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ilight 카이우스xHP 알버스 필모크오. 글제목은 영 생각나는 게 없어서 임시가제.. 나중에 바꿀 듯ㅠㅠ

틔타에서 @fygrindelxdore님과 풀었던 썰 기반으로 합니다. 현대배경AU, 카이우스 본처와 겔러트 없음 주의.

기타 뱀프 관련 오리지널 설정O.

한 편당 대략 12000-15000자 정도 분량 잡을 예정인데 얼마나 편수가 늘어질지는 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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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SN HF루트 대사인용o
*if.




 -알라스테어, 만약 내가 나쁜 사람이 되면 용서하지 않을 건가요?
 -그럴리도 없겠지만 록산느 네가 나쁜 짓을 하게 된다면 화낼 거란다. 분명히 다른 사람들보다 더 몇배로 더 화내겠지. 넌 좋은 아이니까.
 -다행이다. 알라스테어한테 혼나는 거라면 괜찮아요.

 언젠가의 기억을 되새겼다. 분명 그런 대화를 했었던 것만 같았다. 내가 나쁜 사람이 되면, 나쁜 짓을 하면 혼내준다고 했었죠? 하지만 나는 지금의 내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경쾌하게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에 늘어붙은 불순물과 핏자국이 구두 밑창에 찌걱찌걱 달라붙는다. 좁은 고문실 내부의 공기는 혼탁했다. 절망, 고통, 그리고 피를 비롯해서 인간의 신체가 쥐어짜낼 수 있는 모든 체액들이 반복해서 남겼던 흔적은 몇번 청소한다고 해서 쉬이 지워지지는 않으니까. 방 가운데 놓인 의자에 팔이 뒤로 꺾인 채 묶여있던 남자는 여전히 고개를 떨군 채였다. 아까 나가기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꽤나 값나가보이는, 그러나 지금은 피먼지로 얼룩지고 구겨진 수트가 현대판 기사의 갑옷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수트를 비롯하여 그가 몸에 지니고있었던 안경, 구두, 우산, 반지 등등의 소지품들 역시 보이는 그대로의 물건이 아니라는 것 역시. 어떻게 모르겠어요, 알라스테어? 나 역시 기사의 이름을 받았었던 몸인걸. 나는 랜슬롯, 그리고 당신은 퍼시벌.

 "알라스테어. 나 다시 왔어요."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그 발치에 무릎을 꿇은 록시가 속삭였다. 눈 떠봐요. 대답 대신 한쪽 알이 부서져버린 안경이 남자의 콧대 위로 삐딱하게 흘러내렸다. 내가 알고있는 당신은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항상 단정하고 깔끔한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헝클어진 머리에 망가진 안경을 쓰고 핏자국도 제대로 지우지 못한 모습이라니. 사랑하는 사람의 낯선 모습에 새삼 가슴이 뛰었다. 당장이라도 감겨있는 눈꺼풀에 입맞추고 싶었지만 록시는 치밀어오르는 충동을 꾹 참았다. 나의 신사님. 나의 기사.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이 나네요. 엄청 어릴 때였죠. 그땐 당신이 내게 자장가를 불러줬었는데."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괜찮아요, 이제까지 당신도 나를 기다려줬으니까 나도 당신을 몇분 더 기다리는 것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어렸을 때부터 당신을 좋아했다. 항상 각잡힌 수트와 안경 너머의 진중한 눈동자, 브로그 없는 옥스포드. 당신이 바라보는 것과 같은 것을 보고 싶었고, 당신의 옆에 동등하게 서고 싶었다. 처음 당신이 날 후보생으로 추천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나마 처음으로 인정받은 거 같아서. 언제나 알라스테어는 저 멀리에 있고 나는 그 뒤를 간신히 쫓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팔을 뻗어 퍼시벌의 뺨에 손을 댔다. 피부에 와닿는 감촉은 싸늘했다. 언제까지 일어나지 않는걸까, 당신은. 마치 가시나무숲에 갇혀서 잠에 빠진 왕녀의 침상 앞에 선 용사가 된 기분이었다. 키스하면 눈을 떠줄까? 이제 오직 나만을 바라봐줄 수 있나요?

 "더 일찍 알았어야 했어요. 당신의 동료가 된다고해서, 당신을 내 곁에 잡아둘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오래된 전설 속 기사들의 이름을 코드네임으로 지닌 요원들은 혼자, 혹은 2인1조로 위험한 임무에 파견되었으며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은 극히 드물었다. 심지어 누가 사망해도 그 추모주를 마시기 위해 화상으로 모이는 판이었으니. 기껏 당신과 함께 있기 위해서 이 자리까지 왔는데. 만약 당신을 잃기라도 한다면. 퍼시벌은 우수한 기사였지만 가장 최고의 요원이라던 구 갤러해드- 현 아서 역시 모종의 사건에 휘말려 죽을 뻔 하지 않았던가? 몇번의 소소한 사고를 거치면서 불안과 애욕은 점점 증폭되었고, 총명했던 뇌를 빠르게 잠식해갔다. 고결한 기사의 이름을 지닌 채, 제가 수호해야할 가치관과 반대되는 무리와 손을 잡기까지 했으나 후회하지 않았다. 내겐 알라스테어만 있으면 되니까. 애초에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그 모든 과정을 통과했던 게 아니었어, 다름아닌 당신을 위해서였지. 당신이 영원히 나를 용서하지 않게 된다고 해도 당신을 잃어버리는 것보다는 낫다. 화를 내도, 혼낸다고 해도 괜찮아요. 이번만큼은 그냥 나쁜 아이로 남을래요. 그동안 당신의 착한 소녀였으니까 한번 정도는 용서해 줄 거죠?
 일어나지 않는 자신의 기사가 눈을 뜨기를 기다리며 록시는 나지막히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Rock-a-bye baby, On the tree top, When the wind blows, The cradle will r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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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버스가 가족에 의해서 발목이 잡히는 것은 아주 잦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우연히 지나가던 숲속에 거대한 성이 있었고, 마침 그와 가족들은 여행중 길을 잃었기에 지치고 추위에 떠는 상태였으며, 마침 성안에 들어섰을 때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는 우연의 일치들에 대해서는 불평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차려져 있던 호화로운 음식들을 먹고 마시며 벽난로 앞에서 몸을 녹이던 때까지는 괜찮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애초에 그렇게 관리가 잘 되어있는 성이 주인 없는 빈 성이라는 착각은 하지 말았어야만 했는데…… 원래 사람이 여유가 없어지면 주위를 돌아볼 수 없게 되는 법이다. 나라도 들어가지 말자고 말렸어야 했나. 이제와서는 아무 소용 없는 이야기였지만. 알버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성의 성주가 길잃은 여행자를 박대하는 고약한 성미일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인간일거라고는 생각했었지.

 "무슨 생각을 하지?"
 "네 생각."
 "널 여기 내버려두고 떠나버린 네 가족들을 원망해?"
 "아니, 원망하지 않아."

 가족 때문에 주저앉는 건 익숙했고, 역시 이런 고성에 인외의 형상을 한 집주인과 단둘이 남겨진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는 가족을 사랑했으니까. 가족을 위해서. 가족. 가족이란 대체 무엇일까? 가족 때문에 발목이 잡히는 건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입학 직전 감옥에 갇혔을 때가 처음이었었다. 그로 인해서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제게 주홍글씨가 붙었던 것을 극복하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는데, 이제 그 학교도 졸업 못 할지도 모르겠네. 성의 주인이 영영 내보내주지 않는다면 돌아갈 수 없을테니. 알버스는 흘낏 상대에게 시선을 던졌다. 처음에야 놀랐지, 이젠 익숙해져서 그가 아무 소리없이 옆에 다가와도 그다지 놀라지 않는다는 것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 수 없었다.
 알버스의 가족들이 지친 몸을 의탁했던 고성의 주인의 등 뒤로 긴 꼬리가 공중에서 채찍처럼 유영했다. 그리고 네 발로 지면을 디디고 선 늘씬하고 유연한 동체. 한발짝씩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늬가 아로새겨진 털가죽 아래 탄탄한 잔근육들이 물결쳤다. 웬만한 성인 남성보다 훨씬 거대한 재규어였다. 앞발로 가볍게 후려치기만해도 사람의 목뼈 정도는 간단히 부러질 것 같았다. 그나마 새파란 눈동자에서 읽히는 냉정한 이성의 흔적만이 평범한 맹수와 그 궤를 달리하게 만들었다. 이 성의 주인은 인간이 아닌 야수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인간의 말을 거침없이 구사하는데서 그냥 단순한 짐승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하지만. 며칠 지난 지금이야 익숙해졌다지만 처음 봤을 때는 정말이지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충격이었다. 갑작스럽게 실내의 불이 꺼지고, 창문들이 일제히 열리며 분위기가 일변한 와중 푸른 눈의 네발짐승이 천천히 걸어들어오던 그 순간의 기분을 알버스는 기억했다.

 "누구 마음대로 이 곳에 들어왔지?"

 아마 그렇게 말했던가. 짐승 특유의 거친 그르렁거림이 섞여있었지만 목소리 자체는 젊었다. 청년, 혹은 소년의 것처럼. 빈 성인줄 알았던 곳에서 말하는 맹수와의 조우라니 경악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옆에 있던 남동생이 어린 여동생을 보호하듯 끌어안았고 어머니는 자신의 앞을 가렸었다.

 "그저…… 길을 잃었을 뿐이에요. 아무도 없는 줄 알아서,"
 "그래? 정작 주인인 나는 허락한 적 없는데."

 노골적으로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에 소름이 돋았다. 집채만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움직일때마다 소리 하나 나지 않는 것 역시. 맹수가 시퍼런 안광을 빛내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송곳니가 위협적일만치 희게 빛났다.

 "여기서 꺼져,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아── 그 전에 한 명은 여기에 남아."
 "…예?"
 "한 명만 남으라고. 귀 멀었나? 그럼 나머지는 무사히 돌려보내줄테니까."

