겔알 의 연성 문장 네가 다정하면 죽을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죽어도 좋았다. https://kr.shindanmaker.com/679163
"아,"
찰나 날카로운 통각이 손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완전히 낯설기만 한 감각은 아니었다. 이렇게 페이지를 넘기다가 손가락 끄트머리를 베이는 일은 종종 겪어보았던 일이기에. 하지만 몇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는 않는 예리한 아픔이었다. 저도 모르게 책에서 손을 거두고 멀쩡한 손으로 다친 손끝을 감싸쥐고 있으려니, 이내 옆에서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날아들어왔다.
"왜 그래, 어디 다쳤어?" "종이에 손을 베여서……" "아. 그거 은근 아픈데. 네 손 이리 줘 봐."
겨우 베인 것 뿐이니까 그렇게까지 신경써줄 필요 없다고, 사양하기도 전에 낚아채이다시피 손이 잡혀서 끌려갔다. 맞닿는 손바닥의 촉감은 건조하고 서늘했다. 잘 세공된 보석처럼 매력적인 용모와 다르게 항상 그 성정과 언변은 불꽃처럼 뜨겁고 격렬했으나, 겔러트의 체온은 항상 이처럼 서늘한 편이었다. 무더운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제 앞에서 두꺼운 책을 여러권 쌓아두고 읽고있던 소년에게 꼼짝할 새도 없이 손이 잡혀있다는 것을 인식하자 뺨이 확 달아올랐다. 어깨동무나 팔짱같은 신체접촉까지는 괜찮았다. 세간의 상식에 비추어 보건대, 충분히 친구끼리도 할 수 있는 범주에 들 테니까. 하지만 손을 이렇게 잡히는 건…… 어느덧 손끝에서 엄습하는 예리한 통각은 반쯤 잊혀져 있었다. 자신도 통제할 수 없이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진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내 심장 고동이 들리면 어떡하지?
"종이에 베이면 생각보다 많이 아프더라고. 다음엔 조심해, 알버스." "으, 으응." "사랑하는 네가 아프면 내 마음도 같이 아프잖아." "…어?" "농담이야."
씩 웃어보이는 얼굴이 꼭 어린 소년처럼 해사하고 명랑했다. 가만히 무표정으로 있으면 찬바람이 풀풀 날릴 정도로 오만하고 고압적인 인상을 풍기기도 했으나, 웃기만 하면 더할나위 없이 쾌활하고 발랄하다. 정말이지 특이했다. 어느새인가 자신이 좋아하게 되어버린, 바다 건너편에서 불현듯 나타난 금발의 가니메데. 그래도 저런 말은 삼가줬으면 하는데. 왜냐하면- 네가 말하는 의미와 내가 원하는 것이 서로 상이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욕심내고 싶고 착각하고 싶어지니까. 너를 좋아해. 겔러트. 목 바로 아래까지 치밀어오른 진심을 억지로 삭히며 알버스는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괜히 제 속내를 밝혔다가 친구관계마저 잃고마느니 지금 현 상태나마 유지하고 있는 것이 나았다. 나는 괜찮아, 이대로 계속 네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숨결이 닿을 듯한 가까운 거리에서 눈이 마주치는 통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직까지 상대에게 손이 잡혀있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거, 슬슬 놓아줬으면 하는데──
"……"
생채기 난 자신의 손을 끌어다 쥔 겔러트가 다른 한쪽 손으로 느리게 허공을 쓸어내렸다. 아직까지 따끔따끔한 통증이 맴돌던 손끝의 생채기가 그 동작과 더불어 치유되기 시작한다. 지팡이도 없이 간단하게 이루어지는 무언마법. 아직 열여섯 살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그는 걸출하고 뛰어났다. 아마 타고난 천재란 표현은 그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 터이다. 알버스 자신이 이제껏 그렇게 칭송받았듯이. 17여년만에 겨우 조우하게 된 나의 반쪽, 피가 섞이지 않은 영혼의 쌍둥이. 알버스는 가끔 그와 자신의 영혼이 비슷한 색채를 띠고 있으리라 확신하고는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만큼이나 영리하고, 천재적이고, 탁월한 인물이 이 세상에 또 존재할리가. 어느덧 책장 모서리에 베였었던 흔적은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알버스의 손이 놓여난 것은 그와 동시에였다.
"고마워, 겔러트." "별 거 아냐. 간단한 치유술인걸. 내가 베였더라도 너도 똑같이 해줬을 거잖아."
서글서글하게 웃어보이는 얼굴이 오늘따라 눈부시게 느껴져 알버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도로 떴다. 기대를 아예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겔러트는 가끔씩 이렇게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훅 치고 들어오고는 했다. 자신도 모르게 기대해버리도록. 혹시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인 것이 아닐까 헛된 꿈을 꾸게 만드는 달콤한 다정함이었다. 네가 다정하면 죽을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죽어도 좋았다. 네 다정함 안에 잠겨 이대로 죽어버릴 수만 있다면.
이대로 질식할 것 같았다. 발목에 묵직한 추를 매단 채 깊은 심해에 가라앉는 것만 같은, 혹은 바닥없는 유사 속으로 질질 끌려들어가는 듯한 기분에 몇번이고 숨을 가쁘게 토해냈다. 서서히 느리게 죽어가는 것은 이러한 기분일까. 분명 숨을 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했다. 마치 누군가 목을 지그시 졸라오는 것처럼. 혹은 물 속에 잠긴 채 익사하는 것처럼. 이 감각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 어머니의 부음을 전해듣고 고향으로 돌아왔던 순간, 철없는 남동생과 망가져버린 여동생이 온전히 알버스 자신의 몫으로 남겨졌다는 것을 깨달았던 찰나의 절망감. 그리고 무저갱과도 같은 절망과 좌절에서 자신의 손을 잡고 끌어내주었던 또래 소년을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아도니스처럼 아름다웠던 외모도, 자신의 계획을 언급할 때 유독 별처럼 반짝이던 눈빛도, 동유럽 악센트가 약하게 섞여있던 낭랑한 목소리도, 쾌활했던 웃음소리도, 상념에 깊이 빠져들면 한쪽 발끝을 까딱거리는 사소한 버릇마저도.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네가 나의 구원자라고, 나의 태양이고 마침내 만난 나의 반쪽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는데. 겔러트. 짧고도 길었던 지난 두어달간 애정을 담아 수백수천번도 넘게 부르고 써내려갔던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제 모래를 씹는 듯 까끌까끌하게만 느껴질 뿐인 어감에 혀끝이 썼다. 천사의 얼굴과 독사의 혀, 수려한 외모와 그보다 더 현란했던 언변. 그런 그를 사랑했었다. 온통 잿빛으로 바랜 세계에서 홀로 찬란한 황금빛으로 반짝이던 또래 소년을. 숨을 쉬지 못하고 죽어가던 자신에게 도로 호흡을 불어넣어준 나의 구원자. 한동안 숨통이 틀어막혀있었던터라 다시 만난 호흡이 너무나 달콤해서, 그 숨결에 독이 섞여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눈을 감고 들이켰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토록 참혹하게 돌아왔다. 차갑게 식은 여동생의 마지막 모습이 다시 선연하게 눈앞에 떠오르는 바람에 알버스는 진저리를 쳤다. 추위를 느끼는 것도 아닌데 손끝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나 때문에, 내 잘못 때문에. 그런 위험한 생각에 미쳐서 그애를 내버려두는 바람에. 오빠──, 여동생의 마지막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전에 맴돌았다. 다시 숨이 턱 막혔다. 물밖에 내팽개쳐진 채 의미없이 아가미를 뻐끔거리는 수중생물처럼, 부레를 잃고 해변가에 표류한 채 헐떡이며 죽어가는 인어처럼. 자신은 도로 심연 깊숙히 침잠해가고 있었다. 호흡을 잃어버리고서 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을까.
변호사는 일종의 상어와도 같은 존재이다. 언젠가 강의를 수강했던 로스쿨 모 교수가 주장했던 표현이다. 그 당시에는 별 생각 없었는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로펌에 입사하고나서 종종 되새기게 되는 표현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이 그저 피냄새를 좇을 뿐인 상어라, 나쁘지는 않지. 신규 변호사의 경우, 처음에는 정의감에 불타다가도 차차 무뎌지고 오직 수임료에 의해서만 움직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지만 그는 달랐다. 애초에 얄량한 정의감 때문에 이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미끈하니 수려한 외모와 화려한 언변, 그리고 로스쿨에서도 쭉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천재적인 두뇌. 자신의 적성에는 이 길이 제일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옳았다. 겔러트는 같이 입사한 동기 뿐만 아니라 그 나이대 젊은 변호사들 중에서도 제일 잘나가는 변호사였다. 그리고 이번에 맡겨진 사건은 아주 간단한 가압류 건이었다. 그랬어야 했는데.
"또 기각당했다고? 왜?"
"저야 모르죠."
아, 짜증나. 겔러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또였다. 얼마전 클라이언트에게서 받은 사건은 또다시 재판정 문턱도 넘지 못하고 고스란히 반환되어 돌아왔다. 분명 몇번씩 검토했는데! 처음 기각되어 신청서가 반환되었을 때 오탈자든 실수든 뭔가 꼬투리잡힐 게 있는지 몇번씩 확인했던 터였다. 뭐가 문제야, 대체? 저번에 벌써 클라이언트가 로펌 사무실까지 찾아와서 비싼 수임료 받고 뭐하는 짓이냐고 한바탕 지랄을 하고 갔었는데 그 꼬라지를 또 봐야할 생각을 하니 속이 쓰렸다. 난 잘못 없어. 분명 완벽하게 했다고. 슬슬 꼭지가 돌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법원."
건물 바로 앞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목적지를 말하자마자 차가 출발했다. 벌써 몇번씩 제게로 돌아온 서류봉투를 왼손에 든 채 그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목을 조이는 듯한 넥타이를 당겨 느슨하게 만든 후 심호흡을 했다.
마침내 법원 건물 앞에 차체가 멈춰섰을 때, 대강 지폐를 던지다시피 한 채 지면에 발을 디뎠다. 이미 몇번 와본 적 있던 곳이기에 건물 내부구조 자체는 눈에 익었다. 그는 서슴없이 익숙한 복도를 걸어갔다. 구두 밑창과 반들반들한 복도 바닥이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했다. 민사신청과 팻말 아래의 유리문 앞에 선 겔러트는 망설임없이 그대로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무엇을- 아, 변호사님? 무슨 일로,"
"법관 불러요."
"……네?"
"이 사건 담당 법관 부르라고요."
"그건 곤란한데요……"
"불러요. 여기로."
한번 눈이 돌아간 인간은 평소보다 더 뵈는 게 없어지기 마련이다. 신청서 봉투를 데스크에 요란하게 내려친 겔러트는 무조건 억지를 썼다. 지금 자신의 모양새가 전형적인 진상 민원인에 가깝다는 사실은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그는 로펌에서도 제일 잘 나가는 젊은 변호사였고, 고작 이 서류 몇 장 때문에 커리어에 빈틈을 만들 수는 없었다. 선량하게 생긴 남직원이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피하는 사이 주위 시선이 이쪽으로 꽂혀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쪽팔린 짓은 정말 하고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법관 보고 면전에서 직접 설명이라도 들어야겠으니까 어서 불러! 사내 블랙리스트에 오를 각오를 한 채 겔러트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평온한 목소리가 그와 직원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절 찾으시는 분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그쪽이?"
법관이라기보다는 민원인 내지는 견학 온 로스쿨 학생이라고 착각했을 지도 모른다. 상대가 걸치고 있는 것이 특유의 그 법복만 아니었어도. 검은 법복을 입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만큼 앳된 인상이었다. 20대 초중반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어려보인다. 가발을 벗고있어 드러난 붉은빛을 띤 갈색 머리카락과 그 아래의 단정한 얼굴을 한동안 쳐다보다 말고 겔러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토록 찾던 상대가 바로 앞에 있었다. 아마 이제껏 몇번이고 신청서를 반려시켰을 바로 그 장본인. 이제까지 상대방과 만나게 되면 한바탕 벌여주리라 이를 갈았지만 기분은 얼떨떨했다. 의외로 너무나 어린 생김새여서 그럴 수도 있고,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매우 차분하고 침착해서 그랬을 수도 있었다. 왠지 페이스를 빼앗기는 것 같은 기분에 겔러트는 다시한번 정신을 추스렀다.
"아무래도 납득할 수가 없는데요, 이 신청서 반려는."
"이리 주시면 봐 드릴게요."
온화하게 답하는 법관에게 신청서가 담긴 서류봉투를 순순히 넘겨주면서도 묘한 기분은 영 사라지지 않았다.
겔러트가 말없이 지켜보는 와중에 젊은 법관은 서류를 한장한장 찬찬히 넘기며 뜯어보았다. 마지막 장까지 검토를 끝내고나서야 상대가 반짝 고개를 들어올렸다. 여전히 흔들림없이 고요한 눈매.
"이 가압류와 별개로 지금 본안 사건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네요, 변호사님."
"그렇습니다만……"
"그리고 본안이 상고심에 계속중인 상태군요."
"아,"
"헛걸음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이 신청서는 1심 쪽으로 가셔서 접수하셔야 하겠는걸요. 저희도 해드리고야 싶지만 관할 문제가 걸려있기때문에……"
아. 이럴수가. 그는 속으로 탄식했다. 본안이 상고심에 계속 중일 때는 보전처분의 관할은 1심 법원에서 맡게 된다. 보전처분은 상고심이니까, 아주 단순한 문제였는데. 애초에 관할이 달라서 안되는 것을 몇번씩 요구해봤자 먹힐리가 없었다. 관할 문제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오탈자니 다른 사유만 죽어라 찾고 있었으니. 왜 본안을 안 검토했지? 갓 졸업한 새내기 변호사나 저지를 법한 실수에 눈앞이 깜깜했다.
자살할까, 쪽팔려서 뒈지겠는데. 아까 분노에 차서 걸어오던 복도를 패잔병처럼 터덜터덜 걸어가던 와중 타인의 목소리가 그를 불러세웠다.
"그린델왈드 변호사님."
"──예?"
"그 가압류 문제는 죄송합니다. 미리 저희쪽에서 고지해드렸어야 했는데."
아까 자신에게 요지를 사근사근 설명했던 법관이었다. 멀찍히 떨어져서 봐도 소년처럼 앳되고 단아한 생김새의.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자니 적반하장으로 굴었던 몇분 전의 자신이 떠올라 속이 쓰렸다. 어딜봐도 내 실수인데, 굳이 왜? 의문점을 뒤로 하며 겔러트는 순순히 대꾸했다.
"아뇨. 단순한 관할 문제도 미리 체크하지 못한 제 불찰이죠. 신경쓰실 것 없습니다, 그러고보니 성함이-"
"덤블도어."
"덤블도어, 면 설마 그……?"
기억났다. 벌써 몇해 전, 명문 로스쿨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던 바로 그 어린 천재. 나이도 겔러트 자신과 별 차이가 나지 않던 것으로 기억한다. 입학부터 졸업까지 쭉 수석만 거머쥐고 유명 법조계 명사들과 일찍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문까지 발표했다던 법조계의 기대주 겸 슈퍼스타. 역대 최연소 법관으로 임명되었다는 이야기는 주워 들었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아마 풀네임이 알버스 덤블도어, 였던가. 자신이 할 말은 아니지만 꽤 독특한 느낌의 성씨여서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게 어리게 생겼을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지만.
그런데 내 이름은 또 어떻게 알고? 문득 의아해진 겔러트를 향해 요즘 가장 핫한 법조계의 셀러브리티가 생글 웃어보였다.
"전부터 말씀 많이 들었어요. 이렇게 직접 만나뵙게 된 것은 또 처음이지만."
"그런가요."
"그러니까, 혹시 가능하시면 내일 점심식사라도 같이 하지 않으실래요?"
잠깐, 얘 지금 나 꼬시는건가? 무해하다못해 순진해보이는 얼굴이 옅게 웃고 있었다. 표정을 봐선 전혀 아닌 거 같은데 대사는 또 너무나 전형적이다 못해 진부한 작업용 멘트 그 자체여서. 겔러트는 몇초정도 고민하다 대답했다.
"안될 거야 없죠."
"정말요? 그럼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변호사님 명함 좀 주시겠어요?"
마치 여우에라도 홀린 듯한 기분이다, 명함을 꺼내 건네주며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원래 항의나 하러 올 생각이었는데 사실 그건 내 잘못이었고. 게다가 그 유명한 천재마저 만났고. 얼떨결에 내일 그 상대와 식사약속까지 잡다니. 겔러트의 명함을 받아든 상대가 다시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럼 내일 뵐게요, 변호사님."
