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상이한 점 내지 오류 있을 수 있습니다.
변호사는 일종의 상어와도 같은 존재이다. 언젠가 강의를 수강했던 로스쿨 모 교수가 주장했던 표현이다. 그 당시에는 별 생각 없었는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로펌에 입사하고나서 종종 되새기게 되는 표현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이 그저 피냄새를 좇을 뿐인 상어라, 나쁘지는 않지. 신규 변호사의 경우, 처음에는 정의감에 불타다가도 차차 무뎌지고 오직 수임료에 의해서만 움직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지만 그는 달랐다. 애초에 얄량한 정의감 때문에 이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미끈하니 수려한 외모와 화려한 언변, 그리고 로스쿨에서도 쭉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천재적인 두뇌. 자신의 적성에는 이 길이 제일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옳았다. 겔러트는 같이 입사한 동기 뿐만 아니라 그 나이대 젊은 변호사들 중에서도 제일 잘나가는 변호사였다. 그리고 이번에 맡겨진 사건은 아주 간단한 가압류 건이었다. 그랬어야 했는데.
"또 기각당했다고? 왜?"
"저야 모르죠."
아, 짜증나. 겔러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또였다. 얼마전 클라이언트에게서 받은 사건은 또다시 재판정 문턱도 넘지 못하고 고스란히 반환되어 돌아왔다. 분명 몇번씩 검토했는데! 처음 기각되어 신청서가 반환되었을 때 오탈자든 실수든 뭔가 꼬투리잡힐 게 있는지 몇번씩 확인했던 터였다. 뭐가 문제야, 대체? 저번에 벌써 클라이언트가 로펌 사무실까지 찾아와서 비싼 수임료 받고 뭐하는 짓이냐고 한바탕 지랄을 하고 갔었는데 그 꼬라지를 또 봐야할 생각을 하니 속이 쓰렸다. 난 잘못 없어. 분명 완벽하게 했다고. 슬슬 꼭지가 돌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법원."
건물 바로 앞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목적지를 말하자마자 차가 출발했다. 벌써 몇번씩 제게로 돌아온 서류봉투를 왼손에 든 채 그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목을 조이는 듯한 넥타이를 당겨 느슨하게 만든 후 심호흡을 했다.
마침내 법원 건물 앞에 차체가 멈춰섰을 때, 대강 지폐를 던지다시피 한 채 지면에 발을 디뎠다. 이미 몇번 와본 적 있던 곳이기에 건물 내부구조 자체는 눈에 익었다. 그는 서슴없이 익숙한 복도를 걸어갔다. 구두 밑창과 반들반들한 복도 바닥이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했다. 민사신청과 팻말 아래의 유리문 앞에 선 겔러트는 망설임없이 그대로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무엇을- 아, 변호사님? 무슨 일로,"
"법관 불러요."
"……네?"
"이 사건 담당 법관 부르라고요."
"그건 곤란한데요……"
"불러요. 여기로."
한번 눈이 돌아간 인간은 평소보다 더 뵈는 게 없어지기 마련이다. 신청서 봉투를 데스크에 요란하게 내려친 겔러트는 무조건 억지를 썼다. 지금 자신의 모양새가 전형적인 진상 민원인에 가깝다는 사실은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그는 로펌에서도 제일 잘 나가는 젊은 변호사였고, 고작 이 서류 몇 장 때문에 커리어에 빈틈을 만들 수는 없었다. 선량하게 생긴 남직원이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피하는 사이 주위 시선이 이쪽으로 꽂혀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쪽팔린 짓은 정말 하고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법관 보고 면전에서 직접 설명이라도 들어야겠으니까 어서 불러! 사내 블랙리스트에 오를 각오를 한 채 겔러트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평온한 목소리가 그와 직원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절 찾으시는 분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그쪽이?"
법관이라기보다는 민원인 내지는 견학 온 로스쿨 학생이라고 착각했을 지도 모른다. 상대가 걸치고 있는 것이 특유의 그 법복만 아니었어도. 검은 법복을 입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만큼 앳된 인상이었다. 20대 초중반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어려보인다. 가발을 벗고있어 드러난 붉은빛을 띤 갈색 머리카락과 그 아래의 단정한 얼굴을 한동안 쳐다보다 말고 겔러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토록 찾던 상대가 바로 앞에 있었다. 아마 이제껏 몇번이고 신청서를 반려시켰을 바로 그 장본인. 이제까지 상대방과 만나게 되면 한바탕 벌여주리라 이를 갈았지만 기분은 얼떨떨했다. 의외로 너무나 어린 생김새여서 그럴 수도 있고,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매우 차분하고 침착해서 그랬을 수도 있었다. 왠지 페이스를 빼앗기는 것 같은 기분에 겔러트는 다시한번 정신을 추스렀다.
"아무래도 납득할 수가 없는데요, 이 신청서 반려는."