 한 사람만 여기에 남으라고. 뜬금없는 요구였다. 딱 한 명만.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알버스는 제가 남겠다고 자원했고 남은 가족들을 모두 무사히 내보냈다. 지금쯤은 집에 돌아가고도 남았겠지, 잘 돌아갔어야 할텐데.
 꽤나 고결하시네. 그런 상황에서 쉽게 나서기가 어려웠을텐데? 재규어가 비아냥거렸다. 그런 게 아니야. 알버스는 생각했다. 아버지는 감옥에 있고, 여동생은 매우 병약하다. 남동생은 아직 철이 없고. 그애들에겐 어머니가 필요하니 당연히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동생들한테 이 맹수와 단둘이 빈 성에 남으라는 것도 말이 안되지. 가족을 사랑하기도 했지만, 철저한 소거법의 논리에 따른 결과 결국 남아야 하는 사람은 알버스 자신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미 익숙하니까. 그가 대답하지 않자 흥이 깨져버리기라도 한 듯 재규어가 돌아섰다.
 재규어와의 생활은 생각보다 단조롭고 반복적이었다. 성 안에서 다른 사람은 머리카락 끄트머리도 보지 못했고, 사용인의 흔적은 전혀 없었는데도 세끼 식사는 꼬박꼬박 준비되어 나왔다. 최소한 그의 평소 가정식보다는 호화로운 식사였다. 또한 제가 머무르도록 배정받은 거처는 저녁에 돌아갈 때마다 청결하게 정리되어있었다. 딱히 알버스에게 주어진 침실만 그런게 아니라 크고 고풍스러운 성의 복도와 방들은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것처럼 항상 깔끔히 관리되어있었다. 설마 그가 직접 일일이 하는 것은 아니겠지. 잠깐 떠오른 상념을 고개를 저어 떨쳐버린 알버스는 제가 아직까지도 상대의 이름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평범한 짐승이 아니라면 당연히 이름도 있을텐데 이제까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 역시 굳이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고. 나중에 마주치면 꼭 물어봐야지, 알버스는 홀로 식사를 하며 결심했다. 그러고 보니 상대는 단 한번도 자신과 같이 식사를 하려들지 않았다. 혼자 식사하는 걸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식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는걸까. 앞발로 식기를 잡을 수 있긴 한걸까? 그는 인간처럼 식사할까, 아니면 정말 짐승처럼 날고기를 먹을까? 식재료는 어디서 조달해오는 거지? 나는 왜 붙잡아두는거야? 한번 떠오른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생각해보면 알버스는 저를 억류하고 있는 상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처음에 두려움 탓에 아무것도 묻지 못했고, 재규어 역시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으므로. 기묘하기 짝이 없는 한 지붕 밑의 동거였다.
 사실 성에 있는 동안 몸만은 편안하고 안락했다. 인질처럼 잡혀있는 것이 아닌 단순한 휴가였다면 정말 좋았을텐데. 알버스는 가끔씩 그렇게 생각했다. 여기선 누구도 알버스에게 완벽한 모범생이기를 강요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시간에 맞춰 수면을 취하고 식사를 하며 남는 시간에는 내키는대로 성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성의 주인은 오직 서쪽 탑에의 출입만을 금지했을 뿐이었다. 성의 전반적인 지리를 얼추 파악하고 어느정도 재규어에 대한 두려움이 가라앉은 일주일쯤 되었을 때, 참다못해 지루함을 호소하자 재규어는 서재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성의 규모와 어울리는 수천, 수만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는 거대한 서재였다. 그것은 잠깐 동안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잊을 정도로 압도적인 풍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지식에 대한 갈증은 여전하다니, 실소가 났다. 나는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기는 한 걸까.
 그가 재규어와 다시 마주치게 된 것은 그날 밤의 일이었다. 두꺼운 책을 두세권 옆에 낀 채, 자신에게 주어진 침실 앞에서.

 "이름? 그런 게 궁금해? 너도 참 특이하네."
 "같이 지내는 상대 이름 정도는 알고싶은 게 당연한 거 아닐까."
 "나는 널 당장이라도 죽여버릴 수 있는데?"
 "…안 그럴 거잖아."

 호오, 하는 탄성을 흘리며 재규어가 꼬리를 몆번 탁탁 바닥에 내리쳤다. 자주 마주한 건 아니지만 이제 어느정도 표정은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인간이라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는 느낌의 표정. 별로 알려주고싶지 않은 건가 싶은 순간 재규어가 한마디 툭 내뱉었다.

 "겔러트, 그린델왈드."
 "나는…… 알버스."
 "알아, 네 가족이 널 뭐라고 부르는지는 진작 들었으니까 이제와서 알려줄 필요는 없지. 새삼 자기소개하는 시간도 아니고 말이야."

 어째 새침하게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그나저나 이름은 확실히 인간같은데. 이 지역의 인명과 유사한 느낌의 풀네임을 입안에서 굴리며 알버스는 서재에서 들고 나온 책들을 침대 머리맡에 쌓아놓았다. 그러고보니 왜 재규어- 겔러트는 이곳에서 홀로 살고있는 것인지 새삼스레 의구심이 밀려들어왔다. 인간의 이름을 가지고,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며, 인간의 성에서 홀로 살고있는 황금빛 맹수. 넌 대체 누구야, 겔러트? 침대에 누워서도 한동안 그 상념은 알버스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 * *
 왜 그는 서쪽 탑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걸까. 어느날 부득불 떠오른 의혹은 들불처럼 알버스의 마음을 빠르게 침식해갔다. 겔러트 그린델왈드는 첫날부터 어느 곳에도 들어가도 좋지만 서쪽 탑에만은 절대 출입하지말라고 경고했었다. 왜? 그곳에 무엇이 있길래? 옛말에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고 했었던가. 알버스는 고양이가 아니었지만 이 성의 주인 앞에서는 고양이와 비슷한 수준의 연약한 존재에 불과했다. 안락한 생활을 하고있긴하지만 애초에 그는 일종의 포로이자 인질 신세였다.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듯이 성문 바깥으로 나가는 것 역시 금지되어있었고. 그러나 식사를 하면서도, 평소처럼 서재에 들려 책을 고르면서도 서쪽 탑에 대해 곤두세운 신경은 쉽사리 식지 않았다. 서쪽 탑은 왜 유일하게 성내에서 금지된 구역인 것일까.

 "……"

 결국 안절부절 못하던 것도 하루를 지나지 못했다. 어쩌면 왜 이 성에 인간의 말을 구사하는 맹수가 살고있는지 알 수 있는 단서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영원히 이 성 안에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언젠가는 나가야 했다. 그가 변덕스럽게 내보내주든, 알버스 스스로가 자력으로 탈출하든. 아마 후자의 확률이 더 높겠지. 그리고 서쪽 탑은 저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겔러트와의 동선이 자주 맞물리는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하루종일 털끝도 마주하지 못하는 날이 허다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감은 왔다. 성안을 돌아다니다보면 가끔씩 그와 조우하곤했지만 유독 저녁 이후로는 그와 만나기 어려웠으니까. 그렇기에 저녁식사 이후 알버스는 평소처럼 서재로 향하는 것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발을 돌렸다. 금지된 서쪽 탑.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느릿느릿하던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갈수록 빨라졌다. 길게만 느껴지던 복도를 지나고, 수개의 방을 지나 탑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에 도착하기까지 장애물은 전혀 없었다. 알버스는 잠시 눈앞의 계단을 응시했다. 더없이 유혹적인 풍경이었다. 아직까진 발각되더라도 길을 잘못 들었다거나, 그런 어줍잖은 핑계를 댈 수 있겠지만 이 계단을 밟는순간 겔러트의 유일한 경고를 어기는 셈이 된다. 망설이던 것도 잠시 알버스는 계단에 발을 디뎠다.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나선형 계단을 숨가쁘게 오르던 것도 잠시, 어느덧 최상층에 도달해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철문. 저 안에 성 주인의 어떤 비밀이 숨겨져있을까. 알버스는 심호흡을 한 후 문고리를 비틀어열었다.
 문 너머의 방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한동안 손길이 닿지 않은 듯 다소 너저분했고, 곳곳에 널브러진 부서진 가구 위에 뽀얀 먼지가 쌓여있는 것이 육안으로도 보였다. 그리고 모퉁이에 세워진 길쭉한 전신거울과 벽에 걸린 찢겨진 초상화…… 초상화? 알버스는 홀린 듯이 초상화에 다가갔다. 마치 날카로운 것으로 갈기갈기 찢어발긴 것처럼 난도질되어 있었기에 초상화 속의 인물이 누구이고 어떻게 생겼는지는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아마도 남성이고, 머리카락은… 금발. 특히 인물의 얼굴 부분이 집중적으로 찢겨나가긴했으나 그나마 오른쪽 눈 부분의 형태는 온전히 보존되어있었다. 길쭉하니 옆으로 시원스레 트인 아몬드형의 눈매였다. 섬세하게 드리워진 속눈썹과 보석처럼 새파란 홍채가 아름다웠다. 그런데 저 눈동자, 분명 어디에서 본 것 같은──

 "내가 분명 경고했었지. 여긴 절대 들어오지 말라고."
 "……!"

 분노를 눌러참은 듯한 사나운 목소리가 뒤편에서 으르렁거렸다. 아. 찰나 전신이 그대로 얼어붙는 듯한 감각이 엄습했다. 알버스는 창백하게 질린 채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거대한 재규어가 눈에서 새파란 귀화를 뚝뚝 흘리다시피하면서 무섭게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흉흉하다고 느꼈던 최초의 조우에서의 모습은 애교였다. 살기에 가까운 위협적인 기세에 바로 턱 밑에 날붙이를 가져다 대고있는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그는 명백히 분노하고 있었다. 아마, 자신이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왜 기껏 말해줘도 못 알아듣는거지?"
 "나…… 나는,"
 "입 다물어."

 찌를 듯 살벌한 기세에 알버스의 입이 다물렸다. 여기서 이대로 죽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짐승의 예리한 송곳니와 발톱에 목덜미가 찢어발겨질 것만 같아 온몸이 덜덜 떨렸다.

 "꺼져."
 "……게,ㄹ"
 "꺼지라고! 당장!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죽여버리기 전에!"

 거의 짐승의 포효와도 같은 고함이 알버스의 귓전을 세차게 후려갈겼다. 그리고 얼어붙어있던 알버스는 그와 함께 놀란 사슴처럼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고, 복도를 지나, 계속해서 달렸다. 발이 꼬일 뻔하고 다리가 후들거렸는데도 멈추지 않고 쭉 뛰었다. 역시 출입이 금지되어있던 성의 정문을 벗어나 언젠가 가족들과 함께 들어섰던 대로를 따라서. 자신이 어느덧 성을 벗어나 성을 둘러싸고 있던 숲에 들어서 있다는 것을 자각한 것은 얼마 후의 일이었다.

 "……아."

 빽빽하게 펼쳐진 수해(樹海). 이미 해가 저물어서인지, 원래 푸르른 녹음을 머금고 있어야 할 숲은 으스스할정도로 어둡고 적막했다. 오싹함을 느끼기도 전 이른 해방감이 낯설게 엄습했다. 성에서 나왔다. 그 성의 주인인 재규어가 쫓아오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이렇게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거였나? 이렇게 간단하게? 설마 내 눈앞에서 사라지라는 말이 놓아준다는 의미였던 건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앞에서 꺼지라고…… 새삼 가슴 한켠이 욱신거렸다. 이제 집으로,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영 그 감각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잡혀있는 것과 다름없는 주제에 설마 정이라도 들었었나. 어쨌든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다. 이제 그 지긋지긋한 성과도, 말하는 재규어와도 영영 작별이니까. 이제 돌아가면 두번다시 이 지역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며 알버스는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 이 숲에 들어올 때도 마차를 타고 한창 헤맸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도보로 걸어서 빠져나가기에는 너무나 까마득했다. 고작 열댓살 먹은 어린 소년의 보폭이라면 더더욱. 솔직히 방향도 잘 모르겠다. 숲 속에서 길이라도 잃게 되면 큰일인데…… 아니, 이미 잃었나?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어. 알버스는 난감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솔직히 그 나무가 그 나무인 거 같고 아까 지나갔던 곳인지도 모르겠고. 그는 촉망받는 우등생이었지만 맨몸으로 낯선 숲에 떨어졌을 때 어떻게 탈출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설상가상이라고 했던가, 주변에서 떨어진 나뭇잎을 밟는 듯한 기척이 들리는 바람에 알버스는 긴장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설마, 그가 기어코 따라온건가? 그리고 발소리의 실체를 육안으로 확인했을 때 순간적으로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네발짐승이긴 했으나 익숙한 재규어의 실루엣은 아니었다. 서너마리의 회색늑대들.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짐승들의 노란 눈동자는 저를 향하고 있었다.
 이런 울창한 숲속이라면 당연히 저런 위험한 야생동물들이 살고있으리란 걸 예상했어야했는데! 평소라면 한밤중 숲에 혼자 들어가는 미친짓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후회는 언제나 늦다. 이제와서 나무 위에 올라갈수도, 달려서 도망치기도 늦었다. 그 전에 물어뜯길 테니까. 알버스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한두발짝 뒤로 물러서면서 생각했다. 이렇게 일개 짐승의 야식거리로 죽기 위해서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왔던 게 아니었는데. 그냥 차라리 그 성에 계속 있었다면, 부자유했을망정 이렇게 비참하게 끝나지 않았을텐데. 곧 살갗을 찢고 뼈를 부러뜨릴 송곳니의 감각을 각오하면서 눈을 질끈 감기가 무섭게 깽깽거리는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설마."

