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 누가
부른 적 없는 사랑이 쳐들어왔다
/박소란, 벽




 밤은 언제나 성급하게 찾아왔다. 적어도 최근 들어 알버스가 느끼기에는 그러했다. 분명 매일매일 똑같은 24시간이었으며 시간의 흐름은 항상 동일할 텐데, 최근의 하루하루들은 꿈결과도 같이 지나치게 빨리 흘러갔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느끼는 이유를 열일곱 소년은 잘 알고있었다. 겔러트 그린델왈드. 고드릭골짜기에 살고 있는 저명한 대고모에게 몸을 의탁하려 왔다는 또래의 소년. 몇주 전 그가 나타난 이후 알버스의 일상은 180도 달라졌으니까. 일어나자마자 그를 만나기위해 달려나가 종일 그와 대화하고 토론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셈이었는데도 밤이 찾아오는 것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땅거미가 지면 겔러트와 헤어져서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야하니까. 태양이 조금만 더, 늦게 지면 좋을 텐데. 겔러트는 이제까지 알버스가 보아온 또래 중 가장 비상하고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겔러트와 같은 수준의 동년배 상대는 7년내내 다녔던 호그와트에서도, 각종 국제 대회에 참가하면서도 본 적 없었다. 마치 평범한 오리들 무리에 혼자 끼어있는 우아한 백조처럼, 겔러트 그린델왈드는 걸출했고 특별했다. 적어도 알버스에게 있어 겔러트 그린델왈드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그를 알기 이전 이제껏 살아왔던 삶이 모두 부질없는 누더기처럼 느껴질 정도로. 셀 수도 없이 많은 상장과 트로피, 성적표와 주위의 찬사가 대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가 없었던 자신의 생은 아무 의미도 없을 뿐인데.
 물론 만나고 나서 며칠 지나지 않아 겔러트가 자신이 덤스트랭에서 퇴학당했다는 사실을 넌지시 고백해왔을 때, 알버스가 충격을 받지 않았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알버스는 엄밀히 따지자면 7년 내내 흠 잡을 것 하나없는 우등생이었고 모범생이었다. 물론 4학년 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기숙사 침대 커튼을 실수 태워버린 적은 있었지만 그 외에는 사춘기의 일탈도 반항도 전혀 겪지 않았으니까. 호그와트 입학 바로 이전 해, 머글 소년들을 습격해 아즈카반에 수감된 아버지를 둔 소년은 항상 공정하고 선량해야만 했다. 제 위에 어둑하게 드리워진 편견과 선입견을 깨버리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다. 항상 우수했고 5학년 때부터 쭉 반장 타이틀을 유지한 채 7학년 때 학생회장 직위까지 거머쥔 그에게 있어 완벽해야한다는 강박감은 숨쉬듯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징계, 하물며 감점도 거의 당해본 적 없던 착한 학생이었던 알버스에게 퇴학은 하늘이 무너지는 수준의 충격과도 맞먹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무려 자신이 새로 사귄 친구가 퇴학을 당했다니? 겔러트가 자신이 학교에서 쫓겨난 이유를 자세히 알려주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뭔가 심각한 일이었겠지. 모교인 호그와트에 대해서만큼 덤스트랭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으나, 나름 유서깊은 교육시설인만큼 학생을 단순한 연유로 인해 내쫓지는 않을 터. 아마 뭔가 심각한 트러블이 있었겠지── 알버스는 그쯤에서 사고를 멈추고 눈을 감았다. 자신의 아버지가 여동생을 공격했던 머글 소년들을 습격했다가 반 머글주의자라는 수치스러운 오명을 얻었듯, 겔러트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어쨌든 지나간 과거의 일일 뿐이며 중요한 것은 지금 겔러트가 알버스의 곁에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그곳에서 퇴학당하지 않았다면, 과연 자신이 겔러트를 만날 수나 있었을까? 아니- 언젠가 겔러트가 이름있는 학자인 대고모를 만나기 위해 이 고드릭 골짜기에 왔을지도 모른다. 