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검은 물속에 잠겼는지, 지층으로 걸어 들어갔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꿈으로도 알 수가 없습니다. (허연_ 목련이 죽는 밤)

#당신을위한시 https://kr.shindanmaker.com/570317 기반 연성.

사쿠라가 아처를 소환했다는 설정, 사쿠라의 전반적인 감정선이 시로가 아닌 아처를 향해있음 주의.

 


 


 

  친애하는 당신에게. 


 당신께서 제 곁을 떠난지도 벌써 반년이 흘렀습니다. 당신과 만났던 계절인 추운 겨울이 가고, 벚꽃피는 봄이 오고, 이제 쓰르라미가 우는 여름이 되었습니다. 이미 우리가 함께할 시간은 2주 남짓으로 정해져있었는데도 당신과 함께했던 시간은 유독 짧게 느껴졌고 또 그만큼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아마 평생토록… 제가 할머니가 되어버린대도 잊지 못할 추억이겠지요. 아직도 가끔씩 생각합니다. 처음 소환되었을 때 충장에 맨몸으로 서 있는 저를 보고 당황하던 당신의 얼굴을, 제 이름을 듣자 '사, 사쿠라……?'하고 의혹에 찬 듯한 음성을 내뱉던 당신의 눈동자. 자신의 연고지도 진명도 기억하지 못하는 무명의 영령을 소환하였다고 할아버님은 매우 화를 내셨었지요. 제게 형편없는 삼류 영령을 소환한 것에 대한 '벌'을 주시려는 할아버님을 막아주신 것도 당신이셨습니다. 저와 할아버님 사이를 가로막으며 제게 보여주셨던 그 뒷모습.


 '내 마스터를 내 눈앞에서 학대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어디 령주로 명령해보라고, 늙은이.'


 네, 아마- 그런 말씀이셨을까요. 아마 저는 그때부터 당신에게 설레기 시작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당신의 든든한 등 뒤에서, 양녀로서 이 집에 온 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받으면서요. 

 이미 마스터로 선택된 선배와 싸우는 것이 부담스러워 오라버니께 령주를 양도할 생각이었지만 제가 계속 당신의 마스터로 남아있기로 한 것도 당신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당신이 아닌 할아버님이 원하셨던 으리으리한 영령이 소환되었다면 글쎄요, 저는 예정대로 마스터의 지위를 포기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당신의 마스터였지만 저를 지켜준 것은 다름아닌 당신이었습니다.

 제가 홀로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 먼저 다가와준 것도 당신이셨습니다. '흐음. 제법 괜찮게 만들기는 한다만, 된장국이 이렇게 진해서야 안되지.' 그렇게 말씀하셨던가요? 저, 이래봬도 당신께서 하신 말씀과 그때의 표정은 전부 기억하고 있답니다. 아마도 대견하다는 듯, 하지만 특유의 그 비딱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계셨었죠. 언니처럼 우등생은 아니지만 제 머리가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라구요. 홀로 이 저택에 남아 매일 당신의 얼굴과 당신의 눈매와 당신의 목소리와 당신의 뒷모습을 빠짐없이 되새기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아, 이런 말을 해도 될까요. 솔직히 조금은 놀랐었습니다. 서번트라고 한다면 천지간을 호령했다는 역사 속의 영웅들. 그런 영령이 요리를 저보다 잘 할 줄은 정말 몰랐었으니까요. 요리라는 게 흔히 생각하는 영웅의 필수덕목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당신께서 손수 요리하신 아침식사에서는 왠지 모르게 익숙한 맛이 나서- 누군가를 떠올려버리고 말았더랬죠. 그래서 그때 당신 앞을 가로막았던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서, 선배를 해치지 마세요……!'

 '왜냐, 마스터. 이것은 전쟁이고 저 애송이 역시 이 전장에 기꺼이 발을 디딘 마스터다. 제거해야할 적이란 거지.'

 '하지만……!'


 선배에게 흉흉한 기세로 달려들려던 당신은 제가 끼어들자 그렇게 울분을 터뜨리듯이 말씀하셨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제일 소중히 여기는 두 사람인걸요. 이상하게도 제 눈에는 서로 닮아보이는 그 두사람이 서로 싸우거나 다치는 것만은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비록 선배에게 제가 마술사라는 사실이 드러나버리고 말았지만.


 '내 마스터는 정말이지 이해하기가 힘든 인간이군. 그런 얼빠진 놈이 대체 왜 좋다는 건가. 마스터는 어리니까 하루빨리 마음을 고쳐먹는 게 좋을텐데.'