 황금빛 재규어가 난입해 사납게 날뛰고 있었다. 늑대 한마리의 모가지를 물어 흔드는 동시에 다른 늑대를 덮쳐누른다. 늑대들보다 훨씬 체격이 거대했던 탓에 머릿수가 많았어도 속절없이 나가떨어졌다. 체급차라는 게 저런 걸 말하는 건가. 이내 늑대 떼가 깽깽거리며 꼬리를 말고 달아나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니 재규어가 제게로 홱 고개를 돌렸다. 입가에 묻은 핏자국과 채 가라앉지 않은 살기 탓에 꽤나 공포스러운 모습이었으나 알버스는 상대와 눈을 피하지 않았다.

 "…미안해. 겔러트."
 "경고는 어기고, 멋대로 성밖으로 뛰쳐나가고, 거기에 이런 수고까지 하게 만들었으니 미안한 줄은 알아야지?"
 "미안해. 다 잘못했어."

 순순하게 사과하자 겔러트가 미심쩍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눈동자. 분명 어딘가에서 보았다고 생각했었지.

 "그 방에 있었던 초상화, 너지?"
 "역시 똑똑하구나. 너."

 역시나 돌아온 대답은 긍정이었다. 유일하게 금지된 서쪽 탑과 그 안에 걸려있던 찢겨진 초상화. 분명 그 벽안이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성의 유일한 주인으로 군림하는 푸른 눈의 재규어. 모종의 이유로 말미암아 야수로 변해버린 인간이라니 마치 오래된 전설이나 동화 속에나 나올만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실체가 눈앞에 있는 것을 어떻게 부정하란 말인가?

 "여기서 설명하기엔 너무 장소가 안 좋은데. 아까 늑대 떼야 쫓아냈지만 다른 짐승들이 더 몰려올지도 모르고. 돌아갈까. 내 등에 타."
 "네 등에?"
 "네 걸음에 맞춰서 걸어가는 것보다 그게 훨씬 빨라. 왜, 무서워?"

 이제까지 머무는 동안 신체접촉도 없었는데 갑자기 등에 타라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잖아. 말이야 타 본적 있지만, 안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머뭇거리고 있자니 재규어가 제 등을 보인 채 뒷다리를 굽혔다. 진짜 타도 되는거야? 망설이다가 겨우 잔등 위에 올라탔다. 당연하지만 말과는 달랐다. 감촉도, 탑승감도. 털결은 생각보다 빳빳했고, 그 아래에서 꿈틀대는 근육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떨어지기 싫으면 내 목에 팔 두르고 꽉 잡아, 재규어가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얌전히 그 지시에 따르기가 무섭게 재규어가 수해를 가르고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 한명을 등에 태우고 있으면서도 전혀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날렵한 몸놀림이었다. 빠른 속도감에 머리칼이 아무렇게나 공중에서 흩날렸다. 희한하게도 현실감이 없다고 알버스는 생각했다. 한때 저와 같은 인간이었던 맹수와 함께, 바로 직전 뛰쳐나온 성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숲이 끝나고 성의 모습이 드러났을 때 묘하게 엄습해온 안도감도.

 "그래서, 어디서부터 듣고 싶어?"
 "가능하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깔끔한 요구군. 안될 거야 없지."

 성의 중심부, 벽난로 앞에 깔린 러그 위에 편하게 자리잡은 재규어가 무늬로 얼룩진 꼬리를 휘저으며 새치름하게 대답했다. 그는 마치 타인의 이야기를 하듯이 말을 꺼냈다.
 겔러트 그린델왈드는 지방 영주의 하나뿐인 후계자였다. 어릴 때부터 그 비상한 두뇌로 흑마법에 심취해있었던. 그리고 그를 가장 매혹시켰던 것은 어느 고서에 언급되어있던 죽음의 성물이라는 세가지 물건이었다. 이것들만 가지고있으면 죽음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고. 아직 어린 소년에게 있어 죽음은 그저 피상적이고 머나먼 개념에 불과했지만, 죽음의 지배자라는 멋드러진 호칭은 매우 혹하는 것이었다. 겨우 일개 영주로서의 삶이 아니라, 더 의미있고 역사에 길이 이름이 남을만한 명성과 영광, 영예. 그렇게 그는 제왕학과 후계자 수업이 아닌 흑마법과 성물의 향방에 대한 탐구에 더 몰두했다.

 "그래서……?"
 "중간과정은 건너뛰고, 결론만 말하자면 진부하다 못해 뻔한 이야기야. 저주를 받았지. 마녀에게서."

 그저 약초나 키우는 노파 나부랭이가 아니라 세상에는 정말로 진짜 마녀가 있더라고. 딱총나무 지팡이의 흔적을 좇아 도달한 곳은 나이든 노파가 홀로 살고있다던 집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라고 재규어는 대답했다. 집에 침입하고, 지팡이를 찾아 훔쳐 달아나려다가 마녀에게 저주를 받았다고. 인간에서 한낱 야수로 전락하고, 매일 시간이 되풀이되는 고성에 매이게 되는 저주.

 "시간이 되풀이된다고?"
 "그럼, 식사나 청소까지 설마 내가 다 한다고 생각했어? 이 몸으로?"

 그나마 식사메뉴가 똑같지 않다는 게 일말의 다행이라고나 할까. 성에 유폐된 것은 비단 자신뿐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버스는 새삼 실감했다. 오래된 성과 그 주위를 둘러싼 숲이 성주에게 허락된 유일한 행동반경이었다. 길 잃은 행인들이 헤매이다 들어올 수는 있어도 정작 집주인은 수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결계. 애초에 이 성 자체가 자신을 가두기 위해 마법으로 세워진 요새에 가깝고, 성 내부의 시간은 항상 그 하루가 반복된다고 겔러트가 덧붙였다. 덕분에 최소한 나이먹어서 죽을 일은 없겠지, 그게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그 저주는 어떻게 푸는 건데?"
 "그게 궁금해?"
 "저주가 정말 실재한다면 그걸 파훼할 방법도 있다는 거잖아."

 살랑살랑 흔들리던 재규어의 꼬리 끝이 찰나 정지했다. 갑작스럽게 공기 중의 분위기가 일변한 것 같은 감각이 엄습한다.

 "비밀이야."
 "뭐? 그런 게 어딨-"
 "어차피 넌 못 도와주니까. 시간도 늦었고 오늘은 이만 알버스 네 방으로 돌아가서 자."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이제까지 다 알려줘놓고서,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벽을 세워버리다니. 아쉬웠지만 당사자가 이렇게 완고하게 말하길 거절하는데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알버스는 하는 수 없이 그를 뒤로 한 채 자리를 떴다. 이 성에 머문 이후 겔러트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잠들기 직전이 되어서였다.


* * *
 때로 내밀한 비밀을 공유하는 것은 상대와 더 사적으로 친밀해질 수 있는 방법이기도하다. 아무리 부자유하게 얽매인 상태라고 해도. 중앙 홀에 나왔던 알버스는 이미 그곳에 나와있던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하고 멈춰섰다.

 "안녕."
 "좋은 아침, 이라고 인사라도 해줄까?"

 말은 그렇게 해도 별로 기분 나빠보이는 눈치는 아니고. 황금빛 재규어가 알버스에게로 느리게 걸어왔다. 새삼 그가 굉장히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3미터쯤 되려나. 그날밤 늑대들과 비교하니 확실히 체급차가 느껴졌었지. 빤히 쳐다보고 있으려니 불현듯 서쪽 탑의 초상화가 떠올랐다. 잘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금발이었고, 한쪽 눈매만 온전히 남아있었던.

 "그 탑에 있던 초상화 말인데. 왜 찢어버린거야?"
 "이렇게 변한 날 분에 못 이겨서."
 "그럼 다른 초상화는 없어?"
 "없어. 그거 하나야. 왜, 내 원래 얼굴이 궁금해?"

 궁금하지 않을리가 없었다. 마녀의 저주에 걸려 일개 짐승으로 변해버린 영주의 아들이라니. 신분이 왕자가 아니라는 게 그나마 덜 동화같은 점이었다. 알버스는 마침 떠오른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럼 겔러트 네 가족들은……?"
 "몰라. 난 여기 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고, 그 후로 얼마나 시간이 더 지났는지도 정확히 가늠하기 어려우니까. 살아있을 수도 있고 모두 죽었을 수도 있겠지."

 덤덤한 목소리였다. 거대한 재규어는 할말을 끝냈다고 느꼈는지 알버스를 지나쳐 성의 정문 밖으로 향했다. 알버스는 한동안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너는 얼마나 오래 이 성에서 그 모습으로 머물렀던 것일까.
 전까지 하루에 한번도 마주치지 못할 때가 많았건만 그 후로 전보다 겔러트와의 조우는 잦아졌다. 그동안 별로 올라가지 않았었던 4층 응접실과 방, 연회장들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발견한 하프시코드 앞에서 알버스가 고민하고있던 와중 뒤에서 그가 말을 걸어왔다.

 "그거 칠 줄 알아?"
 "…소리 좀 내고 다녀!"
 "미안. 워낙 익숙해져 버릇해서."

 아무리 고양이과라지만 저렇게 큰 생물이 이렇게까지 조용하게 돌아다니는 것은 꽤나 소름끼치는 일이다.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있자니 겔러트가 다시 하프시코드를 향해 고개를 까닥거렸다.

 "쳐다보고 있길래. 칠 수 있어?"
 "조금은. 어머니한테 배웠어."
 "그래? 나도 예전엔 잘 쳤었는데. 보다시피 지금은 이런 손으로 건반을 다룰 수 있을리가 없지."

 다소 자조적인 농담이었으나 말투는 담담하다 못해 명랑했다. 한동안 음악이라고는 듣지도 못했었어, 연주해줄래? 내가? 여기 알버스 너 말고 누가 있어. 나도 안 친지 꽤 오래됐는데…… 고민하던 것도 잠시 알버스는 부탁대로 순순히 하프시코드 앞에 앉았다. 건반 위에 손가락을 펴서 올려놓고 숨을 가다듬는다. 화음은 생각보다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3분 가량의 연주를 끝낸 후 건반에서 조심스레 손을 거두었다. 귀를 쫑긋거리며 연주를 듣고있던 재규어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좋은 연주네. 답례로 한 가지 좋은 소식을 들려줄까?"
 "좋은 소식?"
 "들으면 기뻐할걸. ──이제 널 놓아줄게. 가족에게로 돌아가."

