겔알 의 연성 문장
네가 다정하면 죽을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죽어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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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찰나 날카로운 통각이 손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완전히 낯설기만 한 감각은 아니었다. 이렇게 페이지를 넘기다가 손가락 끄트머리를 베이는 일은 종종 겪어보았던 일이기에. 하지만 몇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는 않는 예리한 아픔이었다. 저도 모르게 책에서 손을 거두고 멀쩡한 손으로 다친 손끝을 감싸쥐고 있으려니, 이내 옆에서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날아들어왔다.

 "왜 그래, 어디 다쳤어?"
 "종이에 손을 베여서……"
 "아. 그거 은근 아픈데. 네 손 이리 줘 봐."

 겨우 베인 것 뿐이니까 그렇게까지 신경써줄 필요 없다고, 사양하기도 전에 낚아채이다시피 손이 잡혀서 끌려갔다. 맞닿는 손바닥의 촉감은 건조하고 서늘했다. 잘 세공된 보석처럼 매력적인 용모와 다르게 항상 그 성정과 언변은 불꽃처럼 뜨겁고 격렬했으나, 겔러트의 체온은 항상 이처럼 서늘한 편이었다. 무더운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제 앞에서 두꺼운 책을 여러권 쌓아두고 읽고있던 소년에게 꼼짝할 새도 없이 손이 잡혀있다는 것을 인식하자 뺨이 확 달아올랐다. 어깨동무나 팔짱같은 신체접촉까지는 괜찮았다. 세간의 상식에 비추어 보건대, 충분히 친구끼리도 할 수 있는 범주에 들 테니까. 하지만 손을 이렇게 잡히는 건…… 어느덧 손끝에서 엄습하는 예리한 통각은 반쯤 잊혀져 있었다. 자신도 통제할 수 없이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진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내 심장 고동이 들리면 어떡하지?

 "종이에 베이면 생각보다 많이 아프더라고. 다음엔 조심해, 알버스."
 "으, 으응."
 "사랑하는 네가 아프면 내 마음도 같이 아프잖아."
 "…어?"
 "농담이야."

 씩 웃어보이는 얼굴이 꼭 어린 소년처럼 해사하고 명랑했다. 가만히 무표정으로 있으면 찬바람이 풀풀 날릴 정도로 오만하고 고압적인 인상을 풍기기도 했으나, 웃기만 하면 더할나위 없이 쾌활하고 발랄하다. 정말이지 특이했다. 어느새인가 자신이 좋아하게 되어버린, 바다 건너편에서 불현듯 나타난 금발의 가니메데. 그래도 저런 말은 삼가줬으면 하는데. 왜냐하면- 네가 말하는 의미와 내가 원하는 것이 서로 상이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욕심내고 싶고 착각하고 싶어지니까. 너를 좋아해. 겔러트. 목 바로 아래까지 치밀어오른 진심을 억지로 삭히며 알버스는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괜히 제 속내를 밝혔다가 친구관계마저 잃고마느니 지금 현 상태나마 유지하고 있는 것이 나았다. 나는 괜찮아, 이대로 계속 네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숨결이 닿을 듯한 가까운 거리에서 눈이 마주치는 통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직까지 상대에게 손이 잡혀있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거, 슬슬 놓아줬으면 하는데──

 "……"

 생채기 난 자신의 손을 끌어다 쥔 겔러트가 다른 한쪽 손으로 느리게 허공을 쓸어내렸다. 아직까지 따끔따끔한 통증이 맴돌던 손끝의 생채기가 그 동작과 더불어 치유되기 시작한다. 지팡이도 없이 간단하게 이루어지는 무언마법. 아직 열여섯 살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그는 걸출하고 뛰어났다. 아마 타고난 천재란 표현은 그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 터이다. 알버스 자신이 이제껏 그렇게 칭송받았듯이. 17여년만에 겨우 조우하게 된 나의 반쪽, 피가 섞이지 않은 영혼의 쌍둥이. 알버스는 가끔 그와 자신의 영혼이 비슷한 색채를 띠고 있으리라 확신하고는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만큼이나 영리하고, 천재적이고, 탁월한 인물이 이 세상에 또 존재할리가.
 어느덧 책장 모서리에 베였었던 흔적은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알버스의 손이 놓여난 것은 그와 동시에였다.

 "고마워, 겔러트."
 "별 거 아냐. 간단한 치유술인걸. 내가 베였더라도 너도 똑같이 해줬을 거잖아."

 서글서글하게 웃어보이는 얼굴이 오늘따라 눈부시게 느껴져 알버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도로 떴다. 기대를 아예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겔러트는 가끔씩 이렇게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훅 치고 들어오고는 했다. 자신도 모르게 기대해버리도록. 혹시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인 것이 아닐까 헛된 꿈을 꾸게 만드는 달콤한 다정함이었다.
 네가 다정하면 죽을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죽어도 좋았다. 네 다정함 안에 잠겨 이대로 죽어버릴 수만 있다면.

 이대로 질식할 것 같았다. 발목에 묵직한 추를 매단 채 깊은 심해에 가라앉는 것만 같은, 혹은 바닥없는 유사 속으로 질질 끌려들어가는 듯한 기분에 몇번이고 숨을 가쁘게 토해냈다. 서서히 느리게 죽어가는 것은 이러한 기분일까. 분명 숨을 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했다. 마치 누군가 목을 지그시 졸라오는 것처럼. 혹은 물 속에 잠긴 채 익사하는 것처럼. 이 감각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 어머니의 부음을 전해듣고 고향으로 돌아왔던 순간, 철없는 남동생과 망가져버린 여동생이 온전히 알버스 자신의 몫으로 남겨졌다는 것을 깨달았던 찰나의 절망감. 그리고 무저갱과도 같은 절망과 좌절에서 자신의 손을 잡고 끌어내주었던 또래 소년을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아도니스처럼 아름다웠던 외모도, 자신의 계획을 언급할 때 유독 별처럼 반짝이던 눈빛도, 동유럽 악센트가 약하게 섞여있던 낭랑한 목소리도, 쾌활했던 웃음소리도, 상념에 깊이 빠져들면 한쪽 발끝을 까딱거리는 사소한 버릇마저도.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네가 나의 구원자라고, 나의 태양이고 마침내 만난 나의 반쪽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는데. 겔러트. 짧고도 길었던 지난 두어달간 애정을 담아 수백수천번도 넘게 부르고 써내려갔던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제 모래를 씹는 듯 까끌까끌하게만 느껴질 뿐인 어감에 혀끝이 썼다. 천사의 얼굴과 독사의 혀, 수려한 외모와 그보다 더 현란했던 언변. 그런 그를 사랑했었다. 온통 잿빛으로 바랜 세계에서 홀로 찬란한 황금빛으로 반짝이던 또래 소년을. 숨을 쉬지 못하고 죽어가던 자신에게 도로 호흡을 불어넣어준 나의 구원자. 한동안 숨통이 틀어막혀있었던터라 다시 만난 호흡이 너무나 달콤해서, 그 숨결에 독이 섞여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눈을 감고 들이켰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토록 참혹하게 돌아왔다. 차갑게 식은 여동생의 마지막 모습이 다시 선연하게 눈앞에 떠오르는 바람에 알버스는 진저리를 쳤다. 추위를 느끼는 것도 아닌데 손끝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나 때문에, 내 잘못 때문에. 그런 위험한 생각에 미쳐서 그애를 내버려두는 바람에. 오빠──, 여동생의 마지막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전에 맴돌았다. 다시 숨이 턱 막혔다. 물밖에 내팽개쳐진 채 의미없이 아가미를 뻐끔거리는 수중생물처럼, 부레를 잃고 해변가에 표류한 채 헐떡이며 죽어가는 인어처럼. 자신은 도로 심연 깊숙히 침잠해가고 있었다. 호흡을 잃어버리고서 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을까.

 겔러트. 너는 나의 호흡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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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상이한 점 내지 오류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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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버스가 그 사진을 발견한 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겔러트가 기거하고 있는 백셧 여사의 집에 들렸다가 거실 한켠에 놓인 커다란 은액자를 보게 된 것은. 바틸다 백셧은 매우 저명한 학자이자 유명한 마녀이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알버스와 교류하는 몇 안되는 인근 주민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부터 쭉, 그리고 아리아나의 존재를 알고 있는 아주 소수의 이웃. 몇년간 알고 지낸 백셧 여사에게 대조카가 있다는 것 자체도 금시초문이기는 했지만 그 대조카와 이렇게 가까운 사이가 될 줄은 더욱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요새는 백셧 여사보다 그 대조카인 겔러트와 더 자주 만나고 서신교환을 했던 터라, 이 집에 방문하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간만에 들린 백셧의 집안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특히 방금 알버스가 발견한 은액자에는 겔러트의 사진들이 여러 장 끼워져있어, 바틸다 백셧이 그녀의 사랑스러운 대조카를 매우 아낀다는 것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만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자신과 함께 찍었던 사진 역시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알버스는 약간 멋쩍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정쩡하게 떨어져있는 듯한 거리, 그리고 웃지 않고 앞을 응시하는 겔러트의 무표정 역시 둘 사이가 묘하게 서먹서먹해보이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네 웃는 얼굴, 정말 해사하고 예쁜데. 좀 미소라도 머금고 찍지.
 애정을 담아 손톱 끝으로 사진을 가볍게 톡 친 후 하나하나 뜯어보던 알버스의 시선이 찰나 한 군데 고정되었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오직 겔러트 -그리고 가끔 알버스 자신의- 의 사진 뿐인 액자에서 다소 이질적인 어린 소녀의 사진이었다. 열살 전후쯤 되었을까, 앳되다 못해 어린 얼굴이 은액자 속에서 말갛게 웃어보인다. 어깨 즈음까지 기른 찰랑찰랑한 금빛 머리채와 푸른 눈망울, 갸름한 얼굴형. 전반적으로 새침한 인상이었으나 마치 요정처럼 예뻤다. 입고 있는 옷의 팔랑팔랑한 레이스 탓에 더욱 살아있는 인형처럼 보이는 소녀였다. 그러고보니 오밀조밀하니 선이 고운 이목구비가 누군가를 닮은 것 같기도 한데── 아, 설마. 알버스는 돌아서서 상대를 불렀다.

