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ilight 카이우스xHP 알버스 필모크오. 글제목은 영 생각나는 게 없어서 임시가제.. 나중에 바꿀 듯ㅠㅠ
틔타에서 @fygrindelxdore님과 풀었던 썰 기반으로 합니다. 현대배경AU, 카이우스 본처와 겔러트 없음 주의.
기타 뱀프 관련 오리지널 설정O.
한 편당 대략 12000-15000자 정도 분량 잡을 예정인데 얼마나 편수가 늘어질지는 미정.
영생에 가까운 뱀파이어의 삶은 길고 무료했다. 몇백년, 몇천년의 밤을 지새우다 보면 본디 가지고 있었던 감각의 역치는 조금씩 무뎌져 가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수면을 취하지 않았고 인간의 혈액을 제외한 음식물의 섭취는 실질적으로 필요하지 않았기에, 인간일 때 존재했던 기본적인 욕구들은 대개 흡혈에 대한 욕구 하나로 수렴되어버리고는 했다. 인간 시절 존재했던 기본적인 욕구의 소멸은 인간성 자체가 마멸(磨滅)되어간다는 징조이기도 했다. 고작 백여년을 사는 필멸자와 불로불사를 누리는 불멸자의 희로애락의 기준은 철저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법. 그렇기에 뱀파이어의 삶에 있어서 오락은 꽤나 중요한 요소였다. 미쳐버리지 않기 위해서, 흐르는 세월에 그 이성마저 마모되어 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런 점에 있어서 카이우스가 택한 오락은 가장 과격하고 강렬한 것이었다. 처벌과 고문, 그리고 처형. 비록 뱀파이어가 되며 개화하게 된다는 개인의 특수능력은 끝내 발현하지 않았고, 그것은 내내 마음 한켠의 응어리였으나 그에게는 몇천년간 쌓아올린 볼투리의 막대한 권력과 부가 있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뱀파이어라고 한들 인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어찌되었든 카이우스는 볼투리 가문의 공동수장 중 하나였고, 뱀파이어 세계의 왕족이나 다름 없었다. 그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 자들은 오직 그의 형제들 뿐이었다. 아로와 마르쿠스, 몇천년간 함께 살아왔기에 거의 피붙이에 가까운.
카이우스가 자신의 능력에 대한 부재를 인식하지 않고 넘겨버렸는가 하면 그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무리 차고 넘치는 권력과 황금이 발 아래 있어도 그 부재만은 결코 채울 수 없는 갈증이었다. 그는 아로처럼 피부 접촉을 통해 마음과 기억을 읽을 수 없었고 마르쿠스처럼 타인들의 관계를 읽어낼 수도 없었다. 형제들은 카이우스의 결핍에 대해 단 한번도 언급한 적 없었으나 그것은 잊고 넘길래야 잊어버릴 수가 없는 현실이었다. 게다가 아로는 능력이 있는 자들을 매우 사랑했다. 독특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 속해있는 클랜의 꼬투리를 잡아 파괴하고 그들을 볼투리의 휘하로 데려오는 것이 아로가 택한 여흥이자 오락이었던 것이다. 능력이 있는 자를 아끼는 형제와, 세 수장들 중에서 유일하게 홀로 개인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신. 아무도 감히 면전에서 카이우스의 부족함을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그에 대한 스트레스는 죄인에 대한 더 잔인한 처벌과 가혹함으로 이어졌다. 그는 무소불위의 권위와 부귀영화를 쥐고 있으면서도 항상 억눌린 분노를 떨쳐내지 못했다. 능력을 소유하지 못한 자신과, 그런 자신을 타인이 얕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나를 우러러 보게 할 수 없다면 최소한 두려워하게 만들 수는 있겠지. 카이우스는 매번 그렇게 생각했다. 가혹한 처벌은 아주 동물적인 수단이었고 주위의 복종과 공포심을 끌어내기에는 충분했다. 로마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항상. 그는 그렇게 자신만의 유희를 즐기며 세 수장들 중에서 가장 잔학해졌고, 또 가장 교활해졌다. 몇천년 가까이 그러한 삶의 방식이 반복되었지만 생각보다 질리지 않는 여흥이었다. 하지만 그런 류의 말초적인 오락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언제나 단조로웠다. 심지어 카이우스는 몇천년을 살아가면서도 반려 또한 맞이하지 않았다. 배우자로 삼을 만큼 매력을 느끼는 인물을 만나지 못하기도 한데다 굳이 반려를 찾고싶지는 않았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의 반려가 능력이 있어도, 없어도 둘다 기분이 오묘할 것 같았으니까.