 뭐? 알버스는 잠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갑작스러운 선언이었다. 수십수백번도 더 상상하고 기다려온 문장이었으나 막상 이렇게 들으니 생각처럼 환희, 해방감이 밀려오지는 않았다. 대신 왜? 이제서야? 어째서? 채 말로 화하지 못한 수가지 의문들이 뇌리를 맴돌았다.

 "왜……?"
 "이제 돌아가도 돼. 혼자서는 수해를 빠져나가기 힘들 테니까 숲 어귀까지는 내가 직접 바래다줄게."
 "아니, 왜? 갑자기…?"
 "별로 안 좋아하네?"
 "이렇게 갑자기 떠나라고 하는데 기뻐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그토록 바래왔던 해방인데도 왜 이렇게 기쁘지 않은거지. 재규어가 어서 나가자는 듯이 다시 고개를 까딱였다. 그 순간 알버스는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나 안 갈래."
 "무슨 소리야, 그게."
 "너 혼자 여기에 내버려둔채 돌아가고싶지는 않아. 아직 파훼하는 법 알려주지도 않았잖아."

 막상 소리내어 내뱉고 나니 확신이 섰다. 자신이 떠나고 나면 아마 그는 이 거대한 고성에 홀로 남게 되겠지. 얼마나 오래 이 성에 유폐되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저주가 풀리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계속 쭉. 어쩌면 영원히. 이대로는 못 가. 안 갈 거야. 비밀이라면서 어떻게 저주를 깰 수 있는지 알려주지도 않았고. 이런 상태로는 돌아간다고 해도 그가 어떻게 살고있을지 계속 마음에 밟힐 것 같다. 당연히 좋다고 수락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재규어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고집 부리지 마. 순순히 보내줄 때 어서 떠나."
 "싫어. 이렇게 보낼거면 왜 애초에 한 사람만 남으라고 했어?"
 "그거야 혹시 저주를 풀어줄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럼 방법을 알려줘! 비밀이라고 하지 말고!"
 "알려주면, 그럼 네가 도와줄 수 있어?!"

 겔러트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정말 야생 맹수의 것과도 같은 사나운 으르렁거림이었다.

 "보나마나 도와줄 수 없을 테니까 가라고 할 때 어서 가! 여기서 영원히 살고싶은 게 아니면!"
 "싫어! 알려주지도 않고서 그냥 가라는 게 어딨어! 방법이라도 말해줘!"

 팽팽한 결착 가운데 어이가 없다는 듯 재규어가 꼬리를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내리쳤다. 대리석 재질의 표면에 부딪힐 때마다 채찍소리처럼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려퍼졌다. 가라고 해도 안 가겠다는 건 처음 보네! 그럼 알려달라고! 집채만한 맹수가 심기 불편함을 여과없이 드러내는데도 알버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희망고문하려고 하지 마. 난 이미 지겨울 정도로 이 안에 처박혀 있었으니까."
 "그런 거 안 해. 알려주기나 해."
 "얌전하게 생겨서 의외로 고집 굉장히 세구나, 너…… 좋아. 그 마녀가 그랬었지. 내 이런 모습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경멸하지도 않고."

 그리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왜 말을 하다 말아?"
 "…쪽팔리니까 그렇지. 그리고 사랑, 할 수 있는 상대가 나타나서,"
 "─설마 키스라도 해야한대?"
 "무슨 소리야. 동화책 너무 많이 읽은 거 아냐?"

 아니, 처음부터 자기 입으로 진부한 이야기라며! 이미 충분히 동화에나 나올만한 상황인데 보통 그거잖아. 저주에 걸린 왕자가 도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것은 여주인공의 입맞춤이니까. 비록 여기에는 왕자도 사랑스러운 여주인공도 없지만.
 그러나 겔러트의 대답은 입맞춤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날 네 손으로 한번 죽여야 해."
 "저주를 파훼하는 법이 죽음이라고? 말도 안돼. 그럴거면 자살하는 게,"
 "그 마녀가 말하길 해답은 '나는 끝에서 열린다'라고 했었나. 상대가 날 사랑한다면 그냥 죽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했어. 아니면-"
 "아니면?"
 "그냥 죽는 거지."

 마녀의 저주를 통해 야수로 변한다는 것만큼은 진부할 정도로 고전적인데 파훼 방법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과격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을 해내기 위해선 상대를 사랑해야 한다고. 내가 그를 사랑하나? 알버스는 자문했다. 자신을 가족들에서부터 떨어뜨리고 이 성에 묶어두다시피한 상대였다. 그리고 굳이 따지면 그날 서쪽 탑에 들어섰던 날 밤 이전에는 변변한 대화조차 거의 오가지 않았던 사이기도 했고. 억류자와 피억류자 사이 사랑이 싹틀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놀라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눈앞의 상대에게 품게 된 감정은 더없이 강렬한 연민과 친애의 정에 가까웠다. 그가 속박된 저주에서 풀려나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길 바란다. 이 고독한 고성과 수해의 결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되찾았으면 좋겠다고.
 겔러트 그린델왈드는 제 입으로 흑마법에 심취했었다고 고백했다. 흑마법을 다루는 이들의 악명에 대해서는 알버스 역시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갓난아이나 처녀를 제물로 바치고, 흑미사를 열며 악마와 계약하기도 한다고 했던가. 과연 겔러트가 어느정도로 흑마법에 빠져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솔직하게 알려주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계속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알버스는 그가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랐다. 갱생도 회개도, 어쨌든 이 상태에서 벗어나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알버스는 사람을 신뢰하는 편이었다. 아무리 믿을 만한 것 같지 않아도, 잘못을 했더라도 한번 더 기회를 주고 믿어주는 것이 평소 그의 지론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알버스는 겔러트 그린델왈드에게 두번째 기회를 주고싶었다. 어쩌면, 이게 사랑이란 감정일지도 모르겠네. 알버스는 남의 일 대하듯 생각했다. 단 한번도 누군가를 좋아해본적 없었는데 이제와서 인간도 아닌 모습의 상대에게 반하다니.

 "그래서 어떻게 하면 돼?"
 "정말로 할 생각이야? 어차피 내가 죽더라도 결계는 풀릴 거고 네가 나가는 데는 지장 없을거니까 너무 부담 안 가져도 돼."
 "넌 안 죽어, 겔러트."

 내가 그렇게 만들지 않을 테니까. 재규어가 빤히 알버스를 응시하다 따라오라는 듯 먼저 걸음을 옮겼다. 중앙 홀에 도착했을 때 그가 자신을 향해 눈짓했다. 벽난로 위에 걸려있는 한 쌍의 검을 인식한 것은 그때서였다.

 "저걸로?"
 "싫으면 도끼도 있는데. 그걸로 할래?"
 "아니야……"

 한번도 살아있는 생명체에게 날붙이를 휘둘러보지 않은 입장에선 도끼가 더 쓰기 편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흉악한 비주얼에 거부감부터 든다. 검이라고 마음이 더 편한 건 아니지만. 알버스는 발뒤꿈치를 들고 벽에 장식되어 있던 검 한 자루를 꺼냈다. 장식용 검치고는 손대면 베일 것처럼 날이 서 있었다. 저주를 풀어주겠다고 공언해놓고서 막상 검을 쥐니 두려움이 슬금슬금 기어나왔다. 만약 내가 널 사랑하는 게 아니라면? 내가 실수라도 한다면? 제 속내를 눈치챘는지 재규어가 목을 울렸다. 마치 웃음소리 같았다.

 "이대로 죽게 된다고 해도 별 상관없으니까 편하게 내려쳐. 알버스 네 손에 의한 것이라면 죽음 역시 환영할테니."

 나는 네가 죽기라도 한다면 날 용서할 수 없을텐데? 알버스는 힐트를 움켜잡은 채 재규어를 향해 다가갔다. 목을 치는 게 나을까, 심장을 찌르는 게 나을까? 아니면── 고민이 끝나기도 전 재규어가 천천히 제 고개를 숙여보였다. 모르겠다. 이제껏 곱게 펜대만 쥐고 책장만 넘겼던 손에 들린 검은 생각보다 무거웠고, 입안이 긴장감으로 메말랐다. 알버스는 느리게 검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고, 다음 순간 힘을 다해 내리쳤다.


* * *
 눈이 떠졌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의아함이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있는거지? 여기에 머무른지도 꽤 되었다고 하지만, 익숙한 거처의 풍경이 아니라고 해서 낯섦을 느끼다니. 몽롱했던 의식이 서서히 수면 위로 끌려올라오는 찰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분명 마지막 순간 장식용 검을 들고 재규어에게 내리쳤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나서 기절하기라도 한 건지 이후의 기억은 끊겨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벌떡 일어나려던 순간 옆에 앉아있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묘하게 익숙한 푸른색 눈동자였다. 기름하게 뻗은 또렷한 눈매.

 "일어났네."
 "어, 너……?"
 "그대로 기절해서 반나절 넘게 안 일어나길래 걱정했었어. 키스라도 해서 깨워볼까 했는데 마침 잘 됐다."
 "아……"

 곱슬거리는 화려한 금발이 꼭 순금을 녹인 것처럼 반짝였다. 나이는 십대 중후반 정도 되었을까, 아직 앳된 티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반듯한 이목구비는 놀랄만큼 수려했다. 겔러트. 그는 자신도 모르게 상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황금빛 재규어와 똑같은 것은 그 눈 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서쪽 탑에 숨겨져있던 찢긴 초상화의 주인이자 저주받아 야수로 전락했던 그 장본인. 사실 어떻게 생겼겠거니하는 상상까진 구체적으로 해본 적 없었는데, 흑마법이니 저주니 하는 음침한 단어들과는 한오백년 정도 더 떨어져있는 듯한 해사하고 명랑한 얼굴이었다. 게다가 이렇게까지 잘생겼다고는 미리 말 안 해줬잖아. 알버스는 눈부신 것을 보는 것처럼 시선을 피했다. 어쨌든 그가 멀쩡히 살아있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건 저주의 파훼가 성공했다는 의미겠지. 그랬다는 건 내가 정말로 널…… 새삼 그것을 인식하자 뺨이 달아올랐다. 상대가 제 마음을 읽기라도 할까봐 알버스는 서둘러 두서없이 말머리를 꺼냈다.

 "이,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가족들을 찾아갈거야?"
 "글쎄. 이미 후계자 자리는 다른 누군가한테 넘어갔을 거고…… 별로 다급하지는 않은걸. 그냥 알버스 널 따라가면 안 될까?"
 "나, 나를?"
 "안 돼? 너 나 사랑한다며. 저주도 깨뜨려줬잖아."

 헉. 다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은 착각에 알버스는 어쩔 줄 몰라했다. 고스란히 감정을 들켜버린 셈이었다. 너무해. 이런 거. 겔러트의 낯 위로 장난기 넘치는 미소가 스쳐지나가나 싶더니 더욱 가까이 제 얼굴을 들이댔다.

 "그런데 내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 그래도 지금이 더 잘생겼지?"
 "아… 물어보지 마……"
 "왜, 대답해 줘. 설마 사람이 됐다고 이제와서 사랑이 식은 건 아니지?"

 이런 성격인 줄 진작 알았으면! 그동안은 저주 때문에 까칠하게 굴었던 건지, 그 조각같은 외모로 유들유들하게 대해오자 혼이 쏙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겔러트의 외모는 자신이 이제까지 본 사람들 중 가장 아름다웠으므로. 알버스가 대답을 하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돌리자 더욱 집요하게 매달려왔다.

