그가 기어코 따라온건가? 그리고 발소리의 실체를 육안으로 확인했을 때 순간적으로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네발짐승이긴 했으나 익숙한 재규어의 실루엣은 아니었다. 서너마리의 회색늑대들.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짐승들의 노란 눈동자는 저를 향하고 있었다.
 이런 울창한 숲속이라면 당연히 저런 위험한 야생동물들이 살고있으리란 걸 예상했어야했는데! 평소라면 한밤중 숲에 혼자 들어가는 미친짓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후회는 언제나 늦다. 이제와서 나무 위에 올라갈수도, 달려서 도망치기도 늦었다. 그 전에 물어뜯길 테니까. 알버스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한두발짝 뒤로 물러서면서 생각했다. 이렇게 일개 짐승의 야식거리로 죽기 위해서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왔던 게 아니었는데. 그냥 차라리 그 성에 계속 있었다면, 부자유했을망정 이렇게 비참하게 끝나지 않았을텐데. 곧 살갗을 찢고 뼈를 부러뜨릴 송곳니의 감각을 각오하면서 눈을 질끈 감기가 무섭게 깽깽거리는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설마."

 황금빛 재규어가 난입해 사납게 날뛰고 있었다. 늑대 한마리의 모가지를 물어 흔드는 동시에 다른 늑대를 덮쳐누른다. 늑대들보다 훨씬 체격이 거대했던 탓에 머릿수가 많았어도 속절없이 나가떨어졌다. 체급차라는 게 저런 걸 말하는 건가. 이내 늑대 떼가 깽깽거리며 꼬리를 말고 달아나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니 재규어가 제게로 홱 고개를 돌렸다. 입가에 묻은 핏자국과 채 가라앉지 않은 살기 탓에 꽤나 공포스러운 모습이었으나 알버스는 상대와 눈을 피하지 않았다.

 "…미안해. 겔러트."
 "경고는 어기고, 멋대로 성밖으로 뛰쳐나가고, 거기에 이런 수고까지 하게 만들었으니 미안한 줄은 알아야지?"
 "미안해. 다 잘못했어."

 순순하게 사과하자 겔러트가 미심쩍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눈동자. 분명 어딘가에서 보았다고 생각했었지.

 "그 방에 있었던 초상화, 너지?"
 "역시 똑똑하구나. 너."

 역시나 돌아온 대답은 긍정이었다. 유일하게 금지된 서쪽 탑과 그 안에 걸려있던 찢겨진 초상화. 분명 그 벽안이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성의 유일한 주인으로 군림하는 푸른 눈의 재규어. 모종의 이유로 말미암아 야수로 변해버린 인간이라니 마치 오래된 전설이나 동화 속에나 나올만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실체가 눈앞에 있는 것을 어떻게 부정하란 말인가?

 "여기서 설명하기엔 너무 장소가 안 좋은데. 아까 늑대 떼야 쫓아냈지만 다른 짐승들이 더 몰려올지도 모르고. 돌아갈까. 내 등에 타."
 "네 등에?"
 "네 걸음에 맞춰서 걸어가는 것보다 그게 훨씬 빨라. 왜, 무서워?"

 이제까지 머무는 동안 신체접촉도 없었는데 갑자기 등에 타라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잖아. 말이야 타 본적 있지만, 안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머뭇거리고 있자니 재규어가 제 등을 보인 채 뒷다리를 굽혔다. 진짜 타도 되는거야? 망설이다가 겨우 잔등 위에 올라탔다. 당연하지만 말과는 달랐다. 감촉도, 탑승감도. 털결은 생각보다 빳빳했고, 그 아래에서 꿈틀대는 근육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떨어지기 싫으면 내 목에 팔 두르고 꽉 잡아, 재규어가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얌전히 그 지시에 따르기가 무섭게 재규어가 수해를 가르고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 한명을 등에 태우고 있으면서도 전혀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날렵한 몸놀림이었다. 빠른 속도감에 머리칼이 아무렇게나 공중에서 흩날렸다. 희한하게도 현실감이 없다고 알버스는 생각했다. 한때 저와 같은 인간이었던 맹수와 함께, 바로 직전 뛰쳐나온 성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숲이 끝나고 성의 모습이 드러났을 때 묘하게 엄습해온 안도감도.