 그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은 소환 이후 가장 당신이 강렬하게 내보인 감정이었는지라 심각한 상황에서도 슬핏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날 이후로도 선배 그리고 세이버 씨와 종종 마주쳤지만 당신은 으르렁대기만 했을 뿐 선배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하지는 않으셨지요. 내심 제 말을 들어주신 게 기뻐서 당신이 함께하는 저녁식사 때마다 솜씨를 발휘하고는 했습니다. 성배전쟁, 이름부터 '전쟁'이라는 흉흉한 단어가 들어가있고 저는 그 전쟁에 참여한 마스터인데도- 솔직히,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나 행복했었습니다. 당신과 같이 있으면 할아버님에게 더이상 '훈육'을 받지 않는다거나 오라버니가 손을 올리지 않으신다는 -당신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제 뺨을 때리시려다가 당신이 불같이 화를 내신 이후 더이상 제게 다가오려고도 하지 않으셨었죠-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저 당신이 좋았습니다. 이상하게도 오래전부터 알아온 것처럼 느껴지는 나의 서번트. 나의 아처.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와 비뚜름한 미소가 너무나 잘 어울리던 당신. 이미 우리에겐 정해진 기한이 있다는 걸 똑똑히 알고 있으면서도 최대한 오랫동안 당신과 함께 있고 싶었습니다.

 아마 그래서 저는 어리석은 망집에 빠져들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원래 뿌리는 다르다지만 저 역시 엄연한 마토의 일원. 마키리의 오래된 망집은 그 딸인 제 혈관에도 흐르고 있었습니다. 당신과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욕망. 당신을 잃고 싶지 않다는 집착. 차마 미움받을까봐 령주로 날 좋아해달라는 명령을 내린다거나 하는 행위는 엄두도 못 냈으면서. 사실 저, 보았었어요. 당신이 언니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풍경을. 실례되는 일인 건 알지만 말소리 역시 엿듣고 말았었지요. 


 '…그녀가 괴물이 된다면 죽일 수 밖에 없지. 너무 염려하지 마라, 린. 내 마스터의 목숨은 그녀의 서번트인 내 손으로 기꺼이 거둘 테니까.'


 그 순간 현기증이 날 것만 같았습니다. 피를 나눈 친언니가 저를 죽이는데 동의했다는 것보다 당신의 한 마디가 더 묵직하게만 느껴졌습니다. 당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저를 보호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할아버님이나 오라버니 앞에서 저를 감쌌던 것처럼. 왜 저를 둘러싼 이 세계와 제 운명은 이토록 가혹하게 느껴졌을까요. 저는 한번도 괴물이 되고 싶었던 적 없었습니다. 그저 제 인생에 처음으로 나타난 등불같았던 당신에게 사랑받고 싶을 뿐이었는데. 이 얼마나 어긋나며 뒤틀린 연정이었는지.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제가 먼저 당신에게 부탁할 걸 그랬어요. 제가 사람을 해치는 괴물이 되면 꼭 죽여달라고.

 그러던 중 집에 귀가했을 때 오라버니가 난폭하게 저를 몰아붙이며 윽박질렀었지요. 제가 오라비와 몇번씩이고 붙어먹는 난잡한 짓을 했다는 걸 당신께 폭로해버리겠다고 하셨었습니다. 언제는 자기 친구에게 호감이 있는 것처럼 바지런히 그 집에 그나들더니 이제 꼭두각시 나부랭이한테도 대줄 생각이냐고, 가벼운 계집애라며 저를 비난하셨습니다. 그때 제가 왜 그랬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오라버니의 말대로 십수번도 더 경험한 일이었고 언제나 그래왔듯이 그냥 잠깐 참아주면 되는 일이었을텐데, 저는 저를 욕보이려는 오라버니를--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라버니가 당신께 모든 사실을 알리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아무리 당신이 저를 죽이고자 마음먹었다고 하더래도, 또 온세상이 저를 손가락질하고 비난한대도 당신께만큼은 마지막까지 온전한 저 자신으로 보이고 싶었었으니까요. 그 후의 일은 마치 제가 아닌 타인이 대신 겪었던 일처럼 기억이 몽롱합니다. 방향감을 잃은 나비처럼 가벼운 맨발로 길을 배회하며, 부유하는 악몽처럼, 그렇게. 당신을 잃고 싶지 않다는 그 망집만으로 저는 밤길을 정처없이 떠돌아 다닐 뿐이었습니다. 잃고 싶지 않아. 곁에 있어줬으면 해. 나를 돌아봐줬으면…… 나를 떠나지 말아줬으면 해. 조금만, 조금만 더-

 어느덧 저는 어두운 지하 대공동에 홀로 서 있었습니다. 제게서 흘러나온 불길한 마력이 대기중에 꿈틀거리고 저는 난생 처음 실감하는 충만함과 고양감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지난 수년간 저를 괴롭게 했던 할아버님의 본체를 두 손가락으로 일그러뜨려 죽이고, 당신을 맞이할 준비를 했습니다. 제가 사모하는 당신을. 공기의 흐름에서 당신의 존재감이 묻어났을 때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솔직히 기뻤습니다. 대체 무엇이 기뻤던 걸까요. 내 목숨을 거두러 온 나만의 사신을 기꺼이 맞이하게 된 것? 어쨌든 내 마지막은 당신의 손으로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짧은 기간동안이었지만 그 동안이나마 당신은 제 전부였습니다. 그런 당신이 저를 위해 여기까지 와주신 것에 대한 기쁨이었을까요.

