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은 숲이 시작되는 어귀에 자리잡고 있었다. 오래되어 보이는 성당은 그만큼 겉에서부터 고색창연한 인상을 풍겼다. 홀로 높게 솟아있는 뾰족한 첨탑이 유독 고고하고 우아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외벽에 새겨진 양각의 부조가 눈에 들어왔다. 가운데 서 있는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군상 개개인의 표정마저 표현되어있을 정도로 섬세한 부조였다. 아마도 머글들이 숭상하는 경전에 등장하는 장면이겠거니, 막연하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던 도중 성당 입구 옆에 서 있는 흰 성모상에 시선이 멎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성모는 처연한 표정을 띠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이방인을 환영하는 듯 자애로워 보이기도 했다. 겔러트는 다시 몇 발짝 앞으로 내딛었다. 손끝이 금속제 문고리에 닿았다. 관리가 잘 되어 있었는지, 오크 재질의 묵직한 성당문은 귀에 거슬리는 마찰음 없이 매끄럽게 열렸다.
 오후의 성당 내부는 조용하고 한적했다. 평소 사제가 서서 미사를 집전하는 제단도, 신도들이 앉아 있어야 할 회중석도 역시 텅 비어 있었기에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색색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과한 일광이 일렬로 놓여진 목재 의자들에 유유하게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높은 천정을 지탱하는 듯한 수개의 아치형 기둥들, 신도석을 좌우로 양분하며 제단까지 쭉 이어진 중앙 회랑에 길게 깔린 붉은 카페트, 제대 뒤쪽 벽에 매달려 있는 거대한 십자가. 그리고 코끝을 맴도는 오래된 성당 특유의 향취. 그는 결코 머글들을 좋아하지 않는 소년이었으나, 마법 없이 나름대로 일구어낸 머글들의 문화는 항상 그를 감탄케 만들었다. 문학과 건축, 음악과 같은 무수한 예술…… 이런 일개 건축물을 감상하자고 먼 이국까지 온 것은 아니었으나, 잠깐의 여유를 즐기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을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히기까지 그리스도가 겪은 수난을 무려 열네장에 걸쳐서 나눠 그린 듯한 성화를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회중석 가장자리에 앉아있던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당황함도 잠시, 상대의 모습이 겔러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제 나이 또래의 앳된 소년이었다. 그리고 머리를 덮고 어깨까지 흘러내린 반투명한 재질의 검은 미사보. 검은 미사보도 있었던가? 자신을 돌아보는 소년의 상반신 위로 스테인드 글라스 너머에서 쏟아지는 햇빛이 영롱한 색채를 흩뿌렸다. 상대 역시 낯선 불청객의 등장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근거리는 아니었으나, 기이하게도 소년의 모습은 화인을 찍듯 시야에 또렷하게 들어찼다. 마치 성당에 들어서기 전 보았었던 부조처럼. 일자로 곧게 뻗은 아미와 아몬드 모양의 눈매, 살짝 벌어진 입술의 모양새, 그리고 은방울꽃같은 흰 얼굴. 미사보 너머로 설핏 드러난 목줄기의 실루엣이 사슴처럼 가늘고 곧았다. 상대의 눈동자가 자신의 것보다 한 톤 더 옅은 빛깔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몇 초 정도가 지나서였다. 푸르다기보다는 차라리 하늘색에 가까운.
 소녀가 아닌 소년이었고, 머리에 쓰고 있는 것마저 흰색이 아닌 검은색의 미사보였지만 기이하게도 낯선 소년의 모습은 뜬금없는 장면을 연상케했다. 마치─ 식장에 들어서는 새신부가 등 뒤로 길게 드리운 순백의 면사포처럼 보여서. 겔러트는 착시와도 같은 상념을 떨쳐버리기 위해 의식적으로 눈꺼풀을 몇번 깜박였다. 여전히 베일을 쓴 상대는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제 착각은 쉽게 스러지지 않았다. 첫 대면이었다.



* * *
 마법사들은 머글들의 종교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게 종교에서 파생된 예술품들은 언제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무수한 건축물들, 낮게 울려퍼지는 화음이 매력적인 성가와 수많은 예술가들에 의해서 그려진 성화, 나이든 여인들이 소중히 들고 있던 로사리오. 겔러트가 태어나고 자란 중부 유럽에는 머글들이 세운 성당들이 무수히도 많았다. 으레 끄트머리에 십자가가 세워진 높은 탑과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혹은 성모 마리아 상, 열두 사도와 유명한 성인들이 조각된 부조들, 성인의 유해와 같은 성유물, 오색의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되어있는. 신앙심은 전혀 없지만, 겔러트는 성당 특유의 정적인 분위기를 좋아했다. 다소 독특한 취향이라는 생각은 줄곧 해왔지만…… 적어도 나는 미사보를 직접 써 본 적은 없었지.

 "그렇지만 조금 놀랐어. 보통 마법사들은 머글들의 문화에는 관심이 없는 게 보통이니까. 게다가 그 미사보는 또 뭐였어?"