 "겔러트, 이 여자애는 누구야? 널 닮은 거 보니까 혹시 여동생?"
 "나 여동생 없는데. 뭘 보고 그러는 거야?"
 "이 사진……"
 "사진? ─아. 이거."

 성큼성큼 곁에 다가온 겔러트의 시선이 알버스가 들여다보고 있던 소녀의 사진에 닿았다.

 "이건 내 어릴 때 사진인데."
 "뭐? 잠깐, 너라고?"
 "나 맞아. 아홉살인가 열살 즈음에 찍었던 거였던가."

 자… 잠깐만. 순간적으로 천재소년의 총명한 뇌는 자신이 방금 받아들인 정보를 해석하고 수용하길 거부했다. 그러니까, 이 사진 속 인물이…… 겔러트의 여동생도 아니고 심지어 생물학적 성별이 소녀도 아니라고.

 "미안한데 이 사진에서 네가 입고 있는 옷이, 어, 음, 여아용 아니야……?"
 "우리가 어릴 때 머글들 아동복 유행이 저런 거여서 그래. 그런 취향이셔서 말이지. 다시 생각만 해도 짜증나네."

 정말로 싫은지 사진을 응시하는 눈매가 별로 유쾌해보이지는 않았다. 여전히 혼란에 빠진 알버스를 내버려둔 채 겔러트가 은액자의 표면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 사진 별로 안 좋아한다고 분명 말씀드렸었는데…… 굳이 여기에 끼워넣으셔야했나, 대고모님도 참."

 조각같이 반듯한 옆모습 위로 사진 속 소녀의 웃는 얼굴이 느리게 겹쳐진다. 그러니까, 정말로 저 애가 겔러트구나. 가끔 그가 어릴 때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하다는 생각을 한 적 있기는 했지만 저렇게 예뻤을 줄이야. 새삼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바람에 알버스는 겔러트가 눈치채지 못하게 심호흡을 했다. 한때 늪같은 우울과 절망감 속에서 익사해가고있던 자신을 밖으로 끌어내준 매혹적인 베르길리우스. 바다 건너의 이국에서 등장한 나의 구원자. 그런데 유년기의 모습은 차라리 베아트리체에 가까웠다니.
 새삼 이제껏 그와 함께하지 못했던, 그가 부재해있던 시간들이 아쉬워졌다. 너의 열다섯, 너의 열넷과 열셋, 그리고 열두살과 열한살, 열살 이전은 내가 영원히 알 수 없을 순간이기에. 진작 만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알버스는 억지로 미련들을 떨쳐냈다. 지난 시간들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이제 남은 시간들은 계속 함께할 수 있을 터였다. 열일곱, 열여덟, 스무 살- 그리고 아마 그 이후에도 계속. 서로가 있는 한 우리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너만 있으면 괜찮아. 알버스는 새삼 마음을 다잡으며 눈앞의 상대와 그의 유년 시절 편린을 번갈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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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년만에 사랑니를 발치했다. 첫 사랑니였다. 아릿한 아픔을 수반하며 잇몸을 뚫고 올라오는 사랑니를 결국 뽑아버렸을 때 제임스가 처음으로 느낀 감정은 해방감이었다. 사랑니가 신경 근처와 맞닿아있다거나, 뿌리가 휘어있다던가 혹은 이가 누워있지 않고 똑바로 나주었기에 발치 자체는 간단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발치가 아니라 그 이후에 찾아왔다.

 "아…… 진짜 아파…"
 "언젠 하나도 안 아프다며?"
 "이제는 아프거든? 놀리지 마, 패드풋."

 얼음팩을 뺨 옆에 바싹 가져다 댄 채 누워있던 제임스는 알싸하게 밀려오는 아픔에 미간을 찌푸렸다. 마취가 풀리고나자 서서히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고 당연히 통각도 그 안에 포함되어있었다. 치료사의 솜씨가 어쨌든 생니를 통째로 뽑아냈는데 아프지 않을리가 없었다. 아, 이거 의외로 아프네.

 "넌 사랑니 아직 안 났냐?"
 "오, 프롱스. 난 벌써 열다섯 살 때 뽑았다고."
 "이 형님보다도 먼저 사랑니가 나다니…… 건방지구나, 친구."
 "딱 보기에도 너보단 내가 성숙해보이지 않아? 외모로든 지적수준으로든?"
 "우리의 우정과 멀린의 수염에 맹세코, 그건 절대 아니지."

 그래도 가장 절친한 악우와 투닥거리다 보니 고통은 조금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내일은 오늘보다는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으며 내내 시리우스와 농담 따먹기를 하던 제임스가 절망하기까지는 채 12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확인하기 전까지.

 "내 얼굴……!"
 "프롱스, 아침부터 왜 난리── 와. 너 지금 몰골 진짜 굉장하다."

 절망했다! 거울 앞에서 나라 잃은 듯한 표정으로 망연자실하게 서있는 제임스의 뒤에서 시리우스가 포복절도하기 시작했다. 머리칼이 정돈 안 된 듯 뻗쳐있는 것은 괜찮았다. 항상 이랬으니까. 그런데 내… 내 얼굴. 내 잘난 얼굴이. 제임스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오른뺨을 느리게 매만졌다. 거울 속의 오른뺨은 평소와 다르게 퉁퉁 부어있었다. 왼쪽 얼굴에 비해 1.5배정도 더 퍼진 면적이며 알사탕이라도 문 듯 툭 튀어나온 흉한 모양새라니. 못생겼잖아! 이제까지 본 거울 속 내 모습 중 제일 못생겼어!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으로 제임스는 부어오른 뺨을 의미없이 더듬었다. 부기 때문인지 유난히 피부 표면이 뜨거웠다. 그리고 턱이 뻐근했다.

 "이, 이거 왜 이런 거지……?!"
 "원래 사랑니 빼고 나면 다음날에 엄청 부어. 몰랐어?"
 "몰랐어! 왜 진작 말 안해줬어!"
 "프롱스, 대체 얼음찜질은 뭐 때문에 했다고 생각한 거야? 부기 예방하려고 하는 거잖아, 그거."
 "찜질 했는데! 하라는 대로 열심히 했다구! 근데 왜 이러지?"
 "몰라. 네가 제대로 안 했나보지."

 한껏 빵빵해진 얼굴로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한 채 서 있는 친구에게서 등을 돌리며 시리우스는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제임스 포터는 마치 여름의 태양같은 인물이었다. 365일 웃는 얼굴로 지내는 듯, 밝고 활기차며 주변에 제 에너지를 나눠주는 듯한 인간상. 그런 제임스가 저렇게 절망한 듯한 표정으로 구는 걸 볼 수 있다니 희귀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저 광경 보여줄 겸 리무스랑 피터도 여기로 부를까, 시리우스는 몇 초 정도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차피 저 부기도 며칠 지나면 알아서 가라앉을텐데 평생 가는 것 마냥 괴로워하는 제임스의 표정이, 사진으로 남겨놓고 싶을 만큼 웃겨서.

 "제임스, 어차피 사나흘 지나면 다 가라앉아."
 "뭐? 그럼 그동안 이 못생긴 얼굴로 지내야한단 말이야? 어디 나가지도 못하게 생겼잖아!"
 "음…… 그건 어쩔 수 없지."
 "말도 안 돼! 지금 나 완전 흉측하다고!"

 마치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후다닥 제 침실로 달려가더니 바로 침대 시트를 뒤집어쓴다. 알아주는 퀴디치 선수 아니랄까봐 잽싸기 그지 없는 몸놀림이었다. 시리우스는 어이 없다는 눈빛으로 제임스- 로 추정되는 시트 가운데 툭 튀어나온 부분을 응시했다.

 "지금 에반스라도 부르면 볼 만하겠다?"
 "끔찍한 소리 하지 마. 릴리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

 부기 때문에 입이 잘 벌어지지도 않는 상태일거면서 말은 잘도 했다. 시리우스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제임스가 릴리 에반스에게 목을 매기 시작한 것도 벌써 몇년 된 이야기였고, 둘이 사귀기 시작한 것 역시 그렇게 오래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직도 릴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주제에, 지금 릴리를 불러온다는 말에도 질색하는 걸 보니 정말 충격이긴 한 모양이었다. 진짜 실물이 나타나면 어쩔까. 그래도 저렇게 시트 뒤집어쓰고 안 나오려나? 짓궃은 마음이 스멀스멀 일어나는 통에 시리우스는 깃펜과 양피지를 놓아두었던 책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학이 시작하고나서 단 한번도 손댄 적 없었던 물건들이었으나 지금 당장은 필요했다.
 친애하는 릴리, 방학 잘 보내고 있어? 나는 제임스의 집에서 같이 지내고 있어. 다름이 아니라…… 그는 중간중간 슬쩍 뒤를 돌아보면서 사각사각 편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
 발치 이후로 이틀이 더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기는 약간 완화되었을 뿐 거의 그대로였다. 이제 더이상 통증이 문제가 아니었다. 내 원래 얼굴이 영원히 안 돌아오는 건 아니겠지? 제임스는 여전히 불안에 떨며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걱정과 불안감에 의해 거의 만 하루 가까이 식음을 전폐하다시피한 상태였다. 얼음찜질도 하라는 대로 했는데 왜! 어째서! 억울해! 그깟 사랑니가 뭐라고?!
 그 순간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보나마나 패드풋이겠지, 열기 싫다고 거부하려는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예상치 못한 이름을 들먹였다.