그렇기에 매일 반복되던 그의 일상에 일어난 작은 이변은 몹시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탈출이라고요?"
"그렇단다, 형제여.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지……"
아로의 목소리는 언제나와 같이 실크처럼 매끄러웠으나 형제를 오래 알아온 카이우스는 지금 아로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소식을 듣자마자 그에게 엄습한 감정은 불쾌감이나 분노가 아니었다. 신기함과 호기심. 원래 볼투리 가는 피를 마시기 위해 일개 클랜처럼 일일이 사냥을 하지 않았다. 세계 곳곳에서 제물이 될 인간들을 유인하여 볼테라로 이송해오는 것은 꽤나 오래된 전통이었다. 그들의 식사는 언제나 안전하고 신속하며 편리했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볼테라까지 이송되어온 제물들 중 한명이 탈출했다고 했다. 한낱 인간인 주제에 볼투리 가의 호위병들마저 모두 따돌리고, 그 포위를 뚫은 채 달아났다고. 그런 게 가능한 거였나? 갑작스레 일어난 호기심을 굳이 숨기지 않으며 카이우스는 느슨하게 다리를 꼬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아로?"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지요,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하이디의 말로는 어린 소년이었다고 하던데, 평범한 인간같지는 않았다고…… 마치 우리들처럼 희한한 능력을 쓰며 탈출했다고 하지 뭡니까!"
"호오, 애초에 인간이 맞긴 한건가요? 실수로 다른 일족 중 하나가 우연히 끼어들어간 건?"
평소 과묵한 성정의 마르쿠스마저 이 놀라운 소식에 관심이 생기는지 앉아있던 의자에서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러나 아로는 우아하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것은 절대 아니라는군요. 확실히 인간 소년이었답니다."
"하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저희의 영지이자 왕국인 이 볼테라에서……?"
"그게 문제란 거란다, 내 어여쁜 형제여.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했던 것인지──"
아로의 반듯한 미간이 서서히 좁혀졌다. 볼투리 가가 군림하는 천년왕국이나 다름없는 이 볼테라에서, 그것도 먹이로 끌고 온 인간이 도망쳤다. 이것은 단순한 해프닝을 넘어서 알려지게 된다면 볼투리의 권위 자체에 금이 갈 수 있는 사건이었기에. 침묵하는 마르쿠스와 명백히 언짢은 기색의 아로와 다르게 카이우스가 느낀 것은 다른 감각이었다. 인간이 혼자 이 볼테라에서 도주했다고. 그것도 우리와 비슷해보이는 능력을 발휘하여. 몇천년간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이변이었다. 볼테라는 일종의 식충식물의 덫과도 같았고 이제껏 제물로 낙인찍힌 자들 중 살아서 돌아간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이 어찌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니란 말인가.
"아로, 대체 어떤 자이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알아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미 추적대를 보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제대로 알아본 후 결정해야겠지……"
어떻게 죽일지. 딱히 덧붙이지 않았는데도 형제의 속내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아마 그땐 용케 살아 도망쳤을지 몰라도 이번에는 확실히 죽일 것이다. 고문과 처벌에 도가 튼 카이우스 만큼은 아니어도, 아로 역시 몇천년간 볼투리의 정점으로 군림해온 절대군주였다. 아로 특유의 냉혹함을 카이우스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궁금한걸. 무려 사자 아가리와도 같은 이 볼테라에서 도망친 상대였다. 난데없이 그 얼굴이 알고싶어졌다. 그렇기에 그가 내뱉은 말은 거의 충동적인 변덕에 가까웠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직접 다녀오지요."