 그 미사보는 어머니가 간직하시던 거야, 알버스가 겸연쩍은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 어머니는 머글 태생이셨으니까, 학교 입학 통지서를 받기 전까지 어쨌든 평범한 머글 가정의 딸이었다고 해. 남들이 믿는 만큼 평균치의 신실한. 우리 세계에 발을 디딘 이후 더이상 신앙생활은 하지 않으셨다고 하지만.

 "그리고 나도 겔러트 너처럼 성당 특유의 분위기는 꽤 좋아해서…… 앉아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거든. 그땐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었던 시기기도 했고."

 너와 만난 이후로는 영 다시 가본 적 없는 것 같네, 말을 덧붙이며 알버스는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특유의 수줍어하는 듯한 온화한 미소였다. 그 위로 첫 조우의 순간, 미사보를 쓰고 자신을 뒤돌아보던 소년의 모습이 찰나 겹쳐졌다. 신부가 드리운 베일을 떠올리게 하던 그 모습.

 "그런데 네가 다시 미사보 쓴 모습 보고싶어."
 "미사보? 그걸 왜?"
 "그냥."

 그때 너무 인상깊었었나봐, 어깨를 으쓱해보이자 알버스가 눈동자를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놔뒀던 지팡이를 가볍게 휘두르자 옆에 놓여있던 탁상 서랍장에서 미사보 주머니가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소년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알버스가 주머니를 열기 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겔러트가 팔을 뻗어 제지했다.

 "아, 그런데 내가 씌워줘봐도 돼?"
 "? 안될 거야 없지만……"

 장미 자수가 입구 주변에 아로새겨져있는 미사보 주머니를 가볍게 열어젖히자 곱게 접혀있는 미사보의 형태가 드러났다. 두 장이었다. 그때 보았었던 검은 미사보와 좀 더 보편적인 흰 미사보. 그는 흰 미사보를 들어올렸다. 끄트머리만 세심한 자수로 마감되어있을 뿐, 전반적으로 비치는 재질인 미사보는 흡사 거미줄로 자아낸 것처럼 얇고 가벼웠다. 겔러트는 미사보를 펼친 후 알버스의 머리 위로 조심스럽게 가져갔다. 씌워주기가 무섭게 하늘하늘한 미사보가 풍성하게 흘러내려 알버스의 머리와 어깨를 가렸다. 반투명한 미사보 아래로 붉은기가 도는 갈색 머리칼이, 반듯한 이마가 고스란히 비쳐보였다. 너울거리는 베일에 감싸인 단정한 얼굴이 흔들림 없이 그를 응시해온다. 본래 여성용이라고는 하지만, 미사보를 쓰고 얌전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년의 모습은 묘한 기분을 자아냈다. 최초에 연상했던 신부의 모습같기도 했고, 그게 아니면──
 다시 벗겨줄게, 서둘러 속삭인 후 그는 다시 미사보에 손을 댔다. 순간 알버스의 머리에서 베일이 느리게 떨어져내렸다. 채도와 명도가 다른 두 쌍의 벽안이 근거리에서 다시 교차했다. 고작 머리와 얼굴을 가리고 있는 반투명한 얇은 천 하나 벗겨주는 것 뿐인데…… 왜? 목이 탔다. 바닥에 미끄러져 떨어진 미사보를 주울 겨를도 없이 겔러트가 상대의 이름을 낮게 속삭였다. 알버스. 돌아오는 대답은 평온했다. 응. 언제나처럼 차분한 톤의 낮은 목소리, 흔들림 없는 눈동자. 타인은 그렇지 않은데 자신 홀로 동요하는 것 같은 기분은 낯설었고, 또 익숙하지 않았다. 겔러트는 베일을 쓰지 않은 소년의 앳된 얼굴에서 제 시선을 억지로 떼어냈다. 누군가를 바라보면서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만 같아서.




*Elisabeth- Der Schleier fällt(The Veil Desc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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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라니. 책에서만 존재하는 그런 감정을 나는 비웃었다. /윤정은, 갑을의 시