 "프롱스? 에반스가 왔어. 문 좀 열어봐."
 "릴리? 릴리가 어떻── 지금은 안 돼!"

 릴리가 지금 어떻게 우리집에 있는 건데?! 릴리와 함께라면 언제 어느때 어느곳에라도 항상 오케이지만 지금은 정말 아니었다. 제임스가 살면서 릴리 에반스를 피하고 싶은 유일무이한 순간을 고르라면 당연히 지금이었다. 이 모습을 어떻게 보여주란 말인가. 뺨은 퉁퉁 부었고 입은 제대로 벌어지지도 않는데다 평소보다 배는 더 못생겨져있는데! 이윽고 문 너머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제임스는 더욱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제임스?"

 진짜 릴리잖아, 내 릴리! 언제 들어도 나이팅게일의 지저귐처럼 맑고 예쁜 목소리였다. 어쩌면 목소리까지도 예쁠 수가 있지, 완벽한 내 사랑…… 사랑하는 여자친구의 목소리에 잠시 상념에 빠져있던 제임스를 강제로 현실에 끌고온 것은 장난기 가득한 시리우스의 목소리였다.

 "릴리를 이대로 밖에 세워둘 셈이야? 뭐, 네가 안 열면 따고 들어가면 되니까."
 "뭐?!"
 "알로호모라."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방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언뜻 보인 실루엣은 두 개. 제임스는 본능적으로 시트를 머리 끝까지 덮어썼다. 소년의 허세라고 해도 좋지만 릴리에게는 항상 멋지고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싶었다. 부끄러운 모습들을 보였던 건 사귀기 전에 있었던 사건들로 족했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아니야.
 누군가 타박타박 걸어서 다가오나하더니, 제임스가 누워있던 침대 한켠이 무게를 싣고 가볍게 기울어졌다.

 "제임스, 나 왔어."
 "릴리……? 어떻게?"
 "시리우스가 부엉이를 보냈었어. 네가 사랑니를 뽑고나서 많이 침울해져 있으니까 내가 있으면 도움이 될 거라고."
 "패드풋 너-"
 "계속 얼굴 안 보여줄 거야?"

 아무리 지금 얼굴이 말도 아니더라도, 더이상 버틸 수 없었다. 제임스는 자신을 걱정해서 방문했다는 여자친구를 계속해서 무시할만큼 매정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그 대상이 릴리 에반스라면. 패드풋, 진짜 가만 안 둘거야. 기어이 릴리를 불러온 시리우스에게 원망의 화살을 돌리며 제임스는 천천히 시트를 내렸다. 빼꼼 눈 바로 아래까지 내리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 붉은빛이 도는 긴 갈색 머리칼을 단정하게 한쪽 어깨로 넘긴 채 차분하게 응시해오는 녹안. 정말 릴리였다. 예쁘다. 릴리를 마주하자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제임스의 눈에 릴리는 항상, 언제나 예뻤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못생겼잖아, 이런 꼬락서니를 릴리에게 보여야한다니. 그는 풀죽은 눈빛으로 낮게 웅얼거렸다.

 "그런데…… 나 지금 정말 못생겼어."
 "넌 안 못생겼어."
 "진짜야…… 보면 실망할거라고."

 릴리가 나한테 실망하면 어쩌지, 내가 봐도 못생겼는걸. 사랑니는 대체 왜 존재하는 거고 빼버리고나서도 이렇게 문제인걸까. 울상을 지으며 제임스는 바투 쥐고 있던 시트를 느리게 아래로 내렸다.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마자 부드러운 것이 뺨에 와닿았다. 릴리의 손이었다. 자신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다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어, 릴리……?"
 "제임스 포터, 너 하나도 안 못생겼어."

 웃고 있는 릴리의 얼굴이 너무 예뻐서 순간적으로 눈부신 것을 본 사람처럼 눈앞이 아득해졌다.

 "나한테는 여전히 잘생겼어, 예쁘고."
 "어……"
 "그러니까 얼굴 숨기려고 하지 마. 사랑니 뽑느라 고생 많았어, 제임스."

 입술에 온기가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홀린 것처럼 멍한 표정을 한 제임스에게 릴리가 다시 생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시리우스에게 듣기로는 어제부터 제대로 식사도 못 했다며. 내려가자, 간단하게 스프라도 만들어줄게."

 보드라운 손이 살며시 제 손을 잡아끌어온다. 릴리에게 끌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는 중에 거울을 지나쳤으나 이번에는 제 모습이 아까처럼 끔찍해보이지는 않았다.
 제임스의 부기가 완전히 가라앉은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더 지나고 나서의 일이었다. 첫 사랑니가 뽑혀나간 잇몸이 완전히 아물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달 가까이 지난 후의 일.




사실은 저번주에 제가 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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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어에 대한 전설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옛 이야기와도 같았다. 구전 속 인어들에 대한 묘사는 지역마다 조금씩 상이했으나 그 외관만은 항상 동일했다. 인간의 상반신과 물고기의 하반신을 지닌 아름다운 생명체들. 바다의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고 노래를 불러 뱃사람들을 홀려 잡아먹는 요사스러운 마물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으며, 인어의 눈물은 곧 진주가 된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인어가 인간이 되기를 소원하여 뭍에 나왔다는 동화같은 전설 역시 존재했다. 하지만 결국 모두 옛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허구의 존재에 불과하다. 그의 왕국은 삼면에 바다를 둘러끼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만들어진 전설일 뿐이라고. 겔러트는 항상 그렇게 단언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실제로 인어를 보았다는 목격자가 몇백년간 단 한 사람도 없었을리가 없었다. 어려서야 유모의 품에서 동화책을 읽으며 한번쯤 인어를 만나보고싶다는 꿈을 꾸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내일모레 성년을 맞이할 일국의 후계자가 그런 어린애 같은 소망을 품고 있는 것도 우스웠다. 그는 이미 동화나 민담, 전설 대신 제왕학과 정치학, 군사학이 더 어울리는 나이가 된지 오래였으므로.
 그리고 그날 일어난 해프닝은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성년식까지 2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기에 각종 예법 등 익혀야 할 것들은 갈수록 많아지고 있었다. 성년이 되자마자 바로 왕위 물려줄 것도 아니면서 대체 왜? 자신을 전담한 왕실교사들의 지독함에 진저리를 치면서 몰래 성밖으로 빠져나간 것은 순간적인 충동에 가까웠다. 그는 왕실의 혈통을 이은 하나뿐인 후계자이기는 했지만 결코 모범적인 학생은 아니었기에 종종 빠져나갈 통로를 알아두었고, 그날 역시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왕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해양 국가답게 수도에 위치한 왕성에서 십여분 정도 걸어가면 바다와 맞닿아있는 해변가가 펼쳐졌다. 왕실 사유지였기에 인기척도 드물었고 이런 충동적인 도피처로도 딱 좋았다. 여느 때와 같이 사람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바닷가 풍경을 예상했건만 그날은 조금 달랐다.

 "……?"

 처음에는 운나쁘게 해변으로 떠밀려온 돌고래를 잘못 보거나 헛것을 본 줄 알았다. 당연히 텅 비어있어야 할 백사장에 인영 하나가 비스듬히 앉아있었다. 여길 어떻게? 자신이 본 것을 의심하며 한발짝 한발짝 다가갈 때마다 실루엣이 또렷해졌다. 본인 역시 인기척을 느꼈는지 저를 막 돌아보는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 제 나이 또래의 소년이었다. 처음 느낀 것은 전반적으로 색조가 옅은 인상이라는 것이었고, 그 다음으로 느낀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옷이 대체 저게 뭐야? 제대로 된 의복이라기보다는 마치 돛을 찢어서 그 천을 아무렇게나 걸친 것처럼 보이는 모양새였다. 심미적이거나 사회적인 이유가 아닌, 문자 그대로 맨몸을 가리기만 위해서 두른 것처럼. 가느다란 양 발목과 매끈한 종아리가 고스란히 상아색 천쪼가리 아래로 다 드러나있었다. 혼자 덩그러니 있는 걸 보면 딱히 일행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아보이는데, 어째 난감해지는 기분으로 겔러트는 이름모를 상대를 응시했다. 자신의 것보다 더 색채가 연한 푸른빛 눈동자가 얌전히 제 시선의 움직임을 쫓아왔다.

 "이름이 뭐야? 왜 여기 혼자 있어?"
 "……"

 왕족의 권위를 무기처럼 휘두르는 일부 노친네들을 평소에도 혐오해왔기에, 일부러 동년배로 보이는 소년에게 격의없는 말투로 질문했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더 곤란해지는 기분인데. 겔러트는 재차 말을 이었다.

