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매우 흔한 이야기다. 불행했던 소녀는 마침내 괴물이 되었고, 그녀 곁에 있었던 소년은 소녀에 대하여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었다는 그런 흔하디 흔한 이야기. 그리고 자라버린 소년이 다시 마주친 소녀는 더이상 무력할 뿐인 피해자가 아니었다. 이 세상의 모든 악이라는 어둠을 제 안에 깊숙히 품은 모체. 수호자로서 반드시 그 숨통을 끊어야 할 악.

 가장 가까운 곁에 있었으면서도 그 고통을, 괴로움을 눈치채지도 못했던 소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제게 상냥하게 웃어주었던 소녀. 겉으로 미소하면서도 속으로는 계속 울고있었을 그녀를 결국 구해주지 못했던- 그의 무력한 과거가 쌓아올린 죄의 소산. 

 그는 구하지 못했고 그녀는 구원받지 못했다. 지독히도 진부한 이야기였다. 그가 수호자로서 보아온 세계에서 그것은 흔한 풍경이었으며 이보다 참담한, 혹은 그만큼 불행한 인간은 더러 존재했더랬다. 하지만 소녀는 달랐다. 구할 수 있었다. 그 나락에 손을 뻗어 끌어올려줄 수 있었는데, 정의의 사자란 꿈을 꾸었던 소년은 소녀 한명조차도 구원하지 못했다고── 그리고 그가 구하지 못했던 가련한 소녀는 세상을 멸하게 될 악을 잉태한 채 제 앞에 위태로이 서 있었다.


 "……선배."


 선배, 재차 저를 불러오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희게 바래버린 머리칼과 붉게 물든 눈동자가 낯설었지만 소녀는 여전히 그가 알던 소녀였다. 무고한 마을 주민들에 이어 끝내 제 피를 나눈 친언니마저 삼켜버린 괴물이 되었다해도. 선배, 아파요. 선배. 배가, 이상하게 너무 불러서── 어린애처럼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그를 향해 가냘프게 호소했다.


 "……사쿠라."


 "아파요, 선배. 너무 아파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


 양팔로 복부를 감싸쥔 채 소녀가 비명을 지르듯 날카롭게 신음했다. 이 세상의 모든 악, 앙그라 마이뉴는 탄생하고 싶어한다. 모든 생물이 소유한 원초의 본능에 충실하게, 설령 그 탄생이 외계의 종말일지라도 그녀가 태내에 품고 있는 것은 '태어나길' 바라고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태어나면 모체인 그녀는 죽겠지. 비단 소녀뿐만 아니라 이 세계 역시 그 끝을 맞이할 터.


 "선배, 입 맞춰… 줘요…… 그럼 조금 나을 것도 같은데,에. 네?"


 어느새 제 가슴팍에 매달리듯이 기댄 소녀가 달뜬 얼굴로 응석부리듯 속삭였다. 잠시 주저하던 그가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달맞이꽃처럼 화사한 웃음이 흰 낯빛 위에 잠시 머물렀다. 기뻐요, 선배── 이제 언니에겐 뺏기지 않아. 선배, 절대 날 떠나지 말아요. 그럴- 거죠.

 소녀의 세계와도 같은 성배의 어둑한 내부, 끓어오르는 진흙 속에서 홀로 이질적인 색채를 간직한 붉은 궁병은 구원받지 못한 소녀의 이마에 느리게 입술을 포갰다. 세계의 최후와도 같은 입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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씀 어플 키워드 '기차역'





 나는 피아를 구분할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 줄곧 죽음을 생각했다. 아직 죽음이라는 단어조차 알지 못했는 어린애 시절부터 계속해서. 어느날 아름드리 큰 나무에서 제일 굵게 뻗어나온 가지에 목을 매달아 죽은 이모의 파리한 시신을 마주했을 때, 그때까지 어렴풋하던 나의 소망은 뚜렷한 방향성을 갖게 되었다. 아, 저게 바로 죽음이구나. 내가 은밀히 숨겨왔던 나의 오래된 바람.