 사랑은 그저 덧없는 환상에 불과하다.
 항상 그렇게 생각해왔다. 아주 오래전부터 품었던 생각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열망과 간절함을 읽어낼 때의 기분은 성가셨고, 때로는 귀찮았다. 왜 나를 사랑할까, 나는 널 사랑할 생각 따위 전혀 없는데. 그가 보기에 사랑은 사람을 무모하고 어리석게 하는 요소일 뿐이었다. 사랑에 빠져서 멍청해질 뿐이라면, 사랑은 차라리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질병에 가깝지 않은가. 그것도 인류 대다수를 전염시킬만큼 전염성이 매우 강한 병증. 오래전 유년기에 읽었던 한 동화*를 기억한다. 그 동화의 주인공은 사랑에 빠지는 것을 염려한 나머지 어둠의 마법을 통해 자신의 심장을 적출하고, 따로 상자에 가둬서 보관한다. 결코 사랑이라는 감정에 빠지지 않도록. 애초에 동화니까 나올만한 이야기이고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기도 했다만, 그는 그 동화의 주인공 역시 어리석다고 판단했다. 자신을 얼마나 신뢰하지 못했기에 스스로의 심장을 꺼내어 봉인까지 한단 말인가? 굳이 심장을 밖으로 적출하지 않는다해도 그는 살면서 사랑에 빠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 책 속에서나 존재할 하잘 것 없는 감정 따위.
 자신은 절대 사랑에 빠질 생각이 없었지만 학창시절 내내 동경과 연정이 섞인 시선은 항상 따라다녔고, 상대의 눈빛에서 자신을 향한 특유의 감정을 읽어내는 것은 익숙했다. 그렇기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의 눈에서 그러한 흔적을 읽는 것은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알버스. 퇴학 직후 성물의 흔적을 추적하기 위해 들렀던 이국에서 만난 의외의 소울메이트. 아마 영혼에도 특유의 빛깔과 모양새가 있다면 알버스의 영혼은 자신과 쌍둥이처럼 닮아있으리라 그는 확신했다. 자신만큼이나 똑똑하고 뛰어난 어린 천재. 이제까지 자신과 대화가 통하는 또래는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알버스와의 만남은 더욱 특별했다. 성물의 행방을 좇겠다던 본래의 목적은 온데간데 없이 하루종일, 혹은 밤을 새워서까지 수십여 가지 주제들에 대해 토론하고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좋을 만큼. 우리가 함께한다면 아무것도 우릴 막을 수 없을 거야, 우리는 이 사회를 개혁할 수 있어. 매번 확신에 차서 속삭일 때마다 때이른 승리감과 고양감이 척수를 짜릿하게 관통했다. 나의 유일무이한 벗이고 친우이며 이 세상에 하나뿐일 동등한 존재. 언젠가 우리 이름이 역사책에 실리겠지, 모두가 우릴 존경하고 경애할 거야. 위대한 젊은 혁명가들이라고 우러러보면서. 그래야 할 터였다. 가장 자신을 사랑해서는 안될 인물이 있다면 그건 알버스였다. 우리는 서로의 천재성을 공유하는 하나뿐인 동류니까. 너만큼은 나를 사랑해서는 안 됐는데.
 처음에는 착각이겠거니 치부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부정하기 힘들 만큼 상대의 연심은 또렷하게 엿보였다. 익숙한 눈이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 특유의 달뜬 눈빛, 눈매, 눈동자. 갈망과 갈구, 열기가 어지러이 뒤섞여 있는……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구나, 대체 왜? 몇번이고 자문했으나 알 수 없었다. 왜 나를 사랑하지? 어째서 나를 사랑해? 네가 날 사랑하지만 않았어도 우린 계속 친구로서, 파트너로서 유대를 유지할 수 있었을텐데. 겔러트 본인과 유일하게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상대가 자신을 사랑한다니. 정말이지 당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의문하고 동정하면서도 연민했다. 대체 왜 나를 사랑하게 된 것인지에 대한 의문과 나를 사랑해버린 너에 대한 연민,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또? 하는 안타까움. 너는 나만큼이나 똑똑하잖아, 알버스. 그렇다면 너 역시 사랑이 얼마나 헛되고 의미없는 환영인지 잘 알고 있을 터인데…… 그런데 왜? 사랑은 그저 착각이고, 일개 망상이며 인간을 약하게 하는 전염성 강한 병증에 가까울 뿐인 감정이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여름의 끝무렵이 되어 일어난 모종의 사건 탓에 영국을 떠나게 되고나서도 그의 믿음은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아마 평생동안 그랬을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누멘가드의 가장 높은 탑, 그는 느리게 눈을 떴다. 반백년 가까이 아무도 방문하지 않았던 곳에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래, 네가 왔구나. 올 줄 알고 있었지…… 언젠가는 말이야. 하지만 헛걸음했구먼. 난 결코 그걸 가진 적이 없었다."

 불을 보듯 뻔한 거짓말이었다. 그는 눈앞의 상대가 활동하기 이전, 가장 위험한 어둠의 마법사라 불렸던 인물이었으며 1945년 결투에서 패배하여 이 누멘가드에 유폐되었다. 그리고 그때 그를 패배시켰던 인물의 이름은 마법세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소유자의 패배를 통해서 소유권이 옮겨가는 지팡이의 행방은 분명해진다. 자신이 딱총나무 지팡이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이미 알고 방문한 상대였다. 역시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을 터. 거짓을 말해보았자 통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어쨌든 그의 입을 통해서 바라던 것을 얻어갈 수는 없을 테니까.