몇년, 혹은 몇십년 이후에. 하지만 그랬다면 나는 도저히 견디지 못했을거야. 몇주 전의 자신은 정말이지 덫에 걸려 숨통이 끊어져가는 짐승과도 같은 상태였으니까. 아마 그대로 절망과 분노에 침식되어 죽었을지도 몰라, 네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지난 7년동안 완벽해야한다는 압박과 강박관념을 코르셋처럼 감고 치열하게 살아왔다. 입학 전부터 제게 씌워진 가족의 어두운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는데, 졸업 후 또다시 가족 때문에 발목이 잡힐 줄이야. 마주한 현실 앞에서 알버스는 피를 토하듯이 좌절했다. 가족이란 이름의 굴레는 몸부림칠 수록 더 목줄기를 조여오는 밧줄과도 같았다. 처음에는 오명을 쓴 아버지, 이번에는 온전히 내 몫으로만 남겨진 아픈 여동생. 그렇다고 알버스가 자신의 가족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 그들은 화목했었다. 적어도 아리아나가 공격당하기 전까지는. 그리고 소년은 자신의 가족들 모두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동시에 소년은 더 높은 곳, 넓은 곳으로 나아가기를 원했다. 그는 한두 세기에 나올까말까한 천재였으니까. 그러나 가족은 그가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마다 매번 앞을 가로막았다. 이번에는 책과 논문 틈바구니로 탈출할수도, 어머니에게 대신 의존할 수도 없었다. 알버스는 가장이 되었고 이제 의지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철저히 혼자였으며 여동생이 살아있는 한 이 집안에 줄곧 묶여있어야 할 테니까. 그렇게 바닥없는 우울의 늪에 잡아먹히듯 침잠해가던 순간 제 앞에 나타난 소년의 존재는 얼마나 찬란하고 황홀하며 인상적이었는지. 겔러트 그린델왈드에게 알버스 덤블도어가 정신없이 빠져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름답고 천재적인 나의 구원자.
 그렇기에 알버스에게 있어 겔러트와 함께하는 1분 1초는 너무나도 소중했다. 그저 바라만 보고있어도 좋았지만 그와의 대화는 더욱 즐거웠다. 이제까지 이토록 자신과 동등한 재능의 소유자와 토론을 나누었던 적이 있었나? 두 소년은 여러 주제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는 현 마법사회의 시스템과 그 문제점, 머글들에 대한 것까지 흘러갔다. 솔직히 겔러트의 태도(그는 머글들이 마법사들에 의해 지배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며 현재처럼 마법사들이 숨어사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열변을 토했다)는 알버스가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과격하고 근본주의적이었으나 그런 점을 지적하기에 열일곱 천재는 상대에게 심하게 빠져있었다. 그래서 알버스는 냉정하게 비판하는 대신 다소 거칠어보이는 그의 사상을 매끄럽게 다듬고 세련된 어휘로 포장해주는 길을 택했다. 더 큰 선을 위하여(For the Greater Good). 상대의 이니셜을 따와 만들었던 글귀는 일종의 은밀한 고백과도 같았다. 겔러트가 이 문구를 마음에 들어하는 듯했을 때 소년의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설레였다. 이제껏 단한번도 사랑도 연애경험도 겪어보지 못했던 알버스는 낯선 감정의 파도 속에서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했다. 늦되기 짝이 없는 첫사랑이었다.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있다는 것을 어설프게나마 자각하게 된 후로 열일곱 소년의 하루하루는 매일같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것과도 같았다. 겔러트가 시야에서 멀어지면 괴로웠고 그와 가까이 있으면 행복했다. 그가 자신의 속내를 행여 눈치챌까 조마조마하면서도 알아줬으면 하는 모순적인 감정이 교차했다. 해가 떠오르면 곧 겔러트 그린델왈드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 이제 겔러트 그린델왈드와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슬퍼졌다. 그런 마음에 언젠가 지나가는 말처럼 고백했던 적이 있었댔다.