 나는 대체 왜 세상에 태어난 것일까. 이런 삶 따위 전혀 원하지 않았는데. 외관상으로나마 귀한 댁 아가씨인 나를 어미 잡아먹고 태어난 년이라고 대놓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으나 나는 때로 사용인들에게서, 무생물에서조차 내게 향하는 질책의 시선을 느꼈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나이를 먹고 이모부가 주최하는 낭독회의 주연이 된 후에  갈망은 더욱 강렬해져만 갔다. 입으로는 남녀간의 뜨거운 정사를 생생하게 연기하면서도 내 내면은 항상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선별된 음서들의 그 어떤 격렬한 묘사도 나를 근본적으로 달아오르게 하지는 못했다. 이모부는 어쩌다 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시체처럼 차갑다고 표현했다.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차갑게 식어있었으니까. 이모부가 처조카인 나와 혼인할 생각이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자연스레 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어느정도 나이가 찬 후에도 이모부는 나를 자신의 처로 맞이하지 않았다. 아마 내가, 이렇게 물새처럼 찬 손발을 가진 여자였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모부는 내 서늘한 체온을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문득 궁금해졌다. 이모도, 나처럼 몸이 차가웠던가? 이모도 나처럼 언제나 죽음을 생각하며 몸도 마음도 추운 겨울을 살고 있었을까.

 아마 나는 그 해 안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이모처럼 목을 매든, 면도칼로 동맥을 끊든 이 지긋지긋한 생에서 탈출하고 말았을 것이었다. 만약 백작과 타마코- 숙희가 내 삶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이모부의 손님으로 내가 음란한 구절을 읽고 때로는 직접 시연하는 것을 지켜본 남자가 과연 나를 온전히 자유롭게 해줄 수 있을지, 뭔가 함정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유혹은 그럴 듯했지만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의 제안 중 나를 매료시킨 것은 자유로운 미래도, 더이상 음서를 읽을 필요 없다는 것도 아니었다. 마시면 이모부의 지하실로 끌려갈 염려 없이 죽을 수 있다던 극약이 담긴 작은 병이 그것이었다. 나는 백작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타마코를 만났다. 타마코, 아니…… 나의 숙희.

 새앙쥐처럼 어리고 날랜 계집아이였다. 쉽게 속일 수 있게 어리숙한 애로 데려다달랬더니, 고 자그마한 머리통으로는 제 스스로 제법 똘똘하다고 생각하는건지 날 세상물정 모르는 아가씨로 여기는 것이 빤하게 보였다. 착각하는 게 귀여워서 멋대로 내버려뒀더니 도둑의 딸 아니랄까봐 어느순간 내 마음까지 가져가버렸다. 숙희에게는 내게 결여된 생기가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응당 누구나 가지고 있을 생기, 하지만 내게는 결핍되어 있는 그것을 그 애는 차고 넘치도록 발산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제껏 유령같이 살아온 내게 그 애는 더없이 매력적으로 비쳤다.

 처음에는 분명 내 명의로 평생 본토의 정신병원에 처박아두려고 했던 하녀 계집애는 아주 훌륭하게 내 인생을 망쳤다. 내가 그토록 파괴하기를 원하고 또 소원했던 내 일그러진 삶을 그 애는 단숨에 망가뜨렸고, 지옥같은 밑바닥에 있던 내게 손을 뻗어 나를 지상으로 끌어올렸다.


 아가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자, 표 사왔어요.