 "어서 나를 죽여, 볼드모트. 난 기꺼이 죽음을 맞이할 테니! 하지만 내가 죽는다고 해서 네가 찾는 것을 얻지는 못할걸……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너무 많아……"

 친히 이 누멘가드에 발을 들인 불청객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다고 해서 얌전히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원하는 답을 들었다고 해도 그대로 순순하게 퇴장하지는 않겠지. 한때 '죽음의 지배자'라는 칭호를 꿈꾼 적 있었으나 죽음은 더이상 두렵지 않다. 어차피 생에 미련은 없었다. 그저 생존이라는 단편적인 가치에만 얽매여 있을 너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겠지, 한때 젊은 시절의 자신이 그러하였듯.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아직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한 절대 승리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랬었듯이.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때 저를 향해 사랑에 빠진 시선을 보내던 십대 소년 역시 자신처럼 나이를 먹었고, 심지어 이 세상 사람조차 아니게 되었지만- 그래도 최소한 그 무덤이 훼손되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한때 벗으로서의 마지막 신의라고 해도 좋았고, 말년의 얄량한 회개라고 해도 좋았으며 그 감정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는 진심을 담아 상대를 비웃었다. 우습고도 안타까웠다. 비록 먼 길을 돌아오기는 했으나 그가 뒤늦게 깨달은 것을 상대는 아직까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게 뻔하게 보여서.

 "나를 죽여, 어서! 넌 이기지 못할거야. 넌 이길 수 없어! 그 지팡이는 결코, 네 것이 될……"

 녹색 불빛이 좁은 감방 안을 비추는 낙뢰처럼 번쩍였다.
 한때 사랑이란 감정 자체를 부정하고 비웃었던 소년이 그것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최후를 맞이하기까지, 꽤나 긴 세월이 흘렀다. 1899년의 여름, 그 후 99년이 지나서의 일이었다.



*음유시인 비들이야기 - 마술사의 털난 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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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

1883

1899

1926

1945

1997

1998





+)
1899-1998 99년에 걸쳐 완성되는 서사
한때 곁에 두기 위해 모든걸 take했다던 user였던 소년이 상대에 의해 갇혀 반백년을 보내고 끝내 그 무덤을 지키기위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어긋나버리는 바람에 채 100을 채우지 못하고 완전하지 못한 99에서 끝난 게 더 완벽하고 앵슷한 거 같기도 하다
99는 9가 두개라 완전이란 뜻으로도 쓰이고 아멘이란 뜻으로도 쓰인다니깐
어쨌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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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때로 자신의 영혼이 여전히 1899년의 여름에 붙들려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정확히는 1899년의 여름, 영국 고드릭 골짜기에. 그곳에 머물렀던 기간은 겨우 두어달 남짓이었고, 도망자처럼 급박하게 떠났던 이후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근처를 스쳐지나간 적조차 없었다. 이미 몇십년도 더 지나버린 오래된 이야기였다. 그러나 지층처럼 켜켜히 묻어두었다고 생각했던 기억은 뜬금없는 순간 부유하는 유령처럼 되살아나 그의 뇌리를 정처없이 방황하고는 했다. 1899년의 그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고, 학교에서 퇴학처분을 받은 후 이제껏 한번도 밟아본 적 없던 이국의 땅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났던 인물은 그의 인생에서 조우한 최초의 변수였다.
 그는 타고난 천재였고, 따라서 주위 상황과 인물들, 때로 자기자신마저도 거대한 체스판 위에 올려놓은 채 이용하고 조종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의 인생은 항상 철저히 통제된 상수로 점철되어 있었다. 미처 예기치 못한 요인에 의해 벌어지는 돌발상황 정도야 가볍게 해결할 자신도, 능력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삶은 언제나 씨실과 날실처럼 조밀하고 촘촘하게 짜여진 설계도 내지 청사진 아래 펼쳐져 진행되었다. 1899년까지만 해도, 그의 지난 16년은 항상 그러했다. 자신이 미리 예상한 방향에서 결코 일탈하지 않는 삶. 지루하다고 평할 수도 있겠으나 그는 자신의 방식에 만족했다. 심지어 졸업장도 받지 못하고 중간에 덤스트랭에서 쫓겨났을 때조차 그러했다. 퇴학 역시 그의 변수가 되지 못했다. 어차피 학교에서 더이상 배울 것은 없었다. 그것이 학문이 되었든, 인간을 다루는 기술이 되었든. 차라리 아무데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의 몸이 되어 제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 낫다. 그 즈음의 그에게는 이미 새로운 목표가 존재했다. 피브렐 가문의 일원들이 소유했었다던 세가지 죽음의 성물. 마법사들이 오히려 머글들을 피해서 숨어야하는 모순덩어리 현 사회를 개혁하고, 나아가 죽음의 지배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마침 이그노투스 피브렐이 살았다던 지역에 저명한 학자인 대고모가 살고 있었기에 찾아가는 것 역시 용이했다. 방학을 맞아 시간을 내어 먼 친척을 방문한 사랑스러운 소년, 그것이 그가 고드릭 골짜기에서 택한 대외적인 가면이었다. 목표는 오직 세 가지 성물의 행방을 추적하는 것─ 그리고 낯선 땅에서 그는 마침내 만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의 생에 있어 처음으로 등장한 변수, 차마 예측하지 못했던 분계점이자 최초의 이변이 될 또래 소년을.

 "안녕. 네 이름이…… 오, 알버스?"