 "혹시라도 재규어가 더 취향이었던 건 아니라고 믿을게."
 "아니야…… 네가 더 잘생겼어."
 "그건 그래, 난 잘생겼으니까."

 얘 진짜 뭐하는 애지? 알버스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고마워, 모두 네 덕분이야. 뒤늦은 감사인사가 달큰하게 귓가를 맴돌았다.
 떠도는 이야기가 있었다. 여행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었기에 허무맹랑하기도 하고, 흔해빠진 동화같기도 한 이야기였으나 그 기본 골조만은 항상 똑같았다. 어느 수해의 끝, 오래된 성에 인간처럼 행동하는 야수가 홀로 살고있다는 것. 가끔 길 잃은 이가 그 성에 들어오면 다시 나갈 수 없다고도 했고 오직 진정한 사랑만이 그 성주를 구할 수 있다고도 했다. 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는 계절에 이야기의 끝은 그렇게 저물었다. 저주받은 야수는 다시 인간으로 돌아왔으며, 자신의 구원자와 함께 새로운 여정을 떠났다는 것은 오직 그들만이 알고 있는 마지막 장의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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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커서 겔러트 오빠랑 결혼할래."

 저녁식사 도중 여동생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스푼을 떨어뜨린 것은 비단 애버포스 뿐이 아니었다. 바로 앞에서 식사 중이던 알버스의 손에서 포크가 주르륵 미끄러져 떨어져내리는 것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눈에 들어왔다. 은제 식기가 식탁과 부딪히는 바람에 쨍그랑, 하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났지만 식탁에 앉아있던 네 사람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자신과 다른 의미로 얼어붙은 듯한 형, 그리고 대단한 각오라도 한 것처럼 의지에 불타 보이는 아리아나. 유일하게 그 발언이 나오기 전과 별 다르지 않게 차분해 보이는 것은 다름아닌 선언의 타겟이 된 겔러트 뿐이었다. 알버스가 떨어뜨린 포크를  대신 주워주며 그가 나른하게 웃어보였다.

 "오, 그래? 이렇게 예쁜 숙녀분에게 청혼을 받다니 정말로 영광인걸."
 "응! 난 나중에 꼭 오빠랑 결혼할거야!"
 "그런데 어떡하지, 아리아나? 나는 이미 네 사랑스러운 큰오빠의──"
 "잠깐, 잠깐, 잠깐! 거기까지! 입 다물어!"

 그 매끄러운 혀끝에서 무슨 위험한 소리가 더 흘러나올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애버포스는 급하게 겔러트의 말을 끊어먹었다. 이 자식이 대체 애 앞에서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고! 그나저나 내 여동생이 이 빌어먹을 놈이랑 결혼하고 싶다니 이 무슨 큰일날 소리야? 당장이라도 눈앞에 있는 망할 자식의 멱살을 잡아 흔들고싶었으나 그는 꾹 눌러참았다. 대신 애써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는 것을 택했다.

 "아리아나, 넌 아직 결혼 얘기를 하기엔 너무 어려. 아직 성인이 되려면 몇년은 더 남았잖아."
 "그게 뭐 중요해?"
 "아주 중요하지…… 그런데 대체, 왜 하필 이 놈이야?"
 "그거야, 겔러트 오빠는 잘생겼으니까. 내가 본 사람들 중에서 제일 잘생겼어. 그리고 나랑 똑같은 금발이기도 하고!"

 윽. 다시 둔기에 머리를 얻어맞는 것 같은 충격이 엄습했다. 물론 저 자식이 제법 미끈하니 반반하게 생겼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 사실이 사랑해 마지않는 여동생의 입에서 흘러나오니 왠지 충격이 컸다. 왜 그런 마음 있잖아. 그는 끈기를 유지하며 아리아나에게 마저 말을 걸었다. 그가 어떤 심정이든 말든 옆에서 빙글빙글 웃고 있는 동구권 출신의 미남은 이제 창백해진 형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어째 둘이 식탁 아래에서 손을 잡고 있는 듯했지만 간신히 무시했다.

 "아리아나, 잘 생각해 봐. 결혼은 상대 얼굴이나 머리색만 보고 하는 게 아니야. 좀 더 오랫동안 알아보고, 또 성격이라던가 나와 잘 맞는다던가, 여러가지를 알아보고 심사숙고한 후에야 결정하는 거지……"
 "하지만 겔러트 오빠가 우리집에 들리기 시작한지도 벌써 몇년이 넘었잖아? 대체 얼마나 더 알아야 하는데?"
 "그게, 그러니까."
 "난 세상에서 애버포스 오빠를 제일 좋아하지만 두번째로는 겔러트 오빠가 좋단 말이야. 그러니까 결혼할래."
 "어, 뭐?!"

 와, 오늘은 이래저래 정말 충격적이군. 그는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득해지는 듯한 기분을 경험했다. 자신이 그래도 아직까지는 귀여운 여동생의 1위라는 거라던가, 알버스는 아예 순위권에서 밀려났다는 것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이제와서 나 다음으로 저런 놈을 2순위로 꼽다니! 왜! 어째서! 내가 널 어떻게 키우고 아꼈는데! 나타난지 몇년도 안된 주제에 귀엽고 순수한 내 천사같은 동생의 마음을......! 애버포스는 마치 십여년만에 부모의 원수라도 만난 사람처럼 겔러트를 노려보았다. 상대는 여전히 얄미울 정도로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야, 너. 내 순진무구한 여동생을 어떻게 홀려놨길래 저 애가 저런 소리를 해?!"
 "글쎄. 원래 잘생기고 예쁜 걸 좋아하는 건 사람의 본능이 아닐까 싶은데. 그리고 워낙 내가 잘생기고 예쁜데다 숙녀에게 상냥하잖아."
 "미친 거 아냐? 개소리 하지 마."
 "그냥 순순히 인정하는 게 좋을걸. 그러다가 아리아나의 1위 자리도 뺏긴다?"

 아, 진짜 죽여버리고 싶다. 이 자리에 알버스와 아리아나만 없었어도, 지금의 기분이라면 충분히 겔러트에게 용서받지 못할 저주를 쓰고도 남을 것 같았다. 내가 만든 저녁식사가 아니라 크루시오나 처먹여야하는데! 이 자식이 고드릭 골짜기에 눌러앉은지도 벌써 몇년이 넘었다.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동공에 힘이 풀려서 겔러트와 딱 붙어다녔던 형을 애저녁에 뺏긴 것까지는 그러려니 하겠는데, 이제는 급기야 제가 애지중지했던 여동생의 마음마저 빼앗길 위기였다. 아니, 대체 왜.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의 애버포스를 본 체 만체 하고 겔러트가 아리아나에게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이미 난 네 사랑하는 큰오빠와 미래를 약속한 사이라서 말이지. 대신 형부는 되어줄 수 있는데, 어때?"

 여전히 반쯤 혼이 나가있는 듯한 알버스의 어깨를 제게로 끌어당겨 안으며 겔러트가 웃었다. 모 주간지의 가장 아름다운 미소 상을 타도 좋을만큼 황홀하기 짝이 없는 미소였다. 물론 애버포스가 보기에는 악랄해보일 뿐이었다만.

 "에, 형부……?"
 "미쳤냐? 내가 애한테 그런 말 하지 말랬지!!"

 어느날 저녁에 일어났던 해프닝은 그렇게 저물었다. 알버스는 한동안 민망한 듯한 표정으로 동생들을 대했고, 하나뿐인 여동생은 쉽게 포기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며, '이제 처제도 다 알았으니까 별로 상관없잖아' 운운하며 집안에서도 노골적으로 굴기 시작한 금발미남의 존재만을 제외한다면 별로 달라진 것은 없는.




+@fygrindelxdore님 멘션내용 일부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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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버포스는 처음부터 겔러트 그린델왈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불길한 예지와도 같은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화려한 금발과 흠 잡을 데 없는 미끈한 이목구비, 희미한 동유럽 악센트가 섞여있지만 유창한 발음마저 꺼림칙하게만 느껴졌기에. 마치 산행 도중 발견한 독화같은 유해한 존재. 그렇기에 그는 형이 새로 사귄 친구를 결코 기꺼워할 수 없었다. 그래, 둘이 정말 친구인줄 알았던 때도 있었지. 죽자사자 하루종일 붙어다니면서 자기들끼리 꺄르르 깔깔 좋아죽을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단순한 형의 '친구'라고 생각했을 때도 좋아할 수가 없는 인간이었는데, 무려 형의 애인이라고 하니 오백삼십배 정도는 더 싫어졌다.
 그가 두 사람간의 관계를 알게 된 것도 우연에 가까웠다. 점심 먹으라고 아무리 불러도 안 내려오길래 짜증나서 침실까지 올라가봤더니 딱 들러붙어서 당장이라도 키스할 것처럼 꼴값을 떨고있었다. 대체 그 인간 무릎엔 왜 올라가 앉아있는데? 아리아나도 열한살 이후로는 내 무릎 위에 안 앉아! 자신을 발견하고나서 놀란 표정을 짓는 것도 잠시, 형이 수줍지만 뭔가 각오한 듯한 표정으로 -멀린의 수염에 맹세코, 오, 맙소사. 그 멍청이가 된 듯한 얼굴이라니- 사실 우리 사귀고 있어 어쩌고 떠드는 순간 스스로에게 기억력 수정 마법을 걸고만 싶었다. 그 와중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형의 어깨에 턱을 괴고있던 그 자식의 태도는 더 열받았고. 시발, 네 애인이기 전에 십여년 넘게 우리 형이었거든? 책에만 파묻혀살던 형에게 드디어 첫사랑이 생긴 건 혈육으로서 축하할만한 일이었으나 왜 하필 저 생긴 것만 번지르르한 자식인데? 둘 사이가 까발려진 후에는 아주 대놓고 보란듯이 집안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는 것도 짜증났고, 처남이니 뭐니 몸서리쳐지는 호칭으로 자신을 부를 때마다 정말이지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 자식이 아주 우리집에서 살다시피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형."
 "왜?"
 "아 제발, 식탁에서라도 그 손 좀 놓으면 안 돼……?"

 환장하겠네. 하루종일 붙어다니면서 뭐가 그리 절절해서 밥 처먹을 때도 손 붙잡고 먹냐고. 알버스의 왼손을 깍지 낀 채 쥐고 저는 능숙하게 왼손으로 스푼질을 하던 겔러트가 힐끗 고개를 들었다. 내가 너한테 말 걸었냐, 왜 우리 형이 아니라 네가 대꾸해?

 "우리가 이러고 있다고해서 처남에게 방해라도 되는 게 있어?"
 "그놈의 처남 소리는…… 됐다. 네 마음대로 하십쇼."