 "음, 혹시 말을 못 해? 아니면 외국인?"
 "……"

 이번에도 역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방금 전과 다르게 성과는 있었다. 소년이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럼 왜 여기에 혼자 있냐고 물어봐도 소용이 없을 거고… 어떡할까."
 "……"
 "여기 내버려두고 갈 수도 없고. 혹시 나 따라올래?"

 아마 몰래 왕성을 빠져나갔던 것을 부왕이나 교사들에게 들키면 호되게 혼이 나긴 하겠지만 그건 나중의 문제고… 외우다시피 지겹게 읽고있는 고전들도 항상 위정자의 덕목은 피치자를 돌보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저 군주의 덕목을 실생활에서 실천하고자 하려는 것 뿐이다. 정말로. 게다가 옷가지도 제대로 못 걸친 소년을 그냥 내버려두고 오기에 겔러트의 양심은 아직 건재했다.
 모래톱 위에 앉아있는 소년에게 손을 내밀자 조금 머뭇거리는 듯 하더니 자신의 손을 잡아왔다. 맞잡은 손에 지그시 힘이 실리나 하더니 소년이 몸을 일으켰다. 갓 태어나 첫걸음을 떼는 새끼사슴처럼 위태롭게 버티고 서나 하더니 이내 제 쪽으로 픽 쓰러졌다. 간신히 어깨를 붙잡아 쓰러지는 걸 막아주긴 했지만, 오늘 방금 만난 상대와 갑작스레 신체가 맞닿는 기분은 꽤 묘했다. 어렸을 때부터 왕실의 유일무이한 후계자로서 보안이니 뭐니 하는 이유로 타인과 부대끼며 살았던 적이 없었던지라 더욱. 독특하게도 소년이 자신의 품 안으로 쓰러지는 순간 코끝에 바다 내음이 확 풍겨왔다. 흔한 물비린내나 짠내가 아니라, 뭐랄까, 유치한 비유지만 마치 인어같은. 숨결이 닿을 듯한 근거리에서 눈이 마주치는 것 역시 한없이 낯선 기분이었다. 괜찮아? 농을 던지듯 가볍게 말을 건네며 조심스레 어깨에서 손을 떼자 다시 소년의 몸이 휘청거렸다. 어디 다친 거 같지는 않은데…… 이대로는 한나절이 지나도 왕성으로 귀환은 어려울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불러오기 위해 자리를 비우고 싶지는 않았기에 잠시 망설이던 겔러트는 마음 속으로 결정을 내렸다.

 "미안, 잠깐만 실례할게."

 어깨를 붙들고 무릎 뒤에 손을 받친 후 단번에 안아들었다. 호리호리해도 남자애니까 꽤 묵직하리라고 예상했는데 생각보다는 수월했다. 갑작스레 몸이 들어올려지는 바람에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소년과 시선이 다시 얽혔다. 천이 위로 딸려올라가지 않게 다시 고쳐안으면서 겔러트는 안심시키려는 듯 웃어보였다.

 "널 여기에 놔두고 사람을 불러오기가 뭐해서. 걷는 게 어려운 것 같으니까 내가 성까지만 안고 갈게. 괜찮지?"

 혼란스러워하는 듯한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나 하더니 소년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는 내내 너무 주목을 받지만 않으면 좋을텐데, 내심 바람을 품으며 겔러트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꽤나 이상한 기분이었다. 노친네들 잔소리가 지겨워서 벌인 짧은 일탈이었는데 왕실 소유의 해변에서 생전 처음 보는 소년과 만나고, 무려 그 상대를 안아올린 채 왕성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대체 왜 그런 차림으로 혼자 모래사장에 있었던 것인지 이유가 궁금했지만 차차 물어보면 되겠지 싶었다. 그런데 얘 글은 쓸 줄 알까?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나중에 생각하자 싶었다.
 첫 만남이었다.


2.
 한때 인어들이 인간들 앞에 거리낌없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있었으나 이미 알버스의 대에 와서 그것은 금지된 사항이었다. 인간 앞에 자신을 드러내지 말 것, 그리고 인간과 절대 접촉하지도 말 것. 어린 인어들은 유년기부터 그런 주의사항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다. 그리고 알버스는 절대 규칙을 어기지 않는 매우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그렇기에 그날의 사건은 일종의 일탈에 가까웠다. 벌써 오래 전에 일어났던 이야기였다. 이름도 모르고 심지어 종족마저 다른 뭍 위의 인간 소년을 구해주었던 것은.
 시간이 흐르며 인간들의 기술은 날로 발전했고 해양은 더이상 인어들만의 안전한 보금자리가 아니었다. 그날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유람선이 특유의 소음과 함께 바다 한복판을 가로질러가는 것을 응시하고 있던 알버스는 평소보다 수면에 가까이 있었고, 그래서 마침 타이밍 좋게 뭔가가 바닷물에 추락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사람, 그것도 아마 어린…… 새파란 바닷물에 이질적인 황금빛이 섞여 일렁이는 것을 본 순간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그동안 칼처럼 지켜왔던 금기를 어긴 이유는 그 당시에도, 그 이후에도 알 수 없었다. 물에 빠진 것은 열살 남짓해보이는 소년이었고, 입고 있는 의복은 인간들의 복식을 잘 모르는 그의 눈에도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자신도 모르게 받쳐안은 소년의 힘없이 늘어진 팔다리와 감긴 눈꺼풀을 쳐다보다 말고 수면으로 향했다. 인간은 물 속에서 호흡을 하지 못한다고 했었다. 인어의 입맞춤을 받은 인간은 수중호흡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오래된 전설이 있긴 했으나 알버스 역시 그 진위를 알지 못했다. 어서 빨리, 수면 위로 데려다주지 않으면.

 그 순간 금발의 소년이 물 속에서 눈을 떴다.

 눈동자는 놀랄 만큼 새파랬다. 마치 이 바다속처럼 명도 높은 푸르름이었다. 날 봤어. 시선이 닿는 순간 알버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순간 치밀어오른 감정은 자신의 정체를 인간에게 들켰다는 공포나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알 수 없는 가슴설렘에 가까웠다. 홀린 듯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다 말고 어느새 수면 바로 아래에 도착한 것을 깨달았다. 알 수 없는 감정을 뒤로 한 채 소년의 몸을 힘껏 수면 위, 바깥공기가 있는 곳으로 밀어올렸다. 다른 인간들이 발견할 수 있도록 몇십 초 정도 그러고 있었을까, 웅성거림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며 알버스는 도로 바다 깊숙히 헤엄쳐 내려갔다. 아주 짧은 조우였다. 그러나 그 기억은 매우 강렬하게 남았고, 물에 빠진 상대와 마주한 순간 느꼈던 감정의 정체를 스스로 깨닫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다시 한번 더 만나고 싶었다. 그동안 시간이 지나 더이상 어린 소년이 아닐 상대를. 이름은 당연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대였지만 갈수록 바람은 강해졌다. 육지로 나가서 다시 한번만 더 만나고 싶다는. 분명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한낱 구전 설화일지라도, 어린 인어들이 듣고 자라는 이야기 중에는 뭍에서 꼬리 대신 다리로 걸어다니는 인어들의 이야기가 꽤나 많았었다. 알버스는 꽤나 총명했고 다리를 얻는 방법에 대해 알아내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침내 알아낸 그것은 맥이 빠질 정도로 간단했다.


3.
 타인에게 관심 없고 요리조리 빠져나가기로 유명한 왕실 후계자가 밖에서 고양이도 아니고 무려 사람을 주워왔다는 것은 왕궁 내에서도 극소수만 아는 비밀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솔직히 아직까지 잘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도 소년을 내보내지는 않은 상태였다. 이 상태로 왕성 밖으로 보내기에는 좀…… 자신이 이렇게 동정심 많고 너그러운 성격이었나 새삼 감탄하며 겔러트는 정물같은 자세로 책을 읽고 있는 상대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처음 데리고 온 날 두르고 있던 거적같은 천쪼가리는 내다버린지 오래였다. 자신의 옷을 입히기에는 한 뼘 정도 키가 작고 뼈대가 더 가늘어서 무리였고, 궁정 시종들 제복을 입히기도 뭐해서 결국 귀족 자제들이 입을 만한 옷을 따로 구해오게 시켰다. 그런 황당한 상황에서 만나서 그렇지, 이렇게 멀쩡하게 옷을 입혀놓으니 인물화의 모델로 삼아도 될만큼 단정한 생김새였다. 말을 못 한다는 게 아쉽긴 했지만, 어떻게 글은 또 읽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하루종일 책을 붙들고 있다시피 한 모습이 신기했다. 나는 저렇게까진 못 할 거 같은데.

 "음, 걸음 연습할 시간이야."

 아직까지 이름도 몰라서 제대로 못 부르고 있지만 어쨌든. 예상대로 글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듯 싶었다. 책에 코를 박고 있는 걸 보면 읽는 건 또 가능한 거 같은데 희한하기도 하지.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바닷가에서 솟아오른 것 같았다. 이름 모를 소년에게서는 오묘한 부유감이 느껴졌다. 인간의 겉모습을 하고 있되 마치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생물인 것처럼. 걸음이 서툰 것 마저도 그랬다. 소년의 걸음걸이는 첫날 느꼈던 것처럼 어색하고 서툴기 그지 없었다. 겉보기에 뼈나 근육은 멀쩡한 것 같은데 의사가 아닌 이상 구체적인 연유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손을 내밀자 읽던 책을 옆에 내려놓고 소년이 자신의 손을 잡아왔다.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더니 살얼음판이라도 디디듯 한발짝 발을 내디뎠다. 발목에 힘이 빠졌는지 잠깐 비틀거리다가 다시 무게중심을 되찾는다. 첫날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부자연스럽고 위태로운 발걸음이었다. 무너져내릴 듯, 품 안으로 쓰러질 듯 아슬아슬하게 몇 걸음 더 옮기고 나서야 반대쪽 벽에 겔러트의 등이 닿았다.

