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곧내. 쓰려고 했으나 아무래도 역시 안쓸 거 같은 옛날글 쪼가리들 그냥 한데 모아서 올려놓는 용도


0.페ㅅ나/궁흑앵
 그는 악몽 속을 걷는 남자였다. 깨어서도, 그리고 잠이 들어서도. 그의 풍경은 항상 똑같았다. 살려달라고 혹은 죽고 싶지 않다고 절규하는 무수한 얼굴들이 있었으며 걸음걸음 발목을 낚아채는 시체들의 찬 손마디가 있었다. 언젠가 제 손으로 죽여야만 했던 동료의 모습이 있었으며 품안에서 처연하게 숨이 끊어졌던 어린아이도 존재했다. 마치 메마른 심상풍경처럼, 눈을 감으면 악몽을 꾼다는 사실을 생전의 그는 익히 알고 있었다. 어차피 눈을 뜬다해도 현실은 또다른 악몽의 연장선상일 뿐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희뿌연 안개 속에서 몇 걸음 떼어놓기도 전에 아처는 자신이 악몽을 꾸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 풍경이 낯설다는 것 역시.

 선배.
 선배, 살려주세요.
 선배…!

(중략)

"선배, 어째서──"

 흡사 빙판이 쩍 갈라지듯 온화하던 소녀의 얼굴 위에 균열이 일었다. 찰나 눈꼬리에서 새까만 진흙이 피눈물처럼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평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고운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린 그녀가 원독어린 오탁을 줄줄 흘리며 통곡하듯 소리를 높였다. 

 "왜 저를…… 구해주지 않았어요? 어째서?
정의의 사자가 되고 싶다고 했으면서, 선배 미워, 거짓말쟁이, 이 거짓말쟁이──!"
 
 흡사 연인에게 배신당한 처녀처럼, 초야에 신랑을 잃어버린 신부와도 같이. 그렇게 제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쥔 채 절규하는 소녀의 등 뒤로 그림자들이 그녀에게 감응하듯 사납게 요동쳤다. 
 당장이라도 저를 집어삼킬 것 같은 히스테리컬한 기세 앞에서 궁병은 미미하게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네가 상처입은 척 할 필요가 있는건지 모르겠군. 애초에 너는 마토 사쿠라도 아니잖나."
 "네, 에? 후, 후후. 선배, 방금 그 말은 좀 우스운걸요. 그럼 여기 있는 저는ㅡ 누구라는거죠?"
 "그저 마토 사쿠라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이 세상의 모든 악이지. 너 자신도 알겠지만."
 "……!"

 그 말에 반박하려는 듯 소녀, 아니 소녀의 형상을 한 그것이 입을 벌렸지만 아처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나는── 널 죽일 수밖에 없어."

 서번트는 꿈을 꾸지 않는다. 그저 마스터와의 연결링크를 통해 상대의 기억을 엿보는 것 정도일까.



1.페zㅔ/키리아이
 "생일…… 이요? 생일이라면, 그것은 제가 만들어진 날을 의미하는 것인지."

 의아함을 고스란히 품은 붉은 눈동자는 잘 세공된 보석처럼 아름답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녀 자체가 아인츠베른의 천년 비원을 고스란히 녹여낸 기술로 탄생한 호문클루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조형미를 갖춘 우아한 예술품이기도 하지만. 아이리스필은 나비처럼 긴 속눈썹을 가볍게 깜박이며 상대가 알려준 낯선 개념을 조심스레 입안으로 굴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키리츠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하트 옹에게서 들었어. 오늘이 네가 태어난 날이라고."
 "저는 인간이 아닙니다, 키리츠구. 정확히 말하자면 태어났다기보다는 만들어졌다는 것에 가깝겠지요. 그런 제 생일─이란 것을 축하하겠다니, 당신의 사고는 제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네요."