 "밤에 갑자기 네 생각이 나면 어떻게 하지? 갑자기 하고싶은 말이 생각날수도 있잖아. 전하지 않으면 다음날 잊어버릴지도 모르는."

 금발의 소년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부엉이를 보내, 알버스 네 편지라면 언제라도 환영이니까."

 그때부터 밤이 되면 두 사람간에 부엉이가 바삐 오가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벌어지는 일은 아니었으나 대부분 먼저 편지를 써보내는 것은 알버스였다. 하루는 너무나 짧게 느껴졌는데도 희한하게 밤은 길었다. 매일 만나는데도 불구하고, 떨어져 있는 그 잠깐조차 상대가 너무 보고싶어 참을 수 없을 때 알버스는 침대에서 일어나 깃펜을 들었다.  당장이라도 전하지 않으면 이대로 제 감정에 익사해버릴 것 같아서. 겔러트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은 각양각색이었다. 순수한 학문적 토론의 연장선일 때도 있었고, 현 사회를 개혁시킬만한 새로운 아이디어도 있었으며, 새벽의 기운을 빌어 솔직하게 제 마음을 털어놓은 연서 역시 있었다. 물론 썼다가도 차마 보내지 못했던 연서들은 버리지도 못하고 구겨진 채 책상 한켠에 고스란히 처박혔다. 매번 책상서랍을 열어볼 때마다 서글퍼지는 풍경이었으나, 만약 그가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반응이 두려웠기에 알버스는 현 상태 유지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네 곁에 있을 수 있다면 평생 친구로만 남아도 괜찮아. 친구로서라도 너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서툴기만 한 연심은 짝사랑하는 상대의 사소한 말 한마디나 눈빛에도, 손짓 하나에도 속절없이 휘둘리고 또 휩쓸렸다.
 상념에 빠진 상태에서 실수로 편지 마지막 줄에 사랑해, 를 덧붙일 뻔한 알버스는 가까스로 문장을 마무리지으며 제일 하단에 서명을 남겼다. 언제나처럼 제 이름의 첫 이니셜인 A를 죽음의 성물 특유의 상징에 겹친 듯한 서명이었다. 세가지 죽음의 성물- 겔러트에게 성물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된 이후 알버스 역시 죽음의 지배자, 라는 그럴듯한 타이틀에 마음을 빼앗겼다. 유소년기에 가장 좋아했던 동화책의 내용이 단순한 비유가 아닌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흥분감, 그리고 성물 자체에 대한 매료. 겔러트는 소유자를 최강으로 만들어준다는 딱총나무 지팡이에 가장 흥미가 있는 듯했으나 알버스의 마음을 뒤흔든 것은 다름아닌 부활의 돌이었다. 부활의 돌만 손에 넣으면 돌아가신 부모님을 다시 불러올 수 있을 것이고, 그는 이제 여동생이라는 주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염원을 담아, 그리고 겔러트를 향한 애정을 담아 알버스는 항상 그런 식으로 편지 마지막에 서명을 남겼으며 오늘도 그러했다.

 "겔러트에게 잘 전달해줘. 언제나처럼, 알지?"

 부엉이의 다리에 편지를 묶고 작게 속삭인 후 창문을 열어 날려보낸다. 파드득, 날개를 치며 어둠 속으로 날아가는 부엉이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알버스는 계속해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편지를 보내고나서 답장을 기다리는 시간은 가장 설레면서도 고통스러운 시간 중 하나였다. 지금쯤 내 편지를 읽고있을까? 아니면 답장을 쓰고있을까? 겔러트의 글씨체는 그 외모만큼이나 화려했기에 알버스는 겔러트와의 대화만큼이나 그가 쓴 답장을 읽는 것 역시 좋아했다. 그러나 보통 늦어도 2,30분이면 답장이 오고는 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부엉이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책조차 눈에 들어오지않아 알버스는 초조하게 침실을 서성거리며 부엉이를 기다렸다. 아까까지 설렘과 기대로 차올랐던 마음이 서서히 불안으로 얼룩지기 시작한다. 너무 늦은 시간에 보낸걸까, 아니면 내가 내용을 너무 길게 썼나. 혹시 이미 자고있는걸까? 그게 아니면──
 그 순간 창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귓가를 스쳤다. 드디어 부엉이가 돌아온건가 싶어 반갑게 돌아선 알버스의 푸른 눈동자에 거짓말같은 풍경이 비쳤다.

 "아……?"
 "안녕, 알버스. 창문 좀 열어줄래?"

 쏟아져내리는 달빛 아래 금빛 머리칼이 사금처럼 반짝였다. 마치 한밤중의 환상처럼, 혹은 꿈 속에서나 상상했을만한 몽환적인 풍경처럼─ 어깨에 부엉이를 앉힌 겔러트가 창가를 두드리며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부른 적 없는 사랑이 느닷없이 쳐들어왔다. 습격처럼, 혹은 기습과도 같이. 알버스는 눈부신 것을 보는 사람처럼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겔러트와 밤에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던가. 그들은 항상 황혼이 깔리기 시작하면 내일을 기약하며 헤어졌고, 어쩌다 저녁식사를 같이 한 적은 있어도 환한 실내에서 이루어졌으니까. 처음으로 월광 아래에서 마주한 겔러트의 모습은 낮과 사뭇 다르게 느껴졌기에 알버스는 못박힌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섣불리 가까이 갔다가 그가 신기루처럼 사라지거나, 이 꿈에서 깨어나버릴 것 같아서.