"카이우스? 네가 직접?"
"네. 솔직히 궁금하군요. 감히 저희의 영지에서 달아난 귀여운 쥐새끼가 누구인지…… 허락해주시겠지요, 아로?"
카이우스는 보통 성에서 잘 나가지 않았다. 그는 기본적으로 필멸자들을 경멸했고, 외부에서 같은 인간인 척 위장하며 인간들과 섞이는 행위를 썩 내켜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이렇게 그가 자발적으로 나서는 모습에 두 형제는 꽤나 의외라는 눈치였다. 잠시 옆에 앉아있던 마르쿠스와 시선을 교환하던 것도 잠시, 아로가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안될거야 없지."
"감사합니다. 아로."
허락은 떨어졌다. 정말 간만의 외출이로군. 카이우스는 생각했다.
뱀파이어들의 능력은 아직 '살아있었을 때', 즉 인간이었을 때의 경험과 연관되어 발현된다고 한다. 화형당해 죽어가던 알렉이 그 고통을 차단하고 싶다는 염원을 품었기에 현재의 능력을 가지게 된 것처럼. 그렇기에 각자 발현되는 능력 역시 상이했다. 한번 점찍어둔 표적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 역시 이미 가문 안에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영국, 영국이라. 영국의 고드릭 골짜기…에 있는 것 같다고. 지구 반대편까지 달아났나 싶었더니 생각처럼 그렇게 멀리 도망가지는 않았다. 아마 쫓아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거겠지만. 거의 청동기 시대부터 쭉 축적해온 볼투리의 재력은 무시무시했고, 전용기 한두대 띄우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용기에 몸을 실은 채 카이우스는 잠자코 창밖을 내다보았다. 추적능력을 지닌 경호원은 그저 상대의 위치만을 말했을 뿐, 정확한 생김새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어떻게 찾아야 하나. 하이디의 보고대로라면 소년이고, 적갈색에 가까운 머리칼이었다는 것밖에 단서가 없던데. 일단 제가 나서서 자원하기는 했지만 새삼 막막해지는 기분이 엄습했다. 그런 단편적인 정보밖에 없다니 찾아내는 것 자체도 생각처럼 쉬울 것 같진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
"카이우스 님. 정말 혼자서 가시겠습니까?"
"몇번을 말하게 하는 거지? 나는 되풀이하게 하는 자를 싫어한다."
비행 자체는 몇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도착해서 막 내리기 전 조심스레 저를 붙잡았던 조종석의 경호원이 하지만, 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설마 경호가 없다면 내가 내 몸 하나정도 못 지킬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일개 인간 하나한테서? 치밀어오르는 모욕감과 분노를 억지로 가라앉히며 카이우스는 지면에 발을 디뎠다. 만약 제인이 지금 자신의 곁에 있었다면 당장 제 앞의 경호원을 고문하라고 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인은 저 멀리 볼테라에 있었고 그는 고드릭 골짜기라는 낯선 지역에 있었으며, 당장 이 자를 죽여버리면 돌아갈 때 새로운 자를 불러오도록 요청하는 것도 귀찮아진다. 형제들이 거기까지 가서 성격을 못 죽였냐며 한소리할지도 모르고. 제 불쾌함을 느꼈는지 새파랗게 질린 경호원을 무시한 채 카이우스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사냥의 시작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후 알버스가 택한 것은 세계 여행이었다. 유럽에서부터 아시아, 오세아니아,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대륙에 이르기까지 장장 1년이 넘는 긴 여행계획이었다. 그동안 그는 학교 내외에서 우수하고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 여행은 7년간 치열하게 달려오기만 했던 자신에게 주는 일종의 휴식이자 선물과도 같았다. 어차피 취직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능력과 성적, 재능이라면 그 어떤 직장이라도 그를 환영해 마지않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무엇보다 조금은 쉬고싶었고 학교를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보고싶었다. 여행의 파트너는 신입생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도지였고 그들이 제일 먼저 들리기로 한 나라는 이탈리아였다. 시칠리아 섬에서부터 나폴리, 폼페이, 로마. 그리고 문제의 그 일이 벌어진 것은 그들이 토스카나 주의 볼테라에 들렸을 때였다. 잠깐 도지와 떨어졌던 사이 그는 거대한 인파에 휩쓸렸고, 군중에 섞여 볼테라의 중심부에 위치해있던 고성의 입구로 밀려들어갔다. 그리고 곧 생지옥이 시작되었다. 비명과 애걸이 난무하고 마치 갇힌 닭떼들처럼 갈팡질팡하는 인파 사이에 끼여서 알버스는 탈출을 감행했다. 머글들이 주위에 있을 때는 마법을 쓰지않는다는 건 기본적인 원칙이었으나 이런 긴급한 상황에서라면 마법부 장관이 온대도 이해해줄 것이다. 대체 뭐였지? 그 자들은? 마치 양떼를 몰아 도축장으로 몰아넣는 사냥개들과 같았던 능숙한 태도. 번제의 제물을 간택하는 것마냥 익숙해보이는 모습들이었다. 도지와 간신히 조우하고나서도 그 의문점은 알버스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고, 그는 결국 양해를 구한 후 여행을 중단하고 귀가했다.