 "오늘은 그만 할까?"
 "……괜, 찮아."

 순간 겔러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이 방 안에는 나랑 얘밖에 없고, 들려온 목소리도 바로 코앞에서 들렸고, 그럼 정말로? 상대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더 소년 같았다. 앳된 외모를 보며 막연하게 상상했던 것보다 한 톤 낮은 침착한 목소리.

 "너, 말할 줄 아는구나."
 "응, 미안……"
 "아니. 나한테 미안할 것까지는 없고. 이제까지는 왜… 아니다. 이름부터 물어봐야지, 이름이 뭐야?"
 "알버스."

 이제는 잘 쓰지 않는 고어였다. 아마 희다, 라는 뜻이었던가. 나름 이미지와 어울리는 것 같다고 납득하며 겔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버스. 그런 이름이었구나. 혹시 내 이름은 알아?"
 "-겔러트?"
 "알고 있었네."

 상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이름을 듣는 것은 낯선 기분이었다. 어디서 왔는지, 왜 그런 차림으로 홀로 있었는지, 이제까지 말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수십가지였지만 그는 질문을 쏟아붓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나쁘지 않았다.


4.
 살며시 밸브를 열자 미지근한 물이 욕조에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뭍으로 올라온 후 홀로 욕실에 남겨지는 시간이 가장 편안했다. 아무리 자신이 원해서 택한 것이었다지만, 이제까지 살아왔던 익숙한 방식이 있는데 지금의 모습이 불편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여전히 어색하기만 한 옷을 가지런히 벗어 접어둔 후 미리 챙겨놨었던 소금을 욕조 안에 풀었다. 손을 뻗어 수온을 확인한 후 알버스는 조심스레 욕조에 몸을 담갔다. 물 안에 완전히 허리 아래가 잠기자마자 느리게 변화가 시작되었다. 곧게 뻗어있던 두 다리가 하나로 엉겨붙고, 매끈한 살갗이 이질적인 질감의 비늘들로 덮이기 시작한다. 이내 끄트머리에서 꼬리 지느러미가 튀어나와 펼쳐졌다. 물고기의 하반신이었다. 심해를 유영해야 하는만큼 한들거리는 관상어의 것처럼 연약해보이지만은 않은, 유연하지만 탄탄해보이는 하반신. 하체가 본래의 모습으로 변화함에 따라 양쪽 귀 아래 목덜미가 세로로 쫙 갈라지며 아가미가 입을 벌렸다. 물에 닿아있는 손가락 사이사이를 얇은 피막같은 물갈퀴가 채운다. 이제껏 살아왔던 익숙한 모습에 편안함을 느끼며 알버스는 널찍한 욕조 안에서 몸을 쭉 폈다. 풍성한 꼬리 지느러미가 욕조 가장자리에 비스듬히 걸쳐졌다.
 인어가 인간의 다리를 얻는 방법은 생각보다 너무나 간단했다. 물 밖으로 나가 공기중에 노출되면, 그리고 물기가 완전히 마르고 나면 꼬리는 인간의 두 다리로 변화했다. 하지만 인어들은 바다 깊숙히 사는 생물이었고 가끔 바위 위에 올라가 앉아있는 경우는 있어도 물기가 마를 때까지 그러지는 않았기에, 이 단순한 사실은 오랫동안 비밀에 부쳐지는 것이 가능했다.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인어가 물 밖에 나가서 물기가 마를 때까지 머무르겠어, 나같이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야.
 언젠가 물 속에서 눈이 마주쳤던 상대와 다시 만나고 싶다는 불가능에 가까운 소망만으로 끝내 육지에 올라오는 행위를 감행했고 다리도 얻었다. '걷는다'라는 개념은 그저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을 뿐인데 막상 경험한 걷기는 생각보다 어려웠고, 낯설었다. 물속을 가르고 나아가는 것보다 공기 속에서 움직이는 게 저항은 적은 느낌이지만, 당장이라도 중심을 잃고 넘어질 듯한 착각이 든다. 실제로 처음 뭍에 올라온 날은 도저히 걸을 수가 없어서 막연하게 어떻게 할까 고민하면서 해변에 앉아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두 다리로 서는 불안정한 자세로 인간들은 어떻게 걸어다닐 수 있는지 아직까지도 알 수 없었다. 더 익숙해지면 그처럼 혼자서도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게 될까. 일어설 때 매번 잡아주던 손의 감촉이 새삼스레 떠올라 알버스는 물갈퀴가 생긴 자신의 오른손을 하릴없이 쥐었다 폈다. 손마디가 길쭉하고 우아했던, 자신만큼이나 서늘했던 체온의.

 "날 기억 못 하는 것 같긴 하지만……"

 찾고있던 상대와 바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둘도없는 행운이었다. 인간은 훨씬 성장속도가 빠르다고 했었던가, 어렸던 소년은 훌쩍 성장해 있었고 어느새 청년 티가 역력했다. 그날에 비해 많이 달라진 것이 없는 자신에 비하면 천양지차였으나 그래도 눈매만큼은 여전히 똑같아서. 그 화려한 금발 역시. 전혀 기억 못하는 것 같아서 아쉽기는 했지만 벌써 오년도 더 지난 이야기였다. 물에 빠져서 정신 없었을 테니까 헛것을 봤다고 치부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기적같이 한번에 만나게 된 것은 좋은데, 그 후 어떻게 하고싶은지 딱히 생각하지 않았던터라 약간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무작정 널 만나러 왔다거나 네가 좋다고 하면 부담스러워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정체를 밝히기에도 뭐했다. 당분간은 그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싶었다.
 막 상념에 빠져들려는 찰나 누군가 욕실의 문을 서너번 노크했다. 연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알버스의 이름을 불러왔다.

 "알버스, 안에서 잠든 거 아니지? 너무 오래 있는 거 아니야?"
 "어, 아냐… 나갈게……!"

 당장이라도 겔러트가 문을 따고 들어와 제 본모습을 볼 것 같은 불안감에 발버둥치다시피 욕조에서 빠져나오다 바닥 타일에 형편없이 몸이 부딪혔다.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소음이 문 밖에까지 들렸는지 다시 문밖의 상대가 문을 두드렸다.

 "괜찮은 거야?"
 "괘, 괜찮아!"

 걸려있던 대형 수건을 손에 잡히는대로 끌어당겨 정신없이 하반신의 물기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이 상태를 혹시 그가 보기라도 하면. 내가 그와 같은 인간이 아니란 걸 알아도 전과 똑같이 대해줄까? 주입과도 같은 반복적인 교육 탓에 알버스는 인간들이 이종족에게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잘 알았다. 아무리 자신이 첫눈에 반한 상대고 당장은 상냥하게 대해주는 거 같아도, 겔러트 역시 인간이었으니까. 이 꼬리지느러미를 보게 된 이후에도 똑같이 대해주리라 생각하기는 솔직히 어려웠다. 언젠가 정체를 고백해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아직 아니야…! 이미 푹 젖어버린 수건을 내려놓고 팔을 뻗어 새 수건을 꺼내 물기를 꾹꾹 문질러 닦았다. 골반 아래에서 꼬리 지느러미 끝까지, 비늘로 덮여있는 면적 전체를 말리는 것은 생각보다 꽤 어려웠다.

 "들어가봐도 되지?"
 "어, 잠깐──"

 문고리가 돌아가는 듯한 덜컥거리는 소리에 마음이 더 급해졌다. 물밖으로 나온 후 아가미는 사라졌지만 흰 수건 아래에서 아직 꼬리 지느러미가 툭 튀어나와있었다. 대충 말린 것 같은데 왜 안 변해, 왜……! 초조해지는 바람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 순간 욕실 문이 열렸다. 알버스는 본능적으로 수건으로 하반신을 가린 채 고개를 돌렸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익숙한 금발이었다.

 "미안. 아직 옷 안 입었구나. 그런데 바닥에서 뭐해?"
 "아… 그게, 미끄러져서."
 "어디 안 다쳤어? 욕실에서 미끄러지는 건 위험해."
 "괘, 괜찮아."

 미끄러져내릴세라 하반신을 가린 수건을 꽉 붙든 채 알버스는 자신의 꼬리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천 아래 가려진 게 인간의 다리가 아니라는 게 티가 날까봐 불안함에 심장이 요동쳤다.

 "옷 입고 나와. 이번엔 미끄러지지 말고."
 "으, 응."

