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은 아주 오래 전, 그녀가 아직 어렸고 그는 지금보다 더 젊었을 적의 일이었다. 그날이 무슨 요일이었는지, 그 이전까지 뭘 하고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록산느 모튼은 그와 만났던 순간만큼은 바로 어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안녕, 작은 숙녀분. 록산느라니 정말 예쁜 이름이구나. 혹시 괜찮다면 널 록시라고 불러도 되겠니?"
 "록시……?"
 "그래, 록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록산느 모튼이 '록시'라는 또다른 애칭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안경이 잘 어울리던 멀쑥한 젊은 신사는 아버지의 지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고, 허리를 숙여 자신의 허리춤 정도밖에 오지않는 작은 숙녀에게 정중한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는 그 인사와 더불어 그녀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었다. 이제 스스로도 본명인 록산느보다 더 익숙하게 여겨지는 이름, 록시. 이후 그녀는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 스스로를 록시라고 불러달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다름 아닌 그가 불러준 이름이니까. 그리고 처음으로 그와 만난 후 십여년이 지났을 때 신사는 더이상 어린 소녀가 아닌, 훌쩍 성장해버린 그녀에게 다시 찾아왔다.
 킹스맨. 갑옷 대신 수트를 몸에 걸친 현대의 기사들, 젠틀맨 스파이. 안경과 몸의 선에 딱 떨어지는 수트가 유난히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그는 아서왕 전설 속 기사들의 이름을 코드네임으로 가진 유서깊은 비밀조직의 일원이었다. 007같은 건가요?하는 그녀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비슷하지, 하고 고개를 끄덕일 때의 그 기분이라니. 그리고 그의 코드네임은 퍼시벌이었다. 그리스도의 성혈을 담았다는 거룩한 잔, 성배를 찾아 떠났던 세명의 기사 중의 한 사람. 그녀를 방문한 퍼시벌은 어린 록산느를 처음으로 록시라고 불렀던 그때처럼 제안을 해왔다.

 "언젠가 말해준 적이 있었지. 킹스맨이라는 조직이 있단다. 나 역시 그 조직의 일원이지. 이번에 안타깝게도 동료 한 사람이 죽었어. 그래서 그 공석을 메우기 위해 후보생을 모집하고 있는데, 록산느. 나는 너를 추천하고 싶구나."
 "저를요?"
 "그래. 너는 기사를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기사가 되는 게 어울리는 아이니까. 만약 네가 성공한다면- 우리의 일원으로서, 내 동료로서 네게 주어질 코드네임은 랜슬롯이 되겠지."
 "……랜슬롯."
 "미리 말해두자면 그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거란다. 하지만 나는 너를 믿는다, 록시."

 랜슬롯이라하면 가장 유명한 기사의 이름이자 제일 용맹했던 원탁의 기사가 아닌가. 비록 주군의 아내였던 왕비와 사랑에 빠져버리기는 하지만…… 처음으로 그녀를 록시라고 불렀던 남자가 이번에는 또다시 새로운 이름을 주려고 하고 있었다. 다름아닌 그녀를 자신의 동료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자신을 진지한 눈으로 응시하는 퍼시벌을 향해 록시는 한치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추천을 받아 후보생이 되겠다고, 그리고 꼭 모든 과정을 통과하여 당신의 곁에 대등한 동료 한 사람으로서 서겠다고.
 그의 경고대로 훈련과정과 시험들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후보생들이 취침 중이었던 방에 물이 차오를 때도 있었으며 -맙소사, 인명피해는 없을 거랬잖아요, 퍼시벌?- 스카이다이빙 -약한 고소공포증이 있는 록시에게 있어 가장 긴장되었던 순간 중 하나였다- , 필기시험까지 일정은 꽤나 타이트하고 긴장을 놓을 새 없이 빡빡했다. 처음에는 다수였던 후보생들이 하나하나 탈락하며 최후의 3인만 남게되고, 심지어 클럽에서 같은 동년배 여성을 유혹해 침대로 끌어들이라는 미션이 내려왔을 때 록시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래, 그 아가씨 취향이 에그시나 찰리가 아니라 의외로 나일수도 있는 거지 뭐. 약물을 탄 술잔을 받아마시고 의식을 잃었다가 도로 정신을 차렸을 때 차가운 철로에 팔다리가 묶여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록시는 후보생이 된 이래 가장 동요했다. 어떻게 된 거지, 설마 그곳에서 납치된건가? 그 술잔에 들었던 약은? 계획적인 소행인가? 누가? 왜? 소피라고 했던 그 여자는 속임수였나? 아니면 설마 이것도 미션의 일부? 필사적으로 흐릿한 머리를 굴리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중이던 록시 앞에 나타난 낯선 남자는 서릿발처럼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가 들고있는 이 칼만이 널 살릴 수 있다. 내 고용주를 대신해서 묻겠다, 킹스맨이 대체 뭐지? 퍼시벌은 또 누구야? 살고싶으면 어서 말하는 게 좋을걸! 설상가상으로 가깝게 다가오기 시작하는 기차소리까지. 그 순간 그녀는 처음으로 죽음을 실감했다. 하지만 낯선 자에게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모든 걸 말해버릴 수는 없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당신이 내게 보여준 신뢰를 저버릴 수는 없으니까. 나는 당신이 처음으로 록시, 라고 불러준 순간부터 아마-
 기차가 바로 지척까지 다가왔다고 느낀 순간 록시는 눈을 질끈 감았다.