 반들반들 반짝이는 눈동자가 보석처럼 예뻤다. 백작은 그 애가 물욕이 많으니 장신구들을 슬쩍슬쩍 보여주라고 했지만, 내가 지니고 있었던 어떤 보석보다도 더 빛나는 것은 나를 바라볼 때 그 애의 눈빛이었다. 슬쩍 물어봤더니 이제까지 제가 입히고 씻긴 것 중 나처럼 예쁜 게 없었다나. 정말이지 맹랑하기가 그지 없었다. 그러니까 널 사랑하게 된 거겠지만.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자그마한 손바닥에 기차표가 두 장 놓여있었다. 기차를 타고 이 기차역을 떠나는 순간 나는 자유의 몸이 된다. 더이상 공포스러운 지하실에 끌려갈 염려도, 매번 그 구성이 바뀌는 한 무리의 신사들 앞에서 음란한 소설을 읽을 필요도, 나이든 이모부와 혼인할 필요도 없는.


 그럼 우리 같이 탈래? 숙희야.


 기차표를 내밀고 있던 숙희의 손을 감싸쥐자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서늘한 나와 대조적으로 숙희의 손발은 항상 따뜻했다. 내게 자신의 온기를 나눠주기라도 하듯, 그 애도 내 손을 마주 잡았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나의 하녀. 연옥에서 함께 탈출한 나만의 베아트리체.

 나는 더이상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 삶을 원했다. 숙희와 함께 살아가는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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씀 어플 키워드 '다녀올게'




 다녀올게.


 언니는 항상 그렇게 말했다. 자리를 비울 때마다 언제나, 빠짐없이. 잠시 내 옆을 뜰 때마다, 미안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내게 속삭였다. 다녀올게, 잠깐이면 돼. 그러니까 기다릴 수 있지, 사쿠라?

 그럴 때마다 나는 마치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십년도 더 전, 내가 아직 토오사카의 성을 가지고 있었을 때 언니가 나를 항상 챙겨줘야 할 어린 동생 취급했을 때처럼. 이미 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오래전 아득한 심연 아래로 묻어둔 유년기의 기억들은 보글보글 아래로부터 솟아오르는 기포처럼 매일 수면 위로 차례차례 하나둘씩 떠올랐다. 


 언니.

 응?

 기억해요? 우리가 어려서… 아마 여덟,아홉살쯤이었을 거에요. 아버님, 어머님과 같이 유카타를 입고 축제에 갔던 때. 그때 저는 금붕어를 잡고 싶어했는데 아무리 애써봐도 제 힘으로는 한마리도 잡을 수 없었어요. 그때 언니가 말했었어요. 잠깐 기다려 봐, 사쿠라- 라고. 그리고 언니는 뜰채 하나를 더 가져오더니 금새 금붕어를 2마리나 더 잡아줬었어요. 금붕어가 든 비닐봉투를 야무지게 제 손안에 쥐어주고나서 자, 어머님이 기다리실 테니까 어서 뛰어! 라면서 내 손목을 끌어당겨서 뛰었었죠.

 아, 그랬었나…… 벌써 오래된 일이네. 기억력이 좋구나, 사쿠라. 사실 네가 말하기 전까지 살짝 잊어버리고 있었어.

 저도…… 아주 최근에야 기억한걸요. 저어, 언니.

 응?

 나중에- 다시 우리 같이, 둘이서 축제에 가요. 이번엔 저도 언니에게 금붕어를 잡아주고 싶어요.

 으응, 그럴까. 이제 여름도 얼마 안남았고- 그럼 약속. 여기 새끼손가락.

 네에- 저도, 새끼손가락.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언니 뿐이다. 할아버님도, 오라버니도, 토오사카 댁의 아버님도, 어머님도, 그리고…… 선배조차도. 오로지 이 세상에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은 언니 뿐. 나의 언니, 토오사카 린. 지금도 날 위해서 여름 축제에 가줄 것을 약속하며 손가락 걸고 웃어주고 있는 사람.


 자아, 그럼 이제 정말 다녀올게. 사쿠라.

 네, 언니.


 만개한 장미처럼 화사한 웃음을 머금은 채 언니가 현관에 서서 손을 활기차게 흔들어보였다. 나 역시 언니를 배웅하며 마주 웃어보였다.

 다녀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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