 기억하고 있다. 때는 7월 초순이었으며 우거진 녹음은 청량했고, 하얗게 작열하는 일광은 따가울 정도로 내리쬐었다. 영국의 여름은 그의 고향이나 그가 다닌 학교에서 겪은 것과는 사뭇 다른 계절이었다. 그러한 계절에 두 소년은 마주했다. 상대의 이름을 소리내어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서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생전 처음 느끼는 감각이 척추를 타고 가파르게 흘렀다. 낯선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너는, 나와 '동류'구나. 너도 나와 같다고. 자신만큼이나 똑똑하고 총명하며 천재적이고 뛰어난 존재. 알버스. 그는 다시한번 입속으로 상대의 이름을 굴렸다. 그것은 이름 주인의 외모만큼이나 부드러운 어감이었다. 알버스와의 조우는 그의 삶에 있어 첫번째 특이점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만나버린 쌍둥이별자리의 나머지 반쪽. 찰나 제가 왜 이곳에 왔는지 망각하고 온전히 상대에게 빠져들 정도로, 자신과 동등한 존재와의 대화는 즐거운 일이었다. 기존에 맺어왔던 인간관계들과 다르게 통제도, 조종도 없이 그저 호감과 친근감으로 지속되는 관계. 어떻게 보면 생애 처음으로 사귄 진정한 의미의 '친구' 아닌가. 원래 성물의 행방을 파악할 때까지 잠깐 몇주정도만 머무를 생각이던 원래의 계획은 어느덧 뒤로 밀려나 있었다. 매일같이 마주하는 상대의 눈빛에 어느덧 갈구하는 듯한 열기가 깃들어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 그때서야 그는 자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두번째 변수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애초에 제어할 생각조차 없었던 첫번째 변수가 연이어 변이를 일으켰다.
 왜 그런 사랑에 빠진 눈으로 날 바라보는 거지, 네가 나를 사랑하면 안 될텐데. 차라리 티가 덜 났다면 무시라도 할 수 있었을테지만 알버스의 속내는 너무나도 선연하게 엿보였다. 흡사 손에 잡히기라도 할 것처럼. 왜 너는 나를 사랑할까. 제게 품은 연심을 채 숨기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질질 흘리는 앳된 얼굴을 무심하게 응시하며 그는 생각했다. 익숙한 눈빛이고 표정이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 특유의 갈망하는 듯한 눈매. 이미 그러한 시선은 그동안 지겹도록 겪어왔다. 하지만 처음으로 사귀다시피한 친구가, 또래 여자애들이 보내오던 바로 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꽤나 낯선 감각이었다. 이제까지 항상 자신이 짜온 판 내에서 이루어졌던 삶이 어느순간부터 걷잡을 수 없이 낯선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제게 연정을 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제와서 매몰차게 거절하기엔 이미 늦었다. 앞으로의 그의 계획, 이 사회를 개혁하고 죽음의 지배자가 되기 위한 청사진에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버렸기에. 꼭 거절할 필요가 있나? 그는 자문했다. 상대가 자신을 좋아한다면 오히려 잘 된 터였다. 그는 통제하고 조종하며 이용하는 데 익숙한 종류의 인간이었으며,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기라도 한다면 더 간단했다. 이제까지는 그저 친구로서 허물없이 대했다해도, 널 유용하게 써먹어줄게. 넌 날 사랑하니까.
 비록 예상치 못했던 예외로 점철된 여름이었으나 이제는 제 궤도를 찾게 될 것이다. 그는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 자신을 사랑하는 소년이 필요했고, 상대 역시 자신을 열망했으므로. 어쩌다 손끝이라도 스치게 되면 흠칫 굳어버리거나 파르르 어깨를 떠는 모습을 모른 척 하면서, 그는 처음 만났던 순간처럼 상냥한 태도를 견지했다. 이미 애정의 권력관계가 끼어든 이상 두 소년의 관계는 더이상 초반처럼 동등하지는 않았으나, 겉으로나마 아슬아슬하게나마 유지되고 있었기에.
 아마 이번에는 그의 계획이 엇나가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다른 돌발상황이 벌어지지만 않았다면. 아픈 여동생마저 함께 데리고 여정을 떠나겠다는 말에 알버스의 남동생이 강하게 반발하고, 고성이 몇번 오간 이후 언쟁이 지팡이가 동반되는 싸움으로 번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어디까지나 사고였다. 누군가의 지팡이에서 발사되었는지 모를 주문을 맞고 끈 떨어진 마리오네트처럼 느리게 지면으로 무너져내리는 어린 소녀의 모습을 보며 퍼뜩 정신이 들었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분명 계획에 없었던 일이었다. 삼자간의 싸움으로 커진 것 자체도, 알버스의 여동생이 죽은 것도, 전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무릎을 꺾은 채 주저앉은 소년의 눈동자에 더이상의 열기는 엿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거의 동물적인 감각에 가까운 예지였다. 자신의 계획은 이미 글렀다는 것을. 알버스는 그와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낙심한 채 떨면서 영국을 떠났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처참했던 실패였다. 길고도 짧았던 여름의 막바지에 벌어졌던 일이었다.
 그가 살면서 마주했던 변수와 이변, 실패의 기억들은 대부분 1899년 여름 한 철에 집중적으로 포진되어 있었다. 유일하게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었던 태풍의 눈 중심에 있었던 한 소년. 이상하게 너와 있을 때만은 내 뜻대로 잘 되지 않았지. 그는 나지막히 서류 중간즈음에 적혀있는 이름을 읊조렸다. 알버스, 덤블도어. 잊지 못했다. 잊을 수도 없었다. 타고난 통제광이었던 그에게 예외만을 안겨주었던 상대. 애초에 나도 그쪽도 신문 1면에 나란히 이름이 같이 실리는 유명인사니, 억지로 잊을래야 잊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군. 그는 쓴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3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갑작스럽게 나타나 내가 짜놓은 체스판을 무너뜨리는데는 여전히 최고구나. 유일한 나의 변수. 알버스. 여기서까지 네 이름을 마주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취조실의 조명이 유난히 서늘했다. 눈앞의 젊은이는 긴장한 듯 딱딱하게 굳은 채 시선을 옆으로 떨구고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손끝을 서로 모은 채 입을 뗐다. 언젠가 알고지냈던 소년의 버릇처럼.