 인형처럼 어색하게 웃으며 겔러트를 눈으로 배웅한 후에야 자신의 하반신이 다리로 돌아와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이지 아찔한 순간이었다. 몸에 소금기가 묻어있어 다시 씻어야한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닫고 알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5.
 겔러트가 보기에 알버스는 무척 독특했다. 최초의 만남이야 이루 말 할 것도 없었고, 갑작스레 말문이 트인 것부터 분명 글을 쓰지 못했던 것 같은데 어느순간 글을 자유자재로 쓰기 시작한 것 역시. 처음 둥지에서 떨어진 새 주워오듯 데려왔을 때는 걸음마저 서툴렀는데 이젠 제법 비틀거리지 않고 잘 걸었다. 마치 왕성에 오고나서 차근차근 제가 익혀야 할 것들을 학습해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특유의 분위기 역시 한몫했다. 주위의 사물들과 묘하게 어울리지 않는 듯한 이질감과 부유감. 처음에도 느꼈지만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았다. 국적이나 가족 등 인적사항을 물어보려고 해도 은근슬쩍 화두를 돌리기만 하고… 현재 머무는 곳이 왕성이고 자신이 하나뿐인 왕실의 후계자란 걸 알았을 텐데도 별다른 태도의 변화가 없는 것 역시 신기한 점이었다. 하긴 신분을 알자마자 바로 거리를 두려고 하거나 노골적으로 불편해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매일 꼬장꼬장한 노친네들만 보다가 간만에 또래 소년을 보니 속이 트이는 기분이기도 했다.
 책만 쥐어주면 행복해하는 것 같긴했지만, 그래도 매일 똑같은 곳에 콕 박혀있는 애를 밖에도 데리고 나가야 할 것 같아서 겔러트는 외출을 감행했다. 왕성에 데려오고 난 이후 첫 외출이었다.

 "네가 직접 젓는 거야?"
 "왜, 걱정 돼? 어릴 때부터 배웠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다른 사람 태우면 네가 안 좋아할 것 같아서."

 처음 만났던 바닷가로 데리고 나온 후 준비해뒀던 조각배를 띄웠다. 자신이 직접 노를 잡자 알버스가 어째 불안해보이는 듯한 기색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정확히는 도착한 곳이 그 해변이라는 걸 안 이후로 묘하게 저런 얼굴이었다. 왜 저러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겔러트는 굳이 묻지 않았다. 다소 긴장한 듯 반듯하게 앉아있는 알버스의 시선이 느리게 주변풍경을 훑었다. 겔러트 자신과 똑같은 벽안이었지만 훨씬 색조가 옅어 새파랗다기보다는 하늘빛에 가까운 눈동자였다. 등 뒤로 펼쳐진 진짜 하늘보다 더 하늘같은 빛깔이라고 생각하며 겔러트는 노를 저었다.
 붙여주겠다는 호위병도 따로 물리치고 -애초에 두 사람 이상 탈 수 있는 크기의 배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둘만 올라탄 배의 분위기는 평온했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파도 소리와 이름모를 바다새들의 울음소리. 저 멀리 펼쳐져 있는 수평선이 눈에 들어온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초조해보이던 알버스의 표정 역시 많이 풀어진 후였다. 가끔은 이런 휴식도 필요한 법이지, 한동안 책과는 먼 삶을 살았던 주제에 겔러트는 스스로의 행위를 합리화했다. 주변 풍경을 둘러보다 말고 문득 눈앞에 있는 소년에게 눈길이 멎었다. 약한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 벌어진 셔츠깃이 나풀거리며 흰 목줄기가 드러났다. 성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항상 주변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지금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자연스러웠다. 알버스의 옆모습에 정신을 판 사이 유독 커다란 파도가 다가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파도가 배에 덮쳐들기 바로 직전이 되어서였다.

 "……!"

 한대 얻어맞는 듯한 묵직한 타격감과 동시에 작은 조각배는 무력하게 뒤집혔다. 당연히 그 안에 타고 있던 두 소년도 그대로 바다에 빠졌다.

 "알버스?"

 해양국가의 후계자답게 겔러트는 바다와 친숙했고, 수영에 능한 편이었다. 언젠가 어려서 물에 빠졌던 기억 이후로 더 집착했던 면도 있었다. 파도에 휩쓸렸던 것도 잠시 수면 위로 고개를 쳐든 겔러트가 뒤집힌 조각배의 뱃전에 매달렸다. 나야 수영할 줄 안다지만 그애는? 이런 파도치는 바다에서 수영할 수 있을까? 고개를 돌려 정신없이 찾았지만 온통 푸른 바닷물만 일렁일 뿐, 붉은빛을 띤 머리칼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아까 그 파도에 휩쓸려가버렸나?
 간신히 배를 원상태로 돌려놓고 그 위에 힘겹게 기어올라갔다. 물에 빠진 생쥐처럼 온몸이 푹 젖어버린지라 스쳐지나가는 바닷바람이 유독 차가웠다. 여전히 보이지 않는 상대를 찾으며 다시 한번 이름을 불렀다. 익숙한 형체가 시계(視界)에 들어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너……?"

 물 위로 떠오른 얼굴이 유난히 창백했다. 젖어서 뺨에 어지러이 들러붙은 적갈색 머리카락과 죄 지은 아이처럼 뭔가에 겁먹은 듯 올려다보는 눈동자. 어딘가 평소와 다른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 위화감의 원인을 겔러트가 눈치챈 것은 한 박자 늦은 직후였다. 알버스의 귀 밑 목덜미가 한 뼘 정도 길게 찢어진 채 허공에서 뻐끔거리고 있었다. …아가미? 바닷물 아래에서 이형의 형상이 아른거렸다. 대강 보기에도 인간의 하반신이 아니었다. 물고기의 꼬리였다. 인간의 상반신과 물고기의 하반신, 그리고 목덜미에 돋아난 아가미.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생물의 이름을 겔러트는 잘 알고 있었다. 그저 동화나 전설 속에서만 등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인어……"

 언젠가 어려서 한번쯤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생명체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6.
 들켰다. 들켜버렸다. 이래서 사방이 물인 곳에는 오고싶지 않았는데. 당장이라도 도망쳐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으며 알버스는 입술을 떨었다. 여기서 달아나는 거야 쉬웠다. 바다는 자신이 평생 살아온 곳이었고, 한낱 조각배나 인간의 헤엄보다 훨씬 빠르게 도망쳐 숨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달아나버리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겨우 찾아냈는데. 이제껏 함께 보냈던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어설픈 연심이 발목을 붙들었다. 평생 상대를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망설임 역시 알버스를 어쩔 줄 모르게 만들었다. 바다에 빠지자마자 다리는 원래의 형상을 되찾았고 아가미 역시 피부를 찢고 모습을 드러냈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생긴 얄팍한 피막 역시. 물에 젖어 금발이 캐러멜 빛깔로 짙게 물든 겔러트가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 알버스는 눈을 내리깔았다.
 이제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정체를 숨긴 이종족을 경멸하거나 혐오할까? 아니면 자신을 속였다는 것에 대해 분노할까? 어느쪽이든 감당하기 너무나 버거울 것만 같은 느낌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알버스의 귓전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닿았다.

 "…인어, 였구나. 이제 다 이해가 가네."
 "……"
 "잘 걷지 못했던 것도, 그런 차림으로 홀로 있었던 것도 다."

 생각보다 화가 나 있거나 냉정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이제 시선을 들어올려도 되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알버스가 고개를 든 건 다음 문장에서였다.

 "그러고보니 옛날에 바다에 빠졌던 적이 있었어. 그때는 아직 수영을 잘 하지 못해서. 그때 바다 속에서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던 것 같았는데… 그땐 물이 폐로 들어가서 헛것을 봤다고 생각했었거든."
 "……"
 "왜냐면 분명 그때 꼬리를 본 거 같아서. 착각이라고만 여겼는데- 그거, 너였어?"
 "아……"

 기억하고 있었구나. 오래 전 이야기라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멍하게 상대를 응시했다. 표정에서 이미 대답이 읽혔는지 겔러트가 생긋 웃었다. 물에 빠져 형편없는 몰골이었는데도 성화에 등장할 법한 천사를 연상시키는 미소였다.

 "진작 말하지 그랬어…는 무리였겠고. 고마워, 그때 구해줘서."
 "나, 나는."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사실 난 어릴 때부터 인어와 만나는 게 소원이었거든."

 오늘서야 소원성취했네. 일국의 후계자는 마치 열살짜리 소년처럼 웃었다.

 "그런데 그 꼬리 말이야. 다시 다리로 돌아올 수는 있는거야?"
 "물 밖으로 나와서 완전히 건조되고 나면……"
 "그럼 물 속에 들어가면 다시 꼬리로 변하고?"
 "응."
 "와, 진짜 마법같네. 일단 돌아가자, 올라와."

 손이 뻗어왔다. 그것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것도 잠시 손을 맞잡고 뱃전 위로 몸을 실었다. 배가 기우뚱거리면서 알버스의 몸이 온전히 공기 중에 드러났다. 하복부 아래 비늘로 덮힌 하반신이 오후의 햇빛 아래에서 반짝였다. 늘어진 꼬리 지느러미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민망하게 느껴져 알버스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만져봐도 돼?"
 "어? 응……"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상대가 조심스럽게 비늘 표면에 손끝을 댔다. 인어에 비해 체온이 높은 사람의 피부가 와닿자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풍성하게 펼쳐진 지느러미에서부터 천천히 훑어올라가는 타인의 촉감이 생소했다. 손끝이 떨어져나가는 동시에 겔러트가 겉옷을 벗었다. 바닷물이 여전히 뚝뚝 떨어지는 겉옷에서 대충 물을 짜낸 후 겉옷으로 꼬리를 둘둘 싸맨다. 겉옷이 길고 넉넉했던 탓에 지느러미 끄트머리를 제외한 하반신이 손쉽게 가려졌다. 마치 크레페처럼 겉옷으로 감싸인 알버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완전히 말라야 다리로 변한다고 했잖아? 지금 우리 둘다 홀딱 젖어서 다 건조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으니까… 이렇게 가리고 돌아가면 될 거 같아서."