 "그래서, 어디서부터 듣고 싶어?"
 "가능하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깔끔한 요구군. 안될 거야 없지."

 성의 중심부, 벽난로 앞에 깔린 러그 위에 편하게 자리잡은 재규어가 무늬로 얼룩진 꼬리를 휘저으며 새치름하게 대답했다. 그는 마치 타인의 이야기를 하듯이 말을 꺼냈다.
 겔러트 그린델왈드는 지방 영주의 하나뿐인 후계자였다. 어릴 때부터 그 비상한 두뇌로 흑마법에 심취해있었던. 그리고 그를 가장 매혹시켰던 것은 어느 고서에 언급되어있던 죽음의 성물이라는 세가지 물건이었다. 이것들만 가지고있으면 죽음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고. 아직 어린 소년에게 있어 죽음은 그저 피상적이고 머나먼 개념에 불과했지만, 죽음의 지배자라는 멋드러진 호칭은 매우 혹하는 것이었다. 겨우 일개 영주로서의 삶이 아니라, 더 의미있고 역사에 길이 이름이 남을만한 명성과 영광, 영예. 그렇게 그는 제왕학과 후계자 수업이 아닌 흑마법과 성물의 향방에 대한 탐구에 더 몰두했다.

 "그래서……?"
 "중간과정은 건너뛰고, 결론만 말하자면 진부하다 못해 뻔한 이야기야. 저주를 받았지. 마녀에게서."

 그저 약초나 키우는 노파 나부랭이가 아니라 세상에는 정말로 진짜 마녀가 있더라고. 딱총나무 지팡이의 흔적을 좇아 도달한 곳은 나이든 노파가 홀로 살고있다던 집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라고 재규어는 대답했다. 집에 침입하고, 지팡이를 찾아 훔쳐 달아나려다가 마녀에게 저주를 받았다고. 인간에서 한낱 야수로 전락하고, 매일 시간이 되풀이되는 고성에 매이게 되는 저주.

 "시간이 되풀이된다고?"
 "그럼, 식사나 청소까지 설마 내가 다 한다고 생각했어? 이 몸으로?"

 그나마 식사메뉴가 똑같지 않다는 게 일말의 다행이라고나 할까. 성에 유폐된 것은 비단 자신뿐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버스는 새삼 실감했다. 오래된 성과 그 주위를 둘러싼 숲이 성주에게 허락된 유일한 행동반경이었다. 길 잃은 행인들이 헤매이다 들어올 수는 있어도 정작 집주인은 수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결계. 애초에 이 성 자체가 자신을 가두기 위해 마법으로 세워진 요새에 가깝고, 성 내부의 시간은 항상 그 하루가 반복된다고 겔러트가 덧붙였다. 덕분에 최소한 나이먹어서 죽을 일은 없겠지, 그게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그 저주는 어떻게 푸는 건데?"
 "그게 궁금해?"
 "저주가 정말 실재한다면 그걸 파훼할 방법도 있다는 거잖아."

 살랑살랑 흔들리던 재규어의 꼬리 끝이 찰나 정지했다. 갑작스럽게 공기 중의 분위기가 일변한 것 같은 감각이 엄습한다.

 "비밀이야."
 "뭐? 그런 게 어딨-"
 "어차피 넌 못 도와주니까. 시간도 늦었고 오늘은 이만 알버스 네 방으로 돌아가서 자."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이제까지 다 알려줘놓고서,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벽을 세워버리다니. 아쉬웠지만 당사자가 이렇게 완고하게 말하길 거절하는데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알버스는 하는 수 없이 그를 뒤로 한 채 자리를 떴다. 이 성에 머문 이후 겔러트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잠들기 직전이 되어서였다.


* * *
 때로 내밀한 비밀을 공유하는 것은 상대와 더 사적으로 친밀해질 수 있는 방법이기도하다. 아무리 부자유하게 얽매인 상태라고 해도. 중앙 홀에 나왔던 알버스는 이미 그곳에 나와있던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하고 멈춰섰다.