 "답장을 쓰다가 그냥 찾아오는 게 낫겠다 싶어서. 이것 좀 열어주지 않을래?"
 "앗, 미안…! 들어와."

 재차 창문이 두드려졌을 때 알버스는 최면과도 같은 상태에서 깨어나 허둥지둥 창가로 다가갔다. 뜬금없지만 지금 이 상황이 마치 머글들 사이에서 전해내려온다는 오래된 초자연적 전설의 일부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뱀파이어는 집주인의 허락이 없으면 집안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믿고 있다고 했었지. 정식으로 초대받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다고. 그렇다면 지금 널 '초대'하고 있는걸까? 설령 그가 피를 탐하기 위해 인간을 미혹할 뿐인 뱀파이어라고 해도 기꺼이 제 경동맥을 내어주고 싶었다. 그만큼 널 사랑하니까.
 손이 떨리는 바람에 알버스는 몇번 헛손질을 한 후에야 -상대가 눈치채지 못했기만을 바라며- 간신히 문고리를 벗겨냈다. 창문이 열리고, 달빛과 함께 겔러트가 안으로 가볍게 뛰어들어왔다.

 "오, 여기가 네 침실이구나. 처음 들어와보네. 저쪽에 있는 건 설마 다 상장이야?"
 "응? 어, 그래."
 "너 학창시절에 정말 우등생이었구나. 난 반성해야겠는걸."

 야심한 시간에 짝사랑하는 상대와 제 침실에 단둘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자 심장이 가파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 만약 이 소리가 들리게 되면 어떡하지. 안절부절 못하는 알버스를 뒤로 하고 느긋하게 방을 구경하던 겔러트가 장난기어린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나쁜짓을 하다 걸린 아이처럼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표정이 아직도 얼어있네. 놀랐어? 갑자기 찾아와서?"
 "응, 솔직히…… 겔러트 네가 자고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네 편지가 언제 올지 모르는데 어떻게 일찍 잠자리에 들겠어. 친애하는 나의 알버스."

 한없이 매끄러운 말투와 천사처럼 아름다운 외모. 벌써 그를 처음 만났던 것이 한달도 더 된 일인데도 알버스는 자신보다 한두살 더 어린 또래 소년 앞에서 매번 속절없이 무너져내렸다. 아무리 그가 비밀과 거짓말에 천부적인 천재라 할지라도 난생 처음으로 빠져든 첫사랑 앞에서는 그저 무력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너는 나를 친구로만 생각할텐데, 내가 널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걸 알면 경멸할까?

 "그런데 말이야, 아까 네가 보냈던 편지 말인데─"

 창가에 기대앉은 겔러트가 다시 입을 연 순간 갑작스레 노크소리가 울렸다. 이번엔 당연히도 창문에서 들려온 소리는 아니었다. 누군가 알버스의 침실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두 소년이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쳐다본 순간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침실 문이 벌컥 열렸고, 알버스는 마법을 쓰는 대신 엉겁결에 겔러트를 창문 밖으로 밀쳐버리고 말았다. 왠지 이 시간에 그가 자신의 침실에 있다는 걸 알려선 안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엄습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다름아닌 파자마 차림의 남동생, 애버포스였다.

 "…형? 이 시간에 창문 열어놓고 서서 뭐 하고있어? 안 자?"
 "아, 그게, 답답해서 잠깐…… 열었어. 애버포스, 무슨 일이야?"
 "아리아나가 자꾸 칭얼거려서. 겨우 재우고 올라왔는데 내일 해 뜨면 어디 아픈 거 아닌지 형이 좀 봐줘야할 거 같아. 그런데, 형."
 "으응?"

 알버스와 똑 닮은 하늘색 눈동자가 의구심을 품고 자신을 응시해온다. 남동생의 시선 앞에 알버스는 그답지 않게 뻣뻣하게 굳어서 긴장했다.