 "오직 한 교수만이 네 퇴학에 반대했더군. 그래서…… 알버스 덤블도어가 왜 널 아꼈지?"

 알버스, 그 이름을 발음하는 순간 환시처럼 오래된 풍경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을 간절히 바라보던 사랑에 빠진 눈, 저를 향해 해사하게 웃어보이던 수국꽃다발같은 흰 얼굴. 자신이 나이를 먹었듯 상대 역시 나이를 먹고 중년에 접어들었을텐데도, 그가 떠올리는 인물은 언제나 열일곱 소년의 용모를 하고 있었다. 벌써 고드릭 골짜기를 떠난지도 몇십년이 흘렀으나 자신을 사랑했던 소년의 얼굴만은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몸은 오래전 그곳을 떠나왔어도 제 영혼의 중심은 여전히 그해 여름에 매여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제 상념을 씹어삼키며 겔러트 그린델왈드는 청년의 대답을 기다렸다.
*

 해리는 아무 데나 책을 펼쳤다. 책 한 면에 걸쳐 실려있는 십대 소년 두 명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을 찍을 당시 바람이라도 불었었는지 소년들의 머리칼이 산들산들 흩날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울창한 녹음을 배경으로 서로 약간 거리를 둔 채 떨어져서 서 있었다. 이 소년이, 정말로 십대 시절의 덤블도어일까? 해리는 찰나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빛바랜 사진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열여섯 살, 아니면 열다섯 살? 사진 속의 얼굴은 앳되다 못해 어렸다. 소년이라는 단어 자체를 인간의 형상으로 체화시킨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인상. 그의 기억 속 온화한 노인이 한때 이토록 청초한 분위기의 소년이었으리라고, 두 사람을 연결시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붉은빛이 감도는 갈색 머리칼과 단정한 이목구비, 상냥해보이는 눈매와 수줍은 듯 입가에 희미하게 걸려있는 옅은 미소. 그리고 소년이 걸치고 있는 것은 베스트와 흰 셔츠였다. 열린 셔츠 깃 사이로 사슴처럼 가느다란 목줄기가 길게 뻗어있었다. 사진 속의 십대 덤블도어 -로 추정되는 소년- 는 제 두 손을 앞에 겹쳐서 얌전히 모아쥔 채 해리를 유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약간 미쳤지만 위대한 마법사였던 은발 현자에게도 한때 소년 시절이 있었다니, 역시 멍청한 헤르미온느나 온순한 폭탄꼬리 스크루트처럼 어색하고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그 과거의 파편이 지금 해리의 눈 앞에 떡하니 존재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해사하고 예쁘장한 십대 소년의 모습으로.
 한편 어린 덤블도어 곁에 서 있는 금발의 소년은 덤블도어와 다르게 제법 성숙한 청년 티를 풍겼다. 그는 덤블도어보다 몇 뼘 정도 더 늘씬하게 키가 컸다. 소년의 곱슬거리는 머리칼은 색이 바랜 사진 속에서도 선연하게 반짝이는 금빛이었다. 약하게나마 미소를 머금고 있는 덤블도어에 비해 그는 무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문 입매와 사람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은 그의 잘생긴 얼굴을 더 오만하고 냉랭하게 보이게 했다. 목까지 꽉꽉 채워입은 검은 상의와 제복 내지 군복을 연상시키는 모양새의 군청색 겉옷, 뒷짐을 지고 있는 자세 역시 고압적인 분위기에 한몫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 속 소년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여신이 사랑했다던 오래된 신화 속의 미소년처럼. 십대 시절 덤블도어에게 이렇게 잘생긴 친구가 있었단 말인가? 해리가 알고 있는 덤블도어의 가까운 지인이라고는 도지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 도지가 젊어서 이런 출중한 외모였으리라고는…… 막 사진 밑에 붙어있는 설명을 확인할 틈도 없이, 사무실 문이 왈칵 열렸다.