 "안녕."
 "좋은 아침, 이라고 인사라도 해줄까?"

 말은 그렇게 해도 별로 기분 나빠보이는 눈치는 아니고. 황금빛 재규어가 알버스에게로 느리게 걸어왔다. 새삼 그가 굉장히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3미터쯤 되려나. 그날밤 늑대들과 비교하니 확실히 체급차가 느껴졌었지. 빤히 쳐다보고 있으려니 불현듯 서쪽 탑의 초상화가 떠올랐다. 잘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금발이었고, 한쪽 눈매만 온전히 남아있었던.

 "그 탑에 있던 초상화 말인데. 왜 찢어버린거야?"
 "이렇게 변한 날 분에 못 이겨서."
 "그럼 다른 초상화는 없어?"
 "없어. 그거 하나야. 왜, 내 원래 얼굴이 궁금해?"

 궁금하지 않을리가 없었다. 마녀의 저주에 걸려 일개 짐승으로 변해버린 영주의 아들이라니. 신분이 왕자가 아니라는 게 그나마 덜 동화같은 점이었다. 알버스는 마침 떠오른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럼 겔러트 네 가족들은……?"
 "몰라. 난 여기 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고, 그 후로 얼마나 시간이 더 지났는지도 정확히 가늠하기 어려우니까. 살아있을 수도 있고 모두 죽었을 수도 있겠지."

 덤덤한 목소리였다. 거대한 재규어는 할말을 끝냈다고 느꼈는지 알버스를 지나쳐 성의 정문 밖으로 향했다. 알버스는 한동안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너는 얼마나 오래 이 성에서 그 모습으로 머물렀던 것일까.
 전까지 하루에 한번도 마주치지 못할 때가 많았건만 그 후로 전보다 겔러트와의 조우는 잦아졌다. 그동안 별로 올라가지 않았었던 4층 응접실과 방, 연회장들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발견한 하프시코드 앞에서 알버스가 고민하고있던 와중 뒤에서 그가 말을 걸어왔다.

 "그거 칠 줄 알아?"
 "…소리 좀 내고 다녀!"
 "미안. 워낙 익숙해져 버릇해서."

 아무리 고양이과라지만 저렇게 큰 생물이 이렇게까지 조용하게 돌아다니는 것은 꽤나 소름끼치는 일이다.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있자니 겔러트가 다시 하프시코드를 향해 고개를 까닥거렸다.

 "쳐다보고 있길래. 칠 수 있어?"
 "조금은. 어머니한테 배웠어."
 "그래? 나도 예전엔 잘 쳤었는데. 보다시피 지금은 이런 손으로 건반을 다룰 수 있을리가 없지."

 다소 자조적인 농담이었으나 말투는 담담하다 못해 명랑했다. 한동안 음악이라고는 듣지도 못했었어, 연주해줄래? 내가? 여기 알버스 너 말고 누가 있어. 나도 안 친지 꽤 오래됐는데…… 고민하던 것도 잠시 알버스는 부탁대로 순순히 하프시코드 앞에 앉았다. 건반 위에 손가락을 펴서 올려놓고 숨을 가다듬는다. 화음은 생각보다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3분 가량의 연주를 끝낸 후 건반에서 조심스레 손을 거두었다. 귀를 쫑긋거리며 연주를 듣고있던 재규어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좋은 연주네. 답례로 한 가지 좋은 소식을 들려줄까?"
 "좋은 소식?"
 "들으면 기뻐할걸. ──이제 널 놓아줄게. 가족에게로 돌아가."

 뭐? 알버스는 잠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갑작스러운 선언이었다. 수십수백번도 더 상상하고 기다려온 문장이었으나 막상 이렇게 들으니 생각처럼 환희, 해방감이 밀려오지는 않았다. 대신 왜? 이제서야? 어째서? 채 말로 화하지 못한 수가지 의문들이 뇌리를 맴돌았다.