 "Good girl, Roxy."
 "…나, 해낸 건가요?"

 잘 해냈다, 풀어줄테니 가만히 있으렴. 기차가 무서운 기세로 지나가고 난 후 눈 앞에 나타난 것은 다름아닌 그녀의 기사였다. 살아있었다. 그리고 끝까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이것 역시 시험이었구나. 나는 당신도, 당신의 조직도 배신하지 않았어.
 세명의 후보생들 중 록시가 가장 먼저 시험을 치렀기 때문에 록시는 중앙 통제실에서 멀린 그리고 퍼시벌과 함께 에그시와 찰리가 동일한 시험을 치르는 광경 역시 지켜볼 수 있았다. 에그시 언윈은 그녀처럼 통과했으며 찰리 헤스켓은 탈락했다. 이제까지 후보생 개개인의 추천인은 비밀이었기에 에그시의 추천인이 최고의 요원이라던 갤러해드였으며 찰리의 추천인이 다름아닌 조직의 수장 아서였다는 것을 그녀가 알게 된 것은 그때가 되어서였다.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 시험 뿐. 멀린은 전통적으로 마지막 시험 전에는 후보생과 추천인 단둘이 24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통이라며 안내했다. 에그시는 갤러해드와 함께 사라졌고 록시 역시 퍼시벌을 따라 이동했다. 공들였던 화려한 화장을 지우고 머리칼을 포니테일로 다시 묶어올린다. 10년도 더 넘게 알아온 상대라지만 이렇게 둘이서만 꼬박 하루를 같이 보내는 건 처음이어서 살짝 들뜬 상태의 록시에 비해 퍼시벌은 묘하게 수심에 찬 듯한 표정이었다. 저와 같이 있는 게 기쁘지 않아요? 조심스러운 질문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록산느,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난 잘 모르겠구나."
 "뭐가요?"
 "널 추천한 것이 정말 잘 한 일인지. 넌 똑똑하고 유능한 아이니까 당연히 여기까지 올 거라고 믿었단다. 하지만 막상 문턱 하나만 남겨두니…"
 "……퍼시벌은 저와 동료가 되는 게 싫어요?"
 "그런 게 아니야. 킹스맨은 위험한 임무에 자발적으로 뛰어들어야하는 존재다. 하지만 우리 외엔 아무도 우리의 노고를 알아주지 않지. 우리는 그림자 속에서 활동하는 현대의 기사들이니까. 전대 랜슬롯은 홀로 단독임무에 투입되었다가 살해당했어. 나는 만약 네가 그렇게 된다면-"
 "오, 퍼시벌."

 놀랍게도 그는 진심으로 괴로운 듯한 얼굴이었다. 비로소 처음으로 그의 민낯을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 맙소사, 항상 우아하고 여유 넘치는 완벽한 신사같던 그가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안다니. 그것도 다름아닌 나 때문에! 메이크업을 지우면서 이미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던 록시는 냉큼 퍼시벌이 앉아있던 책상 위로 훌쩍 올라가 앉았다. 아버지가 보신다면 모튼 가의 후계자답지 않은 품위 없는 행동이라며 지적하셨겠지만 여긴 잔소리할 부모님도 없고, 우리 둘 뿐인데 뭐 어때.

 "퍼시벌이 날 그렇게까지 생각해주는지는 몰랐어요. 하지만 당신이 날 추천해준 거 잖아요? 난 그저 당신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을 뿐이에요."
 "록산느."
 "죽지 않겠다-라고 맹세할 수는 없겠네요. 하지만 퍼시벌, 난 정말로 당신의 동료가 되고싶어요. 나도 코드네임을 받고 당신과 함께 하고싶어요."

 록시는 환하게 웃었다. 아, 가까이에서 본 그의 눈동자는 이런 색이었구나.

 "그리고 록시라고 불러주세요, 항상 그랬듯이."
 "록시."
 "네, 그렇게요."