뭐였을까, 그 광경들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출구를 봉쇄한 후…… 마치 사냥같기도 했고 도살같기도 했다. 뱀파이어. 그동안 뇌리를 맴돌던 단어를 알버스는 천천히 혀끝으로 발음했다. 뱀파이어는 존재한다. 이미 호그와트에서의 7년간의 정규 교육을 통해 여러 유사인류의 존재는 익히 잘 알고있었다. 하지만 일종의 둥지를 틀고 그 곳으로 먹잇감을 유혹하여 끌어들이는 뱀파이어 무리에 대한 이야기는 생전 듣도 보도 못했다. 뱀파이어들은 본래 독립적인 성향이 강한 개체였다. 소규모의 클랜을 형성하여 유사 가족집단에 소속된 채 살아가거나 홀로 외로운 늑대처럼 살아가는 개체가 대다수라고 배웠건만, 자신이 볼테라에서 봤던 풍경은 차라리 왕국과 그 군대에 가까웠다. 자신의 영지에서 절대자로 군림하는 중세 군주의 모습이 그러했을까 싶을 정도로.
그 순간 창가에서 느린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자신의 방이 2층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반박자 늦은 이후였다.
"……?"
찰나 알버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닫힌 창문을 두드리고 있는 상대는 이 근방에서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얼굴이었다. 깔끔하게 뒤로 빗어넘긴 금발이 달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소년인지 소녀인지 미묘하게 구분하기 힘든 선이 가느다란 이목구비는 앳된 인상이었으나 쉬이 연령대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10대처럼 보이기도 했고, 20대처럼 보이기도 했으며 순간적으로 셀 수 없이 나이가 많은 노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홍옥처럼 새빨간 눈동자가 유리창 너머로 뚫어져라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선명한 빛깔의 핏빛 눈동자, 그때 볼테라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Ciao."
예쁘장한 외모 탓에 구분하기 힘들었던 상대의 성별을 알버스는 그 목소리를 통해 겨우 구분했다. 목소리 톤은 소년처럼 낮았다. 그리고 저 이질적인 분위기와 피처럼 붉은 홍채.
"뱀파이어구나, 당신."
낮은 속삭임과도 같았으나 용케 알아들었는지 창가의 상대가 입꼬리를 느슨하게 끌어올렸다.
"정답. 그러니 창문 좀 열어주겠어?"
뱀파이어는 집주인의 초대가 없으면 함부로 사람의 집 안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였던가? 그저 머글들의 미신이고 오래된 전설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이었던 모양이었다. 뱀파이어의 완력이라면 저 얇은 유리창 정도는 쉽게 깨부수고 들어올 수 있을텐데 굳이 제게 요청하는 걸 보면. 상대의 매혹적인 외모와 목소리는 한껏 독을 품고 핀 꽃처럼 유혹적이었으나 알버스는 고개를 저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 동네에 뱀파이어가 살고있다는 말은 십여년간 들어본 적도 없었다. 굳이 여기까지 나타난 걸 보면 이유는 뻔하잖아. 뒷덜미에 식은땀이 흘렀다. 내 지팡이가, 아까 어디쯤에 놨었지. 등 뒤로 뻗은 손이 지팡이를 찾아 미친듯이 책상 위를 더듬었다.