 "아까 안에서 말소리 들린 거 같았는데. 형 방금 누구랑 얘기한거야?"
 "어? 그냥 잠이 안 오길래 부엉이한테 말 건 거였어. 신경쓰지말고 가서 자."
 "두 사람 목소리 같았는데……"
 "애버포스 네가 잘못 들은 거겠지. 여기 누가 있다고 그래. 우리집에는 집요정도 없잖아."
 "이상하네……"

 남동생의 의심에 찬 시선이 답지않게 죄라도 지은 듯한 표정의 알버스의 얼굴과 그 뒤에 어정쩡하게 열린 창틀을 오가며 집요하게 머물렀다. 그러나 결국 별다른 특이점은 찾지 못했는지 애버포스는 이내 어깨를 들썩였다.

 "그럼 난 내려갈게. 형도 어서 자."
 "그래, 잘 자. 애버포스."

 어색하게 남동생을 배웅하고나서야 알버스는 울상이 되어 창가로 달려갔다. 비록 많이 높은 위치는 아니지만, 혹여나 자신이 밀쳐버린 것 때문에 겔러트가 다쳤으면 어떡하지? 나 때문에 네가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쩔 줄 몰라하며 창가에 서서 아래로 몸을 기울이자마자 익숙한 한쌍의 벽안과 눈이 마주쳤다.

 "겔러트…!"
 "네 동생, 이제 갔어?"

 최악의 상황 -그가 다쳤다거나, 더 심각한 상황이 되었다거나- 이 빗나갔다는 것만으로도 소년의 심장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뛰었다. 마치 공기를 딛고 서 있는 것처럼 유유하게 창가 바로 아래 허공에 떠 있던 겔러트가 훌쩍 창턱으로 뛰어올라 앉았다. 특유의 장난기 어린 쾌활한 표정을 한 그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다행이다, 안 들켰네. 그런데 알버스 너 보기와 다르게 힘 세구나? 아까는 좀 놀랐어."
 "…아, 미안. 미안해…… 다친 데는 없는 거지? 만약 네가 나 때문에 다치기라도 했었다면,"

 새삼스레 목이 메였다. 너무나 좋아하는데, 그래서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싶고 좋은 사람이고 싶었는데 왜 네 앞에서는 이렇게 서툴어지기만 하는걸까. 이내 알버스의 뺨에 서늘한 체온이 위로라도 하듯이 와닿았다 도로 떨어졌다.

 "그런 표정 하지 마. 어쨌든 난 안 다쳤고, 네 덕에 애버포스에게 들키지도 않았잖아?"
 "겔러트, 나는-"
 "괜찮아, 알버스. 이런 경험도 나름 스릴넘치고 좋은걸. 공주가 갇힌 탑을 방문한 왕자라도 된 기분이고."

 새까맣다 못해 짙푸른 여름밤의 어둠을 뒤로 한 채 창가에 기댄 열여섯 소년, 그리고 그 위로 희뿌옇게 쏟아지는 새파란 달빛. 마치 한 여름밤의 꿈과도 같은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풍경이었다. 찰나 지금 이 순간이 이대로 멈추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을 정도로.

 "이왕 온 김에 더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네 동생이 또 올라올지도 모르고, 알버스 네가 많이 놀란 것 같아서 오늘은 이만 가볼게."
 "돌아가게? 벌써?"
 "그렇지만 내일도 또 만날 거잖아, 우리?"

 겔러트 그린델왈드가 알버스를 향해 유려하게 미소지었다. 희곡 속의 요정왕이 탐냈다는 요정여왕의 소년처럼, 혹은 오래된 신화에서 여신의 사랑을 받았다는 미소년처럼.

 "그럼 내일 만나, 친구."

 그는 짧은 인삿말을 남긴 채 마치 큰 새처럼, 꺄르르 웃으며 날렵하게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순간이동을 한 건지 뒤늦게 시선으로 그 뒤를 좇았을 때 겔러트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알버스는 창턱에 손을 짚은 채 한동안 밖을 넋나간 듯 바라보았다. 마치 일련의 환각과도 같은 늦은 밤의 방문이었다.
 그 이후에도 겔러트는 종종 늦은 시간 예고없이 알버스의 침실을 방문하고는 했다. 보내진 편지의 답장 대신일 때도 있었고 별다른 이유없이 변덕처럼 들릴 때도 있었다. 최초의 방문 이후로 항상 열어둔 창문이 마치 그의 앞에서 속절없이 빗장을 풀어버린 제 사랑처럼 느껴졌기에, 어린 천재는 늦은 시간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는 했다. 그가 두드리기 훨씬 전부터 열려있었던 것이기는 했으나, 그날 밤 겔러트가 노크한 순간 알버스가 열어버린 것은 비단 제 침실의 창문만이 아니었기에.