 "왜……?"
 "이제 돌아가도 돼. 혼자서는 수해를 빠져나가기 힘들 테니까 숲 어귀까지는 내가 직접 바래다줄게."
 "아니, 왜? 갑자기…?"
 "별로 안 좋아하네?"
 "이렇게 갑자기 떠나라고 하는데 기뻐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그토록 바래왔던 해방인데도 왜 이렇게 기쁘지 않은거지. 재규어가 어서 나가자는 듯이 다시 고개를 까딱였다. 그 순간 알버스는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나 안 갈래."
 "무슨 소리야, 그게."
 "너 혼자 여기에 내버려둔채 돌아가고싶지는 않아. 아직 파훼하는 법 알려주지도 않았잖아."

 막상 소리내어 내뱉고 나니 확신이 섰다. 자신이 떠나고 나면 아마 그는 이 거대한 고성에 홀로 남게 되겠지. 얼마나 오래 이 성에 유폐되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저주가 풀리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계속 쭉. 어쩌면 영원히. 이대로는 못 가. 안 갈 거야. 비밀이라면서 어떻게 저주를 깰 수 있는지 알려주지도 않았고. 이런 상태로는 돌아간다고 해도 그가 어떻게 살고있을지 계속 마음에 밟힐 것 같다. 당연히 좋다고 수락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재규어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고집 부리지 마. 순순히 보내줄 때 어서 떠나."
 "싫어. 이렇게 보낼거면 왜 애초에 한 사람만 남으라고 했어?"
 "그거야 혹시 저주를 풀어줄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럼 방법을 알려줘! 비밀이라고 하지 말고!"
 "알려주면, 그럼 네가 도와줄 수 있어?!"

 겔러트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정말 야생 맹수의 것과도 같은 사나운 으르렁거림이었다.

 "보나마나 도와줄 수 없을 테니까 가라고 할 때 어서 가! 여기서 영원히 살고싶은 게 아니면!"
 "싫어! 알려주지도 않고서 그냥 가라는 게 어딨어! 방법이라도 말해줘!"

 팽팽한 결착 가운데 어이가 없다는 듯 재규어가 꼬리를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내리쳤다. 대리석 재질의 표면에 부딪힐 때마다 채찍소리처럼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려퍼졌다. 가라고 해도 안 가겠다는 건 처음 보네! 그럼 알려달라고! 집채만한 맹수가 심기 불편함을 여과없이 드러내는데도 알버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희망고문하려고 하지 마. 난 이미 지겨울 정도로 이 안에 처박혀 있었으니까."
 "그런 거 안 해. 알려주기나 해."
 "얌전하게 생겨서 의외로 고집 굉장히 세구나, 너…… 좋아. 그 마녀가 그랬었지. 내 이런 모습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경멸하지도 않고."

 그리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왜 말을 하다 말아?"
 "…쪽팔리니까 그렇지. 그리고 사랑, 할 수 있는 상대가 나타나서,"
 "─설마 키스라도 해야한대?"
 "무슨 소리야. 동화책 너무 많이 읽은 거 아냐?"

 아니, 처음부터 자기 입으로 진부한 이야기라며! 이미 충분히 동화에나 나올만한 상황인데 보통 그거잖아. 저주에 걸린 왕자가 도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것은 여주인공의 입맞춤이니까. 비록 여기에는 왕자도 사랑스러운 여주인공도 없지만.
 그러나 겔러트의 대답은 입맞춤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날 네 손으로 한번 죽여야 해."
 "저주를 파훼하는 법이 죽음이라고? 말도 안돼. 그럴거면 자살하는 게,"
 "그 마녀가 말하길 해답은 '나는 끝에서 열린다'라고 했었나. 상대가 날 사랑한다면 그냥 죽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했어. 아니면-"
 "아니면?"
 "그냥 죽는 거지."