살짝 고개를 까딱해보이고 먼저 걸음을 옮겨 사라지는 낭창한 뒷모습을 보고있다가 겔러트는 문득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별로 머무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한시간 가까이 지나있었다. 내가 뭘 했다고? 정말이지 여우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을 되씹으며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새내기나 할 만한 실수를 하고 진상을 떠는 바람에 면을 있는대로 팔리긴 했지만, 기분은 아까처럼 그렇게 최악이지는 않았다. 이상하게도.
알버스가 그 사진을 발견한 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겔러트가 기거하고 있는 백셧 여사의 집에 들렸다가 거실 한켠에 놓인 커다란 은액자를 보게 된 것은. 바틸다 백셧은 매우 저명한 학자이자 유명한 마녀이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알버스와 교류하는 몇 안되는 인근 주민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부터 쭉, 그리고 아리아나의 존재를 알고 있는 아주 소수의 이웃. 몇년간 알고 지낸 백셧 여사에게 대조카가 있다는 것 자체도 금시초문이기는 했지만 그 대조카와 이렇게 가까운 사이가 될 줄은 더욱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요새는 백셧 여사보다 그 대조카인 겔러트와 더 자주 만나고 서신교환을 했던 터라, 이 집에 방문하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간만에 들린 백셧의 집안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특히 방금 알버스가 발견한 은액자에는 겔러트의 사진들이 여러 장 끼워져있어, 바틸다 백셧이 그녀의 사랑스러운 대조카를 매우 아낀다는 것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만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자신과 함께 찍었던 사진 역시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알버스는 약간 멋쩍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정쩡하게 떨어져있는 듯한 거리, 그리고 웃지 않고 앞을 응시하는 겔러트의 무표정 역시 둘 사이가 묘하게 서먹서먹해보이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네 웃는 얼굴, 정말 해사하고 예쁜데. 좀 미소라도 머금고 찍지. 애정을 담아 손톱 끝으로 사진을 가볍게 톡 친 후 하나하나 뜯어보던 알버스의 시선이 찰나 한 군데 고정되었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오직 겔러트 -그리고 가끔 알버스 자신의- 의 사진 뿐인 액자에서 다소 이질적인 어린 소녀의 사진이었다. 열살 전후쯤 되었을까, 앳되다 못해 어린 얼굴이 은액자 속에서 말갛게 웃어보인다. 어깨 즈음까지 기른 찰랑찰랑한 금빛 머리채와 푸른 눈망울, 갸름한 얼굴형. 전반적으로 새침한 인상이었으나 마치 요정처럼 예뻤다. 입고 있는 옷의 팔랑팔랑한 레이스 탓에 더욱 살아있는 인형처럼 보이는 소녀였다. 그러고보니 오밀조밀하니 선이 고운 이목구비가 누군가를 닮은 것 같기도 한데── 아, 설마. 알버스는 돌아서서 상대를 불렀다.
"겔러트, 이 여자애는 누구야? 널 닮은 거 보니까 혹시 여동생?" "나 여동생 없는데. 뭘 보고 그러는 거야?" "이 사진……" "사진? ─아. 이거."
성큼성큼 곁에 다가온 겔러트의 시선이 알버스가 들여다보고 있던 소녀의 사진에 닿았다.
"이건 내 어릴 때 사진인데." "뭐? 잠깐, 너라고?" "나 맞아. 아홉살인가 열살 즈음에 찍었던 거였던가."
자… 잠깐만. 순간적으로 천재소년의 총명한 뇌는 자신이 방금 받아들인 정보를 해석하고 수용하길 거부했다. 그러니까, 이 사진 속 인물이…… 겔러트의 여동생도 아니고 심지어 생물학적 성별이 소녀도 아니라고.
"미안한데 이 사진에서 네가 입고 있는 옷이, 어, 음, 여아용 아니야……?" "우리가 어릴 때 머글들 아동복 유행이 저런 거여서 그래. 그런 취향이셔서 말이지. 다시 생각만 해도 짜증나네."
정말로 싫은지 사진을 응시하는 눈매가 별로 유쾌해보이지는 않았다. 여전히 혼란에 빠진 알버스를 내버려둔 채 겔러트가 은액자의 표면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 사진 별로 안 좋아한다고 분명 말씀드렸었는데…… 굳이 여기에 끼워넣으셔야했나, 대고모님도 참."
조각같이 반듯한 옆모습 위로 사진 속 소녀의 웃는 얼굴이 느리게 겹쳐진다. 그러니까, 정말로 저 애가 겔러트구나. 가끔 그가 어릴 때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하다는 생각을 한 적 있기는 했지만 저렇게 예뻤을 줄이야. 새삼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바람에 알버스는 겔러트가 눈치채지 못하게 심호흡을 했다. 한때 늪같은 우울과 절망감 속에서 익사해가고있던 자신을 밖으로 끌어내준 매혹적인 베르길리우스. 바다 건너의 이국에서 등장한 나의 구원자. 그런데 유년기의 모습은 차라리 베아트리체에 가까웠다니. 새삼 이제껏 그와 함께하지 못했던, 그가 부재해있던 시간들이 아쉬워졌다. 너의 열다섯, 너의 열넷과 열셋, 그리고 열두살과 열한살, 열살 이전은 내가 영원히 알 수 없을 순간이기에. 진작 만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알버스는 억지로 미련들을 떨쳐냈다. 지난 시간들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이제 남은 시간들은 계속 함께할 수 있을 터였다. 열일곱, 열여덟, 스무 살- 그리고 아마 그 이후에도 계속. 서로가 있는 한 우리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너만 있으면 괜찮아. 알버스는 새삼 마음을 다잡으며 눈앞의 상대와 그의 유년 시절 편린을 번갈아 응시했다.
17년만에 사랑니를 발치했다. 첫 사랑니였다. 아릿한 아픔을 수반하며 잇몸을 뚫고 올라오는 사랑니를 결국 뽑아버렸을 때 제임스가 처음으로 느낀 감정은 해방감이었다. 사랑니가 신경 근처와 맞닿아있다거나, 뿌리가 휘어있다던가 혹은 이가 누워있지 않고 똑바로 나주었기에 발치 자체는 간단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발치가 아니라 그 이후에 찾아왔다.
"아…… 진짜 아파…" "언젠 하나도 안 아프다며?" "이제는 아프거든? 놀리지 마, 패드풋."
얼음팩을 뺨 옆에 바싹 가져다 댄 채 누워있던 제임스는 알싸하게 밀려오는 아픔에 미간을 찌푸렸다. 마취가 풀리고나자 서서히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고 당연히 통각도 그 안에 포함되어있었다. 치료사의 솜씨가 어쨌든 생니를 통째로 뽑아냈는데 아프지 않을리가 없었다. 아, 이거 의외로 아프네.
"넌 사랑니 아직 안 났냐?" "오, 프롱스. 난 벌써 열다섯 살 때 뽑았다고." "이 형님보다도 먼저 사랑니가 나다니…… 건방지구나, 친구." "딱 보기에도 너보단 내가 성숙해보이지 않아? 외모로든 지적수준으로든?" "우리의 우정과 멀린의 수염에 맹세코, 그건 절대 아니지."
그래도 가장 절친한 악우와 투닥거리다 보니 고통은 조금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내일은 오늘보다는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으며 내내 시리우스와 농담 따먹기를 하던 제임스가 절망하기까지는 채 12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확인하기 전까지.
"내 얼굴……!" "프롱스, 아침부터 왜 난리── 와. 너 지금 몰골 진짜 굉장하다."
절망했다! 거울 앞에서 나라 잃은 듯한 표정으로 망연자실하게 서있는 제임스의 뒤에서 시리우스가 포복절도하기 시작했다. 머리칼이 정돈 안 된 듯 뻗쳐있는 것은 괜찮았다. 항상 이랬으니까. 그런데 내… 내 얼굴. 내 잘난 얼굴이. 제임스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오른뺨을 느리게 매만졌다. 거울 속의 오른뺨은 평소와 다르게 퉁퉁 부어있었다. 왼쪽 얼굴에 비해 1.5배정도 더 퍼진 면적이며 알사탕이라도 문 듯 툭 튀어나온 흉한 모양새라니. 못생겼잖아! 이제까지 본 거울 속 내 모습 중 제일 못생겼어!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으로 제임스는 부어오른 뺨을 의미없이 더듬었다. 부기 때문인지 유난히 피부 표면이 뜨거웠다. 그리고 턱이 뻐근했다.
"이, 이거 왜 이런 거지……?!" "원래 사랑니 빼고 나면 다음날에 엄청 부어. 몰랐어?" "몰랐어! 왜 진작 말 안해줬어!" "프롱스, 대체 얼음찜질은 뭐 때문에 했다고 생각한 거야? 부기 예방하려고 하는 거잖아, 그거." "찜질 했는데! 하라는 대로 열심히 했다구! 근데 왜 이러지?" "몰라. 네가 제대로 안 했나보지."
한껏 빵빵해진 얼굴로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한 채 서 있는 친구에게서 등을 돌리며 시리우스는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제임스 포터는 마치 여름의 태양같은 인물이었다. 365일 웃는 얼굴로 지내는 듯, 밝고 활기차며 주변에 제 에너지를 나눠주는 듯한 인간상. 그런 제임스가 저렇게 절망한 듯한 표정으로 구는 걸 볼 수 있다니 희귀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저 광경 보여줄 겸 리무스랑 피터도 여기로 부를까, 시리우스는 몇 초 정도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차피 저 부기도 며칠 지나면 알아서 가라앉을텐데 평생 가는 것 마냥 괴로워하는 제임스의 표정이, 사진으로 남겨놓고 싶을 만큼 웃겨서.
"제임스, 어차피 사나흘 지나면 다 가라앉아." "뭐? 그럼 그동안 이 못생긴 얼굴로 지내야한단 말이야? 어디 나가지도 못하게 생겼잖아!" "음…… 그건 어쩔 수 없지." "말도 안 돼! 지금 나 완전 흉측하다고!"
마치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후다닥 제 침실로 달려가더니 바로 침대 시트를 뒤집어쓴다. 알아주는 퀴디치 선수 아니랄까봐 잽싸기 그지 없는 몸놀림이었다. 시리우스는 어이 없다는 눈빛으로 제임스- 로 추정되는 시트 가운데 툭 튀어나온 부분을 응시했다.
"지금 에반스라도 부르면 볼 만하겠다?" "끔찍한 소리 하지 마. 릴리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
부기 때문에 입이 잘 벌어지지도 않는 상태일거면서 말은 잘도 했다. 시리우스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제임스가 릴리 에반스에게 목을 매기 시작한 것도 벌써 몇년 된 이야기였고, 둘이 사귀기 시작한 것 역시 그렇게 오래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직도 릴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주제에, 지금 릴리를 불러온다는 말에도 질색하는 걸 보니 정말 충격이긴 한 모양이었다. 진짜 실물이 나타나면 어쩔까. 그래도 저렇게 시트 뒤집어쓰고 안 나오려나? 짓궃은 마음이 스멀스멀 일어나는 통에 시리우스는 깃펜과 양피지를 놓아두었던 책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학이 시작하고나서 단 한번도 손댄 적 없었던 물건들이었으나 지금 당장은 필요했다. 친애하는 릴리, 방학 잘 보내고 있어? 나는 제임스의 집에서 같이 지내고 있어. 다름이 아니라…… 그는 중간중간 슬쩍 뒤를 돌아보면서 사각사각 편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 발치 이후로 이틀이 더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기는 약간 완화되었을 뿐 거의 그대로였다. 이제 더이상 통증이 문제가 아니었다. 내 원래 얼굴이 영원히 안 돌아오는 건 아니겠지? 제임스는 여전히 불안에 떨며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걱정과 불안감에 의해 거의 만 하루 가까이 식음을 전폐하다시피한 상태였다. 얼음찜질도 하라는 대로 했는데 왜! 어째서! 억울해! 그깟 사랑니가 뭐라고?! 그 순간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보나마나 패드풋이겠지, 열기 싫다고 거부하려는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예상치 못한 이름을 들먹였다.
"프롱스? 에반스가 왔어. 문 좀 열어봐." "릴리? 릴리가 어떻── 지금은 안 돼!"
릴리가 지금 어떻게 우리집에 있는 건데?! 릴리와 함께라면 언제 어느때 어느곳에라도 항상 오케이지만 지금은 정말 아니었다. 제임스가 살면서 릴리 에반스를 피하고 싶은 유일무이한 순간을 고르라면 당연히 지금이었다. 이 모습을 어떻게 보여주란 말인가. 뺨은 퉁퉁 부었고 입은 제대로 벌어지지도 않는데다 평소보다 배는 더 못생겨져있는데! 이윽고 문 너머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제임스는 더욱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제임스?"
진짜 릴리잖아, 내 릴리! 언제 들어도 나이팅게일의 지저귐처럼 맑고 예쁜 목소리였다. 어쩌면 목소리까지도 예쁠 수가 있지, 완벽한 내 사랑…… 사랑하는 여자친구의 목소리에 잠시 상념에 빠져있던 제임스를 강제로 현실에 끌고온 것은 장난기 가득한 시리우스의 목소리였다.
"릴리를 이대로 밖에 세워둘 셈이야? 뭐, 네가 안 열면 따고 들어가면 되니까." "뭐?!" "알로호모라."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방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언뜻 보인 실루엣은 두 개. 제임스는 본능적으로 시트를 머리 끝까지 덮어썼다. 소년의 허세라고 해도 좋지만 릴리에게는 항상 멋지고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싶었다. 부끄러운 모습들을 보였던 건 사귀기 전에 있었던 사건들로 족했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아니야. 누군가 타박타박 걸어서 다가오나하더니, 제임스가 누워있던 침대 한켠이 무게를 싣고 가볍게 기울어졌다.
"제임스, 나 왔어." "릴리……? 어떻게?" "시리우스가 부엉이를 보냈었어. 네가 사랑니를 뽑고나서 많이 침울해져 있으니까 내가 있으면 도움이 될 거라고." "패드풋 너-" "계속 얼굴 안 보여줄 거야?"
아무리 지금 얼굴이 말도 아니더라도, 더이상 버틸 수 없었다. 제임스는 자신을 걱정해서 방문했다는 여자친구를 계속해서 무시할만큼 매정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그 대상이 릴리 에반스라면. 패드풋, 진짜 가만 안 둘거야. 기어이 릴리를 불러온 시리우스에게 원망의 화살을 돌리며 제임스는 천천히 시트를 내렸다. 빼꼼 눈 바로 아래까지 내리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 붉은빛이 도는 긴 갈색 머리칼을 단정하게 한쪽 어깨로 넘긴 채 차분하게 응시해오는 녹안. 정말 릴리였다. 예쁘다. 릴리를 마주하자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제임스의 눈에 릴리는 항상, 언제나 예뻤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못생겼잖아, 이런 꼬락서니를 릴리에게 보여야한다니. 그는 풀죽은 눈빛으로 낮게 웅얼거렸다.
"그런데…… 나 지금 정말 못생겼어." "넌 안 못생겼어." "진짜야…… 보면 실망할거라고."
릴리가 나한테 실망하면 어쩌지, 내가 봐도 못생겼는걸. 사랑니는 대체 왜 존재하는 거고 빼버리고나서도 이렇게 문제인걸까. 울상을 지으며 제임스는 바투 쥐고 있던 시트를 느리게 아래로 내렸다.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마자 부드러운 것이 뺨에 와닿았다. 릴리의 손이었다. 자신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다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어, 릴리……?" "제임스 포터, 너 하나도 안 못생겼어."
웃고 있는 릴리의 얼굴이 너무 예뻐서 순간적으로 눈부신 것을 본 사람처럼 눈앞이 아득해졌다.
"나한테는 여전히 잘생겼어, 예쁘고." "어……" "그러니까 얼굴 숨기려고 하지 마. 사랑니 뽑느라 고생 많았어, 제임스."
입술에 온기가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홀린 것처럼 멍한 표정을 한 제임스에게 릴리가 다시 생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시리우스에게 듣기로는 어제부터 제대로 식사도 못 했다며. 내려가자, 간단하게 스프라도 만들어줄게."
보드라운 손이 살며시 제 손을 잡아끌어온다. 릴리에게 끌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는 중에 거울을 지나쳤으나 이번에는 제 모습이 아까처럼 끔찍해보이지는 않았다. 제임스의 부기가 완전히 가라앉은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더 지나고 나서의 일이었다. 첫 사랑니가 뽑혀나간 잇몸이 완전히 아물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달 가까이 지난 후의 일.