+글제목을 Love is Open Door로 할까하다가 너무 직설적인 것 같아서… 부제쯤으로 생각해주세요
++@fygrindelxdore님 멘션(:편지 넘 길게썼나 늦게보냈나 자나보다 안절부절하고있는데 똑똑 소리 들려서 봤더니 달빛아래 금발 빛내면서 화사하게웃고있는겔 상상할때마다 흡 저의심박수,,)에서 특정장면 착안 허락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곧내. 쓰려고 했으나 아무래도 역시 안쓸 거 같은 옛날글 쪼가리들 그냥 한데 모아서 올려놓는 용도


0.페ㅅ나/궁흑앵
 그는 악몽 속을 걷는 남자였다. 깨어서도, 그리고 잠이 들어서도. 그의 풍경은 항상 똑같았다. 살려달라고 혹은 죽고 싶지 않다고 절규하는 무수한 얼굴들이 있었으며 걸음걸음 발목을 낚아채는 시체들의 찬 손마디가 있었다. 언젠가 제 손으로 죽여야만 했던 동료의 모습이 있었으며 품안에서 처연하게 숨이 끊어졌던 어린아이도 존재했다. 마치 메마른 심상풍경처럼, 눈을 감으면 악몽을 꾼다는 사실을 생전의 그는 익히 알고 있었다. 어차피 눈을 뜬다해도 현실은 또다른 악몽의 연장선상일 뿐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희뿌연 안개 속에서 몇 걸음 떼어놓기도 전에 아처는 자신이 악몽을 꾸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 풍경이 낯설다는 것 역시.

 선배.
 선배, 살려주세요.
 선배…!

(중략)

"선배, 어째서──"

 흡사 빙판이 쩍 갈라지듯 온화하던 소녀의 얼굴 위에 균열이 일었다. 찰나 눈꼬리에서 새까만 진흙이 피눈물처럼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평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고운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린 그녀가 원독어린 오탁을 줄줄 흘리며 통곡하듯 소리를 높였다. 

 "왜 저를…… 구해주지 않았어요? 어째서?
정의의 사자가 되고 싶다고 했으면서, 선배 미워, 거짓말쟁이, 이 거짓말쟁이──!"
 
 흡사 연인에게 배신당한 처녀처럼, 초야에 신랑을 잃어버린 신부와도 같이. 그렇게 제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쥔 채 절규하는 소녀의 등 뒤로 그림자들이 그녀에게 감응하듯 사납게 요동쳤다. 
 당장이라도 저를 집어삼킬 것 같은 히스테리컬한 기세 앞에서 궁병은 미미하게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네가 상처입은 척 할 필요가 있는건지 모르겠군. 애초에 너는 마토 사쿠라도 아니잖나."
 "네, 에? 후, 후후. 선배, 방금 그 말은 좀 우스운걸요. 그럼 여기 있는 저는ㅡ 누구라는거죠?"
 "그저 마토 사쿠라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이 세상의 모든 악이지. 너 자신도 알겠지만."
 "……!"

 그 말에 반박하려는 듯 소녀, 아니 소녀의 형상을 한 그것이 입을 벌렸지만 아처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나는── 널 죽일 수밖에 없어."

 서번트는 꿈을 꾸지 않는다. 그저 마스터와의 연결링크를 통해 상대의 기억을 엿보는 것 정도일까.



1.페zㅔ/키리아이
 "생일…… 이요? 생일이라면, 그것은 제가 만들어진 날을 의미하는 것인지."

 의아함을 고스란히 품은 붉은 눈동자는 잘 세공된 보석처럼 아름답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녀 자체가 아인츠베른의 천년 비원을 고스란히 녹여낸 기술로 탄생한 호문클루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조형미를 갖춘 우아한 예술품이기도 하지만. 아이리스필은 나비처럼 긴 속눈썹을 가볍게 깜박이며 상대가 알려준 낯선 개념을 조심스레 입안으로 굴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키리츠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하트 옹에게서 들었어. 오늘이 네가 태어난 날이라고."
 "저는 인간이 아닙니다, 키리츠구. 정확히 말하자면 태어났다기보다는 만들어졌다는 것에 가깝겠지요. 그런 제 생일─이란 것을 축하하겠다니, 당신의 사고는 제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네요."