 마녀의 저주를 통해 야수로 변한다는 것만큼은 진부할 정도로 고전적인데 파훼 방법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과격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을 해내기 위해선 상대를 사랑해야 한다고. 내가 그를 사랑하나? 알버스는 자문했다. 자신을 가족들에서부터 떨어뜨리고 이 성에 묶어두다시피한 상대였다. 그리고 굳이 따지면 그날 서쪽 탑에 들어섰던 날 밤 이전에는 변변한 대화조차 거의 오가지 않았던 사이기도 했고. 억류자와 피억류자 사이 사랑이 싹틀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놀라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눈앞의 상대에게 품게 된 감정은 더없이 강렬한 연민과 친애의 정에 가까웠다. 그가 속박된 저주에서 풀려나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길 바란다. 이 고독한 고성과 수해의 결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되찾았으면 좋겠다고.
 겔러트 그린델왈드는 제 입으로 흑마법에 심취했었다고 고백했다. 흑마법을 다루는 이들의 악명에 대해서는 알버스 역시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갓난아이나 처녀를 제물로 바치고, 흑미사를 열며 악마와 계약하기도 한다고 했던가. 과연 겔러트가 어느정도로 흑마법에 빠져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솔직하게 알려주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계속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알버스는 그가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랐다. 갱생도 회개도, 어쨌든 이 상태에서 벗어나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알버스는 사람을 신뢰하는 편이었다. 아무리 믿을 만한 것 같지 않아도, 잘못을 했더라도 한번 더 기회를 주고 믿어주는 것이 평소 그의 지론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알버스는 겔러트 그린델왈드에게 두번째 기회를 주고싶었다. 어쩌면, 이게 사랑이란 감정일지도 모르겠네. 알버스는 남의 일 대하듯 생각했다. 단 한번도 누군가를 좋아해본적 없었는데 이제와서 인간도 아닌 모습의 상대에게 반하다니.

 "그래서 어떻게 하면 돼?"
 "정말로 할 생각이야? 어차피 내가 죽더라도 결계는 풀릴 거고 네가 나가는 데는 지장 없을거니까 너무 부담 안 가져도 돼."
 "넌 안 죽어, 겔러트."

 내가 그렇게 만들지 않을 테니까. 재규어가 빤히 알버스를 응시하다 따라오라는 듯 먼저 걸음을 옮겼다. 중앙 홀에 도착했을 때 그가 자신을 향해 눈짓했다. 벽난로 위에 걸려있는 한 쌍의 검을 인식한 것은 그때서였다.

 "저걸로?"
 "싫으면 도끼도 있는데. 그걸로 할래?"
 "아니야……"

 한번도 살아있는 생명체에게 날붙이를 휘둘러보지 않은 입장에선 도끼가 더 쓰기 편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흉악한 비주얼에 거부감부터 든다. 검이라고 마음이 더 편한 건 아니지만. 알버스는 발뒤꿈치를 들고 벽에 장식되어 있던 검 한 자루를 꺼냈다. 장식용 검치고는 손대면 베일 것처럼 날이 서 있었다. 저주를 풀어주겠다고 공언해놓고서 막상 검을 쥐니 두려움이 슬금슬금 기어나왔다. 만약 내가 널 사랑하는 게 아니라면? 내가 실수라도 한다면? 제 속내를 눈치챘는지 재규어가 목을 울렸다. 마치 웃음소리 같았다.

 "이대로 죽게 된다고 해도 별 상관없으니까 편하게 내려쳐. 알버스 네 손에 의한 것이라면 죽음 역시 환영할테니."

 나는 네가 죽기라도 한다면 날 용서할 수 없을텐데? 알버스는 힐트를 움켜잡은 채 재규어를 향해 다가갔다. 목을 치는 게 나을까, 심장을 찌르는 게 나을까? 아니면── 고민이 끝나기도 전 재규어가 천천히 제 고개를 숙여보였다. 모르겠다. 이제껏 곱게 펜대만 쥐고 책장만 넘겼던 손에 들린 검은 생각보다 무거웠고, 입안이 긴장감으로 메말랐다. 알버스는 느리게 검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고, 다음 순간 힘을 다해 내리쳤다.


* * *
 눈이 떠졌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의아함이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있는거지? 여기에 머무른지도 꽤 되었다고 하지만, 익숙한 거처의 풍경이 아니라고 해서 낯섦을 느끼다니. 몽롱했던 의식이 서서히 수면 위로 끌려올라오는 찰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분명 마지막 순간 장식용 검을 들고 재규어에게 내리쳤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나서 기절하기라도 한 건지 이후의 기억은 끊겨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벌떡 일어나려던 순간 옆에 앉아있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묘하게 익숙한 푸른색 눈동자였다. 기름하게 뻗은 또렷한 눈매.