 내가 더럽고 치사해서 말을 말아야지. 그나마 밥상머리에서 서로 안 먹여주는 게 어디냐고 애버포스는 자신을 위로했다. 그러면 정말로 포크라도 던져버리고 싶을 테니까. 하지만 본능적으로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천재에 장남이라 손에 물 한방울 안 묻히고 펜대만 잡으면서 곱게 큰 형이 가사에 젬병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가장이 되었다지만 하루아침에 가사에 능숙해질리는 없는 일이었고, 자연스럽게 요리는 애버포스의 몫으로 넘어왔다. 한마디로 저 자식이 지금 나한테 저러면서 처먹고 있는 음식도 다 내가 만든 거라 이거야. 생각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현관 밖으로 쫓아내고 싶었지만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기에 그는 너무도 선량했다.
 어쨌든 그의 하나뿐이고 영리하며 천재적인 형이 바다를 건너온 금발미남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줄만큼 푹 빠져있다는 것은 겉보기에도 매우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애버포스는 형의 첫 연애에 대놓고 찬물을 들이붓기에는 마음이 약했다. 아무리 열받고 복장이 뒤틀려도, 어쨌든 하나뿐인 친형이었고 그는 형을 나름대로 사랑했으니까.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러다가 둘이 깨져버리길 바란 마음도 없지않아 있었다. 몇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은 꿈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둘의 사랑놀음을 참아주는 것도 어쨌든 그에게는 큰 피해가 오지 않는다는 것 하에 참고 있는 것 뿐이었는데.

 "처남, 언제까지 그렇게 염소들하고만 놀 거야?"
 "…그쪽이 내 부모라도 돼?"
 "오. 너무 배배 꼬인 거 아냐? 난 처남을 진심으로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이제 졸업도 했는데 언제까지 네 형에게만 의존해서 살려고 하는거야. 설마 알버스가 널 평생 뒤치다꺼리해주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아 참, 그리고 전부터 편하게 매형이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실컷 잔소리해놓고 유들유들하게 한마디를 덧붙이는 태도가 더할 나위 없이 얄미웠다. 생각같아서는 고약한 저주라도 등짝에 쏴버리고 싶었으나 눈앞의 상대가 형과 비슷한 수준의 천재라는 걸 알기에 화만 삭힐 뿐이었다. 게다가 알버스는 그 뛰어난 지능이 무색하게도 겔러트가 관련된 일에는 조금, 아니 많이 무뎌지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다. 대놓고 앞에서 으르렁거리지 않는다고 우리가 사이 좋아진 줄 알다니! 의외의 면에서 순진한 면모가 있는 형의 환상을 지켜주기 위해 그 앞에서만은 착하고 그 애인과도 잘 지내는 동생인 척 노력하고있다만.
 어쨌든 겔러트의 갖잖은 훈계가 나름 그에게 동인으로서 작용한 것도 사실이었다. 정확히는 꼴보기 싫은 얼굴을 더이상 보지 않기 위해서였기도 했다. 그래, 진작 내가 분가해서 나갔어야 했어! 왜 저 꼬락서니를 보면서 계속 고통받고 있었지! 결국 약 반년에서 일년간의 과정을 거쳐 애버포스는 자신의 가게를 개업했다. 형의 직장 근처에 있던 빈 가게를 인수해서 연 주점이었다. 아무리 형의 연애사가 꼴보기 싫어 선택한 길이었다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우리 학교 근처로 해줘, 그래야 내가 자주 들리지 하고 웃는 형의 얼굴을 매정하게 무시하기에 그는 너무나 선한 인물이었으니까. 드디어 가게의 주인으로서 영업하게 된 첫날, 이유모를 설렘에 가슴이 뛰었다. 이제 온전히 스스로의 경제권을 가지게 되었다는 뿌듯함도 있었으나 형과 형 애인의 연애질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이 제일 컸다. 하하, 망할 놈의 커퀴들 때문에 고통받았던 나날도 이제 끝이다! 아무 생각없이 문을 열었다가 그대로 눈감고 돌아나와야 했던 과거의 나날들을 생각하니 새삼 울화가 치밀었다. 이제 둘이 뭘 하던 내가 알게 뭐람. 이제 나와 내 시각은 자유야. 그렇게 생각했었다, 분명히.

 "애버포스, 개업 축하해."
 "우리가 첫 손님인가봐?"
 "형……? 무슨 일이야, 여기까지."
 "우리 친애하는 처남이 가게를 열었다는데 어떻게 안 찾아올 수가 있겠어!"

 악. 순간 없던 편두통이 날카롭게 엄습했다. 역시 형 직장 근처에 개업한 게 실수였나…! 저 꼴들 보기 싫어서 내 가게로 피신한건데 가게 문 열자마자 나타나다니. 형의 어깨를 감싸듯 팔을 두르고 있던 뻔뻔한 얼굴의 금발미남이 어두침침한 가게 내부를 쓱 둘러보았다.

 "너무 어둡네. 전반적인 분위기도 어째…… 학생들이 좋아할 것 같은 느낌은 아닌걸? 대체 수요층을 누구로 잡은 거야?"
 "넌 신경 꺼."
 "애버포스─ 난 네가 겔러트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 정말…… 그래, 내가 미안해. 이제 됐지? 왔으니까 주문이나 해. 계산은 따로 필요 없어."

 앓느니 죽어야지. 잠자코 파이어위스키 두 잔을 따르며 그는 골이 땡겨오는 것을 느꼈다. 축하해주러 왔다더니 너댓 시간동안 신나게 평소 하던 그대로 연애질만 하다가 '앞으로 너희 형하고 자주 들릴게' 어쩌고하며 보란듯이 형을 제 옆구리에 끼고 나가버린 잘생긴 얼굴을 떠올리자 위까지 아파왔다. 아니, 넌 절대 오지 마. 앞으로도 제발. 가능하면 영원히. 두 사람이 앉았었던 테이블을 정리하며 애버포스는 진심으로 소원했다. 가게 앞에 멧돼지 머리통 간판이 아니라 저 인간 머리를 걸어놓고 싶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항상 그랬듯이 그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형과 형의 애인, 두 인간들이 매상을 올려주겠다는 명목으로 거의 매일 들이닥치다시피했으니까! 게다가 핑계만 그랬지 항상 칼같은 2인분만 시키고 서너시간, 길게는 대여섯 시간까지 한 자리에 죽치고 앉아서 보는 사람 혈당치가 저절로 올라갈 정도로 사랑놀음을 해댔다. 아무래도 자신의 가게를 자기네 데이트 장소로 정한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바로 코앞에서 하하호호 명랑쾌활 대잔치를 벌이며 아주 신이 나셨다. 한참 사랑의 밀어라도 속삭이는지, 겔러트에게 뭐라 귓속말을 하며 생글생글 웃고있던 알버스에게 그는 초췌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형…… 정말 나는 괜찮으니까, 일부러 여기까지 들릴 필요는 없어……"
 "어떻게 우리가 다른 델 가겠어? 처남 가겐데!"

 아, 이 새끼는 또 지가 나서서 끼어들어. 우리 형도 입 있거든? 저도 모르게 말투가 뾰족해졌다.

 "됐고, 넌 앞으로 오지 마."
 "이런, 너희 둘 설마 아직까지 사이가 안 좋은 거야?"

 안 좋기만 할까? 내가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거긴 하지만. 아직까지도 큰 착각을 하고있는 듯한 형을 내버려두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첫사랑은 원래 안 이루어지는 법이라는데 이 인간들은 왜 이렇게 징하게 오래 가는 거야. 좀 깨져라.
 호그스 해드는 원래 큰 수입을 기대하고 연 가게는 아니었다. 사실 지긋지긋한 형네 커플에게서 탈출하려는 목적이 더 컸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할 것 아닌가? 그렇기에 오픈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의 가게가 학생들로부터 꺼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근 상인으로부터 전해들었을 때는 다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왜죠? 역시 어린애들이 보기엔 너무 칙칙한가……"
 "그게 아닐세. 자네 가게에 매일같이 교수들이 드나든다고해서 학생들이 오고싶지 않아해. 자네라면 쉬러 온 자리에서 교수와 만나고 싶겠나?"

 하여튼 정말이지 그의 인생에 있어 손톱만큼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들이었다. 하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형은 뛰어난 재능으로 인해 어린 나이에 호그와트의 교수로 임용되었고, 현재 변신술 과목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 잘난 애인께서도 쫄랑쫄랑 형을 따라 교수를 해먹고 있는 모양이셨고. 학교 졸업장도 없다던 주제에 어떻게 교수직을 꿰차는 게 가능한지는 미스터리였으나, 어쨌든 요지는 둘다 버젓한 교수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매일같이 내 가게에서 죽치고 있기도 하지. 수업준비는 대체 언제 하는거야? 아무리 대단한 매출을 기대하고 가게를 연 게 아니었다고해도 슬슬 스팀이 올라왔다. 그의 정신건강과 시력에 크나큰 상해를 입히고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 손님까지 쫓아내고 있단 말이지. 애버포스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한달 넘게 참아줬으면 꽤 많이 참았다.

 "형, 미안한데 이제 내 가게에 당분간 들리지 말아줬으면 해. 형하고 형 애인이 매일 버티고 있는 바람에 학생들이 여기 안 오잖아."
 "이런…… 이제껏 그건 생각 못 했네. 정말 미안해, 애버포스."
 "그럼 할 수 없지, 딴데 가야겠네. 마침 알버스 네가 좋아할 만한 디저트 가게를 알아놨는데. 처남, 그동안 신세 많이 졌어."
 "오. 애버포스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네. 어딘데?"

 미안한 사람치고는 너무 태세가 빠르지 않아? 겔러트와 팔짱을 낀 채 일어서는 형의 뒷모습을 배웅하며 그는 간절하게 바랬다. 이제 제발 다시는 오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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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 자르고 재업.
나름 그린델도어 쉬퍼들 간의 뇌트워크같았던 피아노 치는 겔 보고싶어서 썼던 글. ㅅㅒ헌 대사 인용o





 알버스의 모친은 머글 태생의 마녀였고 그렇기에 머글들의 악기에도 조예가 깊었다. 켄드라가 생전에 제일 잘 다루었던 것은 피아노였고, 그녀의 사망 이후에도 그녀가 쓰던 피아노는 뽀얗게 먼지가 쌓인 채 계속해서 집 한구석에 남아있었다. 정작 알버스 본인은 어머니가 살아있을 때도, 돌아가신 후에도 그 악기를 다루어본 적이 한번도 없었지만. 아마 겔러트가 방문 도중 우연히 피아노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평생 그 뚜껑은 다시 열릴 일 없었을 것이다. 남은 세 남매 중 그 누구도 이 건반악기를 다룰 줄 몰랐으니까.

 "피아노가 있었네? 알버스 너도 피아노 칠 줄 알아?"
 "아니, 나는 못 쳐. 저건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쓰셨던 거야."
 "오, 혹시 내가 한번 쳐봐도 돼?"
 "……너 피아노도 칠 줄 알았어?"

 피아노는 머글들의 악기인데. 자신이야 머글 태생 어머니를 둔 혼혈이라서 잘 알고 있다지만 보통의 마법사들은 그 존재 자체도 모르는 게 정상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름을 아는 걸 넘어서 직접 다룰 수도 있다고? 조금 놀란 알버스를 뒤로 하고 겔러트가 피아노로 다가갔다. 먼지 쌓인 뚜껑을 열고 희고 검은 건반 서너개를 느릿느릿 누르는 풍경을 알버스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 레, 미. 한동안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았는데도 그 소리는 여전히 맑고 청아했다.
 그동안 관리 잘 했나 봐, 따로 조율할 필요는 없겠네. 뒤돌아보며 저를 향해 씩 웃는 얼굴이 해사했다. 의자를 가까이 당겨앉은 후 본격적으로 건반 위에 손을 올려놓고 자세를 잡는 일련의 준비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이윽고 손끝에서 연주되기 시작한 멜로디는 유쾌하고 명랑했다. 연주 자체보다 피아노 건반 위를 춤추듯 오가는 길쭉하고 우아한 손가락에 더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겔러트 그린델왈드가 건반악기를 다루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의 상상 이상으로. 3분 가량 지속된 연주 동안 알버스는 넋을 잃고 겔러트의 연주에 집중했다. 마지막 음이 멈춘 순간에야 열일곱 소년은 찰나의 백일몽에서 벗어났다.

