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상대의 답장을 기다리는 행위 자체에는 아주 익숙했다. 알버스가 평소 서신을 주고받는 상대들은 당대 명망이 높거나 저명한 학자들이 대다수였으며, 당연하게도 그들은 평소에도 아주 바빴다. 아직 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어린 학생 -아무리 그 학생이 한세기에 한번 나올까말까한 천재라고 할지라도- 과의 대화에만 온전히 몰두할 수 없는 위치의 인물들이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랬기에 국내외 명사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것은 항상 느지막한 속도로 진행되었다. 짧게는 1주일, 길게는 보름에서 한달까지. 부엉이 편에 편지를 보내고 나면 그 정도는 기다려야 비로소 상대의 답신이 도착하고는 했다. 그렇기에 편지를 보내고 나서 다시 답장이 올 때까지 쭉 기다려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며, 알버스는 단 한번도 답신의 도착여부와 속도에 있어 조바심을 내 본 적 없었다. 적어도 올해 여름까지는.

 "……"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고 서명까지 한 후 알버스는 제가 쥐고 있던 깃펜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분명 이른 아침에 만나 주위에 엷은 낙조가 깔리기 시작할 즈음이 되어서야 겨우 헤어졌을텐데, 왜 귀가하고나면 하지못했던 이야기들이 또 떠오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겔러트. 기적처럼 제 앞에 나타난 또래 소년. 자신만큼이나 똑똑하고, 또 자신만큼이나 영리한…… 그와 만난 이후로 학계의 유명인사들과 서신을 주고받던 교류는 거의 중단하게 되었다. 졸업 전부터 꾸준히 교류를 지속해오던 이들이 대다수였으나 별로 아쉽지는 않았다. 지금 당장, 제 눈앞에 알버스 자신만큼이나 총명하면서 대화가 잘 통하는 동년배가 있는데 굳이 그래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으므로. 자신보다 나이가 몇배 이상 많은 마법사 혹은 마녀들과 학술적 교류를 시작한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또래 소년소녀들 중에는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이제는 아니지 않은가. 당장 그와 나누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고 그와 함께 보내는 1분1초가 소중했기에 자신의 시간과 열정을 다른 곳에 쪼개어서 쏟아붓고 싶지 않기도 했다. 어차피 내일 해가 떠오르면 다시 만나게 될 상대였다. 내일도, 모레도. 하지만 밤이 흐르는 동안 자신이 하고 싶은 말, 그와 나누고 싶은 화젯거리를 하나라도 놓쳐버리게 될까봐 내일까지 기다리기는 어려웠다. 당장이라도 네게 전하지 않으면. 지난 17년간 항상 낮과 밤의 길이는 같았을진대 이번 여름밤은 유난히 길고도 지루했다. 밤이 이토록 길게 느껴지는 때가 이제껏 또 있었던가? 그렇기에 알버스는 상대와 방금 헤어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집에 돌아와서 도로 펜을 집어드는 것을 택했다. 편지에 담긴 내용은 다양했다.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토론 주제도 있었고, 현 사회의 부조리와 그에 대한 비판도 있었으며, 가끔씩은 서로가 알지 못하고 흘려보낸 각자의 학창시절과 지난 과거들에 대한 고백같은 편지도 있었다. 그리고 오늘 보내려고 쓴 편지. 한쪽 다리를 쭉 내뻗고 대기하고 있는 부엉이에게서 잠깐 눈을 뗀 채 자신이 쓴 편지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것이 바로 네가 덤스트랭에서 저지른 실수였어! 하지만 난 불평하지 않아. 네가 그 학교에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결코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알버스.