"싫어. 설마 복수하러 온거야? 내가 거기서 도망쳐서?"
"설마. 반은 맞고 반은 틀려. 우리는 자비롭지 않으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는 너그러우니까."
"무슨 소리야……?"
"궁금했을텐데 알려주러 온 셈 치지. 네가 도망친 볼테라는 우리 볼투리 가문이 다스리는 영지다. 마침 운나쁘게 제물들 틈 사이로 딸려들어간 모양이더군."
볼투리? 영지? 제물? 혼란스러운 가운데 낯선 단어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러니까 내가 재수없게 뱀파이어들의 한끼 식사로 낙점된 인파들 사이에 끼어들어가서 험한 꼴을 당했다 이거란 말인가. 겨우 책상 어딘가에서 찾아낸 지팡이를 움켜쥐며 알버스는 생각했다. 인간이 육식을 하는 것처럼 뱀파이어가 인간의 피를 마시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순리라고 생각한다. 생물로서의 본능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그런 방식으로. 인간 역시 공장식 축산산업을 운용하는 것 역시 잘 알고있으면서 왠지 거부감이 들었다. 지팡이를 쥐고 있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그저 그 장소를 탈출하는 것으로 끝난 악몽이라고 생각했건만, 저를 쫓아온 편린이 창가에서 질 나쁜 꿈처럼 미소했다.
"…볼투리는 대체 뭐야? 당신 가문의 이름인가?"
"우리의, 그리고 나의 가문 이름이지."
그러니까 창문 좀 열어줘.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흡혈귀가 다시 한번 유리창을 두드렸다. 그 눈웃음에 홀려 몇발짝 창가로 다가갔던 것도 잠시 알버스는 심호흡을 하고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고작 투명한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둔 상대를 겨냥한 채 그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콘프링고."
거한 폭발이 일어났다. 창유리 뿐만 아니라 창틀이 통째로 날아갔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뭐 나중에 수리하면 될 것이다. 집을 부숴먹었다면서 남동생이 어지간히 잔소리를 하기는 하겠지만. 당연지사 상대 역시 창문과 같이 나가떨어져 있었다. 정말 인간이 아닌 게 맞긴 한건지, 난데없는 폭발에 휘말려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지면에 착지하는 모습이 고양이과 맹수처럼 날렵했다. 그 정도 폭발이면 어디 한군데 생채기 하나쯤은 났음직한데 여전히 설화석고처럼 매끄러운 안면을 보며 알버스는 새삼 생각했다. 진짜 뱀파이어가 맞나보구나.
"뭐야, 방금 그건?"
너 인간이 맞기는 한건가? 방금 전과 다르게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경계심이 섞여있었다.
"나는 마법사니까."
"마법사?"
치켜올린 지팡이를 굳이 숨기려고 하지 않으며 알버스는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금발 흡혈귀의 앳된 낯 위로 미묘한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마법이라, 그래서…… 볼테라에서 달아날 수 있었던 거였군. 그런 방법으로. 언젠가 들은 적 있지, 인간이면서 우리와 비슷한 능력을 사용하는 부류가 있다고…"
"……"
"그럼 그 지팡이만 없으면 되는 건가?"
미처 놀랄 새도 없이 상대의 모습이 알버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릴 새도 없이 체온이 낮은 손이 바이스처럼 제 손목을 낚아챘다. 어떻게? 바로 코앞에서 오만하게 웃고있는 얼굴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웠고, 현실감이 없었다.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 같은 속도였다. 그에 놀라기도 전 뼈를 부러뜨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악력에 둔중한 고통이 엄습했다. 귀여운 장난감이네. 이것만 꺾어버리면 더이상 날뛰지 못하게 되는건가? 길고 매끄러운 손가락이 제가 쥐고 있는 지팡이로 향하는 순간 알버스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프로테고!"