 "──어때?"
 "아름다운 곡이네. 제목이 뭐야?"
 "'An der schönen blauen Donau'. 어릴 때 도나우 강을 자주 봤거든. 그래서 더 좋아하는 곡이야."

 도나우 강. 낯설면서도 익숙한 지명이었다. 정작 한번도 그 실제 풍경을 본 적은 없었으니까. 새삼 눈앞의 소년이 바다를 건너온 외국 출신이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알버스는 가장이 되었고 발이 묶여버렸지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계획했던대로 도지와 함께 세계를 여행하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그는 날개꺾인 새처럼 고드릭 골짜기에 매였으나 세계는 매혹적인 또래 소년의 모습으로 알버스에게 나타났고 또 다가왔다. 여행과 너와의 만남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당연히 너를 택할거야, 겔러트. 네가 바로 나의 세계니까. 17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만나게 된.
 그날 이후로 겔러트의 방문 때마다 그의 피아노 연주를 듣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과가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미리 배워둘걸, 배워두지 않았던 과거의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만약 나도 피아노를 다룰 줄 알았다면 너와 대화할 소재가 더 늘어났을텐데. 그리고 어쩌면 같이 연주할 수도 있었을테고─

 "나는 연주할 때 지나치게 감정을 담는 경향이 있어."
 "음, 원래 그게 정상인 거 아냐?"

 어느날 연주를 갑작스레 멈추고 겔러트가 꺼낸 말에 알버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딱히 음악에 대해 조예가 깊은 것은 아니었지만 원래 악기연주엔 어느정도 연주자의 감정이 표현되어야 하는 것 아니었던가? 그 순간 겔러트의 낯 위로 짓궃은 장난기가 스쳐지나갔다.

 "그럼 알버스 네가 날 위해서 직접 연주해줄래?"
 "내가……? 하지만 난 전혀 모르는데…"
 "걱정하지 마, 내가 도와줄게."

 도와준다니, 가르쳐주기라도 한다는걸까 내심 설렌 알버스의 몸이 갑작스레 번쩍 들어올려졌다. 어? 당황할 새도 없이 공중에 들려진 몸이 다시 내려앉았다. 연이어 울려퍼지는 요란한 불협화음에 제가 겔러트에 의해 피아노 건반 위에 앉혀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지했다.

 "게, 겔러트……?"
 "도와준다고 했잖아."

 생긋 웃어보이는 얼굴에 순간 둔부와 허벅지에 배기는 건반의 불편한 감촉마저 잊혀졌다. 아니, 이렇게 사람을 건반 위에 앉혀놓고 무슨 연주를 하라고… 난처하게 눈동자만 굴리던 알버스의 뺨에 서늘한 체온이 와닿았다. 응? 불안하게 올려다보는 와중 겔러트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양 무릎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나만 믿어, 속삭이는 입술 모양새에 정신이 팔려있자니 자연스레 옷 틈새로 손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이번에는 당연히 피아노를 연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중략)


* * *
 "고장은 안났네."
 "만약 고장났으면 애버포스가 가만히 안 있었을 거야…"
 "그럼 내가 널 지켜줬을 텐데, 뭐. 네 형이기 전에 내 사랑하는 잉글리시 로즈라고. …참, 아까 네 연주 잘 들었어?"
 "아, 그런 말 하지 마……!"

 정말 다행히도 피아노는 고장나지않았다. 만약 어딘가 망가지기라도 했다면 정말이지, 동생 볼 낯이 없었을텐데. 겔러트의 농에 귀끝을 붉히다가도 새삼 가족이 쓰던 물건 위에서 무슨 짓을 했던건가 싶어 알버스의 얼굴이 도로 창백해졌다. 겔러트가 아니었다면 그런 짓 따위 절대 하지 않았을텐데, 겔러트와 같이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느슨해져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것이 그에게 빠져버린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했지만.
 항상 책임과 의무감에 짓눌려 살던 알버스에게 있어 겔러트 그린델왈드는 일종의 일탈이며 해방과도 같았다. 겔러트와 있으면 더이상 착한 아이이자 장남으로 남아있을 필요도, 모범이 되는 우등생으로 남아있을 필요도 없었으니까. 호그와트 입학 전부터 멍에와도 같은 압박감에 매여있던 소년에게는 생전 처음으로 맛보는 자유의 카타르시스였다. 그렇기에 알버스는 불꽃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상대에게 정신없이 빠져들었고 목을 맸다. 하루종일 대화를 나누고 토론을 해도, 마주보고 있어도 온전히 가라앉지 않는 갈증이었다. 그와 함께하며 자유를 느끼면서도 제게 있어 자유의 상징과도 같은 그가 어디론가 떠나버릴까 늘 두려웠다. 널 내 옆에 붙잡아두고싶어. 겔러트. 내가 원하는 만큼의 절반이라도 너 역시 날 원하고 있다면 좋을텐데──

 "알버스, 우리 대고모님 집에 하프시코드 있어. 알지? 피아노랑 비슷한 건데. 오늘 저녁식사 같이하러 안 올래?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가르쳐줄게."

 알버스의 인생을 뒤흔들어놓은 아름다운 구원자가 미소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설령 네가 이끄는 종착점이 파멸 뿐일지라도 나는 기꺼이 너를 따라갈거야. 알버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겔러트의 손을 마주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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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Grindeldore 오메가버스 Green-Eyed  (0) 2017.01.25

*영고앱 주의

1.달링/허니

 혈족의 연애사를 가까이에서 지켜보아야한다는 것은 때로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라고 애버포스는 생각했다. 어머니의 무릎 위에서부터 비밀과 거짓말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던 세살 터울의 형은 학창시절 내내 연애를 제외한 모든 방면에서 우수한 결과를 얻었다. 그래, 연애를 제외한다면 말이지. 워낙 한세기에 나올까말까한 천재셔서 또래집단 내에서도 다가가기 어려운 절벽 위의 꽃 이미지였는데다 스스로도 별 관심 없어보이기도 했고. 그런데 이게 대체 다 무슨 일이야, 옛말에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더니. 완전히 눈이 멀어버린 게 아닌 이상 저런 짓은 못하지…! 이제 익숙해질만도 하련만, 애버포스의 눈앞에는 환장할만한 광경이 펼쳐져있었다. 아니 자리가 부족한 것도 아닌데 좀 떨어져 앉으면 죽기라도 해? 미끈한 생김새의 금발 미남이 카우치에 느슨하게 기댄 채 앉아있었고, 그의 천재적이고 총명한 형은 뺨을 붉힌 채 굳이 상대의 허벅지 위에 올라타 앉아있었다. 서로의 허리와 목에 팔을 두르고있는 꼬라지가 무슨 죽고 못사는 연인들 같아서 눈꼴이 시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닌 거 같긴한데 왜 굳이 우리집에서 저 지랄을 하는 거냔 말이지. 여기가 자기네 신혼방이야? 어?

 "게… 겔러트. 이것 좀 풀어주면……"

 그래도 양심과 눈치란 게 남아있는지 알버스가 힐끗 제 쪽으로 시선을 주더니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다. 그는 혹시나 어린 여동생이 방에서 나오기라도하면 저 꼬락서니를 보지못하게 꼭 눈부터 가려줘야겠다는 생각부터 했다. 방해받았다고 느낀 건지 묘하게 불쾌해보이는 겔러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화살처럼 꽂혀온다. 아니, 여긴 우리집 거실이고 외부인은 너인데요. 너라고 너.

 "처남, 눈치라는 게 있으면 이럴 땐 좀 조용히 나가주는 게 어떨까?"
 "겔러트…!"
 "친애하는 나의 알버스, 눈치는 조금 없지만 진솔한 네 동생한테 자리 비켜달라고 해줘."
 "아… 애버포스, 저, 미안해……"

 형이 난처한 듯 말꼬리를 흐렸다. 평소의 날카로운 지성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멍청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대놓고 나가달라고하기는 미안한가보지? 내가 더러워서 나가고 말지. 그는 두손을 들어보이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네네, 물러갑니다. 간다고.

 "…달링,……"

 돌아나가기 전 슬핏 돌아본 풍경 역시 가관이었다. 낯간지러운 밀어와 함께 길고 우아한 손가락이 형의 뒤통수를 감싸쥐고 잡아당기는 것을 마지막으로 애버포스는 현관문을 세차게 닫았다. 혹시나 저기서 붙어먹기라도하면 꼭 둘다 죽여버려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그는 염소우리로 발길을 돌렸다.



2.애기

 아 진짜 짜증나. 애버포스는 몇번이고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유독 일진이 사나운 하루였다. 평소엔 칼같이 기상하는 주제에, 오늘따라 늦게 일어나는 것 같길래 굳이 형의 침실까지 올라가보지 말았어야했다. 괜한 염려는 결과적으로 그의 시각과 마음 모두에 깊은 상처를 남겼을 뿐이었다. 형이랑 형 애인이 한 침대 쓰고있는 걸 나라고 아침 댓바람부터 보고싶었겠냐고. 문을 열어젖히자 그때서야 소스라치게 놀라며 시트를 뒤집어쓰던 꼴이 아직까지 눈앞에 선했다. 더 열받는 건 그 자식은 별로 당황한 거 같아보이지도 않았다는 거야. 맨어깨를 드러낸 채 오히려 나른하게 웃어보이던 잘생긴 얼굴을 생각하니 아직까지 복장이 뒤집혔다.

 "저, 그러니까…… 사실은… 우리 사귀는 사이야……"

 아침과는 다르게 둘다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은 가운데 죽을 죄라도 지은 것 같은 표정으로 알버스가 고백했다. 그리고 그는 코웃음을 쳤다.

 "그걸 누가 모른대?"
 "? 어, 어떻게……?"
 "형의 그 돌대가리 저주를 맞은 듯한 얼굴만 봐도 세상 사람들이 다 알걸! 저 자식만 보면 눈까지 풀려서 맨날 실실거리고 다녔잖아!"

 자기가 천재라고 다른 사람은 다 백치인줄 아나. 그렇게 줄줄 티내고 다녔으면서도 자신이 아무것도 모를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는 게 더 한심했다.

 "둘이 무슨 사이든 알 바 아닌데, 왜 집안에서 난리야?! 여기 아리아나도 있거든? 그애가 그 잘난 애정행각이라도 목격하면 얼마나 충격을 받겠어?"
 "오, 그건 걱정하지 마. 우린 귀여운 처제의 마음에 충격을 줄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그렇지, 애기야(baby)?"

 와, 방금 것은 조금 많이 강렬했다. 오늘은 시각에 이어 청각까지 테러를 당하는군. 어디부터 지적해야할지 모르겠어서 잠시 침묵에 빠진 애버포스 앞에서 그 미식거리는 호칭이 부끄럽기라도 한건지 형이 얼굴을 물들였다. 남 앞에서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투정부리는 듯한 말투가 낯설게만 느껴져서 딱 돌아버릴 것 같았다. 내가 남이야? 아니, 그럼 둘이 있으면 지들끼리 저렇게 부른다는건가. 아무래도 저 사악한 자식이 우리 형한테 무슨 세뇌나 저주라도 건 게 아닐까? 생긴 것도 어째 어느 평행세계에 존재할 미래의 마왕 -한 반세기 가량 독방에 처박혀서 말년을 맞을- 처럼 생기지않았냐고?