 그럼 또 첫날같은 광경을 연출한 채 돌아가야 하는 걸까, 하는 어색한 마음보다 비밀을 들켰는데도 경멸당하지 않았다는 환희가 더 컸다. 알버스는 흘낏 시선을 앞으로 던졌다. 해변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7.
 왕궁 내에 갑작스러운 건축 공사가 진행된 정확한 이유에 대해 알고있는 궁정의 인물들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그 공사를 진행하는 인부들이나 그 총책임자조차도. 그것이 설치될 태자궁의 주인이 많은 보수를 내걸었기에 공사는 비교적 빠른 속도로 마무리되었다. 사실 한 나라의 후계자가 갑작스레 제 거처에 만들겠다고 선언한 것치고는 다소 뜬금없는 시설이었다. 강화유리로 만들어진 거대한 수조. 돌고래 서너마리라도 충분히 키울 수 있을 법한 크기의 실내 수조였다. 게다가 수조가 완성될 때까지도 단 한 마리의 관상어도 사들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은 채워졌고, 수질을 신선하게 유지하기 위한 각종 여과기와 장치들이 설치되었으며 푸르스름한 조명들 역시 수조 바닥에 놓여졌다. 수조가 있는 곳에 출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의 하나뿐인 열쇠를 손에 쥔 채 겔러트는 그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당연히 진짜 바다와는 다르겠지만 나름 나쁘지않아 보이는 대체품이었다. 물론 이건 자신의 생각일 뿐이니 당사자의 의견을 묻는 게 낫겠지만.

 "어떻게 생각해?"
 "괜찮은 거 같아."

 옆에 서 있던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괜찮아야 할 텐데, 매일같이 바다에 갈 수는 없으니 그 대안으로 생각해낸 아이디어였다. 왜 쓸데없이 예산을 낭비하냐고 관료회의 측에서 반발이 있을만도 했지만 어차피 배정된 예산 내에서 사용하는 거고, 최근 몇년간 주어진 예산보다 적게 써왔으니 이정도 사치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한번 들어가 볼래?"

 알버스가 조심스럽게 수조 옆에 놓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하의를 입은 상태로 물에 들어가면 몸이 변하는 통에 찢어지고 못 쓰게 되어버린다고 해서 -바다에 나갔던 그 날만해도 외투 한장으로 감싸고 데려오느라 고생했고- 일부러 목욕가운을 입게 한 상태였다. 기다란 가운 아래로 유독 가는 양 발목이 엿보였다. 처음 봤던 순간에도 느꼈지만 인간의 모습일 때 하체가 얄팍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원래 안 쓰던 기관이어서 그런가. 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알버스가 수조 가장자리에 걸터앉더니 미끄러지듯 안으로 입수했다. 그리고 변화는 시작되었다.
 언제 봐도 신비롭고 믿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곧게 뻗은 두 다리가 하나로 들러붙나하더니 곧 색이 옅은 비늘이 표면을 뒤덮었다. 끄트머리가 갈라진 꼬리 지느러미가 꽃처럼 물속에서 하늘하늘 나부꼈다. 완벽한 인어의 모습이었다. 목욕가운을 벗어던진 인어가 유려하게 헤엄쳐 겔러트가 서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유리 한 장만을 두고 마주보는 기분은 묘했다. 갈라진 아가미가 팔딱팔딱 움직인다. 푸르스름한 조명 탓에 천장과 벽에 온통 물빛이 아른거렸다. 알버스의 얼굴 역시 파란 빛깔로 얼룩져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서로를 쳐다보나 하더니 물속에서 상대가 먼저 살풋 웃었다. 소년같이 해사한 미소였다. 그때서야 정확한 나이를 물어보지 않았다는 데 새삼 생각이 미쳤다. 인어도 인간과 비슷하게 나이를 먹을까? 인어도 인간과 유사하게 성장하고 늙어가는 것인지 새삼 궁금해졌다. 겔러트는 느리게 수조의 유리벽에 손바닥을 댔다. 서늘한 감각이 피부에 와닿는다. 그때 만져본 꼬리의 촉감도 이와 비슷하게 서늘했었던 것 같다. 물끄러미 제 행동을 응시하던 알버스가 자신의 손을 유리에 가져다댔다. 수조의 벽을 사이에 두고 손을 맞대고 있던 것도 잠시 상대의 몸이 위로 빠르게 솟구쳤다. 깊고 넓은 바다 속에서 살았었던 수중생물답게 꽤나 날렵한 몸놀림과 속도였다.

 "……들어올래?"
 "내가?"

 어느덧 수조의 가장자리에 몸을 걸친 알버스가 겔러트를 향해 손짓했다. 물에 젖어 반짝이는 얼굴에서 평소와 다른 생기가 넘쳤다. 역시 수조를 만들어주길 잘했나 싶어 순순히 수조 꼭대기를 향해 올라갔다. 가까이에서 본 상대는 정말로 더 인어같아서,

 "그러고 싶긴 한데…… 옷 젖잖…?!"

 이제껏 보지 못했던 장난기어린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 훅 가까워지나 하더니 시야가 뒤집혔다.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수면 깊숙히 가라앉는다. 간신히 물속에서 눈을 떴을 때 생글생글 웃고있는 인어가 코앞에 있었다. 나비처럼 나부끼는 적갈색 머리칼과 자신과 다르게 물속에서 더 자연스러운 몸놀림. 강제로 물에 빠뜨려졌다는 것을 잊어버릴만큼 환상적인 풍경이었다. 푸르스름하게 일렁거리는 물과 인어.
 그런데 숨이 슬슬 막혀오는데, 다시 위로 올라가지 않으면. 벌어진 입에서 공기방울 서너개가 새어나왔다. 바닥을 차고 올라가려는 찰나 서느런 손이 겔러트의 양 뺨을 부드럽게 감싸왔다.

 "……"

 그 다음으로 이어진 행위는 너무나 의외의 것이어서, 겔러트는 눈을 크게 떴다. 입술이 서로 맞닿았다. 담백한 입맞춤이었지만 얼어붙기에는 충분했다. 먼저 떨어져 나간 것은 상대 쪽이었다. 느닷없이 먼저 다가왔던 것처럼. 자신이 여실히 당황한 게 표정에서 드러났는지 몇초 후 알버스의 표정 역시 당황스럽게 변했다.

 <그게 아니고……!>
 "?"

 마치 고래의 울음처럼, 청각이 아닌 피부 깊숙히 감겨드는 것 같은 파동. 이게 인어들의 의사소통인가 깨닫자마자 숨이 차서 자신도 모르게 물을 들이켰다. 5년도 더 이전 겪었었던, 폐부에 물이 차는 듯한 불쾌감을 각오했으나 각오한 느낌은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폐에 느껴진 것은 신선한 산소였다. 마치 평소처럼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호흡. 뭐지? 다시한번 호흡을 시도했으나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속인데도 숨쉬는 것이 가능하다. 어떻게?
 인어와 입맞춤하게 되면 물속에서도 호흡을 할 수 있다고 어느 민담집에서 읽었던 것 같았다. 어린 마음에 꽤나 낭만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정말이었나? 자신이 눈치챘다는 걸 느꼈는지 알버스가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을 놀라게 해놓고 저런 얼굴이라니. 어쩐지 약이 올라 지면을 딛고 그대로 수조 위로 도약했다. 머리를 쳐들자마자 익숙한 공기가 폐부 깊숙히 스며들었다. 저를 따라서 물위로 머리만 내놓은 상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움직였다.

 "겔러트?"

 물 속은 너의 세계일지 몰라도 물 밖은 내가 속한 세계지. 겔러트는 팔을 뻗어 무작정 상대의 턱을 끌어당겼다. 어쩔 줄 몰라하는 눈동자 표면, 물빛에 반사된 푸르름이 일렁이고 있었다. 나만 놀라면 억울하니까.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입술을 포갰다. 몸을 뒤로 빼려는 걸 놓아주지않고 그대로 뒤통수를 잡아챘다. 아무리 수중호흡을 가능케 해 주기 위한 배려였다지만 나한테는 그거, 나름 첫키스였는데.


8.
 "네 꼬리 보여주지 않을래?"

 상대방의 갑작스러운 부탁에 알버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게다가 여기는 물 한 방울도 없는 실내인데.

 "벌써 몇번 봤잖아."
 "가까이서 제대로 본 적은 거의 없잖아. 예뻐서 그래, 예뻐서."
 "별로…… 예쁘지는 않은데."

 자신이 보기에는 인간들 특유의 길고 곧게 뻗은 두 다리가 더 미관상 아름다웠다. 그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자세로 지면을 디디고 선 채 걸어다닐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놀라운지. 인간의 아이들 역시 바로 걷는 것이 아니라 걷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연습한 후에야 비로소 걸어다닐 수 있다고 하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꼬리 지느러미를 보여주는 게 조금 부끄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이 그와 다른 종족, 비인간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거 같아서. 그나마 물 속에서는 괜찮지만 이렇게 뜬금없이 보여달라고 하면. 난처한 표정을 짓던 알버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어디서?"
 "수조까지 가긴 좀 그러니까 욕조?"
 "어──"

 얼떨결에 욕실까지 질질 끌려오다시피 도착했다. 궁 내에 욕실만 여러개였지만 하나뿐인 왕실 후계자가 주로 사용하는 욕실은 유난히 크고 화려했다. 매끄럽게 펼쳐진 대리석 재질의 바닥 위를 조심스레 걷고 있으려니 겔러트가 먼저 소형 풀장 사이즈의 욕조에 달린 밸브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미지근한 온수가 사정없이 콸콸 쏟아져내린다. 발목 즈음 물이 찼을 때야 욕조에 발을 내디뎠다.