 그녀는 그렇게 새삼 각오를 다졌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신의 곁에 서고 싶어. 당신 옆에 대등한 동료의 한 사람으로서.
 24시간을 보낸 다음날 멀린이 그녀를 불러 총을 건네준 후 이제까지 길러온 푸들을 쏘라고 명령했을 때 그녀는 직감했다. 이게 바로 마지막 시험이구나. 기사가 되기 위한 최후의 관문이 약한 동물을… 그것도 무려 자신의 개를 쏘는 것이라니,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기사도는 마땅히 약자를 보호해야하는 것일진대. 그녀의 푸들이 온순한 눈빛으로 동요하는 주인을 바라보았다. 록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나는, 해야만 해, 왜냐면, 그와 약속했으니까- 차마 푸들의 눈을 쳐다볼 수는 없어 눈을 질끈 감고 쥐고있던 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고 큰 소음이 났다. 아마 눈을 뜨면 아끼던 개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을 것이다. 죽지만 않았다면 좋을 것을…… 아니, 죽었을 것이다. 그녀가 건네받은 총의 크기는 꽤나 묵직했으니까. 이렇게 가까이에서 총에 맞았다면 틀림없이 죽었을 거야.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방아쇠를 당긴 자세 그대로 총을 움켜쥐고 얼어붙어 있던 그녀의 귓가에 멀린의 목소리가 스쳐지나갔다.

 "마지막 시험을 통과한 것을 축하한다, 록산느. 이제 눈을 떠봐."
 "아……?!"
 "그건 빈 총이었어."

 눈을 떴다. 그녀의 푸들은 어디 하나 다친 곳 없이 멀쩡하게, 순한 눈망울로 주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빈 총이었구나. 이것이 마지막 테스트. 차갑게 식어버린 것 같았던 심장이 다시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그럼 나는…?

 "아직까지 조용한 걸 보니 에그시는 통과하지 못한 모양이군."
 "멀린……"
 "이젠 네가 새로운 랜슬롯이야. 킹스맨의 일원이 된 걸 축하한다, 랜슬롯."

 그렇게 한동안 비어있었던 원탁의 공백을 메울 새로운 기사가 한 명 탄생했다. 그 중 가장 어리고 유일하게 성별이 다른 기사가.
 그리고 그녀가 받은 축하인사 중 가장 기쁜 것은 역시 그녀의 추천인이 건넨 인삿말이었다.

 "랜슬롯, 축하한다. 언제나 네가 해낼 거라고 믿고있었어."
 "언제는 날 추천한 게 잘 한 일인지 모르겠다면서요?"
 "사실 그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란다. 네가 중간에 탈락할 거라고 한번도 생각한 적 없었지만 그렇기에 더 내 선택을 곱씹고는 했지. 아끼는 너를 터무니없이 위험한 곳으로 끌어들인 것은 아닌지……"

 퍼시벌의 차분한 눈매는 평소처럼 진중했으나 그를 오랫동안 알아온 록시는 눈치챌 수 있었다. 이 사람, 진심으로 기뻐하면서도 나를 걱정하고 있구나.

 "널 끌어들인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다만, 사실 나는 네가 이런 위험한 삶이 아닌 평범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길 바랬어. 랜슬롯이 아닌 록산느의 삶. 하지만 넌 너무나 뛰어난 아이였지. 각자 후보생을 추천하라는 오더가 내려왔을 때 그 자리에 어울릴만한 사람은 오직 너밖에 떠오르지가 않더구나."
 "퍼시벌."
 "그리고 너는 결국 해냈지. 이제 랜슬롯으로 살아가게 될 네게 내가 해줄 말은 이것밖에 없구나. 부탁이다. 꼭 살아남거라, 록시. 가능하면 나보다 더 오래."

 아직 수트와 안경도 지급받지 못한 신규 기사의 어깨에 그녀의 추천인이었던 기존 기사의 손이 올려졌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매는 한없이 자랑스러워하는 동시에 어딘가 서글프기도 해보이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랜슬롯 네가, 너 자신을 잊지 않고 끝까지 록산느 모튼일 수 있기를."
 "약속할게요, 퍼시벌. 하지만 당신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홀로 남는 건 싫어요. 그러니까 나하고도 약속해요. 당신도 역시 살아남을 거라고."

 이미 그는 충분히 검증된 실력을 지닌 기사이다. 퍼시벌의 코드네임을 가지고있는 채 이제껏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그의 유능함을 의미하므로. 하지만 전대 랜슬롯 역시 혼자 아르헨티나에 파견될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이었지 않은가. 만약 퍼시벌이 자신을 두고 그렇게 죽어버린다면? 우습게도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보다 그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이 훨씬 더 숨이 막혀왔다. 자신이 없는 삶이, 당신 없이 기사로서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당신이 아니었으면 이 자리까지 오지도 못했을 텐데. 그러니까 당신도 죽지 말아요. 나도 노력할 테니까. 새로운 랜슬롯, 록시, 록산느 모튼, 여러 이름으로 불리게 된 소녀는 과감하게 발뒤꿈치를 들어올려 저를 내려다보는 세례자의 뺨에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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