*

 이제 해리는 등잔을 높이 든, 땅딸막한 그레고로비치의 뒤를 따라서 어두운 복도를 서둘러 걸어가고 있었다. 그레고로비치는 복도 끝에 있는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대패질한 부스러기와 흔들리는 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황금이 보였다. 그리고 창턱에는 금발 젊은이 하나가 거대한 새처럼 도사리고 앉아있었다. 그의 손에는 가느다란 지팡이가 들려있었다. 힐끗 열린 문 쪽을 돌아본 잘생긴 청년은 곧 고개를 돌려 비 내리는 창밖으로 거침없이 뛰어내렸다. 그의 화려한 금발과 긴 코트자락이 바람결에 나부꼈다.


*

 해리가 마지막으로 양초를 발견한 곳은, 수많은 사진들이 세워져있는 앞부분이 둥근 서랍장 위였다. 불꽃이 살아나 춤을 추자, 반사된 빛이 먼지 낀 유리와 은 액자 사이로 일렁였다. 그는 사진들이 아주 살짝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바틸다가 불을 지피기 위해 주섬주섬 장작을 주워모으는 동안, 그는 "테르지오"하고 속삭였다. 그러자 사진들을 뒤덮고 있던 먼지가 싹 사라졌다. 해리는 즉시 가장 커다랗고 장식이 화려한 액자들에 끼워져있던 예닐곱 장의 사진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과연 바틸다나 혹은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없앴을까 의아해하고 있을 때, 뒤쪽에 있는 사진 하나가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해리는 재빨리 그것믈 잡아챘다.
 그레고로비치의 창턱 위에 도사리고 있던 바로 그 젊은이, 금발의 잘생긴 도둑이 은 액자 안에서 해리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해리는 저도 모르게 불씨를 들고 있었던 손을 액자 가까이에 가져다 댔다. 불씨의 움직임에 따라 사진 속 인물의 고개가 미미하게 옆으로 움직였다. 귀족적이면서도 묘하게 수성(獸性)을 숨기고 있는 듯한 용모였다. 조각같은 이목구비에 음영이 짙게 드리워진 탓에 청년은 몹시 강렬한 인상을 풍겼다. 해리는 이 젊은이를 전에 어디서 보았는지 퍼뜩 생각났다. <알버스 덤블도어의 삶과 거짓말>에서 이 젊은이는 십대 소년이었던 덤블도어의 곁에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그렇다면 사라진 사진들이 모두 어디에 있는지 이제 명확해졌다. 바로 리타의 책에 실린 것이다.


*

 해리는 사진을 찾기 위해 책장을 휙휙 넘겼다. 거의 단박에 그가 찾고 있던 그 사진이 딱 눈에 들어왔다. 다시 봐도 놀라울만큼 청순한 외모의 어린 덤블도어와 그의 잘생긴 친구가 마치 오늘 처음 만난 사이처럼 미묘한 거리를 두고 서 있는 사진이었다. 해리는 재빨리 사진 밑에 실린 설명을 보았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의 알버스 덤블도어
 그의 친구인 겔러트 그린델왈드와 함께


*

 해리는 나이든 교장 선생님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다른 의자에 앉았다. 덤블도어의 긴 은색 머리카락과 턱수염, 반달 모양의 안경알 너머 꿰뚫어보는 듯한 하늘빛 두 눈과 휘어진 코, 모든 것이 그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심지어 그의 양손 모두 다친 데 하나 없이 깨끗했다. 하지만……

 "그런데 교수님, 어려서 제 생각보다 훨씬 예쁘셨더라고요."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아차 싶었으나 정작 덤블도어 본인은 별로 기분이 상하지는 않은 눈치였다. 익숙한 노인의 얼굴이 다정한 웃음을 머금은 채 해리를 돌아보았다. 이제껏 몇년간 봐왔던 그 얼굴 뒤로 언뜻 그 사진 속 소년의 청신한 이목구비가 스쳐지나가는 것 같아, 해리는 잠깐 눈을 깜박였다.

 "네가 그랬다면 정말 그랬겠구나, 해리."
 "어…… 죄송해요, 교수님. 그렇지만 정말 너무 의외여서……"
 "너무 오래전이어서 예전의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잊고 있었는데."

 덤블도어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기억을 되새기는 듯 먼 곳을 바라보는 눈매를 바라보며 해리는 불현듯 깨달았다. 그 사진 속에서 소년 시절의 덤블도어가 정면을 향해 보내고 있던 눈길, 그것은 다름아닌 사랑에 빠진 듯한 눈이었다. 그리고 그 연정이 향했을 대상은 아마……
 "겔러트, 이거."
 "이게 뭐야?"
 "부활절 계란. 안 받을거야?"