 저는 머지않아 개막할 성배전쟁을 위하여 만들어진 그릇. 그런 인형인 저를 당신이 인간처럼 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2.페ㅅ나/시+흑앵
 성배의 밑바닥은 언제나 고요하다. 이 세상의 모든 악으로 오염된 만능의 원망기, 그 원념이 깊숙히 침잠되어 말라붙어버린 최하층. 그 심장부에서 소녀는 아슬아슬하게 가장자리에 올라선 채 비스듬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오로지 공허한 어둠으로만 덧칠되어있어야할 성배의 최심부, 그곳에는 평소와 다르게 백장미들이 희게 만개해있었다. 소녀의 가냘픈 팔안에 안겨있는 꽃다발과 동일한 색채의. 묻어날 듯 끈적끈적한 주위의 어둠과는 전혀 어울리지않는 새하얀 장미, 그리고 그 장미들에 파묻혀있는 희미한 인영. 꽃송이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흡사 잠든 것처럼 단정했다. 항상 입버릇처럼 우아함을 언급하셨던 아버지, 당신은 여전히 우아하시네요. 당신의 딸은 이렇게 되어버렸는데.

 "…아버지."

 품에 안고있던 백장미 다발에서 한 송이를 집어든 소녀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이내 소녀는 생생하리만치 독한 향기를 뿜어내는 백장미의 꽃송이에 느지막히 입술을 겹쳤다. 입맞춤을 그대로 품은 채 백장미는 처연하게 아래로 추락해, 이미 오래 전에 숨이 끊긴 남자의 가슴 위로 떨어져내렸다.

 "…아버지, 저는,"

 처음 아버지가 저를 다른 가문으로 입양보내겠다는 결정을 내리셨을 때 전 울지 않았어요. 아버지의 결정이셨으니까. 그곳에서 벌레들에게 온몸을 유린당하고, 미래를 빼앗기고, 내쉬는 날숨 한 조각에조차 절망이 들어찼어도 저는 아버지를 원망하지않았어요. 제 아버지시니까. 나를, 나를 미워해서 그렇게 내린 결정이 아니시라는 것을 알고있었으니까. 오히려 나를 위해서, 마술사로서 내리신 결정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아버지, 전.. 너무 괴로웠어요. 마토 가에서 제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교육이라는 명목의 학대를 당하면서 아버지를 불러도, 아버지는 구해주러오지 않으셨었죠. 저도 딸이었는데. 가족이었는데. 아버님과 어머님과 언니. 세 분은 토오사카 가에서 화목하게, 그리고 저는 벌레들에게 능욕당하면서. 그래도, 아버지, 저는ㅡ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어느덧 소녀의 품안에 있던 풍성한 꽃다발은 단지 서너 송이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친부에게 전하는 친애의 정이 담긴 꽃이. 입맞춤이 담긴 마지막 백장미를 아버지의 시신 위로 떨어뜨리며 사쿠라는 창백한 아버지의 얼굴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옷깃 아래에서부터 배어나와 흥건히 바닥까지 흘러내려 적신 핏자국만 아니었으면 마치 자는 것처럼 보이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지금이라도 아버지와 이렇게 단둘이 있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여기는 저희 단 둘뿐이니까. 이곳에서 평생 함께해요. 저와 같이.