1. 인어에 대한 전설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옛 이야기와도 같았다. 구전 속 인어들에 대한 묘사는 지역마다 조금씩 상이했으나 그 외관만은 항상 동일했다. 인간의 상반신과 물고기의 하반신을 지닌 아름다운 생명체들. 바다의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고 노래를 불러 뱃사람들을 홀려 잡아먹는 요사스러운 마물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으며, 인어의 눈물은 곧 진주가 된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인어가 인간이 되기를 소원하여 뭍에 나왔다는 동화같은 전설 역시 존재했다. 하지만 결국 모두 옛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허구의 존재에 불과하다. 그의 왕국은 삼면에 바다를 둘러끼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만들어진 전설일 뿐이라고. 겔러트는 항상 그렇게 단언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실제로 인어를 보았다는 목격자가 몇백년간 단 한 사람도 없었을리가 없었다. 어려서야 유모의 품에서 동화책을 읽으며 한번쯤 인어를 만나보고싶다는 꿈을 꾸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내일모레 성년을 맞이할 일국의 후계자가 그런 어린애 같은 소망을 품고 있는 것도 우스웠다. 그는 이미 동화나 민담, 전설 대신 제왕학과 정치학, 군사학이 더 어울리는 나이가 된지 오래였으므로. 그리고 그날 일어난 해프닝은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성년식까지 2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기에 각종 예법 등 익혀야 할 것들은 갈수록 많아지고 있었다. 성년이 되자마자 바로 왕위 물려줄 것도 아니면서 대체 왜? 자신을 전담한 왕실교사들의 지독함에 진저리를 치면서 몰래 성밖으로 빠져나간 것은 순간적인 충동에 가까웠다. 그는 왕실의 혈통을 이은 하나뿐인 후계자이기는 했지만 결코 모범적인 학생은 아니었기에 종종 빠져나갈 통로를 알아두었고, 그날 역시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왕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해양 국가답게 수도에 위치한 왕성에서 십여분 정도 걸어가면 바다와 맞닿아있는 해변가가 펼쳐졌다. 왕실 사유지였기에 인기척도 드물었고 이런 충동적인 도피처로도 딱 좋았다. 여느 때와 같이 사람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바닷가 풍경을 예상했건만 그날은 조금 달랐다.
"……?"
처음에는 운나쁘게 해변으로 떠밀려온 돌고래를 잘못 보거나 헛것을 본 줄 알았다. 당연히 텅 비어있어야 할 백사장에 인영 하나가 비스듬히 앉아있었다. 여길 어떻게? 자신이 본 것을 의심하며 한발짝 한발짝 다가갈 때마다 실루엣이 또렷해졌다. 본인 역시 인기척을 느꼈는지 저를 막 돌아보는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 제 나이 또래의 소년이었다. 처음 느낀 것은 전반적으로 색조가 옅은 인상이라는 것이었고, 그 다음으로 느낀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옷이 대체 저게 뭐야? 제대로 된 의복이라기보다는 마치 돛을 찢어서 그 천을 아무렇게나 걸친 것처럼 보이는 모양새였다. 심미적이거나 사회적인 이유가 아닌, 문자 그대로 맨몸을 가리기만 위해서 두른 것처럼. 가느다란 양 발목과 매끈한 종아리가 고스란히 상아색 천쪼가리 아래로 다 드러나있었다. 혼자 덩그러니 있는 걸 보면 딱히 일행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아보이는데, 어째 난감해지는 기분으로 겔러트는 이름모를 상대를 응시했다. 자신의 것보다 더 색채가 연한 푸른빛 눈동자가 얌전히 제 시선의 움직임을 쫓아왔다.
"이름이 뭐야? 왜 여기 혼자 있어?" "……"
왕족의 권위를 무기처럼 휘두르는 일부 노친네들을 평소에도 혐오해왔기에, 일부러 동년배로 보이는 소년에게 격의없는 말투로 질문했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더 곤란해지는 기분인데. 겔러트는 재차 말을 이었다.
"음, 혹시 말을 못 해? 아니면 외국인?" "……"
이번에도 역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방금 전과 다르게 성과는 있었다. 소년이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럼 왜 여기에 혼자 있냐고 물어봐도 소용이 없을 거고… 어떡할까." "……" "여기 내버려두고 갈 수도 없고. 혹시 나 따라올래?"
아마 몰래 왕성을 빠져나갔던 것을 부왕이나 교사들에게 들키면 호되게 혼이 나긴 하겠지만 그건 나중의 문제고… 외우다시피 지겹게 읽고있는 고전들도 항상 위정자의 덕목은 피치자를 돌보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저 군주의 덕목을 실생활에서 실천하고자 하려는 것 뿐이다. 정말로. 게다가 옷가지도 제대로 못 걸친 소년을 그냥 내버려두고 오기에 겔러트의 양심은 아직 건재했다. 모래톱 위에 앉아있는 소년에게 손을 내밀자 조금 머뭇거리는 듯 하더니 자신의 손을 잡아왔다. 맞잡은 손에 지그시 힘이 실리나 하더니 소년이 몸을 일으켰다. 갓 태어나 첫걸음을 떼는 새끼사슴처럼 위태롭게 버티고 서나 하더니 이내 제 쪽으로 픽 쓰러졌다. 간신히 어깨를 붙잡아 쓰러지는 걸 막아주긴 했지만, 오늘 방금 만난 상대와 갑작스레 신체가 맞닿는 기분은 꽤 묘했다. 어렸을 때부터 왕실의 유일무이한 후계자로서 보안이니 뭐니 하는 이유로 타인과 부대끼며 살았던 적이 없었던지라 더욱. 독특하게도 소년이 자신의 품 안으로 쓰러지는 순간 코끝에 바다 내음이 확 풍겨왔다. 흔한 물비린내나 짠내가 아니라, 뭐랄까, 유치한 비유지만 마치 인어같은. 숨결이 닿을 듯한 근거리에서 눈이 마주치는 것 역시 한없이 낯선 기분이었다. 괜찮아? 농을 던지듯 가볍게 말을 건네며 조심스레 어깨에서 손을 떼자 다시 소년의 몸이 휘청거렸다. 어디 다친 거 같지는 않은데…… 이대로는 한나절이 지나도 왕성으로 귀환은 어려울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불러오기 위해 자리를 비우고 싶지는 않았기에 잠시 망설이던 겔러트는 마음 속으로 결정을 내렸다.
"미안, 잠깐만 실례할게."
어깨를 붙들고 무릎 뒤에 손을 받친 후 단번에 안아들었다. 호리호리해도 남자애니까 꽤 묵직하리라고 예상했는데 생각보다는 수월했다. 갑작스레 몸이 들어올려지는 바람에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소년과 시선이 다시 얽혔다. 천이 위로 딸려올라가지 않게 다시 고쳐안으면서 겔러트는 안심시키려는 듯 웃어보였다.
"널 여기에 놔두고 사람을 불러오기가 뭐해서. 걷는 게 어려운 것 같으니까 내가 성까지만 안고 갈게. 괜찮지?"
혼란스러워하는 듯한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나 하더니 소년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는 내내 너무 주목을 받지만 않으면 좋을텐데, 내심 바람을 품으며 겔러트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꽤나 이상한 기분이었다. 노친네들 잔소리가 지겨워서 벌인 짧은 일탈이었는데 왕실 소유의 해변에서 생전 처음 보는 소년과 만나고, 무려 그 상대를 안아올린 채 왕성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대체 왜 그런 차림으로 혼자 모래사장에 있었던 것인지 이유가 궁금했지만 차차 물어보면 되겠지 싶었다. 그런데 얘 글은 쓸 줄 알까?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나중에 생각하자 싶었다. 첫 만남이었다.
2. 한때 인어들이 인간들 앞에 거리낌없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있었으나 이미 알버스의 대에 와서 그것은 금지된 사항이었다. 인간 앞에 자신을 드러내지 말 것, 그리고 인간과 절대 접촉하지도 말 것. 어린 인어들은 유년기부터 그런 주의사항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다. 그리고 알버스는 절대 규칙을 어기지 않는 매우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그렇기에 그날의 사건은 일종의 일탈에 가까웠다. 벌써 오래 전에 일어났던 이야기였다. 이름도 모르고 심지어 종족마저 다른 뭍 위의 인간 소년을 구해주었던 것은. 시간이 흐르며 인간들의 기술은 날로 발전했고 해양은 더이상 인어들만의 안전한 보금자리가 아니었다. 그날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유람선이 특유의 소음과 함께 바다 한복판을 가로질러가는 것을 응시하고 있던 알버스는 평소보다 수면에 가까이 있었고, 그래서 마침 타이밍 좋게 뭔가가 바닷물에 추락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사람, 그것도 아마 어린…… 새파란 바닷물에 이질적인 황금빛이 섞여 일렁이는 것을 본 순간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그동안 칼처럼 지켜왔던 금기를 어긴 이유는 그 당시에도, 그 이후에도 알 수 없었다. 물에 빠진 것은 열살 남짓해보이는 소년이었고, 입고 있는 의복은 인간들의 복식을 잘 모르는 그의 눈에도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자신도 모르게 받쳐안은 소년의 힘없이 늘어진 팔다리와 감긴 눈꺼풀을 쳐다보다 말고 수면으로 향했다. 인간은 물 속에서 호흡을 하지 못한다고 했었다. 인어의 입맞춤을 받은 인간은 수중호흡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오래된 전설이 있긴 했으나 알버스 역시 그 진위를 알지 못했다. 어서 빨리, 수면 위로 데려다주지 않으면.
그 순간 금발의 소년이 물 속에서 눈을 떴다.
눈동자는 놀랄 만큼 새파랬다. 마치 이 바다속처럼 명도 높은 푸르름이었다. 날 봤어. 시선이 닿는 순간 알버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순간 치밀어오른 감정은 자신의 정체를 인간에게 들켰다는 공포나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알 수 없는 가슴설렘에 가까웠다. 홀린 듯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다 말고 어느새 수면 바로 아래에 도착한 것을 깨달았다. 알 수 없는 감정을 뒤로 한 채 소년의 몸을 힘껏 수면 위, 바깥공기가 있는 곳으로 밀어올렸다. 다른 인간들이 발견할 수 있도록 몇십 초 정도 그러고 있었을까, 웅성거림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며 알버스는 도로 바다 깊숙히 헤엄쳐 내려갔다. 아주 짧은 조우였다. 그러나 그 기억은 매우 강렬하게 남았고, 물에 빠진 상대와 마주한 순간 느꼈던 감정의 정체를 스스로 깨닫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다시 한번 더 만나고 싶었다. 그동안 시간이 지나 더이상 어린 소년이 아닐 상대를. 이름은 당연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대였지만 갈수록 바람은 강해졌다. 육지로 나가서 다시 한번만 더 만나고 싶다는. 분명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한낱 구전 설화일지라도, 어린 인어들이 듣고 자라는 이야기 중에는 뭍에서 꼬리 대신 다리로 걸어다니는 인어들의 이야기가 꽤나 많았었다. 알버스는 꽤나 총명했고 다리를 얻는 방법에 대해 알아내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침내 알아낸 그것은 맥이 빠질 정도로 간단했다.
3. 타인에게 관심 없고 요리조리 빠져나가기로 유명한 왕실 후계자가 밖에서 고양이도 아니고 무려 사람을 주워왔다는 것은 왕궁 내에서도 극소수만 아는 비밀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솔직히 아직까지 잘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도 소년을 내보내지는 않은 상태였다. 이 상태로 왕성 밖으로 보내기에는 좀…… 자신이 이렇게 동정심 많고 너그러운 성격이었나 새삼 감탄하며 겔러트는 정물같은 자세로 책을 읽고 있는 상대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처음 데리고 온 날 두르고 있던 거적같은 천쪼가리는 내다버린지 오래였다. 자신의 옷을 입히기에는 한 뼘 정도 키가 작고 뼈대가 더 가늘어서 무리였고, 궁정 시종들 제복을 입히기도 뭐해서 결국 귀족 자제들이 입을 만한 옷을 따로 구해오게 시켰다. 그런 황당한 상황에서 만나서 그렇지, 이렇게 멀쩡하게 옷을 입혀놓으니 인물화의 모델로 삼아도 될만큼 단정한 생김새였다. 말을 못 한다는 게 아쉽긴 했지만, 어떻게 글은 또 읽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하루종일 책을 붙들고 있다시피 한 모습이 신기했다. 나는 저렇게까진 못 할 거 같은데.
"음, 걸음 연습할 시간이야."
아직까지 이름도 몰라서 제대로 못 부르고 있지만 어쨌든. 예상대로 글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듯 싶었다. 책에 코를 박고 있는 걸 보면 읽는 건 또 가능한 거 같은데 희한하기도 하지.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바닷가에서 솟아오른 것 같았다. 이름 모를 소년에게서는 오묘한 부유감이 느껴졌다. 인간의 겉모습을 하고 있되 마치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생물인 것처럼. 걸음이 서툰 것 마저도 그랬다. 소년의 걸음걸이는 첫날 느꼈던 것처럼 어색하고 서툴기 그지 없었다. 겉보기에 뼈나 근육은 멀쩡한 것 같은데 의사가 아닌 이상 구체적인 연유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손을 내밀자 읽던 책을 옆에 내려놓고 소년이 자신의 손을 잡아왔다.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더니 살얼음판이라도 디디듯 한발짝 발을 내디뎠다. 발목에 힘이 빠졌는지 잠깐 비틀거리다가 다시 무게중심을 되찾는다. 첫날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부자연스럽고 위태로운 발걸음이었다. 무너져내릴 듯, 품 안으로 쓰러질 듯 아슬아슬하게 몇 걸음 더 옮기고 나서야 반대쪽 벽에 겔러트의 등이 닿았다.
"오늘은 그만 할까?" "……괜, 찮아."
순간 겔러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이 방 안에는 나랑 얘밖에 없고, 들려온 목소리도 바로 코앞에서 들렸고, 그럼 정말로? 상대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더 소년 같았다. 앳된 외모를 보며 막연하게 상상했던 것보다 한 톤 낮은 침착한 목소리.
"너, 말할 줄 아는구나." "응, 미안……" "아니. 나한테 미안할 것까지는 없고. 이제까지는 왜… 아니다. 이름부터 물어봐야지, 이름이 뭐야?" "알버스."
이제는 잘 쓰지 않는 고어였다. 아마 희다, 라는 뜻이었던가. 나름 이미지와 어울리는 것 같다고 납득하며 겔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버스. 그런 이름이었구나. 혹시 내 이름은 알아?" "-겔러트?" "알고 있었네."
상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이름을 듣는 것은 낯선 기분이었다. 어디서 왔는지, 왜 그런 차림으로 홀로 있었는지, 이제까지 말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수십가지였지만 그는 질문을 쏟아붓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나쁘지 않았다.
4. 살며시 밸브를 열자 미지근한 물이 욕조에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뭍으로 올라온 후 홀로 욕실에 남겨지는 시간이 가장 편안했다. 아무리 자신이 원해서 택한 것이었다지만, 이제까지 살아왔던 익숙한 방식이 있는데 지금의 모습이 불편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여전히 어색하기만 한 옷을 가지런히 벗어 접어둔 후 미리 챙겨놨었던 소금을 욕조 안에 풀었다. 손을 뻗어 수온을 확인한 후 알버스는 조심스레 욕조에 몸을 담갔다. 물 안에 완전히 허리 아래가 잠기자마자 느리게 변화가 시작되었다. 곧게 뻗어있던 두 다리가 하나로 엉겨붙고, 매끈한 살갗이 이질적인 질감의 비늘들로 덮이기 시작한다. 이내 끄트머리에서 꼬리 지느러미가 튀어나와 펼쳐졌다. 물고기의 하반신이었다. 심해를 유영해야 하는만큼 한들거리는 관상어의 것처럼 연약해보이지만은 않은, 유연하지만 탄탄해보이는 하반신. 하체가 본래의 모습으로 변화함에 따라 양쪽 귀 아래 목덜미가 세로로 쫙 갈라지며 아가미가 입을 벌렸다. 물에 닿아있는 손가락 사이사이를 얇은 피막같은 물갈퀴가 채운다. 이제껏 살아왔던 익숙한 모습에 편안함을 느끼며 알버스는 널찍한 욕조 안에서 몸을 쭉 폈다. 풍성한 꼬리 지느러미가 욕조 가장자리에 비스듬히 걸쳐졌다. 인어가 인간의 다리를 얻는 방법은 생각보다 너무나 간단했다. 물 밖으로 나가 공기중에 노출되면, 그리고 물기가 완전히 마르고 나면 꼬리는 인간의 두 다리로 변화했다. 하지만 인어들은 바다 깊숙히 사는 생물이었고 가끔 바위 위에 올라가 앉아있는 경우는 있어도 물기가 마를 때까지 그러지는 않았기에, 이 단순한 사실은 오랫동안 비밀에 부쳐지는 것이 가능했다.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인어가 물 밖에 나가서 물기가 마를 때까지 머무르겠어, 나같이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야. 언젠가 물 속에서 눈이 마주쳤던 상대와 다시 만나고 싶다는 불가능에 가까운 소망만으로 끝내 육지에 올라오는 행위를 감행했고 다리도 얻었다. '걷는다'라는 개념은 그저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을 뿐인데 막상 경험한 걷기는 생각보다 어려웠고, 낯설었다. 물속을 가르고 나아가는 것보다 공기 속에서 움직이는 게 저항은 적은 느낌이지만, 당장이라도 중심을 잃고 넘어질 듯한 착각이 든다. 실제로 처음 뭍에 올라온 날은 도저히 걸을 수가 없어서 막연하게 어떻게 할까 고민하면서 해변에 앉아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두 다리로 서는 불안정한 자세로 인간들은 어떻게 걸어다닐 수 있는지 아직까지도 알 수 없었다. 더 익숙해지면 그처럼 혼자서도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게 될까. 일어설 때 매번 잡아주던 손의 감촉이 새삼스레 떠올라 알버스는 물갈퀴가 생긴 자신의 오른손을 하릴없이 쥐었다 폈다. 손마디가 길쭉하고 우아했던, 자신만큼이나 서늘했던 체온의.