 작은 바구니에 소담스럽게 담겨있는 알록달록한 계란들을 응시하며 겔러트는 새삼 날짜를 되새겼다. 아, 그러고보니 오늘이 부활절이었던가. 전혀 신경쓰지 않고 지내다보니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부활절, 그리고 부활절 계란. 알버스의 손끝에 달랑달랑 들려있는 바구니를 받아들며 그는 내용물을 빤히 바라보았다. 보라색, 옅은 녹색, 분홍색, 푸른색 등 화려한 빛깔의 계란들을 보고있자니 새삼 오늘이 부활절이라는 기분이 났다. 꼼꼼하게 칠해진 밑색이나 고운 문양들이 꽤나 섬세하고 예뻤다. 본인이 직접 꾸민걸까? 아마 그렇겠지? 바로 지금까지 완전히 잊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절 계란들을 보고있자니 완연하게 실감이 들기 시작한다. 손톱으로 계란의 표면을 리드미컬하게 톡톡 두드려 본 후 겔러트는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고마워, 그런데 난 깜박하고 따로 준비 못 했는데 어떡하지."
 "괜찮아. 나도 잊고있다가 어제 저녁에 생각난 거라서."
 "그래도. 그냥 넘어가려니까 좀 미안하잖아. 알버스 네가 다 일일이 꾸민 거 같은데."
 "내가 하고싶어서 한 거니까,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돼."

 타고난 천재로서 어려서부터 칭찬과 찬사엔 익숙한 삶을 살아왔을 애치고는 유독 자신의 말에 한결같이 민망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색한 듯, 수줍은 듯 웃고있는 앳된 얼굴을 보고있자니 갑자기 뜬금없는 생각이 치고 올라왔다. 전부터 얘를 볼 때마다 들었던 상념이기는 했는데.

 "그럼 오늘은 네가 내 부활절 토끼야?"
 "……? 난 사람인데?"

 갑작스러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모양새나 눈꺼풀을 깜박거리는 모습이 정말로 토끼처럼 보이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풋 새어나왔다. 다소 짓궃은 취미일지도 모르지만, 항상 단정하고 평온한 흰 얼굴에 당황이나 놀람 등의 감정이 깃드는 것을 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상대가 겔러트 자신만큼이나 천재적이고 강한 마법사라는 건 알지만 어째 이미지는 토끼나 사슴같은 초식동물 류에 가까운 느낌이란 말이지. 게다가 오늘은 부활절이고, 무려 부활절 계란까지 가져다줬으니까 그야말로 부활절 토끼가 따로 없었다. 그것도 오직 나만의 부활절 토끼겠네.

 "아니, 그러니까 알버스 네가 나한테 계란 줬잖아."
 "응……"
 "그리고 원래 부활절 토끼는 부활절에 착한 아이들의 집에 방문해서 계란을 나눠준다고 하니까─ 아니다, 알버스 넌 이럴 때가 제일 귀여워. 이해 못 했어도 괜찮으니까 그냥 내 토끼하자."
 "…어, 네 토끼?"
 "착하지. 이리 와, 토끼야."

 깨지기라도 할까 달걀이 담긴 바구니를 조심스레 고쳐쥔 채 다른 팔로 허리를 감고 끌어당겼다. 영문을 모르는 표정을 한 채로 딸려와 순순히 안긴 알버스가 눈동자를 굴리며 저와 시선을 맞춰왔다. 아직도 왜 뜬금없이 자길 토끼라고 부르는지 이해를 못 한 얼굴인데. 어려운 논문이나 난해한 서적들은 술술 읽어내리고 외부 대회에서 매번 상장을 싹쓸이해 온 괴물인 주제에, 이런 단순한 농담들에는 삐걱삐걱 어색하게 반응하는 게 정말이지…… 아, 진짜 귀엽네. 얘 정말 뭘 먹고 이렇게까지 귀엽지. 이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씹어먹고 싶을만큼 사랑스러웠다. 한 손에 든 계란 바구니만 아니었으면 두 팔로 끌어안았을텐데. 소소한 아쉬움을 뒤로 하며 그는 생긋 미소지어 보였다.

 "Happy Easter."

 품 안에는 내 귀여운 부활절 토끼도 얌전히 안겨있고, 부활절 토끼에게서 받은 부활절 계란도 있고. 그야말로 더할나위없이 완벽한 부활절이었다. 내년 부활절에는 진짜로 토끼 귀라도 한쌍 달아줄까나. 알버스가 레질리먼시로 꿰뚫어보았다면 아마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생각을 하면서 겔러트는 자신의 부활절을 만족스럽게 만끽했다.



* * *
 "알버스, 넌 어려서 그런 것들 믿었어? 이빨 요정이라던가 산타클로스, 부활절 토끼 같은 존재들 말이야."
 "아니. 부모님이 다음 크리스마스 선물은 뭘로 할까 밤중에 나누시는 이야기를 너무 어린 나이에 들어버리는 바람에. 여동생에게 그 얘기를 해주지 말았어야했는데, 산타클로스가 없다니까 바로 울어버려서 달래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나."
 "그래? 난 믿은 적 있었는데."
 "겔러트 네가? 정말? 꽤 의외인걸."
 "사실을 고백하자면, 지금까지도 믿어. 적어도 부활절 토끼의 존재만큼은."
 "……?"
 "지금 바로 내 앞에 있잖아. 알버스,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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