3.MCU/피터
 "스타크 씨, 있잖아요! 지금 듣고 있는 거에요? 저기요? 스타크 씨!"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회장이자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남자 중 하나이며 가장 핫한 셀럽인 토니 스타크의 평온한 낮잠을 방해할 수 있는 요소는 극히 드물었다. 예를 들어 '토-니-, 또 결제서류가 밀렸잖아요!'하는 페퍼의 하이톤 목소리라던가, '일어나실 시간입니다,sir.' 을 알리는 자비스라던가, 뉴욕 시 전체를 깽판치며 지구 정복의 의지를 표명하는 외계출신 빌런의 존재라던가. 그리고 토니는 그 어떤 경우에도 '응, 다음에 할게… 다음에……' 를 읊조리며 다시 스르륵 오수에 빠질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최근 후원이란 명목으로 뒤를 봐주게 된 귀여운 꼬맹이라면 조금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넓직한 업무용 데스크 위에 두 발을 올려놓고 의자에 편안하게 몸을 기댄 채 잠깐 꾸벅꾸벅 졸고 있었던 토니는 귓가에서 쨍알거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휴대폰 너머로 한마리 새처럼 짹짹대는 꼬맹이의 목소리. 아, 피터 파커. 우리 귀여운 스파이더-키드잖아. 웬일로 먼저 전화를 했대. 아직 어린애를 소년병 징집하듯 먼저 전쟁터로 끌어들인 것에 대한 미안함과 어른으로서의 책임감 반, 스스로 히어로라고 칭하는 소년에 대한 이유모를 친애의 정 반반. 대충 그런 감정으로 연락하고 싶을 때 자유롭게 쓰라고 제 번호만이 들어있는 휴대폰을 자신 명의의 신용카드 한 장과 같이 건네줬던 터였다. 요금 같은 건 다 토니에게로 청구되니 쓰고싶을 때 쓰라고 줬더니 전화도 거의 없는데다- 지나가듯 물어봤더니 자기는 스타크 씨에게 부담을 주고싶지않단다-, 게다가 저번달에 받았던 이 꼬맹이의 카드 결제내역은 환장할 노릇이었다. 맥도날드, 서브웨이, 편의점. 패스트푸드 말고 좀 몸에도 좋고 비싼 거 사먹고 옷도 잘 입고 다니라고 줬더니! 이렇게 피터가 먼저 전화를 한 것도 얼마만인지 몰랐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몇번 목을 가다듬어 잠기운을 털어낸 후 토니는 입을 열었다.

 "어…… 그래, 그래. 스파이더 보이. 듣고 있어. 그런데 왜 이렇게 신난거야?"
 "스파이더 보이라고 부르지마세요! 이래봬도 뉴욕시민들에게 사랑받는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 맨'이라구요!"

 음,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꽤나 하이 텐션인 것이…… 뭐 신나는 일이라도 있었나. 저보다 스무살 가량 어린 소년의 삶에 있어 신나는 일이란 뭐가 있을까. 대충 머릿속으로 생각을 전개했지만 딱히 잡히는 것은 없었다.

 "어, 응, 그래.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 맨 씨. 아빠 낮잠까지 깨우면서 뭐가 그리 신나서 전화를 한 건지 어디한번 들어나볼까?"
 "헉…… 죄송해요. 근데 그게요, 오늘부터 방학했어요!"

 잠깐 헛숨을 들이키는 듯하더니 곧 원래의 텐션을 되찾은 피터가 즐겁게 재잘댔다. 방학했다구요!
 방학. 방학이라. 이미 학생에서 벗어난 지 오래전인 자신에겐 꽤나 낯설게 느껴지는 단어였다. 방학이라, 벌써 그렇게 됐나? 힐끗 달력에 시선을 던졌다. 아…… 벌써 7월이 됐네. 정신없이 살다보니 어느덧 일년의 반절이 지난줄도 몰랐다.
 다시금 소년의 발랄한 목소리가 고막을 경쾌하게 두드렸다.

 "저어, 그래서 가능하다면요, 스타크 씨가 불편하지만 않으시다면……"
 "오케이, 키드. 언제든지 놀러와. 전에도 수트 봐준다고 약속했잖아?" 

'txt' 카테고리의 다른 글

HP/제릴 단문 첫사랑니  (0) 2017.03.07
Kingsman/퍼록시 단문 Lullaby  (0) 2017.02.07
kingsman/퍼록시 baptize  (0) 2017.01.01
fate/언늠 단문  (0) 2016.12.28
fate/흑앵늠 단문  (0) 2016.12.2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