"날 기억 못 하는 것 같긴 하지만……"
찾고있던 상대와 바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둘도없는 행운이었다. 인간은 훨씬 성장속도가 빠르다고 했었던가, 어렸던 소년은 훌쩍 성장해 있었고 어느새 청년 티가 역력했다. 그날에 비해 많이 달라진 것이 없는 자신에 비하면 천양지차였으나 그래도 눈매만큼은 여전히 똑같아서. 그 화려한 금발 역시. 전혀 기억 못하는 것 같아서 아쉽기는 했지만 벌써 오년도 더 지난 이야기였다. 물에 빠져서 정신 없었을 테니까 헛것을 봤다고 치부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기적같이 한번에 만나게 된 것은 좋은데, 그 후 어떻게 하고싶은지 딱히 생각하지 않았던터라 약간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무작정 널 만나러 왔다거나 네가 좋다고 하면 부담스러워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정체를 밝히기에도 뭐했다. 당분간은 그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싶었다. 막 상념에 빠져들려는 찰나 누군가 욕실의 문을 서너번 노크했다. 연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알버스의 이름을 불러왔다.
"알버스, 안에서 잠든 거 아니지? 너무 오래 있는 거 아니야?" "어, 아냐… 나갈게……!"
당장이라도 겔러트가 문을 따고 들어와 제 본모습을 볼 것 같은 불안감에 발버둥치다시피 욕조에서 빠져나오다 바닥 타일에 형편없이 몸이 부딪혔다.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소음이 문 밖에까지 들렸는지 다시 문밖의 상대가 문을 두드렸다.
"괜찮은 거야?" "괘, 괜찮아!"
걸려있던 대형 수건을 손에 잡히는대로 끌어당겨 정신없이 하반신의 물기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이 상태를 혹시 그가 보기라도 하면. 내가 그와 같은 인간이 아니란 걸 알아도 전과 똑같이 대해줄까? 주입과도 같은 반복적인 교육 탓에 알버스는 인간들이 이종족에게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잘 알았다. 아무리 자신이 첫눈에 반한 상대고 당장은 상냥하게 대해주는 거 같아도, 겔러트 역시 인간이었으니까. 이 꼬리지느러미를 보게 된 이후에도 똑같이 대해주리라 생각하기는 솔직히 어려웠다. 언젠가 정체를 고백해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아직 아니야…! 이미 푹 젖어버린 수건을 내려놓고 팔을 뻗어 새 수건을 꺼내 물기를 꾹꾹 문질러 닦았다. 골반 아래에서 꼬리 지느러미 끝까지, 비늘로 덮여있는 면적 전체를 말리는 것은 생각보다 꽤 어려웠다.
"들어가봐도 되지?" "어, 잠깐──"
문고리가 돌아가는 듯한 덜컥거리는 소리에 마음이 더 급해졌다. 물밖으로 나온 후 아가미는 사라졌지만 흰 수건 아래에서 아직 꼬리 지느러미가 툭 튀어나와있었다. 대충 말린 것 같은데 왜 안 변해, 왜……! 초조해지는 바람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 순간 욕실 문이 열렸다. 알버스는 본능적으로 수건으로 하반신을 가린 채 고개를 돌렸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익숙한 금발이었다.
"미안. 아직 옷 안 입었구나. 그런데 바닥에서 뭐해?" "아… 그게, 미끄러져서." "어디 안 다쳤어? 욕실에서 미끄러지는 건 위험해." "괘, 괜찮아."
미끄러져내릴세라 하반신을 가린 수건을 꽉 붙든 채 알버스는 자신의 꼬리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천 아래 가려진 게 인간의 다리가 아니라는 게 티가 날까봐 불안함에 심장이 요동쳤다.
"옷 입고 나와. 이번엔 미끄러지지 말고." "으, 응."
인형처럼 어색하게 웃으며 겔러트를 눈으로 배웅한 후에야 자신의 하반신이 다리로 돌아와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이지 아찔한 순간이었다. 몸에 소금기가 묻어있어 다시 씻어야한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닫고 알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5. 겔러트가 보기에 알버스는 무척 독특했다. 최초의 만남이야 이루 말 할 것도 없었고, 갑작스레 말문이 트인 것부터 분명 글을 쓰지 못했던 것 같은데 어느순간 글을 자유자재로 쓰기 시작한 것 역시. 처음 둥지에서 떨어진 새 주워오듯 데려왔을 때는 걸음마저 서툴렀는데 이젠 제법 비틀거리지 않고 잘 걸었다. 마치 왕성에 오고나서 차근차근 제가 익혀야 할 것들을 학습해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특유의 분위기 역시 한몫했다. 주위의 사물들과 묘하게 어울리지 않는 듯한 이질감과 부유감. 처음에도 느꼈지만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았다. 국적이나 가족 등 인적사항을 물어보려고 해도 은근슬쩍 화두를 돌리기만 하고… 현재 머무는 곳이 왕성이고 자신이 하나뿐인 왕실의 후계자란 걸 알았을 텐데도 별다른 태도의 변화가 없는 것 역시 신기한 점이었다. 하긴 신분을 알자마자 바로 거리를 두려고 하거나 노골적으로 불편해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매일 꼬장꼬장한 노친네들만 보다가 간만에 또래 소년을 보니 속이 트이는 기분이기도 했다. 책만 쥐어주면 행복해하는 것 같긴했지만, 그래도 매일 똑같은 곳에 콕 박혀있는 애를 밖에도 데리고 나가야 할 것 같아서 겔러트는 외출을 감행했다. 왕성에 데려오고 난 이후 첫 외출이었다.
"네가 직접 젓는 거야?" "왜, 걱정 돼? 어릴 때부터 배웠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다른 사람 태우면 네가 안 좋아할 것 같아서."
처음 만났던 바닷가로 데리고 나온 후 준비해뒀던 조각배를 띄웠다. 자신이 직접 노를 잡자 알버스가 어째 불안해보이는 듯한 기색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정확히는 도착한 곳이 그 해변이라는 걸 안 이후로 묘하게 저런 얼굴이었다. 왜 저러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겔러트는 굳이 묻지 않았다. 다소 긴장한 듯 반듯하게 앉아있는 알버스의 시선이 느리게 주변풍경을 훑었다. 겔러트 자신과 똑같은 벽안이었지만 훨씬 색조가 옅어 새파랗다기보다는 하늘빛에 가까운 눈동자였다. 등 뒤로 펼쳐진 진짜 하늘보다 더 하늘같은 빛깔이라고 생각하며 겔러트는 노를 저었다. 붙여주겠다는 호위병도 따로 물리치고 -애초에 두 사람 이상 탈 수 있는 크기의 배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둘만 올라탄 배의 분위기는 평온했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파도 소리와 이름모를 바다새들의 울음소리. 저 멀리 펼쳐져 있는 수평선이 눈에 들어온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초조해보이던 알버스의 표정 역시 많이 풀어진 후였다. 가끔은 이런 휴식도 필요한 법이지, 한동안 책과는 먼 삶을 살았던 주제에 겔러트는 스스로의 행위를 합리화했다. 주변 풍경을 둘러보다 말고 문득 눈앞에 있는 소년에게 눈길이 멎었다. 약한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 벌어진 셔츠깃이 나풀거리며 흰 목줄기가 드러났다. 성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항상 주변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지금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자연스러웠다. 알버스의 옆모습에 정신을 판 사이 유독 커다란 파도가 다가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파도가 배에 덮쳐들기 바로 직전이 되어서였다.
"……!"
한대 얻어맞는 듯한 묵직한 타격감과 동시에 작은 조각배는 무력하게 뒤집혔다. 당연히 그 안에 타고 있던 두 소년도 그대로 바다에 빠졌다.
"알버스?"
해양국가의 후계자답게 겔러트는 바다와 친숙했고, 수영에 능한 편이었다. 언젠가 어려서 물에 빠졌던 기억 이후로 더 집착했던 면도 있었다. 파도에 휩쓸렸던 것도 잠시 수면 위로 고개를 쳐든 겔러트가 뒤집힌 조각배의 뱃전에 매달렸다. 나야 수영할 줄 안다지만 그애는? 이런 파도치는 바다에서 수영할 수 있을까? 고개를 돌려 정신없이 찾았지만 온통 푸른 바닷물만 일렁일 뿐, 붉은빛을 띤 머리칼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아까 그 파도에 휩쓸려가버렸나? 간신히 배를 원상태로 돌려놓고 그 위에 힘겹게 기어올라갔다. 물에 빠진 생쥐처럼 온몸이 푹 젖어버린지라 스쳐지나가는 바닷바람이 유독 차가웠다. 여전히 보이지 않는 상대를 찾으며 다시 한번 이름을 불렀다. 익숙한 형체가 시계(視界)에 들어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너……?"
물 위로 떠오른 얼굴이 유난히 창백했다. 젖어서 뺨에 어지러이 들러붙은 적갈색 머리카락과 죄 지은 아이처럼 뭔가에 겁먹은 듯 올려다보는 눈동자. 어딘가 평소와 다른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 위화감의 원인을 겔러트가 눈치챈 것은 한 박자 늦은 직후였다. 알버스의 귀 밑 목덜미가 한 뼘 정도 길게 찢어진 채 허공에서 뻐끔거리고 있었다. …아가미? 바닷물 아래에서 이형의 형상이 아른거렸다. 대강 보기에도 인간의 하반신이 아니었다. 물고기의 꼬리였다. 인간의 상반신과 물고기의 하반신, 그리고 목덜미에 돋아난 아가미.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생물의 이름을 겔러트는 잘 알고 있었다. 그저 동화나 전설 속에서만 등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인어……"
언젠가 어려서 한번쯤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생명체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6. 들켰다. 들켜버렸다. 이래서 사방이 물인 곳에는 오고싶지 않았는데. 당장이라도 도망쳐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으며 알버스는 입술을 떨었다. 여기서 달아나는 거야 쉬웠다. 바다는 자신이 평생 살아온 곳이었고, 한낱 조각배나 인간의 헤엄보다 훨씬 빠르게 도망쳐 숨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달아나버리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겨우 찾아냈는데. 이제껏 함께 보냈던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어설픈 연심이 발목을 붙들었다. 평생 상대를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망설임 역시 알버스를 어쩔 줄 모르게 만들었다. 바다에 빠지자마자 다리는 원래의 형상을 되찾았고 아가미 역시 피부를 찢고 모습을 드러냈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생긴 얄팍한 피막 역시. 물에 젖어 금발이 캐러멜 빛깔로 짙게 물든 겔러트가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 알버스는 눈을 내리깔았다. 이제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정체를 숨긴 이종족을 경멸하거나 혐오할까? 아니면 자신을 속였다는 것에 대해 분노할까? 어느쪽이든 감당하기 너무나 버거울 것만 같은 느낌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알버스의 귓전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닿았다.
"…인어, 였구나. 이제 다 이해가 가네." "……" "잘 걷지 못했던 것도, 그런 차림으로 홀로 있었던 것도 다."
생각보다 화가 나 있거나 냉정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이제 시선을 들어올려도 되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알버스가 고개를 든 건 다음 문장에서였다.
"그러고보니 옛날에 바다에 빠졌던 적이 있었어. 그때는 아직 수영을 잘 하지 못해서. 그때 바다 속에서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던 것 같았는데… 그땐 물이 폐로 들어가서 헛것을 봤다고 생각했었거든." "……" "왜냐면 분명 그때 꼬리를 본 거 같아서. 착각이라고만 여겼는데- 그거, 너였어?" "아……"
기억하고 있었구나. 오래 전 이야기라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멍하게 상대를 응시했다. 표정에서 이미 대답이 읽혔는지 겔러트가 생긋 웃었다. 물에 빠져 형편없는 몰골이었는데도 성화에 등장할 법한 천사를 연상시키는 미소였다.
"진작 말하지 그랬어…는 무리였겠고. 고마워, 그때 구해줘서." "나, 나는."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사실 난 어릴 때부터 인어와 만나는 게 소원이었거든."
오늘서야 소원성취했네. 일국의 후계자는 마치 열살짜리 소년처럼 웃었다.
"그런데 그 꼬리 말이야. 다시 다리로 돌아올 수는 있는거야?" "물 밖으로 나와서 완전히 건조되고 나면……" "그럼 물 속에 들어가면 다시 꼬리로 변하고?" "응." "와, 진짜 마법같네. 일단 돌아가자, 올라와."
손이 뻗어왔다. 그것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것도 잠시 손을 맞잡고 뱃전 위로 몸을 실었다. 배가 기우뚱거리면서 알버스의 몸이 온전히 공기 중에 드러났다. 하복부 아래 비늘로 덮힌 하반신이 오후의 햇빛 아래에서 반짝였다. 늘어진 꼬리 지느러미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민망하게 느껴져 알버스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만져봐도 돼?" "어? 응……"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상대가 조심스럽게 비늘 표면에 손끝을 댔다. 인어에 비해 체온이 높은 사람의 피부가 와닿자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풍성하게 펼쳐진 지느러미에서부터 천천히 훑어올라가는 타인의 촉감이 생소했다. 손끝이 떨어져나가는 동시에 겔러트가 겉옷을 벗었다. 바닷물이 여전히 뚝뚝 떨어지는 겉옷에서 대충 물을 짜낸 후 겉옷으로 꼬리를 둘둘 싸맨다. 겉옷이 길고 넉넉했던 탓에 지느러미 끄트머리를 제외한 하반신이 손쉽게 가려졌다. 마치 크레페처럼 겉옷으로 감싸인 알버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완전히 말라야 다리로 변한다고 했잖아? 지금 우리 둘다 홀딱 젖어서 다 건조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으니까… 이렇게 가리고 돌아가면 될 거 같아서."
그럼 또 첫날같은 광경을 연출한 채 돌아가야 하는 걸까, 하는 어색한 마음보다 비밀을 들켰는데도 경멸당하지 않았다는 환희가 더 컸다. 알버스는 흘낏 시선을 앞으로 던졌다. 해변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7. 왕궁 내에 갑작스러운 건축 공사가 진행된 정확한 이유에 대해 알고있는 궁정의 인물들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그 공사를 진행하는 인부들이나 그 총책임자조차도. 그것이 설치될 태자궁의 주인이 많은 보수를 내걸었기에 공사는 비교적 빠른 속도로 마무리되었다. 사실 한 나라의 후계자가 갑작스레 제 거처에 만들겠다고 선언한 것치고는 다소 뜬금없는 시설이었다. 강화유리로 만들어진 거대한 수조. 돌고래 서너마리라도 충분히 키울 수 있을 법한 크기의 실내 수조였다. 게다가 수조가 완성될 때까지도 단 한 마리의 관상어도 사들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은 채워졌고, 수질을 신선하게 유지하기 위한 각종 여과기와 장치들이 설치되었으며 푸르스름한 조명들 역시 수조 바닥에 놓여졌다. 수조가 있는 곳에 출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의 하나뿐인 열쇠를 손에 쥔 채 겔러트는 그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당연히 진짜 바다와는 다르겠지만 나름 나쁘지않아 보이는 대체품이었다. 물론 이건 자신의 생각일 뿐이니 당사자의 의견을 묻는 게 낫겠지만.