"이리 주시면 봐 드릴게요."
온화하게 답하는 법관에게 신청서가 담긴 서류봉투를 순순히 넘겨주면서도 묘한 기분은 영 사라지지 않았다.
겔러트가 말없이 지켜보는 와중에 젊은 법관은 서류를 한장한장 찬찬히 넘기며 뜯어보았다. 마지막 장까지 검토를 끝내고나서야 상대가 반짝 고개를 들어올렸다. 여전히 흔들림없이 고요한 눈매.
"이 가압류와 별개로 지금 본안 사건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네요, 변호사님."
"그렇습니다만……"
"그리고 본안이 상고심에 계속중인 상태군요."
"아,"
"헛걸음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이 신청서는 1심 쪽으로 가셔서 접수하셔야 하겠는걸요. 저희도 해드리고야 싶지만 관할 문제가 걸려있기때문에……"
아. 이럴수가. 그는 속으로 탄식했다. 본안이 상고심에 계속 중일 때는 보전처분의 관할은 1심 법원에서 맡게 된다. 보전처분은 상고심이니까, 아주 단순한 문제였는데. 애초에 관할이 달라서 안되는 것을 몇번씩 요구해봤자 먹힐리가 없었다. 관할 문제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오탈자니 다른 사유만 죽어라 찾고 있었으니. 왜 본안을 안 검토했지? 갓 졸업한 새내기 변호사나 저지를 법한 실수에 눈앞이 깜깜했다.
자살할까, 쪽팔려서 뒈지겠는데. 아까 분노에 차서 걸어오던 복도를 패잔병처럼 터덜터덜 걸어가던 와중 타인의 목소리가 그를 불러세웠다.
"그린델왈드 변호사님."
"──예?"
"그 가압류 문제는 죄송합니다. 미리 저희쪽에서 고지해드렸어야 했는데."
아까 자신에게 요지를 사근사근 설명했던 법관이었다. 멀찍히 떨어져서 봐도 소년처럼 앳되고 단아한 생김새의.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자니 적반하장으로 굴었던 몇분 전의 자신이 떠올라 속이 쓰렸다. 어딜봐도 내 실수인데, 굳이 왜? 의문점을 뒤로 하며 겔러트는 순순히 대꾸했다.
"아뇨. 단순한 관할 문제도 미리 체크하지 못한 제 불찰이죠. 신경쓰실 것 없습니다, 그러고보니 성함이-"
"덤블도어."
"덤블도어, 면 설마 그……?"
기억났다. 벌써 몇해 전, 명문 로스쿨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던 바로 그 어린 천재. 나이도 겔러트 자신과 별 차이가 나지 않던 것으로 기억한다. 입학부터 졸업까지 쭉 수석만 거머쥐고 유명 법조계 명사들과 일찍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문까지 발표했다던 법조계의 기대주 겸 슈퍼스타. 역대 최연소 법관으로 임명되었다는 이야기는 주워 들었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아마 풀네임이 알버스 덤블도어, 였던가. 자신이 할 말은 아니지만 꽤 독특한 느낌의 성씨여서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게 어리게 생겼을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지만.
그런데 내 이름은 또 어떻게 알고? 문득 의아해진 겔러트를 향해 요즘 가장 핫한 법조계의 셀러브리티가 생글 웃어보였다.
"전부터 말씀 많이 들었어요. 이렇게 직접 만나뵙게 된 것은 또 처음이지만."
"그런가요."
"그러니까, 혹시 가능하시면 내일 점심식사라도 같이 하지 않으실래요?"
잠깐, 얘 지금 나 꼬시는건가? 무해하다못해 순진해보이는 얼굴이 옅게 웃고 있었다. 표정을 봐선 전혀 아닌 거 같은데 대사는 또 너무나 전형적이다 못해 진부한 작업용 멘트 그 자체여서. 겔러트는 몇초정도 고민하다 대답했다.
"안될 거야 없죠."
"정말요? 그럼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변호사님 명함 좀 주시겠어요?"
마치 여우에라도 홀린 듯한 기분이다, 명함을 꺼내 건네주며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원래 항의나 하러 올 생각이었는데 사실 그건 내 잘못이었고. 게다가 그 유명한 천재마저 만났고. 얼떨결에 내일 그 상대와 식사약속까지 잡다니. 겔러트의 명함을 받아든 상대가 다시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럼 내일 뵐게요, 변호사님."
살짝 고개를 까딱해보이고 먼저 걸음을 옮겨 사라지는 낭창한 뒷모습을 보고있다가 겔러트는 문득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별로 머무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한시간 가까이 지나있었다. 내가 뭘 했다고? 정말이지 여우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을 되씹으며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새내기나 할 만한 실수를 하고 진상을 떠는 바람에 면을 있는대로 팔리긴 했지만, 기분은 아까처럼 그렇게 최악이지는 않았다. 이상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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