무형의 방패가 순식간에 상대방을 밀쳐냈다. 자유의 몸이 되기 무섭게 그는 빠르게 연이어 주문을 읊조렸다. 임모바러스. 소녀와도 같은 외모의 뱀파이어가 그 자리에서 움직임의 자유를 박탈당한 듯 정지했다. 자신이 조금 헐떡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은 그때가 되어서였다. 지팡이를 고쳐쥔 채 몇발짝 다가가자 서로 눈이 마주쳤다. 찰나 인간의 눈동자 뒤로 짙게 드리워진 맹수의 그림자를 엿본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난 더이상 너희와 엮이고 싶지 않아. 고작 너희 식탁에서 벗어난 게 여기까지 쫓아올 만큼 자존심상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돌아가서 전해. 더이상 서로 관여하지 말자고."
다시는 내가 너희의 도시 근처에 발을 디딜 일은 없을 거야. 알버스는 또박또박 덧붙였다. 세상에 뱀파이어가 존재하며, 왕국과도 같은 거대한 군락을 이루고 살아가는 조직적인 클랜이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 것에 대한 교습료치고는 많이 비쌌다.
어쨌든 이제 더이상 엮일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순순히 말이 통했기만을 바라며 알버스는 뒤돌아섰다. 일단 이쪽의 의사를 전달해두긴 했지만 여기까지 집요하게 추적해온 상대방에게 쉽게 먹힐 것 같지는 않다는 불길한 감각이 엄습했다. 아무래도 당분간 집 근처에 보호마법이라도 시전해두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알버스의 예감이 현실화된 것은 만 하루도 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
똑똑똑.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부엉이가 편지를 가지고 돌아왔겠거니 별 생각 없이 창문가로 시선을 던졌으나 부엉이가 아니었다. 창백한 여름달 아래 푸르스름하게 물든 백금발과 어깨 위에서 흘러내린 검은 망토. 어제 제 창가에 깃들었던 소녀같은 용모의 뱀파이어가 다시 알버스의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다시 엮이지 말자고 했던 게 고작 어제 일인데! 굳은 표정으로 지팡이를 움켜쥔 채 벌떡 일어선 알버스를 향해 나이를 알 수 없는 상대가 입매를 느슨하게 휘어보였다.
"그때는 미안하게 됐군. 이번에는 그러려고 온 것이 아니다, 긴장하지 않아도 돼."
"뱀파이어 따위와 그러고싶지 않아. 돌아가."
"어제는 미안하게 됐다고 하지 않았나? 정식으로 소개할까. 나는 볼투리 가의 공동수장인 카이우스."
무려 수장이라고? 아무리 뱀파이어의 외모와 실제 나이는 상관없다지만 알버스는 일시적으로 당황했다. 게다가 겨우 그런 일로 수장급씩이나 되는 인물이 여기까지 방문했단 말인가. 상대방에게서 공격적인 기세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상대는 몇백년, 몇천년을 묵었을지 모르는 흡혈귀였고 결코 자신에게 우호적인 인물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어제 손목을 낚아채던 그 악력. 아직까지 시퍼렇게 멍자국이 남아있는 손목에 힐끗 시선을 떨어뜨렸다가 알버스는 방어적인 자세로 팔짱을 꼈다.
"더이상 하고 싶은 말은 없다고 했을 텐데."
"방금 사과했잖나?"
"사과했다고 뭐든지 해결되는 건 아니지."
지지 않고 받아치자 카이우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가문의 수장이면 거의 왕자님쯤 되는 건지, 평생 거절도 안 당해보고 살았나. 애초에 집안으로 들이지도 않긴 했지만, 알버스는 최후의 축객령을 내렸다.
"더이상 할 말 없으니 돌아가줘."