"어떻게 생각해?" "괜찮은 거 같아."
옆에 서 있던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괜찮아야 할 텐데, 매일같이 바다에 갈 수는 없으니 그 대안으로 생각해낸 아이디어였다. 왜 쓸데없이 예산을 낭비하냐고 관료회의 측에서 반발이 있을만도 했지만 어차피 배정된 예산 내에서 사용하는 거고, 최근 몇년간 주어진 예산보다 적게 써왔으니 이정도 사치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한번 들어가 볼래?"
알버스가 조심스럽게 수조 옆에 놓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하의를 입은 상태로 물에 들어가면 몸이 변하는 통에 찢어지고 못 쓰게 되어버린다고 해서 -바다에 나갔던 그 날만해도 외투 한장으로 감싸고 데려오느라 고생했고- 일부러 목욕가운을 입게 한 상태였다. 기다란 가운 아래로 유독 가는 양 발목이 엿보였다. 처음 봤던 순간에도 느꼈지만 인간의 모습일 때 하체가 얄팍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원래 안 쓰던 기관이어서 그런가. 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알버스가 수조 가장자리에 걸터앉더니 미끄러지듯 안으로 입수했다. 그리고 변화는 시작되었다. 언제 봐도 신비롭고 믿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곧게 뻗은 두 다리가 하나로 들러붙나하더니 곧 색이 옅은 비늘이 표면을 뒤덮었다. 끄트머리가 갈라진 꼬리 지느러미가 꽃처럼 물속에서 하늘하늘 나부꼈다. 완벽한 인어의 모습이었다. 목욕가운을 벗어던진 인어가 유려하게 헤엄쳐 겔러트가 서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유리 한 장만을 두고 마주보는 기분은 묘했다. 갈라진 아가미가 팔딱팔딱 움직인다. 푸르스름한 조명 탓에 천장과 벽에 온통 물빛이 아른거렸다. 알버스의 얼굴 역시 파란 빛깔로 얼룩져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서로를 쳐다보나 하더니 물속에서 상대가 먼저 살풋 웃었다. 소년같이 해사한 미소였다. 그때서야 정확한 나이를 물어보지 않았다는 데 새삼 생각이 미쳤다. 인어도 인간과 비슷하게 나이를 먹을까? 인어도 인간과 유사하게 성장하고 늙어가는 것인지 새삼 궁금해졌다. 겔러트는 느리게 수조의 유리벽에 손바닥을 댔다. 서늘한 감각이 피부에 와닿는다. 그때 만져본 꼬리의 촉감도 이와 비슷하게 서늘했었던 것 같다. 물끄러미 제 행동을 응시하던 알버스가 자신의 손을 유리에 가져다댔다. 수조의 벽을 사이에 두고 손을 맞대고 있던 것도 잠시 상대의 몸이 위로 빠르게 솟구쳤다. 깊고 넓은 바다 속에서 살았었던 수중생물답게 꽤나 날렵한 몸놀림과 속도였다.
"……들어올래?" "내가?"
어느덧 수조의 가장자리에 몸을 걸친 알버스가 겔러트를 향해 손짓했다. 물에 젖어 반짝이는 얼굴에서 평소와 다른 생기가 넘쳤다. 역시 수조를 만들어주길 잘했나 싶어 순순히 수조 꼭대기를 향해 올라갔다. 가까이에서 본 상대는 정말로 더 인어같아서,
"그러고 싶긴 한데…… 옷 젖잖…?!"
이제껏 보지 못했던 장난기어린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 훅 가까워지나 하더니 시야가 뒤집혔다.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수면 깊숙히 가라앉는다. 간신히 물속에서 눈을 떴을 때 생글생글 웃고있는 인어가 코앞에 있었다. 나비처럼 나부끼는 적갈색 머리칼과 자신과 다르게 물속에서 더 자연스러운 몸놀림. 강제로 물에 빠뜨려졌다는 것을 잊어버릴만큼 환상적인 풍경이었다. 푸르스름하게 일렁거리는 물과 인어. 그런데 숨이 슬슬 막혀오는데, 다시 위로 올라가지 않으면. 벌어진 입에서 공기방울 서너개가 새어나왔다. 바닥을 차고 올라가려는 찰나 서느런 손이 겔러트의 양 뺨을 부드럽게 감싸왔다.
"……"
그 다음으로 이어진 행위는 너무나 의외의 것이어서, 겔러트는 눈을 크게 떴다. 입술이 서로 맞닿았다. 담백한 입맞춤이었지만 얼어붙기에는 충분했다. 먼저 떨어져 나간 것은 상대 쪽이었다. 느닷없이 먼저 다가왔던 것처럼. 자신이 여실히 당황한 게 표정에서 드러났는지 몇초 후 알버스의 표정 역시 당황스럽게 변했다.
<그게 아니고……!> "?"
마치 고래의 울음처럼, 청각이 아닌 피부 깊숙히 감겨드는 것 같은 파동. 이게 인어들의 의사소통인가 깨닫자마자 숨이 차서 자신도 모르게 물을 들이켰다. 5년도 더 이전 겪었었던, 폐부에 물이 차는 듯한 불쾌감을 각오했으나 각오한 느낌은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폐에 느껴진 것은 신선한 산소였다. 마치 평소처럼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호흡. 뭐지? 다시한번 호흡을 시도했으나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속인데도 숨쉬는 것이 가능하다. 어떻게? 인어와 입맞춤하게 되면 물속에서도 호흡을 할 수 있다고 어느 민담집에서 읽었던 것 같았다. 어린 마음에 꽤나 낭만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정말이었나? 자신이 눈치챘다는 걸 느꼈는지 알버스가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을 놀라게 해놓고 저런 얼굴이라니. 어쩐지 약이 올라 지면을 딛고 그대로 수조 위로 도약했다. 머리를 쳐들자마자 익숙한 공기가 폐부 깊숙히 스며들었다. 저를 따라서 물위로 머리만 내놓은 상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움직였다.
"겔러트?"
물 속은 너의 세계일지 몰라도 물 밖은 내가 속한 세계지. 겔러트는 팔을 뻗어 무작정 상대의 턱을 끌어당겼다. 어쩔 줄 몰라하는 눈동자 표면, 물빛에 반사된 푸르름이 일렁이고 있었다. 나만 놀라면 억울하니까.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입술을 포갰다. 몸을 뒤로 빼려는 걸 놓아주지않고 그대로 뒤통수를 잡아챘다. 아무리 수중호흡을 가능케 해 주기 위한 배려였다지만 나한테는 그거, 나름 첫키스였는데.
8. "네 꼬리 보여주지 않을래?"
상대방의 갑작스러운 부탁에 알버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게다가 여기는 물 한 방울도 없는 실내인데.
"벌써 몇번 봤잖아." "가까이서 제대로 본 적은 거의 없잖아. 예뻐서 그래, 예뻐서." "별로…… 예쁘지는 않은데."
자신이 보기에는 인간들 특유의 길고 곧게 뻗은 두 다리가 더 미관상 아름다웠다. 그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자세로 지면을 디디고 선 채 걸어다닐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놀라운지. 인간의 아이들 역시 바로 걷는 것이 아니라 걷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연습한 후에야 비로소 걸어다닐 수 있다고 하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꼬리 지느러미를 보여주는 게 조금 부끄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이 그와 다른 종족, 비인간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거 같아서. 그나마 물 속에서는 괜찮지만 이렇게 뜬금없이 보여달라고 하면. 난처한 표정을 짓던 알버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어디서?" "수조까지 가긴 좀 그러니까 욕조?" "어──"
얼떨결에 욕실까지 질질 끌려오다시피 도착했다. 궁 내에 욕실만 여러개였지만 하나뿐인 왕실 후계자가 주로 사용하는 욕실은 유난히 크고 화려했다. 매끄럽게 펼쳐진 대리석 재질의 바닥 위를 조심스레 걷고 있으려니 겔러트가 먼저 소형 풀장 사이즈의 욕조에 달린 밸브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미지근한 온수가 사정없이 콸콸 쏟아져내린다. 발목 즈음 물이 찼을 때야 욕조에 발을 내디뎠다.
"잠깐만, 너 옷은-"
자신이 상하의 모두 단정하게 갖춰입은 채로 물에 들어갔다는 것을 자각한 것은 조금 늦었다. 미온수에 잠겨있는 두 발이 먼저 변하기 시작한 통에 그대로 죽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옷감이 하릴없이 찢어지고 튿어지는 소리와 함께 영롱한 비늘로 조밀하게 덮힌 하반신이 공기중에 드러났다. 옷, 미리 벗어놨어야 했는데. 그의 앞에서 본모습을 보인 게 한두번도 아니기는 했으나 흥미롭다는 듯 뚫어져라 응시하는 시선이 따갑도록 강렬했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왜 저렇게까지 집요하게 쳐다보는 거지. 어쩐지 낯부끄러워지는 듯한 기분에 괜히 지느러미 끝으로 몇번 물 표면을 내리쳤다.
"음… 이제 다 봤으면 물기 닦아도 돼?" "예쁘다. 가까이에서 보니까 더 화려하네. 빛이 반사되는 각도에 따라 약하게 반짝이는 거 같아서. 이제 꼬리 말리는 거 도와줄게."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내가 먼저 보여달라고 했으니까 그 정도는 해야지."
전신을 다 감쌀 수 있을 만한 낙낙한 사이즈의 수건을 든 겔러트가 생글생글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꼬리 전체를 수건으로 감싸서 꾹꾹 눌러가며 물기를 제거하는 손길이 세심했다. 어느정도 건조되었다 싶을 때가 되어서야 물고기의 꼬리가 사람의 다리로 돌아왔다. 드러난 맨다리를 수건으로 완전히 가리기 전 상대의 손이 알버스의 발목을 가볍게 쥐어올렸다. 얼떨결에 다리 한쪽이 위로 딸려올라간 알버스가 의아한 듯 고개를 쳐들었다.
"전부터 느꼈는데." "……?" "네 발목 되게 가늘다. 원래 다리를 안 썼을테니 당연한가? 긴가민가했는데 진짜로 한 손안에 잡히네."
발목에 달라붙은 손가락의 모양새는 백조처럼 희고 우아해서, 상황을 잊고 넋을 잃게 만들었다. 피부와 피부가 맞닿는 감각이 유달리 어색하다. 마치 그날 수조에서처럼. 아직 인간들의 기류에 익숙하지 않은 자신이 느끼기에도 어째 분위기가 묘해지는 것 같아 알버스는 성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보니 아까 옷을 갈아입지 않고 바로 물에 들어가는 바람에 옷을 못 쓰게 되어버려서.
"아, 이럴 게 아니라, 나 옷 좀 가져다 줘." "옷?" "여벌을… 못 챙겨와서…… 그러니까, 이러고 돌아갈 수는 없잖아… 저어, 겔러트?"
부탁하려고 했는데,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는 이유가 뭐지. 여전히 웃는 표정인 채로 꼼짝도 하지 않고 응시해오는 얼굴이 알 수 없게 느껴졌다.
"아니면, 내 발목이라도 좀……" "어차피 궁 안인데 괜찮아, 내가 들고 가면 되니까."
들고 가? 뭘? 나를? 발목이 놓아지는 대신 몸이 번쩍 들어올려졌다. 마치 짐짝처럼 상대의 어깨에 들쳐메진 채 알버스는 당황해서 수건이 미끄러져 내릴세라 세게 움켜쥐었다. 설마 이대로 나가려고?
"잠깐, 남들이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입 잘못 놀리면 본인 일자리가 날아가겠다고 생각하겠지. 발버둥치지말고 얌전히 좀 있어줄래." "그냥 내 발로 걸어가면 안 돼…?" "미끄러지면 어쩌려고? 안 돼."
평소 격의 없이 대해주는 모습에서 거의 느끼지 못했지만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왕족이었다. 벌써 몇번이나 이렇게 들려서 가야 하는 건지, 알버스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9. "요즘 들어 유독 외출이 잦으십니다." "그러면 안된다는 국법 조항이라도?" "안될 거야 없습니다만." "그렇다면 경이 상관할 바가 아니지."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자 모노클을 낀 노대신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았다. 하여튼 아버지가 붙여놓은 교사들 중에서도 제일 짜증나는 인간. 저 뭔가를 캐내려는 듯한 눈알은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백년 묵은 능구렁이 같은 노인네를 일대일로 상대하고 있을 때마다 기가 쭉쭉 빨렸다. 내가 왕이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인간을 숙청하든 팔다리를 다 잘라서 뒷방 늙은이로 만들어놓든지 해야지. 짜증의 기색을 굳이 숨기지 않고 뒤돌아서는 겔러트의 뒤로 노대신이 발길을 붙잡듯 말을 덧붙였다.
"최근 외부에서 누군가를 데려오셨다고 들었는데요. 그후로 더 학문에의 기피가 심해지신 것 같다고 스스로도 생각하지 않으시는지?" "아니,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성년식까지 2년도 남지 않았습니다. 부디 지혜롭게 처신하시길."
그 정도 잔소리를 들어줬으면 충분히 참아줬다 싶었다. 성년이 되고나면 지금 멀쩡히 통치 중인 부왕이 갑자기 급사라도 하게 되나. 예법이고 나발이고 일부러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아버린 후 빠르게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빠른 걸음이 어느덧 거의 뜀박질로 변하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누가 보면 또 어지간히 뒷말이 나오겠거니 싶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뛰었다. 최근 계속 드나들어 익숙해진 복도로 접어들고, 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따고 들어서자 어느새 익숙해진 풍경이 그를 반겼다. 그다지 좁지 않은 방을 가득 채운 거대한 유리수조와 아래 위치한 푸르스름한 조명들, 조명 덕에 천장과 벽에까지 일렁거리는 듯한 물결. 그리고 그 수조 안에서 나비처럼 유영하는 인어.
"안녕, 나 왔어."
인기척을 느꼈는지 바로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려오는 눈매가 꾸밈없이 청신했다. 그는 물속에서 나풀나풀 손을 흔들어보이는 인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수조 위에 올라서자 기다렸다는 듯 수면 위로 소년의 머리가 쏙 솟아올랐다. 같이 드러난 맨어깨에서 물기가 반짝였다. 느리게 제게로 다가오는 모습이 꼭 부재했다가 돌아온 주인을 반기는 애완견같기도 하다는 생각에 살풋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미안. 아무도 안 왔지?" "응." "그럼 키스해도 돼?"
알버스가 대답 대신 눈꺼풀을 깜박였다. 조명의 빛에 물든 눈동자는 선연한 물빛이었다. 속눈썹이 뺨 위로 길게 그늘을 드리운다. 사람을 홀려서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가기도 한다는 무시무시한 전설의 주인공치고는 무해하기 짝이 없어보이는 모습이었다. 이미 거리는 충분히 가깝다. 겔러트는 상체를 조심스럽게 기울였다. 닿은 것은 인간보다 훨씬 서늘한 체온이었다. 저번에 한번 키스한 적이야 있지만 그때는 워낙 겨를이 없어서. 입을 어색하게 꾹 다물고있는 게 귀여워 내심 작게 웃음을 삼켰다. 인어들에겐 입맞춤이라는 개념이 없는 걸까 싶었다. 육지에 올라온 후 언어와 문자를, 걸음을 차례차례 습득했듯이 이것도 가르치면 금방 체득하겠지. 나도 처음이고 너도 처음이고. 입술이 열렸다. 혀가 맞닿는다. 구강 내의 체온은 피부 표면보다는 높게 느껴졌다. 그리고 인간의 것보다 조금 더 뾰족한 듯한 치열. 살짝 고개를 옆으로 틀며 깊숙히 파고들자 살짝 헐떡이는 듯한 숨소리가 났다. 보통 인간보다 폐활량도 더 좋을 거면서. 겔러트는 슬핏 웃었다. 인어가 이렇게 귀여운 생물일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만나러 와줘서 고마워. 그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널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
인어 관련 설정들은 Splash(1984)에서 차용.