 "일어났네."
 "어, 너……?"
 "그대로 기절해서 반나절 넘게 안 일어나길래 걱정했었어. 키스라도 해서 깨워볼까 했는데 마침 잘 됐다."
 "아……"

 곱슬거리는 화려한 금발이 꼭 순금을 녹인 것처럼 반짝였다. 나이는 십대 중후반 정도 되었을까, 아직 앳된 티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반듯한 이목구비는 놀랄만큼 수려했다. 겔러트. 그는 자신도 모르게 상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황금빛 재규어와 똑같은 것은 그 눈 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서쪽 탑에 숨겨져있던 찢긴 초상화의 주인이자 저주받아 야수로 전락했던 그 장본인. 사실 어떻게 생겼겠거니하는 상상까진 구체적으로 해본 적 없었는데, 흑마법이니 저주니 하는 음침한 단어들과는 한오백년 정도 더 떨어져있는 듯한 해사하고 명랑한 얼굴이었다. 게다가 이렇게까지 잘생겼다고는 미리 말 안 해줬잖아. 알버스는 눈부신 것을 보는 것처럼 시선을 피했다. 어쨌든 그가 멀쩡히 살아있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건 저주의 파훼가 성공했다는 의미겠지. 그랬다는 건 내가 정말로 널…… 새삼 그것을 인식하자 뺨이 달아올랐다. 상대가 제 마음을 읽기라도 할까봐 알버스는 서둘러 두서없이 말머리를 꺼냈다.

 "이,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가족들을 찾아갈거야?"
 "글쎄. 이미 후계자 자리는 다른 누군가한테 넘어갔을 거고…… 별로 다급하지는 않은걸. 그냥 알버스 널 따라가면 안 될까?"
 "나, 나를?"
 "안 돼? 너 나 사랑한다며. 저주도 깨뜨려줬잖아."

 헉. 다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은 착각에 알버스는 어쩔 줄 몰라했다. 고스란히 감정을 들켜버린 셈이었다. 너무해. 이런 거. 겔러트의 낯 위로 장난기 넘치는 미소가 스쳐지나가나 싶더니 더욱 가까이 제 얼굴을 들이댔다.

 "그런데 내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 그래도 지금이 더 잘생겼지?"
 "아… 물어보지 마……"
 "왜, 대답해 줘. 설마 사람이 됐다고 이제와서 사랑이 식은 건 아니지?"

 이런 성격인 줄 진작 알았으면! 그동안은 저주 때문에 까칠하게 굴었던 건지, 그 조각같은 외모로 유들유들하게 대해오자 혼이 쏙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겔러트의 외모는 자신이 이제까지 본 사람들 중 가장 아름다웠으므로. 알버스가 대답을 하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돌리자 더욱 집요하게 매달려왔다.

 "혹시라도 재규어가 더 취향이었던 건 아니라고 믿을게."
 "아니야…… 네가 더 잘생겼어."
 "그건 그래, 난 잘생겼으니까."

 얘 진짜 뭐하는 애지? 알버스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고마워, 모두 네 덕분이야. 뒤늦은 감사인사가 달큰하게 귓가를 맴돌았다.
 떠도는 이야기가 있었다. 여행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었기에 허무맹랑하기도 하고, 흔해빠진 동화같기도 한 이야기였으나 그 기본 골조만은 항상 똑같았다. 어느 수해의 끝, 오래된 성에 인간처럼 행동하는 야수가 홀로 살고있다는 것. 가끔 길 잃은 이가 그 성에 들어오면 다시 나갈 수 없다고도 했고 오직 진정한 사랑만이 그 성주를 구할 수 있다고도 했다. 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는 계절에 이야기의 끝은 그렇게 저물었다. 저주받은 야수는 다시 인간으로 돌아왔으며, 자신의 구원자와 함께 새로운 여정을 떠났다는 것은 오직 그들만이 알고 있는 마지막 장의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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