 "잠깐만, 너 옷은-"

 자신이 상하의 모두 단정하게 갖춰입은 채로 물에 들어갔다는 것을 자각한 것은 조금 늦었다. 미온수에 잠겨있는 두 발이 먼저 변하기 시작한 통에 그대로 죽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옷감이 하릴없이 찢어지고 튿어지는 소리와 함께 영롱한 비늘로 조밀하게 덮힌 하반신이 공기중에 드러났다. 옷, 미리 벗어놨어야 했는데. 그의 앞에서 본모습을 보인 게 한두번도 아니기는 했으나 흥미롭다는 듯 뚫어져라 응시하는 시선이 따갑도록 강렬했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왜 저렇게까지 집요하게 쳐다보는 거지. 어쩐지 낯부끄러워지는 듯한 기분에 괜히 지느러미 끝으로 몇번 물 표면을 내리쳤다.

 "음… 이제 다 봤으면 물기 닦아도 돼?"
 "예쁘다. 가까이에서 보니까 더 화려하네. 빛이 반사되는 각도에 따라 약하게 반짝이는 거 같아서. 이제 꼬리 말리는 거 도와줄게."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내가 먼저 보여달라고 했으니까 그 정도는 해야지."

 전신을 다 감쌀 수 있을 만한 낙낙한 사이즈의 수건을 든 겔러트가 생글생글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꼬리 전체를 수건으로 감싸서 꾹꾹 눌러가며 물기를 제거하는 손길이 세심했다. 어느정도 건조되었다 싶을 때가 되어서야 물고기의 꼬리가 사람의 다리로 돌아왔다. 드러난 맨다리를 수건으로 완전히 가리기 전 상대의 손이 알버스의 발목을 가볍게 쥐어올렸다. 얼떨결에 다리 한쪽이 위로 딸려올라간 알버스가 의아한 듯 고개를 쳐들었다.

 "전부터 느꼈는데."
 "……?"
 "네 발목 되게 가늘다. 원래 다리를 안 썼을테니 당연한가? 긴가민가했는데 진짜로 한 손안에 잡히네."

 발목에 달라붙은 손가락의 모양새는 백조처럼 희고 우아해서, 상황을 잊고 넋을 잃게 만들었다. 피부와 피부가 맞닿는 감각이 유달리 어색하다. 마치 그날 수조에서처럼. 아직 인간들의 기류에 익숙하지 않은 자신이 느끼기에도 어째 분위기가 묘해지는 것 같아 알버스는 성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보니 아까 옷을 갈아입지 않고 바로 물에 들어가는 바람에 옷을 못 쓰게 되어버려서.

 "아, 이럴 게 아니라, 나 옷 좀 가져다 줘."
 "옷?"
 "여벌을… 못 챙겨와서…… 그러니까, 이러고 돌아갈 수는 없잖아… 저어, 겔러트?"

 부탁하려고 했는데,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는 이유가 뭐지. 여전히 웃는 표정인 채로 꼼짝도 하지 않고 응시해오는 얼굴이 알 수 없게 느껴졌다.

 "아니면, 내 발목이라도 좀……"
 "어차피 궁 안인데 괜찮아, 내가 들고 가면 되니까."

 들고 가? 뭘? 나를? 발목이 놓아지는 대신 몸이 번쩍 들어올려졌다. 마치 짐짝처럼 상대의 어깨에 들쳐메진 채 알버스는 당황해서 수건이 미끄러져 내릴세라 세게 움켜쥐었다. 설마 이대로 나가려고?

 "잠깐, 남들이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입 잘못 놀리면 본인 일자리가 날아가겠다고 생각하겠지. 발버둥치지말고 얌전히 좀 있어줄래."
 "그냥 내 발로 걸어가면 안 돼…?"
 "미끄러지면 어쩌려고? 안 돼."

 평소 격의 없이 대해주는 모습에서 거의 느끼지 못했지만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왕족이었다. 벌써 몇번이나 이렇게 들려서 가야 하는 건지, 알버스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9.
 "요즘 들어 유독 외출이 잦으십니다."
 "그러면 안된다는 국법 조항이라도?"
 "안될 거야 없습니다만."
 "그렇다면 경이 상관할 바가 아니지."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자 모노클을 낀 노대신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았다. 하여튼 아버지가 붙여놓은 교사들 중에서도 제일 짜증나는 인간. 저 뭔가를 캐내려는 듯한 눈알은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백년 묵은 능구렁이 같은 노인네를 일대일로 상대하고 있을 때마다 기가 쭉쭉 빨렸다. 내가 왕이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인간을 숙청하든 팔다리를 다 잘라서 뒷방 늙은이로 만들어놓든지 해야지. 짜증의 기색을 굳이 숨기지 않고 뒤돌아서는 겔러트의 뒤로 노대신이 발길을 붙잡듯 말을 덧붙였다.

 "최근 외부에서 누군가를 데려오셨다고 들었는데요. 그후로 더 학문에의 기피가 심해지신 것 같다고 스스로도 생각하지 않으시는지?"
 "아니,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성년식까지 2년도 남지 않았습니다. 부디 지혜롭게 처신하시길."

 그 정도 잔소리를 들어줬으면 충분히 참아줬다 싶었다. 성년이 되고나면 지금 멀쩡히 통치 중인 부왕이 갑자기 급사라도 하게 되나. 예법이고 나발이고 일부러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아버린 후 빠르게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빠른 걸음이 어느덧 거의 뜀박질로 변하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누가 보면 또 어지간히 뒷말이 나오겠거니 싶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뛰었다. 최근 계속 드나들어 익숙해진 복도로 접어들고, 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따고 들어서자 어느새 익숙해진 풍경이 그를 반겼다.
 그다지 좁지 않은 방을 가득 채운 거대한 유리수조와 아래 위치한 푸르스름한 조명들, 조명 덕에 천장과 벽에까지 일렁거리는 듯한 물결. 그리고 그 수조 안에서 나비처럼 유영하는 인어.

 "안녕, 나 왔어."

 인기척을 느꼈는지 바로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려오는 눈매가 꾸밈없이 청신했다. 그는 물속에서 나풀나풀 손을 흔들어보이는 인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수조 위에 올라서자 기다렸다는 듯 수면 위로 소년의 머리가 쏙 솟아올랐다. 같이 드러난 맨어깨에서 물기가 반짝였다. 느리게 제게로 다가오는 모습이 꼭 부재했다가 돌아온 주인을 반기는 애완견같기도 하다는 생각에 살풋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미안. 아무도 안 왔지?"
 "응."
 "그럼 키스해도 돼?"

 알버스가 대답 대신 눈꺼풀을 깜박였다. 조명의 빛에 물든 눈동자는 선연한 물빛이었다. 속눈썹이 뺨 위로 길게 그늘을 드리운다. 사람을 홀려서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가기도 한다는 무시무시한 전설의 주인공치고는 무해하기 짝이 없어보이는 모습이었다. 이미 거리는 충분히 가깝다. 겔러트는 상체를 조심스럽게 기울였다. 닿은 것은 인간보다 훨씬 서늘한 체온이었다. 저번에 한번 키스한 적이야 있지만 그때는 워낙 겨를이 없어서. 입을 어색하게 꾹 다물고있는 게 귀여워 내심 작게 웃음을 삼켰다. 인어들에겐 입맞춤이라는 개념이 없는 걸까 싶었다. 육지에 올라온 후 언어와 문자를, 걸음을 차례차례 습득했듯이 이것도 가르치면 금방 체득하겠지. 나도 처음이고 너도 처음이고. 입술이 열렸다. 혀가 맞닿는다. 구강 내의 체온은 피부 표면보다는 높게 느껴졌다. 그리고 인간의 것보다 조금 더 뾰족한 듯한 치열. 살짝 고개를 옆으로 틀며 깊숙히 파고들자 살짝 헐떡이는 듯한 숨소리가 났다. 보통 인간보다 폐활량도 더 좋을 거면서. 겔러트는 슬핏 웃었다. 인어가 이렇게 귀여운 생물일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만나러 와줘서 고마워. 그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널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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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Eㅣ의 날 기념으로 네ㅋㅗMㅣMㅣ 겔알

투자한 시간대비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올려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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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영 안차는 ㄱㄹㄷㄷㅇ 단문 혹은 더이상 안쓸 거 같은 짧은 미완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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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스마스때도 그렇더니 발ㄹㅔㄴ타인 연성마저 늦을 줄은....^^;;;
원래 이런 기념일 전혀 안챙기는데 매번 연성하게 만드는 두 예쁜이에게 대신 감사의 말씀 전하고싶네요
이쯤되면 CA는 3차창작같고ㅋㅋㅋㅋㅋㅋㄱ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ㄱ CA쪽이 마음에 영 안차서 계속 붙들고 있다가 결국 하루 넘겼는데 겔알 짧게나마 급하게 써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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