 그때 저는 이미 선배의 서번트였던 세이버 씨를 제 수족처럼 부리고 있었습니다. 세이버 씨로 당신과 함께 온 선배의 발을 묶어두고, 저는 저를 막으러 온 언니와 당신을 동시에 상대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솔직히 당신과 언니는 너무나 협업이 잘 맞아서 그 와중에서도 질투가 날 정도였어요. 당신은 언니가 아닌 제 서번트잖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 손발이 잘 맞은 거였냐구요. 곧 언니의 보석검에 의해서 방어막이 뚫리고, 그 순간 당신이 제게로 뛰어들었습니다. 사실 그때 저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답니다. 그래도 당신의 손에 죽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쇄도하듯 다가오는 당신을 망막에 또렷하게 새기며 저는 눈을 감았습니다. 제 심장을 꿰뚫을 날붙이의 감각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느껴진 것은 고통이 아닌 부드러운 촉감이었습니다.


 '……아?'

 '사쿠라.'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저를 끌어안은 당신의 모습이었습니다. 분명 저를 죽이러 왔을 당신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제가 멍하게 안겨있는 사이 당신이 더욱 제 몸을 품 안으로 강하게 끌어안았습니다.


 '사쿠라, 미안하다. 진작 구해주지 못해서. 널 그런 지옥에 내버려둬서 정말로 미안해.'

 '아처 씨…?'

 '바로 곁에 있었으면서도…… 구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저를 끌어안은 당신이 사과하는 것이 최근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최근이 아니라면 대체 언제? 제가 얼이 빠진 상태로 당신에게 안겨있는 동안 당신은 소환 후 처음 듣는 절절한 목소리로 제게 말했습니다.


 '네가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걸 진작 알았다면……'


 분명 당신에게 끌어안긴 것은 저였지만 이상하게도 제가 당신을 안아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낯설고도 낯익은 느낌이었습니다. 당신을 소환하기 이전부터 훨씬 오래전부터 알아온 기묘한 느낌. 제가 뭐라 입을 떼려는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저의 그림자가 당신의 가슴팍을 꿰뚫고 있다는 것을. 아까 당신이 제게 달려드는 순간 제 그림자가 주인 격인 절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당신을 공격한 모양이었습니다. 그렇다고해도 그림자는 저의 일부. 결국은 제가, 당신을 공격한 셈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이후 그렇게 펑펑 울어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당신의 몸을 끌어안고 저는 아이처럼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아처 씨, 죽지 말아요, 이런 말도 안되는 투정을 부리는 제게 당신은 소멸 직전 환하게 미소를 지어보였습니다.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그런 미소를. 그때 본능적으로 깨달았습니다. 당신 스스로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셨던 당신의 진명을, 제가 소환한 서번트가 누구인지를. 


 '괜찮아, 사쿠라. 이제 넌 자유야. 내 손으로 널 자유롭게 만들어주지 못한 게 걸리지만……'

 '아처 씨.'

 '네가 행복해졌으면 해.'

 'ㅅ--'


 그렇게 당신은 떠났습니다. 아니, 영령의 좌라는 곳으로 돌아갔다는 표현이 더 옳겠네요. 제가 갈 수 없는 곳에 이르러있을 당신을 오늘도 하염없이 생각합니다. 언제쯤 당신과 재회할 수 있을까요, 이미 영령의 반열에 이른 당신과 제가 다시 만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몇번이고 여러 생을 헤매다보면 당신을 만날 수 있을지. 당신이 떠나고 이 세계에 홀로 남은 저로서는 제게서 떠난 그대가 검은 물속에 잠겼는지, 지층으로 걸어 들어갔는지 알지 못합니다. 제 꿈길로조차 저를 방문해주지 않는 야속한 당신 탓에 꿈에서조차 당신의 안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저는 당신과의 기억을 가지고, 당신이 없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든 터를 잡고 살아가겠지요. 오늘도, 내일도.

 당신은 이미 오래전 제 곁을 떠나셨습니다. 그 후로 계절이 바뀌고 또 바뀌었습니다. 겨울의 눈송이가, 봄날의 벚꽃이, 여름의 빗물이, 가을의 낙엽이 목숨처럼 떨어져나갈 때마다 당신을 그리워할 듯 합니다. 하지만 이 말만은 뒤늦게나마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아직도 많이 좋아하고 있어요. 그리고 단 한번이나마 당신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부르고 싶었다고.

 

 아처 씨.


 사랑하는 나의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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