 "이제 다 안다니까 굳이 숨길 필요도 없겠네. 알버스, 이리 와."
 "아,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는 좀…!"

 꼴값들 떤다. 입으로는 여기선 안되니 어쩌니 하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겔러트에게 안기는 형을 보고있자니 이제까지 살아온 삶에 환멸감마저 들었다. 헛구역질이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르는 바람에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몇 초만에 자신이 앞에 있다는 걸 완전히 잊기라도 했는지 아주 대단한 커퀴벌레 한쌍 나셨다. 그냥 따로 나가살아주면 소원이 없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애버포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따라 염소들이 간절하게 보고싶었다.



3.자기

 "자기야(sweetheart)."
 "……"
 "자기야, 알버스……"

 애처로울 정도로 늘어지는 목소리였으나 알버스는 애써 무시했다. 저 얼굴과 저 목소리에 약해져서 그냥 넘어가 준 게 벌써 몇번이던가. 계속해서 결재해야할 서류에 서명하던 도중 시선을 들어올리자, 비 맞은 새끼고양이같은 눈초리로 저를 응시하고있는 상대가 보였다. 그래도 약해지면 안 돼, 약해지면 안 돼.

 "내가 분명 경고했지, 두번 다시 내 학생들 건드리지 말라고."
 "그건──"
 "저번에는 우리 기숙사 학생 발목을 복도에서 거꾸로 매달더니, 이번에는 다른 학생을 호수에 빠뜨렸다며? 겔러트 너 정말 뭐가 문제야? 내가 학교에서 쫓겨나야 속이 시원하겠어?"

 그래, 이 말만은 꼭 해야겠어. 유독 집착이나 통제하려는 욕구가 심한 애라는 건 알았지만 직장에서까지 이러면 어쩌자는거야. 나도 직업과 사회생활이 있다고. 기어코 같은 직장에서 일하겠다며 저를 따라서 같이 호그와트에 교수지원서를 냈을 때만 해도 기특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정말 예상 못했다고! 설마 한참 어린 학생들한테까지 그 질투가 향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걔를 왜 그렇게까지 아끼는데?하고 틱틱대는 건 약과였고 알버스 자신(의 극악한 시험문제 난이도)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다가 걸린 학생이 한번에 50점 감점을 당했다는 걸 뒤늦게 알았을 때는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 외에는 아까 언급했듯이 학생을 복도에서 거꾸로 매달아버린다거나, 대왕오징어나 만나러가라며 호수에 강제로 밀어넣는다거나 등등. 그리고 어제는 블랙 교장이 결국 그 일로 자신을 교장실로 호출했었지…… 알버스는 진저리를 치며 특유의 꿰뚫어보는 듯한 눈초리로 겔러트를 응시했다.

 "다신 안 그러겠다고 약속해. 아니면 우리 헤어지는 거야."
 "알버스, 어떻게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해?"
 "그래서 네가 이제껏 한 짓은 별게 아니라서 쉽게 저질렀니?"

 이번에는 절대로 그냥 안 넘어가! 제 굳은 다짐을 눈치챘는지 겔러트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먼저 백기를 들었다.

 "알았어, 이제 안 그럴게……"
 "정말로?"
 "응, 근데 난 정말 널 생각해서 그런 거야 자기야…"

 기어이 한마디를 덧붙이고 마는 게 본인답다고나 할지. 대체 학생을 호수에 빠뜨리거나 복도에서 매다는 행위의 어디가 날 위한 행동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렇게 못 박아놨으니 한동안은 잠잠하지 않을까? 제발 그래야할텐데. 알버스는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4.여보

 그가 형의 직장 근처에 가게를 차린 데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어쨌든 미우나 고우나 상대는 피를 나눈 하나뿐인 형이었고, 이왕이면 우리 학교 근처에 열어줘 자주 찾아갈게- 라는 빈말이라도 무시할 수는 없었으니까. 어차피 대단한 수입을 기대하고 연 가게도 아니었기에 매상 자체에는 별다른 욕심이 없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이건 진짜 아니라고! 애버포스는 유리잔을 닦던 행주를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가게 자체가 그렇게 큰 편은 아니었는데다 손님도 드문드문 있었기에 코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화는 당연히 바에 서 있는 자신에게까지 다 들렸다. 정말 환장하고 미쳐버릴 노릇이었지만.

 "빨리 해봐."
 "꼭…… 해야 해? 역시 못하겠어…"
 "알버스 네가 어제 내기에서 졌잖아, 한 마디면 돼. 해봐."

 살다가 형이 우는 소리를 내는 것을 내 귀로 들을 날이 오다니. 애버포스는 묵묵히 행주를 도로 들어올려 잔을 계속 닦았다. 더러워진 행주 탓에 오히려 잔이 더 더러워지고있었지만 이미 그런 사소한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있었다. 바 바로 앞 테이블에 앉아있는 형과 형의 대단하고 잘난 동구권 출신 애인은 그가 어떤 심정이든말든─ 그들만의 세계에 빠져있었으므로.

 "여…… 여, 보."

 순간 어제 먹었던 저녁까지 그대로 토할 뻔 했다. 내 가게 안에서 대체 무슨 정신나간 짓들을 하는 거야? 와 시발 진짜 미친 인간들. 기어이 제가 원하던 소리를 듣는 데 성공한 겔러트가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10대 소년의 것처럼 명랑하고 쾌활한 웃음소리였다.

 "아하하! 그런 호칭도 나쁘지는 않네! 내가 이기길 잘했지!"
 "놀리지 마……"

 형의 얼굴이 귓바퀴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게 어둑한 가게 안에서도 훤하게 보였다. 아 정말 다 때려치우고 싶다. 가게 앞에 걸어놓은 간판의 잘린 멧돼지 머리를 저 번지르르한 금발 머리통으로 대체할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만 같았다. 기껏 와서 한다는 게 고작 2인분 주문하고 몇시간 동안 노닥거리면서 정신사납게 연애질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오지 말아줬으면 했다. 안 와주는 게 제 정신건강에 훨씬 유익할 것 같으니까. 언젠가 저 둘한테 가게출입금지를 먹이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며 애버포스는 더러워진 유리잔을 다시 힘주어 닦았다.



5.이름

 그는 이전부터 왜 영어권 인간들이 멋대로 사람의 이름을 자기네 식으로 고쳐서 부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메이저한 언어라고해도 자기들 편하자고 그러는 건 영 실례 아니냐고. 그렇기에 항상 그는 타인에게 자신의 이름을 소개할 때 원래의 발음을 고집해왔다. 성물을 찾기 위하여 들렸었던 고드릭 골짜기에서 한 소년을 만나기 전까지는.

 "겔레르트, 그린델발트?"

 차분하게 가라앉은 톤의 소년다운 목소리가 제 이름을 발음한다. 그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영어식 발음으로는 겔러트 그린델왈드라고 해."
 "겔러트."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영어식으로 발음한 제 이름이 그렇게 기분좋은 울림으로 들릴 수 있는 것이었는지. 이제까지 기를 쓰고 원래의 발음을 고집해왔던 것이 무색해지는 기분이었다.

 "네 목소리로 들으니 한결 기분이 나아지는걸. 앞으로 그렇게 불러줘, 알버스."

 금발의 소년은 해사하게 웃으며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상대의 이름 역시 꽤나 기분 좋은 발음이었다.
 벌써 30년 가까이 흐른 일이다. 꽤나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알버스와의 첫만남은 유독 생생했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종종 그날의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온화한 인상의 소년이 제 이름을 처음으로 발음하던 그 순간을, 대체 어떻게 잊겠는가. 영어식으로 발음한 내 이름이 그렇게 유려하고 사랑스럽게 들릴 수 있다는 건 그때 처음 알았지. 유감스럽게도 널 떠난 이후로는 단 한번도 그렇게 느낀 적이 없었지만. 그린델왈드는 데스크 위에 놓여있던 오늘자 조간신문을 펼쳤다. 겔러트 그린델왈드- 어둠의 마법사 다시 유럽을 공격하다. 대문짝만한 헤드라인이 춤추듯 1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 나라 인간들은 굳이 남의 이름을 자기들 식으로 써놓는단 말이지. 여전하군. 자신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그 표정을 어떻게 오해한 것인지 옆에서 조심스레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 국장님.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곧 그자는 잡힐 겁니다. 국장님도 이렇게 노력하고 계시니까……"
 "고맙네, 애버ㅍ── 나티."

 하필이면 알버스의 동생과 이름이 비슷한 상대일 게 뭐란 말인가. 생각에 빠져있던지라 하마터면 실언할 뻔 했다. 미 MACUSA의 심장부에서 태연하게 그 국장의 겉모습을 뒤집어쓰고있던 그린델왈드는 제 이름이 1면에 인쇄된 신문을 다시 접어 내려놓았다. 그때도, 지금도 내 이름을 영어식으로 부르도록 허락한 건 너 뿐인데…… 알버스. 오래전 헤어진, 이제 더이상 소년이 아닐 그가 새삼스레 보고싶었다.



6.자유:English Rose

 "알버스, 넌 나의 잉글리시 로즈야."

 아니 시발 대체 이건 또 무슨 미친짓이야. 이제 형과 형의 애인이 벌이는 사랑놀음에는 어느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저 새끼 저거 완전 선수 아냐? 공중에서 불러낸 새빨간 장미 한 송이를 형의 가슴팍에 꽂아주는 겔러트의 손놀림이 어째 예사롭지 않아보여 그는 도끼눈을 떴다. 거기에 저 멘트는 또 뭐란 말인가. 그의 영민하고 이지적인 형은 또 상대의 페이스에 휘말려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매번 저렇게까지 휘둘리는 것도 재능이다 싶었다.

 "내가-? 어, 그치만 장미는 겔러트 너와 더 잘 어울리는걸."
 "그건 그래. 난 예쁘니까."

 저 인간들이 미쳤나? 그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잉글리시 로즈고 나발이고 저 염병을 왜 나까지 있는 점심식사 자리에서 하는데. 안타깝게도 두 사람 모두 애버포스의 존재는 새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또 저 소리를 듣고 좋다고 웃는 알버스의 얼굴은 정말 한심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아니, 지가 장미랑 더 잘 어울린다는 뻔뻔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듣고 왜 형이 좋아하는데?

 "하지만 지금 내 눈에는 네 모습밖에 보이지 않는걸, 나의 사랑스러운 잉글리시 로즈."
 "겔러트……"
 "아! 제발 내 앞에서라도 하지 말라고!!"

 잘만 밥 처먹다 말고 대체 왜 이러는데! 참다못해 소리를 빽 지르자 거의 형을 식탁 위에 밀어눕히다시피한 재수없는 금발과 형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앗, 미안…… 애버포스."
 "이런. 처남이 같이 있는 걸 깜박했지 뭐야. 염소들한테도 먹이나 주러가지그래?"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이젠 저 망할 놈의 호칭을 굳이 정정해주고 싶은 마음도 들지않았다. 정신나간 인간들 같으니! 혹시나 식탁 부수면 죽인다, 진짜 죽일 거다. 그는 채 반도 먹지 못한 식사를 그대로 남긴 채 이를 갈면서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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