틔타에서 누하님과 풀었던 썰들 기반으로 합니다
쓸때는 재밌었는데 나만 재밌으면 어떡하지? 겔이 너무 스윗한 거 아닌가? 캐붕같나? 그래도 au에서라도 겔이 알버스한테 상냥한 세계 하나쯤 있는게 낫지않을까?(합리화 고뇌하며 퇴고했음……
겔 묘사만 항상 빡세게 파다가 처음으로 영알 묘사에 공을 들여본 거 같다 인어니까요
애들 연애시키고 싶어서 쓰고싶었던 장면들 위주로만 짧고 빠른전개로 쓰려고 하는 글이라 중반쯤은 온 것 같아서 이쯤에서 끊고 올립니다 원래 한편으로 묶어서 한번에 올릴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길어져서ㅠㅠㅋㅋㅋㅋㅋ
상대의 금발 위에서 쫑긋거리는 귀를 알버스는 낯선 생물을 보듯 응시했다. 그러니까, 분명 고양이 귀였다. 얼룩진 털로 덮여있는 세모난 모양새 자체는 흠잡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그게 자리잡은 위치가 문제였을 뿐. 원래 귀는 정상적으로 있는 거 같으니까 설마 얘 지금 귀가 두 쌍인거야? 겔러트의 등 뒤에서 날렵한 모양새의 꼬리가 존재감을 과시하듯 벽을 탁탁 쳤다. 역시 귀와 동일한 색상의 꼬리였다. 고양이 귀, 그리고 꼬리.
"진짜 고양이 꼬리네……"
아연해지는 기분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자 부드러운 털결이 손끝에 감겼다. 체온을 품고있는 진짜 귀였다. 장식이나 가짜가 아니라. 얼결에 놀라서 손을 거뒀지만 피부에 닿았던 촉감만은 아직도 생생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몰라. 지팡이가 오작동됐나봐."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이렇게 되는데?"
다른 신체부위는 멀쩡한데 오직 고양이 귀와 꼬리 한 쌍만 튀어나오는 건 어떤 마법의 오작용이지? 폴리주스도 아닐테고. 혹시나 효과가 영구적인 건 아닐지, 저걸 파훼해서 원상복구하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머리가 복잡한 자신에 비해 정작 본인은 태연한 표정이어서 알버스의 기분은 조금 미묘해졌다. 워낙 생긴 게 고양이상 내지는 여우상에 가까워서 나름 잘 어울리는 것도 사실이기도 했다.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귀와 꼬리에서 억지로 시선을 잡아떼자니 겔러트가 씩 웃었다.
"그냥 만져봐도 돼."
"너는 네 몸인데 걱정도 안 돼?"
"돌아오겠지 뭐. 아니라도 네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하지만."
"괜찮아, 괜찮아."
손목을 끌어다쥐고 거침없이 제 머리 위에 얹는 태도가 태연자약했다. 손가락 사이로 사금처럼 흘러내리는 금빛 머리칼과 뾰족하게 솟은 한쌍의 귀를 어루만지고 있다보니 자신마저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상념이 들기 시작했다. 본인이 괜찮다면 정말 괜찮은걸까. 정 안되면 성 뭉고 병원에라도 데려가보면 될 테고. 새삼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홍채의 빛깔이 새끼고양이들 특유의 파란 눈망울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알버스."
"응?"
"이러고 있으니까 꼭 네가 나 귀여워해주는 거 같아서. 네 애완동물로 사는 것도 별로 나쁜 삶은 아니었을텐데. 이참에 나 안 키워볼래?"
뭐야, 그게. 귀와 머리카락을 쓰다듬다 말고 웃음을 터뜨리고 있자니 정말 고양이라도 된 것처럼 겔러트가 체중을 실어가며 어깨에 매달려왔다.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알버스의 몸이 기우뚱 뒤로 넘어갔다. 다칠세라 머리 뒤로 손을 받쳐준 채 명랑하게 웃고있는 얼굴 위로 고양이 귀가 별개의 생물처럼 쫑긋 움직였다.
"관심없어? 나 말 잘 들어."
"그럼 손 내밀어 봐. 자, 손."
이런 건 고양이라기보다는 애완견에게나 시키는 거던가? 본인이 시켜놓고 긴가민가해진 알버스의 손바닥 위에 겔러트가 냉큼 한쪽 손을 올려놓았다. 잘했다고 칭찬해달라는 듯하는 뿌듯한 눈빛에 정말로 애완동물을 키웠다면 이런 느낌일까 하는 기분이 엄습했다. 애완묘치고는 조금- 아니 많이 잘생겼지만. 입모양으로 농담이야, 속삭인 겔러트가 뭔가를 골똘하게 생각하더니 곧 가벼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정말 키워본 경험 같은 거 없어? 부엉이 말고."
"없는데…… 겔러트 넌?"
"나도 없어. 그런데 네겐 평범한 동물보다는 뭐랄까, 불사조같은 게 어울릴 것 같긴 한데."
불사조? 난데없는 소리에 알버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불사조는 고결하고 희귀하면서 까다로운 생물이었다. 죽음이 가까워지면 불꽃에 스스로를 불살라 도로 부활한 후 삶을 반복하는 새. 적어도 알버스가 알기에 이제껏 불사조를 길들인 마법사는 한명도 없었다.
"불사조를 어떻게 키워? 애완용으로 길들이는 것 자체가 무리일텐데."
"혹시 모르지. 알버스 너라면 가능할지도? 아무리 희귀한 생물이래도 나보다 더 걔를 예뻐해주면 안돼."
"애초에 못 키운다니까."
"아무려면 어때. 앞일은 모르는 거야."
꺄르르 웃는 얼굴에 잠시 정신이 팔려있는 동안 눈꺼풀이며 이마 위에 장난하듯 입맞춤이 연달아 떨어졌다. 시선 저 편에 보이는 꼬리는 수직으로 곧게 서 있었다. 분명 고양이들이 기분이 좋을 때는 꼬리를 저렇게 세로로 세운다고 어디선가 봤던 것 같았는데. 눈을 가늘게 뜨고 꼬리의 움직임을 응시하고 있자니 마디가 늘씬하게 뻗은 손가락이 알버스의 뺨에 감겨왔다. 어딜 봐, 나랑 있을 때는 나만 봐야지. 네 꼬리 보고 있었어. 아 내 꼬리?
"다음엔 너한테도 귀랑 꼬리 한쌍 달아줄게."
"어, 그건 사양하고 싶은데."
"이미 내 귀 만졌잖아. 그러니까 거부권 없어."
"아까는 네가 만져도 된다며?"
억울함에 목소리를 높이자 겔러트가 다시 깔깔 웃으며 어린아이를 어르듯 알버스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마주댔다.
"무슨 동물 귀꼬리 달고 싶은지나 미리 생각해놔. 사슴? 토끼? 뭐가 어울릴까."
"난 동의한 적 없는… 설마, 이러려고 일부러 그거 달고 나온 건 아니지?"
"그럴 리가."
비죽 웃고있는 모습이 어째 수상하다고 느끼는 순간 겔러트가 딱, 소리 나도록 손가락을 튕겼다. 그와 동시에 금발 위에서, 등 뒤에서 유유히 흔들리던 귀와 꼬리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역시 일부러 그런 거였잖아!
"너 의외로 순진한 면이 있는 거 같더라. 정말 믿었어?"
"아 진짜……"
놀리려고 한 건 아닌데. 미안. 애교스럽게 속살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미 사라지고 없는 고양이 꼬리가 살랑거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다음엔 애니마구스에 도전해볼까봐. 무슨 동물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땐 더 예뻐해줘."
"난 사람인 네가 더 좋은데."
"그건 나도 알아, 그치만 가끔씩은 신선하고 좋잖아?"
애니마구스는 알버스의 입장에서는 딱히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분야기는 했지만 상대가 도전한다는데 말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겔러트는 어떤 동물이 될까 궁금하기도 했다. 역시 생긴 것처럼 고양이과 생물일까? 아니면 여우?
"성공하게 되면 나한테 제일 먼저 보여줘야 해."
"당연하지. 같이 도전할래?"
"아니, 그냥 보는 걸로 만족할게."
같이 하면 재밌을텐데 아쉽게 됐다며 장난스레 웃는 얼굴이 오늘따라 유난히 고양이를 닮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겔러트가 정말로 애니마구스가 되는데 성공하게 되는 것은 몇개월 후의 이야기.
이거 어떡해. 울상을 짓고있는 표정이 조금은 낯설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제일 낯설게 여겨지는 건 머리 위의…… 귀 한 쌍. 원래 머리카락과 비슷한 색깔의 적갈색 털로 덮여있는 세모꼴의 귀가 시선 끝에서 쫑긋 움직였다. 아무리 봐도 고양이 귀였다.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히 움직이는 걸 봐서는 머리띠같은 건 아닌 거 같고, 애초에 성격상 이런 깜찍한 이벤트를 할만한 타입도 아니고. 그런데 웬 고양이 귀? 오늘 무슨 날인가? 대충 달력을 보며 가늠했지만 딱히 걸리는 것은 없었기에 겔러트는 자신의 감상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택했다.
"아, 고양이 귀네. 귀엽다."
"그렇게 말할 게 아니라 도와줘! 이거 못 없애겠어."
"어쩌다가 그렇게 됐는데? 네가 혼자 못 없앨 정도면 엄청 지독한 거 아니야?"
"나도 모르겠어."
시무룩해할 때 귀 끄트머리가 조금 처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착각이겠지. 설마 세트로 고양이 꼬리까지 생긴 건 아닌가 슬쩍 등뒤를 쳐다봤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꼬리는 없었다. 있었으면 더 귀여웠을 거 같긴한데, 내심 아쉬움을 느끼며 그는 찬찬히 알버스의 머리 위에 솟은 귀를 뜯어보았다. 볼수록 완벽한 한 쌍의 고양이 귀였다. 생긴 게 워낙 차분한 인상이라서 고양이과와는 많이 멀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또 나름대로 어울렸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언짢아 하겠지만 귀염성 자체는 별로 없는 애다보니 이 상황 자체가 일종의 서프라이즈처럼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이런 모습을 보겠어. 내심을 숨기며 겔러트는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마법약? 지팡이 역발사? 주문?"
"새로운 변신술 논문 준비하면서 테스트를 해봤는데 실수가 있었나봐."
"와, 너도 실수란 걸 하는구나? 그런데 이거 만져봐도 돼?"
"응? 응……"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겔러트는 냉큼 머리카락 위로 뾰족하게 솟은 귀에 손을 가져갔다. 얄팍한 감촉과 부드러운 털결. 나름의 온기를 품고있는 고양이 귀 특유의 촉감이 맞았다. 비록 그걸 달고 있는 건 제 또래의 소년이긴 했지만. 아무 생각 없이 귀를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알버스가 갑자기 한두걸음 뒤로 물러서며 몸을 뺐다. 고개를 숙인 채 묘하게 쥐어짜낸 듯한 목소리가 더듬거리듯 흘러나왔다.
"저, 겔러트. 그만 만지면 안돼?"
"아팠어? 너무 내 마음대로 만졌나."
"아니, 아픈 건 아니지만- 간지러우니까 기분이 이상해서."
"얼굴 빨개졌는데?"
"그냥 보지 마……"
갑작스레 고양이 귀를 달고 나타나더니 성격마저 고양이처럼 변덕스러워지기라도 했나 싶었다. 쟤 왜 저래? 다소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으려니 상대가 주춤주춤 뒷걸음질치다가 2층으로 후다닥 사라졌다. 얼떨결에 혼자 남겨진 입장에서 황망하기 짝이 없었다. 도와달라고 불러놓더니 도망가버리면 나더러 어떡하라고…
다시 귀를 떼어버리고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알버스가 부끄러워서 죽어가는 듯한 표정으로 어제 일은 잊어달라고 부탁한 것은 다음날이 되어서였다. 혼자서는 못 없애겠다더니, 잘만 해낼 거면서 대체 왜 불렀던 거야. 어제 왜 그랬던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루만에 고양이 귀를 떼버린 것은 솔직히 약간 아쉬웠다. 그 모습 꽤나 귀여웠는데, 나중에 머리띠나 마법으로 한번 더 달아줘볼까. 다른 속내를 품은 채 겔러트는 알버스를 향해 생긋 웃어보였다.
+영알 귀가 약할 거 같다는 동인설정이 있음 원래 겔만 쓰려다가 영알버스한테도 달아주고싶어서 2천자 미만으로 짧게. 바니에 이어 ㄴㅋㅁㅁ라니 정말 이래도 괜찮은가
여동생의 장례식이 끝난 후, 첫사랑이었던 소년이 떠나버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그 통에 아랫쪽 잇몸이 온통 부어오르고 시큰거리며 아팠다. 사랑니가 올라오는 것이 원래 이렇게 아픈 것이었던가? 며칠 참아보았지만 통증은 더 심해져만 갔다. 필연적으로 음식물을 씹어야하는 식사 때는 당연하고 살짝 스치기만 해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프기 시작했다. 꼭 널 닮았네, 이렇게까지 지독한 걸 보면. 소년은 이미 떠올리는 것 자체가 고통인 첫사랑의 얼굴을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아픔을 반추동물처럼 짓씹었다. 오직 하나밖에 남지않은 가족인 남동생은 장례식 이후로 자신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싫어했기에, 누군가에게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할 수조차 없어 홀로 앓기만 했다. 알버스가 결국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은 일주일도 더 지나서의 일이었다.
심각하네. 굉장히 아팠을 것 같은데 이제까지 어떻게 버텼던 거니? 당장이라도 뽑아야 하겠어. 유명한 마법사 병원에서 치료사로 근무했다던 중년의 마녀가 입안을 들여다보며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인맥이 풍부한 백셧 여사의 소개로 추천받은 마녀였다. 그렇게 심각한가요? 간신히 묻자 상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니가 나는 것도 나는 건데…… 매복 사랑니구나. 가로로 누워있어. 그런가요. 당장이라도 뽑아야 할 것 같은데 솔직히 많이 아플 것 같구나. 괜찮습니다, 부탁드릴게요.
잇몸이 있는대로 부어있다보니 혀를 움직여서 말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발치가 아무리 아프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지금도 충분히 아파서 견딜 수 없을 정도였으므로. 열병 같았던 첫사랑이 속절없이 끝나버리고, 그를 대신하듯 잇몸을 뚫고 올라오기 시작한 사랑니는 모질도록 아팠다. 발치를 위해서 준비되어있는 자리에 누우며 알버스는 생각했다. 만약 이걸 뽑아버리면, 생령처럼 여전히 제 머릿속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상대에 대한 미련도 같이 사라져버릴까. 발치 과정은 생각보다 길었다. 마취된 상태에서 잇몸이 절개되고, 사랑니가 여러 조각으로 잘려나가고, 그 조각들이 끌어내지는 일련의 과정이 무감각한 상태에서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아마 마취가 풀리고나면 딱 죽고싶을만큼 아프겠다 싶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진짜 고통은 발치가 끝나고 빈 집으로 돌아와 몇시간 흐른 뒤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잇몸을 째고 이를 잘라내어 긁어냈으니 안 아플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건 생각보다 더 심하잖아. 참기 힘든 아픔에 눈꼬리에서 저절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알버스는 여동생의 장례식장에서도, 그가 떠난 것을 알았을 때도 울지 않았었다. 감히 눈물 흘릴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다름아닌 나 때문에 여동생이 죽었고 그는 떠나갔다. 내가 그에게 정신팔리지만 않았어도. 그 때문에 여동생에게 소홀하지만 않았어도. 겔러트가 한없이 위험한 사상을 품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있었다. 우리 마법사들이 힘을 지녔으니 머글들을 지배할 자격이 있다고? 다름아닌 알버스 자신의 모친 역시 머글태생인데 그 논리의 결함을 모를래야 모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를 비판하는 대신 거친 사상을 매끄럽게 다듬어주었고, 그의 태도를 지적하는 대신 그를 위한 캐치프레이즈를 선물해주었다. 한없이 위험한 계획을 부추기고 찬동하는 공범이며 공모자로서. 그는 틀렸다. 더 커다란 선은 한낱 보기 좋은 허울에 불과했다. 뻔히 알면서 눈감고 그를 막지 않았던 대가는 이토록 가혹하게 돌아왔다. 아, 아리아나. 내 가엾은 여동생. 전부 내 잘못이야. 새삼 슬픔이 응어리처럼 북받쳐 오르면서 눈물이 뺨의 궤적을 타고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지금 여동생의 죽음이 슬퍼서, 겔러트가 떠나버린 것이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다. 그저 발치한 후의 통증이 너무 아파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사랑니를 뽑고 난 후의 그 상실감과도 같은 허전함 때문에.
길고도 짧았던 여름의 막바지, 강렬했던 첫사랑이 끝났고 무식하게 잇몸을 뚫고 올라오던 첫 사랑니가 뽑혀나갔으며 그와 함께 소년의 열일곱 살 역시 끝났다. 알버스가 열여덟 살 생일을 맞기 전 며칠 전의 일이었다.