 …너무 솔직하게 썼나? 마지막 문구를 지워버릴까 잠시 고민하다 말고 알버스는 그대로 편지를 봉했다. 어쨌든 그 문장 자체는 진심이었다. 네가 퇴학당한 게 기쁘다는 듯 지나치게 들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않았으면 바랄 뿐. 만약 겔러트가 덤스트랭에서 쫓겨나지 않고 그대로 쭉 학교를 다니다가 졸업했다면 이 고드릭 골짜기까지 올 일은 영영 없었을 터. 변덕처럼 중간에 대고모 댁에 들리게 되었다 해도 최소한 올해 여름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게는 올해 여름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었겠지. 평소처럼 그에게 잘 전달해 줘, 알겠지? 수리부엉이의 다리에 편지를 매단 후 작게 속삭이자마자 부엉이가 홰를 치며 열린 창밖으로 날아갔다. 겔러트가 머무르고 있는 그의 대고모, 바틸다 백셧의 집은 알버스의 집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부엉이가 편지를 전달받아야 할 상대에게 잘 찾아가길 바라며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 응시하게 되는 건 왜인지 스스로도 이유를 잘 알 수 없었다. 어느덧 창밖에는 새까맣게 어둠이 내려앉아있었다. 밤공기를 가르고 날아가는 부엉이의 뒷모습이 이내 여름밤의 찬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아마 몇분 지나지 않아 부엉이는 겔러트의 손에 자신이 쓴 편지를 떨어뜨릴 것이고, 그가 답장을 쓰기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가 답신과 함께 돌아올 것이다. 이제까지 항상 그랬듯이.
 이제까지 단 한번도 편지를 보낸 후 그 답신이 최대한 빨리 도착하길 간절하게 바라본 적은 없었다. 아무리 학계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고 편지를 주고받는 것 자체를 영광으로 여겨야하는 거물들이었다고 해도 그랬다. 어차피 기다리면 언젠가는 답장이 도착할 것이고, 서두를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알버스와 교류하는 명사들 중에는 먼 해외에 거주하는 이들도 무수했고, 외국인 마법사들 역시 많았다. 하지만 왜 바다 건너 머나먼 곳에 사는 이들의 답신을 기다리는 것보다 바로 옆집에 살고 있는 또래 소년의 답신을 기다리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인지. 막 떠오른 생각들을 편지로 옮길 당시에는 들떠 있었다고해도, 겔러트에게 편지를 보낸 이후 답장이 도착하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언제나 불안하고 초조했다. 너무 늦게 보냈나. 혹시 이미 잠들어 있을까, 내가 부엉이를 보내서 괜히 자고있던 널 깨우게 되는 건 아닐까. 알버스는 벽시계를 흘낏 응시했다. 신경쓰지 않고 있는 사이 이미 자정이 훨씬 지나있었다. 이제까지 자정을 넘긴 시간에 편지를 보낸 적은 없었는데, 역시 너무 늦은 시간이라 자고 있을까? 자신 역시 그냥 자러가는 게 나을까 싶기도 했으나 정신이 말짱한 탓에 잠은 전혀 오지 않았다. 방을 이리저리 서성거려 보기도 하고, 겔러트를 만난 후 내팽개쳐 놨던 상장들 위에 뽀얗게 낀 먼지를 털어내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려고 애썼지만 다시 시계를 보았을 때 여전히 십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만약 답장이 온다고 해도 최소 이삼십분은 더 걸릴 텐데. 알버스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올해 여름밤은 길고도 길었다.
 그 순간 창가에서 뭔가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답신이 오기엔 아직 이른 것 같은데, 설마 부엉이가 벌써 돌아왔나? 반신반의하며 돌아선 알버스의 눈에 의외의 광경이 비쳤다.

 "─겔러트?"
 "안녕. 알버스. 이것 좀 열어줄래?"

 여름밤을 배경으로 더욱 화려하게 반짝이는 금발과 환하게 미소짓고 있는 잘생긴 얼굴. 마치 큰 새처럼 창가에 도사리고 앉아있는 십대 소년이 다시한번 창유리를 똑똑 두드렸다. 상대의 모습이 신기루나 환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 순간, 갑작스레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너 대체…… 어떻게?"
 "답장 쓰다가 갑자기 오고 싶어져서. 대고모님이 주무시고 계시길래 몰래 빠져나왔어. 이 시간에 방문하는 건 처음인 거 같다, 그렇지?"
 "그렇네, 정말……"
 "그러니까 창문 열어주지 않을래?"
 "아, 미안해. 지금 열어줄게."