"…도도하네. 좋아. 그 일 때문에 왔던 건 맞지만 앞으로 더이상 널 귀찮게 할 일은 없을거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당연하게도 동화처럼 박쥐로 변해서 사라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마치 원래부터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카이우스의 모습이 순식간에 창가에서 사라졌다. 한여름밤의 환영이었던 것처럼. 돌아가라고는 했지만 이렇게 깔끔하게 돌아갈 줄은…… 알버스는 자신도 모르게 창가로 몇발짝 다가갔다. 창밖의 낯익은 풍경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 * *
"출발해."
"카이우스 님,"
"어서 출발하라고. 분명히 두번 말하는 걸 싫어한다고 말했을텐데?"
위협적으로 노려보며 짜증을 내자 그때서야 조종석에 앉아있었던 상대가 조종간을 잡았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긴장한 듯한 목소리를 듣고나서야 카이우스는 좌석에 몸을 기댔다. 원래라면 죽였어야 했는데. 그 애. 볼투리는 그들의 권위에 도전한 자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인간이든, 뱀파이어든. 그리고 카이우스는 누구보다 볼투리의 그러한 기조에 앞장서는 편이었다. 죄인을 고문하고 처형하는 것은 지난 수천년간 지겹도록 반복해왔다. 그런데 오늘은 왜? 그가 굳이 이 타국에까지 행차하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볼테라에서 그들을 망신시키고 도망친 인간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 확인한 후 정말 위협적인 요소일 거 같으면 제거해야 하니까. 마법사라고 했었던가? 인간이면서 뱀파이어와 비슷한 능력을 사용하는 부류가 존재한다는 것은 일찍이 알고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강한 존재들인지는 몰랐었다. 이제까지 별로 마주칠 일이 없었으니까. 볼투리의 권역 내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일은 바로 코앞에서 일어난 것이고, 공동수장으로서 그는 위신을 바로잡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감히 볼투리 가문의 권위에 먹칠을 한 자는 즉결처형했어야했다. 그래야만 했는데──
왜 내가 죽이지 않았지? 카이우스는 신경질적으로 기내의 내장재를 노려보았다. 겨우 스무살도 안되어 보이는 어린애였다. 열다섯? 아니면 열넷? 수천년의 밤과 낮을 지새워온 카이우스에게는 하루살이와 비슷한 수준의 티끌같은 미물에 불과했다. 붉은기가 감돌던 머리카락 아래 침착하게 자신을 응시하던 벽안이 환영처럼 아른거렸다. 꽤나 앳되고 어린 용모였다. 직접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면 혼자서 볼테라를 탈출한 장본인이라고는 믿지 못했을 것이다. 죽이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난데없이 폭발이 일어났을 때, 팔목을 틀어쥐고 그 지팡이를 꺾어버리려고 한 순간 강제로 밀려났을 때는 솔직히 약간 당황했었지만. 만약 우리의 혈족이었다면 꽤나 아로에게 예쁨받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소년은 인간이었다. 무려 볼투리의 권세를 코앞에서 짓밟은 상대이고. 뒤늦게 형제들에게 뭐라고 보고해야할지 골이 아파왔다. 솔직하게 고드릭 골짜기까지 찾아가긴 했지만 돌아가라고 해서 순순히 돌아왔다고 할 수는 없는데. 그럼 거짓으로라도 죽였다고 해야하나? 그의 형제이자 대표수장인 아로의 능력은 피부접촉을 통한 마인드리딩이었고 거짓말은 어차피 통하지 않을 터였다. 어떻게 둘러대야 하나 고심하면서 카이우스는 나른하게 상체를 뒤로 기댔다. 이미 차갑게 굳어버린지 오래인 심장 한구석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은 끈질길만큼 사라지지 않았다. 그로서는 처음 느끼는 낯선 감정이었다. 소년을 죽이지 않은 자신에 대한 의아함도 아니었고, 돌아가서 무슨 소리를 해야하는지에 대한 불편함도 아니었으며 감히 일개 인간에게 휘둘렸다는 분노도 아니었다.
그러고보니 이름도 알아오지 못했군. 정작 내 이름은 알려줬는데. 이름이 뭐였을까. 어째서 자신이 그런 것을 궁금해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으나 카이우스는 기꺼이 상념을 받아들이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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