트윗쓸땐 괜찮아보였는데 막상 글로 풀어쓰려니 별로 맘에 안들어서 흑흑.. 45년에 겔 때려잡고 나머지 사랑니 다 뺐음 좋겠다
알파는 다른 알파의 알파 페로몬을 느꼈을 때 본능적으로 상대방에게 경쟁심, 혹은 호승심을 느끼는 것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반응이라고 했다. 다만 양자간 너무나 월등한 격차가 날 때는 당장 턱 밑에 칼이라도 들이밀어진 것 같은 서늘한 공포감과 생명에의 위협을 느끼게 된다고. 오메가가 우성 알파의 묵직한 페로몬을 느꼈을 때 본능적으로 몸과 마음을 활짝 열어젖히고자하는 충동을 느끼듯, 우성 알파의 페로몬을 느낀 보통 알파는 당장이라도 싸움에 패배한 짐승처럼 배를 드러내고 상대에게 순종하고자 하는 굴욕감과 싸워야만 했다.
그리고 알버스는 아주 평범한 알파였다. 어설픈 열성도, 압도적인 우성도 아닌.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러트사이클 때는 억제제를 복용하며 넘겼고, 알파 페로몬이 몸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게 항상 잘 갈무리를 했다. 알파는 오메가에게 끌리는 것이 정상적인 일이라던데 7년동안 학교를 다니면서 알버스는 단한번도 그러한 성적 끌림을 경험하지 못했다. 아마 또래 집단으로부터 감히 다가가기 어려운 천재, 연애대상으로 삼기에는 너무나 머나먼 절벽 위의 꽃 취급을 받은 것 역시 한몫했을 것이다. 차라리 평범하게 베타였으면 좋았을텐데─ 가끔씩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알버스는 오직 지식과 이성의 상아탑에 틀어박힌 채 학문에만 열중했다. 상장과 트로피, 영광과 명성을 안고 졸업하기까지 쭉. 1899년의 여름, 고드릭 골짜기에서 열여섯 소년을 만나기까지는. 겔러트 그린델왈드는 첫눈에 알아볼 수 있을만큼 매우 강한 알파였다. 분명 저처럼 페로몬을 잘 갈무리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다가가는 순간 헉, 하고 숨을 들이쉴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이 느껴졌다. 꼭 발톱을 숨긴 채 집고양이 시늉을 하는 고양이과 대형 맹수를 연상케하는 위압감이었다. 분명 알파가 다른 알파의 기운을 느끼면 반발심이나 굴종심을 느끼게 되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했었지. 희미한 동유럽 악센트가 섞인 발음으로 제 이름을 소개하며 먼저 악수를 청해오는 소년의 손을 맞잡았을 때 알버스가 느낀 것은 양자 그 어떤 감정도 아니었다. 이유모를 떨림과 고양감이 척추를 전류처럼 관통하고 지나갔다. 그 감정의 정체를 깨닫게 된 것은 두 사람이 절친한 친구가 된 후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고 지나서였다. 자신은 처음 본 순간부터 상대에게 반해있었다. 두 사람 모두 알파임에도 불구하고.
(중략)
"나, 나는 알파야. 너처럼."
"그게 뭐가 어때서? 너는 날 원하고 나도 네가 필요한걸. 네가 알파든 베타든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오, 알버스. 상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제 이름은 마치 짤막한 시구 같았다. 겔러트는 언제나 노래하듯 혹은 시를 읊듯이 제 이름을 발음하고는 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그렇게 느껴졌다. 길쭉길쭉하게 뻗어있지만 결코 가녀리거나 연약하게 느껴지지 않는 손가락이 턱과 뺨이 이어지는 선을 매만졌다. 나를 사랑하잖아. 응? 상대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나도 네가 필요해. 나른한 목소리가 속살거리듯 귓전을 스쳤다. 고행 중인 수사를 유혹하는 악마와도 같은 달큰함이었다. 순간 코끝을 싸하게 스치는 향내에 알버스는 어깨를 굳혔다. 알파 페로몬. 언제나 그랬듯 겔러트의 알파 페로몬은 청량하고 강렬했다. 분명 같은 알파의 페로몬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생리적인 반응일진대, 이상하리만큼 반발심은 없었다. 아니- 반발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만두라고 해야할지 망설이는 동안 옷깃 사이로 타인의 체온이 스며들어왔다. 어? 놀란 나머지 저도 모르게 상대의 가슴팍을 밀어내버리고 어쩔 줄 몰라하자 그가 씩 웃었다.
"왜, 키스부터 먼저 할까?"
"아, 나는, 저……"
자신도 모르게 혀가 꼬였다. 아무리 저명하고 이름높은 마법사 앞에서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한번도 더듬거린 적 없었는데 이상하게 그 앞에서만큼은 한없이 서툴러진다. 이렇게 당황해하는 모습 따위는 보여주고싶지 않았는데. 대답을 미처 기다리지 않고 겔러트가 먼저 입술을 포개왔다.
"너 키스 처음이구나, 그렇지?"
내가 네 처음이라니 기쁘네. 마주친 눈동자는 정말로 즐거워보여서 알버스는 눈부신 것을 본 사람처럼 눈을 감았다. 눈꺼풀을 내리깔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입술이 맞닿았다. 입이 열리고 혀가 엉켰다. 숨이 가빠서 헐떡이자 상대가 작게 웃었다. 방금까지의 팽팽한 긴장감을 잊어버릴만큼 명랑한 웃음소리였다.
(중략)
차라리 내가 오메가였다면, 아니면 베타라도 되었다면 좋았을걸. 그럼 널 붙잡을 수 있었을텐데. 이제껏 단 한번도 제 형질에 대해 불만을 품은 적 없었건만 그를 만난 이후로 알버스는 매번 그 생각을 했다. 간혹 베타와 알파가 본딩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알파와 알파가 맺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는 단 한번도 듣지 못했다. 지금은 날 원해준다고 해도 이게 그저 한 철의 불장난일 뿐이라면? 언젠가 그가 말했던대로 곧 떠나버린다면? 한번 깃든 두려움은 들불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타고난 형질은 결코 바꿀 수 없다. 아무리 대단한 마법으로도. 그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헛된 소망은 쉽사리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네 아이라도 가질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그럼 정말 확실히 붙잡아둘 수 있지 않았을까. 네가 나를 떠나지 말았으면 좋겠어. 겔러트. 무용한 고뇌를 되풀이하며 알버스는 얼굴을 감싸안았다.
알x오 알x베 써봤으니 알x알도 써봐야할 거 같아서.. 라는 의도였는데 떡 쓰기 싫어서 끊어버림 누가 나 대신 써줬으면
팔마시온은 대 마키시온 제국의 귀퉁이에 처박혀있었다. 국내외 왕족과 황족들이 한데 모여 교육받는 제국의 공식 황실교육기관 치고는 다소 초라한 위치였다. 하지만 마차에서 내려 그 웅장함을 마주하는 순간 그가 품고있던 생각은 곧 바뀌었다. 일개 소국의 왕궁보다 훨씬 호사스럽고 화려해보이는 건축물은 오만한 신들을 모시는 신전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여기가 내가 몇년간 머물러야할 곳인가, 겔러트는 설원에 선 채 건물들을 찬찬히 올려다보았다. 마차에서 내린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뺨이 에일 정도로 추웠다. 그깟 실험 좀 했다고해서 여기까지 사람을 쫓아내다니 빌어먹을 황실 같으니. 팔마시온의 악명은 높았다. 겉으로는 공식 황실교육기관이라는 번지르르한 타이틀을 달고있지만 실제로는 무법천지라는 곳. 아직 어린 아이들도 가차없이 설원에 내몰고 학생들끼리의 갈등도 전혀 중재하지 않는 철혈의 교육기관. 마치 맹수가 제 새끼를 벼랑 끝에 내몬다는 표현처럼.
"황자님이십니까?"
"그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오세요."
잠시 마노와 황금으로 호화롭게 장식된 정문을 올려보던 와중 칼같은 제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팔마시온의 관리인인가 싶어 빤히 쳐다보자 먼저 깍듯이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손짓했다. 외관에서 느껴졌듯이 팔마시온의 내부 역시 필요이상으로 사치스럽고 호화스러웠다. 뭔가 복잡한 방식으로 난방을 한다더니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따뜻한 온기가 얼어붙었던 몸을 녹였다. 그러나 그를 안내하는 관리인의 걸음은 숙소일 법한 문들이 늘어서있는 복도를 거침없이 빠르게 지나쳤다. 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건지 막연한 의문을 품는 순간 복도의 끝에 다다랐다. 육중한 철문을 밀어젖히자 지하로 내려가는 듯한 어두침침한 계단이 시야에 들어왔다. 지하? 뭔가 묻기도 전에 남자가 먼저 계단에 발을 디뎠다. 한두 층 정도 내려왔을까, 상대가 낡은 문 앞에 발을 멈췄다.
"앞으로 황자님께서 머무르실 곳입니다."
"……하."
어이가 없어서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그러니까 이게 망할놈의 황실이 내게 허락한 거처란 말이지. 지하에 위치한 숙소는 좁았다. 철제 책상과 그 옆에 붙은 평범한 침대 2개, 그리고 딸려있는 화장실. 황궁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들의 거처만도 못한 방이었다. 위대한 대 마키시온 제국의 혈통을 이은 고귀한 피가 묵기에는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곳이었다. 사람을 쫓아낸 것도 모자라서 이런 굴욕까지 주다니 분노가 치밀었으나 애써 눌러참았다. 자신의 옆에 서 있는 관리인은 황실의 눈이고 귀일 것이다. 아마 여기서도 한바탕 날뛰어주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는 법이고, 그럼 그때는 정말로 모가지를 따려 들지도. 겔러트는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관리하며 관리인을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나가 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관리인이 가벼운 목례 후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 홀로 남은 실내를 비추는 전등의 빛마저 어두웠다. 애초에 명목은 팔마시온에서 교육받고 오라는 것이긴 했지만, 이것이 일종의 징계이고 경고라는 걸 자신은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내가 '사고'로 죽어주기라도 하면 노친네들이 제일 좋아하겠지. 겔러트는 신경질적으로 주위를 노려보다말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예상했던만큼 감촉은 딱딱했다. 침대가 맞은편에 하나 더 있는 걸 보니 룸메이트가 하나 더 들어오려나 본데, 과연 이 복마전에서 하필 제 룸메이트가 될 정도라면 얼마나 박복한 신세인지 감도 안 잡혔다. 누가 될 지 모르는 룸메이트와 자신의 신세를 애도하며 겔러트는 그대로 몸을 뒤로 젖혔다.
*
아무리 볼장 다 보고 살아온 인생이래도 문을 열자마자 만년필 끄트머리가 급소를 노리고 날아오면 놀랄 수밖에 없는 법이다. 정확도나 민첩성이 떨어지는 걸 보니 전문 암살자는 아닌 거 같고, 그럼? 아슬아슬하게 만년필을 휘두르는 팔을 피해 물러선 후 겔러트는 가차없이 상대의 팔목을 붙들었다. 팔목이 붙들리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몸부림을 쳐댔다. 반쯤 열린 문 뒤로 이제까지 비어있던 침대 위에 놓인 트렁크가 눈에 들어왔다.
"너구나, 내 룸메이트가. 누군가 했더니."
만년필을 쥔 손목을 낚아채 가까스로 바닥에 찍어누른 후에야 몸부림이 멎었다. 가까이에서 마주본 상대방의 얼굴은 앳되다 못해 어렸다. 열네살? 아니면 열다섯? 그런데 벌써부터 여기 처박히는 신세라니, 그 나이에 꽤나 윗선에게 미움받았던 모양이네. 왜일까, 생긴 건 꽤 귀여운데. 자신과 같은 벽안이지만 색채가 훨씬 옅은 푸른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자신을 똑바로 응시해왔다. 눈빛만 봐서는 호락호락해보이지 않는데, 어떠려나.
"난 너 오늘 처음 보는데. 왜 이래?"
"……"
"말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럼 다음 질문. 어느 나라 출신이야?"
"…베르스."
"아, 그─"
약소국 말이지, 내뱉을 뻔한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베르스라면 현존하는 국가들 중 최하위에 가까울 정도로 국력도 약하고 뒤처지는 나라 아닌가. 웬만한 마키시온 내의 소왕국들보다 더 뒤떨어지는 국가였다. 군사력이든 생산단위든. 명목상으로는 황실교육기관이니 베르스 출신의 왕족이 팔마시온에 있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팔마시온이 학생들을 소속 국가의 국력으로 차별하는 분위기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니 하필 이 초라한 숙소를 자신과 쓰게 된 것 역시 그다지 충격적인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내게 다짜고짜 만년필을 휘두르려고 한 것은 조금 의외고. 팔마시온 내의 학생들은 국가의 위상이 어떠하든 전원 모두가 왕족 혹은 황족이었으며, 학생들간의 작은 충돌이 국가간의 분쟁으로 불거지는 사태 역시 소소하게나마 존재했다. 비록 황실에 거의 내쳐진 상태긴 하지만 자신 역시 마키시온 제국의 혈통의 소유자였고, 그 고귀한 피에 과하게 집착하는 황실이라면 아무리 내버리다시피한 황족에게 향해진 만년필 끝마저 반기의 뜻으로 해석하고도 남았다. 물론 자신이 황자인 걸 몰랐겠지만 앞으로도 쭉 이렇게 행동한다면 팔마시온에서의 적응은 꽤나 힘들어질 것이다. 겔러트는 힐끗 소년의 손에 아직도 쥐여있는 만년필에 시선을 던졌다. 팔마시온의 물건답게 쓸데없이 화려한 물건이었다. 이게 무기로 쓰일 거라고는 갖다놓은 관리인도 몰랐겠지만.
"다신 나한테 이걸 안 휘두르겠다고 약속하면 놓아줄게."
"…싫다면?"
"글쎄, 어쩔까."
*
"그냥 내 애 둘만 낳아줄래? 너 어차피 돌아갈 곳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개가 홱 돌아갔다. 알버스에게 따귀를 맞았다는 것을 자각한 것은 몇 초 지나서의 일이었다. 아, 꽤나 아프군. 청순하게 생겨서 어울리지 않게 손힘은 꽤나 셌다. 모욕감이라도 느꼈는지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자신을 쳐다보는 눈매가 싸늘했다. 곧 부어오를 것 같은 뺨을 매만지며 겔러트는 비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별로 나쁜 제안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날 모욕하지 마."
"그럴 의도 없어. 대제국의 황후 자리를 탐내는 영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너한테 거저 주겠다잖아. 네가 마음에 드니까."
"헛소리야, 어떻게-"
"우리 제국 과학 연구소의 저력을 얕보면 곤란하지."
마키시온의 제국과학연구소, 소드람은 대륙 전체에서 가장 발달된 과학기술을 자랑하고 있었다. 임시적으로 남체에 자궁 하나 달아주는 건 일도 아니지, 그는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있는 소년을 응시하며 씩 웃었다. 순진하고 얌전한 얼굴을 하고 유배지에서도 여전히 야망에 불타는 눈을 한 약소국의 왕족. 처음 본 순간부터 상대가 마음에 들었다. 나만큼 똑똑하고, 나만큼이나 야심이 있고, 나만큼이나 이 팔마시온을 싫어하는 존재.
"그게 싫다면, 도와줄게. 옥중에서 사망한 네 부친의 명예도 복권시켜주고 아프다는 여동생도 제국 최고급 의료진에게 진료받게 해 줄 수 있어."
"……"
"그리고 알버스 넌 베르스의 왕이 되는거지. 어때. 괜찮은 제안 아닌가?"
거절할 수 없을 제안을 했다. 썩어도 준치라는 옛말처럼 이 팔마시온에 처박혀 있어도 그는 여전히 제위 계승권 1위 후보였으며, 잘나고 존귀하신 황제의 아들이었다. 베르스 같은 일개 약소국에 개입해 정치판도를 뒤집어놓는 것은 당장 내일이라도 가능할 수 있을만큼 쉬웠다. 물론 네가 원한다면. 숨기지 못할 만큼 야망과 명예욕이 있는 주제에 가족은 끔찍히도 생각하지. 어차피 끈 떨어진 왕족의 말로는 비참했다. 게다가 천재적이고 영리하다면 더욱 더.
"아. 그러고보니 첫날의 그 소동, 날 암살하면 널 도로 고국에 돌려보내준다고 누가 그랬어?"
"? 어떻게……?"
"다 알게 되는 방법이 있지. 팔마시온에는 벽에도 눈과 귀가 있으니까."
"-그건 미안해."
"미안하면 갚아, 그런 기본 지식쯤은 왕실에서 가르치지 않나?"