 그저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인데 본인이 직접 나타나서 놀란 것도 잠시, 자신이 겔러트를 창밖에 내버려두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알버스가 허둥지둥 창가로 다가갔다. 지팡이를 집어들 생각도 나지 않아 떨리는 손으로 몇차례 헛손질까지 해가며 잠겨있던 창문고리를 어렵사리 풀었다. 딸칵, 하고 창문고리가 풀려나가는 금속성과 함께 겔러트가 가볍게 방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놀랐지? 미안해. 오겠다는 말도 미리 안 하고 와버려서."
 "아니야. 어차피 네 편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하긴 알버스 너도 내 답장보다는 내가 직접 오는 게 더 좋지?"

 이국에서 온 소년이 새하얀 달빛 아래에서 달빛보다 더 화사하게 웃었다. 눈부신 것을 본 사람처럼 알버스는 의식적으로 눈꺼풀을 깜박였다. 꿈이 아니라 현실이건만, 마치 생생한 자각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단 한번도 밤에 만난 적이 없었던가. 항상 해가 떠 있을 때 만났고 해가 지기 전 헤어져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기에 월광과 짙은 어둠을 배경으로 조우한 상대는 다소 낯설게 보였다. 잠깐 방안 풍경을 둘러보는 듯하던 겔러트가 예고없이 오른손을 뻗어왔다.

 "잠깐 밖에 나갔다 올래? 우리 밤에 만나는 건 또 처음이잖아."
 "지금? 당장?"
 "응. 공기도 선선하니 좋던데, 네 동생들도 다 자고 있지 않아?"
 "그건 그렇지만 이 시간에 나가는 건……"
 "서신으로 보내는 것보다 직접 얼굴 보고 이야기하고 싶어서 찾아왔단 말이야. 내일 아침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어. 그러니까 오늘 하루만, 알버스……"

 애교라도 부리는 것처럼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알버스를 재촉해왔다. 이제까지 깨어있던 이유도 겔러트의 편지를 기다리기 위해서였으니 본인이 직접 방문했다면 당연히……
 그런데 겔러트. 나 지금 잠옷 입고 있는데. 아, 뭐 어때. 밤인데 누가 밖을 보고있겠어. 정 신경쓰이면 투영마법 걸어줄까? 아니, 됐어. 네 말대로 누가 보겠어. 못 이기는 척 손을 내뻗어 마주잡은 손바닥의 감촉은 건조하고 서늘했다. 아까 보냈던 네 편지 여기 있어, 겔러트가 생글 웃어보이며 다른 손에 든 편지를 내보였다. 아. 새삼 아까 자신이 보냈었던 편지를 확인하자 민망한 기분이 들어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내가 덤스트랭에서 실수한 것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는다고 했지? 나도 마찬가지야, 어쨌든 학교가 날 내쫓아준 덕분에 여기 와서 알버스 널 만날 수 있었으니까."
 
 자신이 써보냈던 문구에 대한 화답을 활자도 아닌 목소리로 전달받자니 새삼 뺨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럼 가볼까? 물이 흐르는 듯 산뜻한 목소리가 자신을 재촉했다. 제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티가 날 만큼 많이 붉어지지 않았기만을 바라며 알버스는 낮게 속삭였다.

 "오늘 하루만이야."
 "고마워."

 겔러트의 가벼운 손짓에 다시 창문이 비스듬히 열렸다. 쏟아지는 달빛은 시리도록 희었으며 뺨을 스치는 밤공기는 시원했고, 어딘가에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두 소년은 손을 맞잡은 채 여름밤의 일탈과도 같은 첫 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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