겔알 의 연성 문장
네가 다정하면 죽을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죽어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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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찰나 날카로운 통각이 손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완전히 낯설기만 한 감각은 아니었다. 이렇게 페이지를 넘기다가 손가락 끄트머리를 베이는 일은 종종 겪어보았던 일이기에. 하지만 몇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는 않는 예리한 아픔이었다. 저도 모르게 책에서 손을 거두고 멀쩡한 손으로 다친 손끝을 감싸쥐고 있으려니, 이내 옆에서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날아들어왔다.

 "왜 그래, 어디 다쳤어?"
 "종이에 손을 베여서……"
 "아. 그거 은근 아픈데. 네 손 이리 줘 봐."

 겨우 베인 것 뿐이니까 그렇게까지 신경써줄 필요 없다고, 사양하기도 전에 낚아채이다시피 손이 잡혀서 끌려갔다. 맞닿는 손바닥의 촉감은 건조하고 서늘했다. 잘 세공된 보석처럼 매력적인 용모와 다르게 항상 그 성정과 언변은 불꽃처럼 뜨겁고 격렬했으나, 겔러트의 체온은 항상 이처럼 서늘한 편이었다. 무더운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제 앞에서 두꺼운 책을 여러권 쌓아두고 읽고있던 소년에게 꼼짝할 새도 없이 손이 잡혀있다는 것을 인식하자 뺨이 확 달아올랐다. 어깨동무나 팔짱같은 신체접촉까지는 괜찮았다. 세간의 상식에 비추어 보건대, 충분히 친구끼리도 할 수 있는 범주에 들 테니까. 하지만 손을 이렇게 잡히는 건…… 어느덧 손끝에서 엄습하는 예리한 통각은 반쯤 잊혀져 있었다. 자신도 통제할 수 없이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진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내 심장 고동이 들리면 어떡하지?

 "종이에 베이면 생각보다 많이 아프더라고. 다음엔 조심해, 알버스."
 "으, 으응."
 "사랑하는 네가 아프면 내 마음도 같이 아프잖아."
 "…어?"
 "농담이야."

 씩 웃어보이는 얼굴이 꼭 어린 소년처럼 해사하고 명랑했다. 가만히 무표정으로 있으면 찬바람이 풀풀 날릴 정도로 오만하고 고압적인 인상을 풍기기도 했으나, 웃기만 하면 더할나위 없이 쾌활하고 발랄하다. 정말이지 특이했다. 어느새인가 자신이 좋아하게 되어버린, 바다 건너편에서 불현듯 나타난 금발의 가니메데. 그래도 저런 말은 삼가줬으면 하는데. 왜냐하면- 네가 말하는 의미와 내가 원하는 것이 서로 상이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욕심내고 싶고 착각하고 싶어지니까. 너를 좋아해. 겔러트. 목 바로 아래까지 치밀어오른 진심을 억지로 삭히며 알버스는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괜히 제 속내를 밝혔다가 친구관계마저 잃고마느니 지금 현 상태나마 유지하고 있는 것이 나았다. 나는 괜찮아, 이대로 계속 네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숨결이 닿을 듯한 가까운 거리에서 눈이 마주치는 통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직까지 상대에게 손이 잡혀있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거, 슬슬 놓아줬으면 하는데──

 "……"

 생채기 난 자신의 손을 끌어다 쥔 겔러트가 다른 한쪽 손으로 느리게 허공을 쓸어내렸다. 아직까지 따끔따끔한 통증이 맴돌던 손끝의 생채기가 그 동작과 더불어 치유되기 시작한다. 지팡이도 없이 간단하게 이루어지는 무언마법. 아직 열여섯 살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그는 걸출하고 뛰어났다. 아마 타고난 천재란 표현은 그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 터이다. 알버스 자신이 이제껏 그렇게 칭송받았듯이. 17여년만에 겨우 조우하게 된 나의 반쪽, 피가 섞이지 않은 영혼의 쌍둥이. 알버스는 가끔 그와 자신의 영혼이 비슷한 색채를 띠고 있으리라 확신하고는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만큼이나 영리하고, 천재적이고, 탁월한 인물이 이 세상에 또 존재할리가.
 어느덧 책장 모서리에 베였었던 흔적은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알버스의 손이 놓여난 것은 그와 동시에였다.

 "고마워, 겔러트."
 "별 거 아냐. 간단한 치유술인걸. 내가 베였더라도 너도 똑같이 해줬을 거잖아."

 서글서글하게 웃어보이는 얼굴이 오늘따라 눈부시게 느껴져 알버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도로 떴다. 기대를 아예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겔러트는 가끔씩 이렇게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훅 치고 들어오고는 했다. 자신도 모르게 기대해버리도록. 혹시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인 것이 아닐까 헛된 꿈을 꾸게 만드는 달콤한 다정함이었다.
 네가 다정하면 죽을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죽어도 좋았다. 네 다정함 안에 잠겨 이대로 죽어버릴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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