왼손을 끌어다쥐고 손끝마다 느릿느릿 입을 맞추자 당황했는지 알버스가 몸을 비틀어 빼려했으나 놓아주지 않았다.
*
"역시 겔러트 네 도움은 필요 없어. 난 베르스로 돌아갈거야. 내 앞길은 내가 개척해."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어."
겔러트는 선선히 물러섰다. 팔마시온의 최우수 학생이자 수석 졸업생. 관례대로 알버스의 초상화는 역대 수석들의 초상화가 걸린 벽에 나란히 걸렸다. 수많은 초상화들 중에서도 가장 앳되고 어린 얼굴이었다.
"그럼 난 이제 어떻게 할까. 세계 일주라도 해볼까? 아니면 황궁으로 돌아가서 생물학적 아버지 모가지나 따고 황제노릇이나 할까?"
이제 드디어 지긋지긋한 팔마시온을 벗어난다. 누군가들의 바람대로 죽지도, 부상을 입지도 않은 채. 다만 자신의 옆에 서있는 상대와 끝까지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아, 그때 내 제안은 여전히 유효하니까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말해."
"내가 싫어!"
정말 싫은지 질색하는 표정이 귀엽게 느껴져 겔러트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에는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날 것처럼 구는 어린 천재의 인간적인 민낯을 본 것은 팔마시온에서 자신 하나뿐이었을 것이다. 처음 이곳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릴 때의 기분을 되새기면 한없이 유쾌했다. 어쩌면 팔마시온에 보내진 것은 행운이었을지도 몰랐다. 널 만날 수 있었으니까.
내가 왜 썼는지도 모르겠다 김ㅊㅓㄹㄱㅗㄴ의 스크트au 간만에 스크트 읽고 마ㄹ넬로x아ㅇ히만 넘 땡겨서 배틀ㅎㅁ삘로 해봤는데 망했읍니다 역시 영알은 겔이 간이든 쓸개든 달라면 빼줄만큼 눈이 멀어있어야지
가상2세 만들어보고 내 애 낳아달라는 드립 치는 겔/따귀 날리는 영알 보고싶어서 au까지 끌어왔는데(원작기반이면.. 낳아달라면 둘이든 셋이든 낳아줄거 같거든.... 가능한가는 둘째치고......) 별로 마음에는 안듬ㅠㅠㅋㅋㅋㅋㅋㅋㅋ 캐붕대잔치에 au로서의 의미도 없어보인다..
나름 뒷설정..은 스크트 원작처럼 알버스는 베르스 돌아가서 재무대신되고 겔은 황제되서 둘이 평생 못만나는 걸로 하자
원래 이런 기념일 전혀 안챙기는데 매번 연성하게 만드는 두 예쁜이에게 대신 감사의 말씀 전하고싶네요
이쯤되면 CA는 3차창작같고ㅋㅋㅋㅋㅋㅋㄱ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ㄱ CA쪽이 마음에 영 안차서 계속 붙들고 있다가 결국 하루 넘겼는데 겔알 짧게나마 급하게 써서 올림..
오늘 발렌타인 데이잖아. 응? 눈을 동그랗게 뜨며 요구해오는 상대의 시선을 알버스는 애써 외면했다. 싫어. 왜 싫은데? 그런 거 싫다고 전부터 말했잖아. 그러니까 왜? 부끄러우니까 그렇지! 알버스 너 설마 내가 부끄러워? 정말로?
"아, 자꾸 이상한 쪽으로 화제 끌고 가지 말랬지! 내가 언제 네가 부끄럽댔어?!"
"그거야 사랑하는 네가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니까…… 오늘은 연인들의 날이래잖아."
"겔러트, 제발 좀!"
결국 소리가 높아졌다. 얘는 대체 어디서 이상한 것만 주워들어와서 이래?!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는 고양이처럼 겔러트가 제 뒤에 찰싹 들러붙어서 속살거렸다. 화난 거 아니지?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명색이 연인의 날에 그거 하나 정도 못 해줘? 아. 정말. 홱 고개를 돌려 마주한 새파란 눈동자가 순진무구한 척 반짝였다. 얘가 이러는 게 하루이틀도 아니란 걸 뻔하게 알면서 약해지는 나도 글러먹었다고, 알버스는 내심 탄식했다.
"너 진짜 제멋대로야."
"그러니까 네가 날 좋아하지."
반박할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그게 사실이니까 어쩔 수 없다는 게 제일 분한 지점이었다. 착실한 모범생으로 궤도 내에만 살아왔던 자신에게 동년배 소년은 곧 자유였고 일탈의 동의어와도 같았으므로. 이번에도 결국 져줄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알버스는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제 옆에 굴러다니던 초콜릿 박스를 집어들었다. 이런 걸 왜 하고 싶다는 거야, 얘는. 바스락거리는 금빛 포장지를 벗기고 내용물을 입에 털어넣자 바로 체온이 낮은 손길이 알버스의 양뺨을 감싸쥐고 끌어당겼다. 입술이 맞닿나 싶더니 바로 열린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장난스레 혀끝으로 치열을 몇번 톡톡 치는 것도 잠시, 흐무러진 초콜릿 조각을 제 입에 문 겔러트가 떨어져나갔다. 약간의 달콤한 여운만을 남긴 채 자신의 입안은 도로 비어있었다.
그러니까 보통 이런 걸 초콜릿 키스라고 하는 거 같긴 하던데 나는 영…… 알버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소감을 입밖으로 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위생적이야…"
"알버스 너 이럴 때 진짜 분위기 깨는 거 알아? 보통 로망이란 게 있잖아?"
나름 기대하는 표정이었던 겔러트가 김이 샜다는 듯 억울한 표정으로 항의했다. 네 로망이지 내 로망이야? 난 처음부터 별로라고 했잖아. 아무래도 넌 꿈과 로망이 부족한 거 같아. 이런 로망은 사양할래.
"그럼 그냥 하는 건 괜찮지?"
"어──"
대답하기도 전에 입술이 다시 닿았다. 말다툼하는 동안 상대의 입안에서 초콜릿 조각이 다 녹아버린 듯,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입맞춤은 충분히 달았다. 연인들의 날에 어울릴 만한 달큰함이었다.
무려 인류가 철기 문명에 접어들기 이전 태어난 존재와 교제하는 게 쉬울 거라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한 적 없었다. 당장 5-10년만 나이터울이 벌어져도 인식의 차이가 느껴지는 와중에, 세기 단위로 차이가 난다면 더할 나위도 없는 셈이었다. 게다가 당연지사 종족마저 다르다. 마치 하이틴 전용 로맨스작품에나 나올만한 이야기였지만 이렇게 된 걸 어쩌겠냐고 알버스는 남의 일처럼 생각했다. 상대는 호머 서사시의 배경이 된 미케네 문명 시절부터 살아왔다는 흡혈귀였으며, 예쁘고 재력도 상당한데다 심지어 자기네 세계에서는 왕족 비스무리한 거라고 했던가. 어쨌든 생긴 건 제법 흠잡을 데 없는데다 솔직히 얼굴만은 내 취향이고. 일단 나한테 이렇게나 목을 매는 상대가 앞으로 나타날 것 같지도 않고. 당장은 너처럼 변할 생각이 없다고 못박아놨을 때 좀 불만스러워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그에 합의했었으니, 연애대상으로서 이보다 더 나은 후보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첫 연애가 몇천살 연상의 이종족 유사인류라는 건 어째 기분이 오묘해지지만 상대도 자신이 처음이라니까 뭐. 성격은 조금- 아니 많이 급하고, 앞에서는 안 내색하려고 해도 그동안 어지간히 안하무인으로 살아왔구나 싶지만 어찌 되었든 내가 좋다는데. 신분이 나름 왕족 급인데다 그동안 몇천년 간 쌓아올린 부 탓에 소비 스케일의 수준이 틀려서 종종 사람을 당황시키기는 하지만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그런데, 대체 이게 뭐야. 알버스는 황망한 표정이 되어 제 앞에 펼쳐진 광경을 응시했다. 빈말로도 좁다고 할 수는 없는 공간에 야무지게 들어찬 다양한 크기의 박스들과…… 저건 또 뭐지, 꽃? 장미에 수국? 그리고 그 옆에 태연한 표정으로 서 있는 원흉.
"…카이우스. 이게 다 뭐야?"
"오늘이 인간들이 챙기는 기념일이라길래 약소하게나마 준비해봤는데. 왜, 너무 적어?"
"그 반대야!!"
환장하겠군. 얘네도 혹시 세금 같은 거 걷나? 설마 세금으로 이렇게 낭비를 하고있는건가? 얘가 이렇게 돈을 물쓰듯 펑펑 써도 아무도 터치하지않는건가? 알버스의 머릿속에서 수십가지 의문들이 불꽃놀이처럼 연이어 터졌다. 일단 잔소리를 하기 전에 제일 가까운 곳에 놓여있는 진홍색 작은 상자부터 열어보았을 때 그 내용물은 정석적이게도 초콜릿이었다. 이름을 들어본 상표는 아니었으나 보나마나 손이 떨리는 가격일 것이라는데 제 상장 컬렉션을 걸 수 있을 것 같았다.
"저어, 설마 이거 다 초콜릿은 아니지……?"
"날 뭘로 보는 거야? 그 정도의 상식은 있어."
"아니, 넌 좀 더 평범한 일반인들의 상식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어……"
왠지 더이상 열어보면 안될 거 같다. 알버스는 다시 열었던 상자의 뚜껑을 고이 닫고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구애를 승낙한 후로 카이우스의 저세상 경제관념과 소비패턴에 놀랄 만큼 놀랐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놀랄 게 더 남아있었다는 사실이 제일 놀라웠다.
학교 7년을 다니면서도 단 한번도 챙겨본 적 없었던 발렌타인 데이였다. 다른 동급생들이 손을 잡고 호그스미드에 놀러가니 데이트를 하니 핑크빛 기류를 형성할 때 도서관에 처박혀 있었던 기억밖에 없었다. 혹자는 재미없는 인생이라 평할지 몰라도 자신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더 흥미로운 유희였다. 그런데 이제와서 몇천년 넘게 살아온 흡혈귀에게 코를 꿰이면서 팔자에 없는 할리퀸 로맨스에나 나올만한 상황을 종류별로 겪어보고 있었다. 저번에 굳이 볼테라까지 가서 살고싶지 않다고 거부했더니 '그럼 네 이름으로 섬이라도 하나 사줄까?'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알버스가 침묵하자 불호의 뜻으로 알아들었는지 카이우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내가 이번에 또 실수를 한 건가? 넌 너무 어려워."
"아니, 화난 것도 아니고 언짢은 것도 아니야. 그냥 가끔씩 네 경제관념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이 정도면 알아들을 때도 됐을텐데, 대체 볼투리 가문은 어떤 방식으로 자금운용을 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애써 눌러 참았다. 거의 수장 한 사람당 개인 자산규모가 어지간한 국가 하나와 맞먹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나한테 펑펑 쓰는게 가능할리가.
"고마워, 매번 날 위해서 이렇게 신경써주는 거."
"네 표정은 별로 아닌 거 같은데."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그런데 저번에도 분명히 말했잖아? 네 기준은 내게 너무 부담이 크단 말이야."
"……많이 부담스러워? 나름 처음 계획보다 줄인 거다만."
"그러니까 그 기준이 부담스럽다고. 몇천년 넘게 살았을 너한테야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겠지만."
매번 기겁해야하는 제 심정도 이해해줬으면 한다. 그게 어려운 거겠지만. 알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되었든 상대는 자신을 위해서 준비한 서프라이즈 이벤트라고 생각할텐데 너무 면박을 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나는 준비한 것도 없는데.
"그리고 난 아무것도 안 준비했는데 어쩌지. 살면서 이런 날을 챙겨본 적이 없어서. 그거라도, 할래?"
"별로 안 좋아하잖아."
"오늘은 나름 특별한 날이라니까… 아, 목은 말고. 거긴 싫으니까 손목으로 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목덜미에 싸늘한 것이 닿았다가 이내 도로 떨어졌다. 팔목에 닿은 손끝의 체온은 언제나와 같이 차가웠다.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앉은 카이우스가 허락을 구하듯 슬쩍 눈을 위로 떴다. 괜찮아, 고개를 끄덕이자 맥박 위에 키스하듯 입술이 와닿았다. 이윽고 서늘한 감각이 손목의 얇은 피부를 뚫고 들어왔다. 아. 몇번 겪어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느낌에 입에서 짧게 탄식이 새어나왔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통증 자체도, 체내의 혈액이 강제로 빨려나가는 기분은 낯설기만 했다. 차라리 아프기만 한 거라면 괜찮겠는데 이상하게 묘한 기분이, 들어서. 아픔 속에 섞인 미묘한 감각에 구두 속에 갇힌 발끝이 오그라들었다. 그저 피 좀 빨리는 것 뿐인데, 왜? 마치 상대에게 매달려서 애원하게 될 것만 같은 기묘한 느낌이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그만하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이를 악물고 충동을 이겨내는 것도 잠시 카이우스가 떨어져나갔다. 제3자가 보았다면 방금까지 뭘 했는지 알아채지 못할 만큼 입가는 깔끔했다.
"매번 표정 귀엽네."
"그 와중에 보고 있었어?!"
"보이니까. 그리고 원래 그런 거니까 부끄러워 할 필요 없어."
"그, 그러니까 뭐가?"
"피 빨릴 때 느끼는 거."
"뭐, 뭘 느껴……?"
순간 머리가 차갑게 식는 것 같은 기분이 엄습했다. 뭐가 어쨌다고? 제가 미리 말하지 않았냐는 듯이 카이우스가 눈을 깜박였다.
"가끔씩 인간들은 그걸로도 느끼는 경우가 있는 것 같더라고."
"너 그걸 이제서야 말하면 어떡해?!"
"그야 네 표정이 귀여우니까."
"그렇다고 지금까지 안 알려줬다는 게 말이 돼? 이제까지 몇번씩이나…!!"
부끄러움과 수치심으로 뺨이 확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지만 가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런 건 좀더 일찍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거였다면 처음부터 허락도 안 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상대에게 그런 욕구를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거라느니 해서 마음이 약해지는 바람에 처음 수락했었고, 이후 가끔씩 단발성으로 허락했던 건데. 자신이 더 화낼 거라고 생각했는지 카이우스가 눈치를 보는 듯 몇마디 더 덧붙였다.
"미리 말 안해준 건 미안해. 그리고 전에 지중해 가보고싶다며, 밖에 전용기 불러놨는데… 이건 거절 안 할 거지?"
"저것들은 다 어떻게 하고."
"우리 돌아올 때까지 보관해놓으라고 할게. 그래도 한번씩 열어보기는 해줘."
자신이 상자 딱 하나만 열어본 게 마음에 걸리는지 상대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저번 성탄 때처럼 다 합하면 작은 성 하나는 사고도 남을 값어치일까봐 조금 겁나긴 하지만…… 알버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닿는 곳에 놓여있던 붉고 푸른 수국꽃다발을 집어들었다. 이건 같이 가져갈까. 수국의 꽃말은 진심과 변덕이라던데, 새삼 선물해준 상대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소 변덕스럽지만 항상 내게 진심인 황금빛 눈동자의 연인. 좋든 싫든 내가 선택한 짝이고, 언젠가는 나 역시 너와 같이 되겠지. 싸늘한 체온과 영롱한 금안, 더이상 심장이 뛰지 않는 채로 영겁을 살아갈 불멸의 존재가. 언젠가 그의 경제관념에 익숙해질 날도 올까, 그것만은 별로 닮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어차피 먼 훗날의 일이었고 지금은 그냥 제게 주어진 유예기간을 만끽하는 걸로 만족하고 싶었다. 스케일은 많이 당황스럽지만 카이우스 본인에게도 몇천년동안 아무 의미 없었을 -최소한 그가 인간일 때는 없었을 날이니까- 인간들의 기념일을 챙겨준 것도 기특하고. 전에 흘리듯 지중해 연안 쪽을 가보고 싶다고 말했던 걸 용케 기억했다는 것 역시.
"아무튼 해피 발렌타인. 챙겨준 건 고마워."
"──해피 발렌타인."
사실 이렇게 누군가와 어떤 날을 기념하며 같이 보낸다는 기분 자체가 낯설었다. 아마 카이우스가 없었다면 평생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혈액 외의 일반적인 음식물들은 일절 입에 안 댄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날이 날인만큼 가는 길에 초콜릿이라도 한번 먹여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알버스는 상대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지난 17년간을 통틀어 가장 요란한 발렌타인 데이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