 저는 머지않아 개막할 성배전쟁을 위하여 만들어진 그릇. 그런 인형인 저를 당신이 인간처럼 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2.페ㅅ나/시+흑앵
 성배의 밑바닥은 언제나 고요하다. 이 세상의 모든 악으로 오염된 만능의 원망기, 그 원념이 깊숙히 침잠되어 말라붙어버린 최하층. 그 심장부에서 소녀는 아슬아슬하게 가장자리에 올라선 채 비스듬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오로지 공허한 어둠으로만 덧칠되어있어야할 성배의 최심부, 그곳에는 평소와 다르게 백장미들이 희게 만개해있었다. 소녀의 가냘픈 팔안에 안겨있는 꽃다발과 동일한 색채의. 묻어날 듯 끈적끈적한 주위의 어둠과는 전혀 어울리지않는 새하얀 장미, 그리고 그 장미들에 파묻혀있는 희미한 인영. 꽃송이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흡사 잠든 것처럼 단정했다. 항상 입버릇처럼 우아함을 언급하셨던 아버지, 당신은 여전히 우아하시네요. 당신의 딸은 이렇게 되어버렸는데.

 "…아버지."

 품에 안고있던 백장미 다발에서 한 송이를 집어든 소녀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이내 소녀는 생생하리만치 독한 향기를 뿜어내는 백장미의 꽃송이에 느지막히 입술을 겹쳤다. 입맞춤을 그대로 품은 채 백장미는 처연하게 아래로 추락해, 이미 오래 전에 숨이 끊긴 남자의 가슴 위로 떨어져내렸다.

 "…아버지, 저는,"

 처음 아버지가 저를 다른 가문으로 입양보내겠다는 결정을 내리셨을 때 전 울지 않았어요. 아버지의 결정이셨으니까. 그곳에서 벌레들에게 온몸을 유린당하고, 미래를 빼앗기고, 내쉬는 날숨 한 조각에조차 절망이 들어찼어도 저는 아버지를 원망하지않았어요. 제 아버지시니까. 나를, 나를 미워해서 그렇게 내린 결정이 아니시라는 것을 알고있었으니까. 오히려 나를 위해서, 마술사로서 내리신 결정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아버지, 전.. 너무 괴로웠어요. 마토 가에서 제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교육이라는 명목의 학대를 당하면서 아버지를 불러도, 아버지는 구해주러오지 않으셨었죠. 저도 딸이었는데. 가족이었는데. 아버님과 어머님과 언니. 세 분은 토오사카 가에서 화목하게, 그리고 저는 벌레들에게 능욕당하면서. 그래도, 아버지, 저는ㅡ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어느덧 소녀의 품안에 있던 풍성한 꽃다발은 단지 서너 송이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친부에게 전하는 친애의 정이 담긴 꽃이. 입맞춤이 담긴 마지막 백장미를 아버지의 시신 위로 떨어뜨리며 사쿠라는 창백한 아버지의 얼굴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옷깃 아래에서부터 배어나와 흥건히 바닥까지 흘러내려 적신 핏자국만 아니었으면 마치 자는 것처럼 보이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지금이라도 아버지와 이렇게 단둘이 있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여기는 저희 단 둘뿐이니까. 이곳에서 평생 함께해요. 저와 같이.



3.MCU/피터
 "스타크 씨, 있잖아요! 지금 듣고 있는 거에요? 저기요? 스타크 씨!"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회장이자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남자 중 하나이며 가장 핫한 셀럽인 토니 스타크의 평온한 낮잠을 방해할 수 있는 요소는 극히 드물었다. 예를 들어 '토-니-, 또 결제서류가 밀렸잖아요!'하는 페퍼의 하이톤 목소리라던가, '일어나실 시간입니다,sir.' 을 알리는 자비스라던가, 뉴욕 시 전체를 깽판치며 지구 정복의 의지를 표명하는 외계출신 빌런의 존재라던가. 그리고 토니는 그 어떤 경우에도 '응, 다음에 할게… 다음에……' 를 읊조리며 다시 스르륵 오수에 빠질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최근 후원이란 명목으로 뒤를 봐주게 된 귀여운 꼬맹이라면 조금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넓직한 업무용 데스크 위에 두 발을 올려놓고 의자에 편안하게 몸을 기댄 채 잠깐 꾸벅꾸벅 졸고 있었던 토니는 귓가에서 쨍알거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휴대폰 너머로 한마리 새처럼 짹짹대는 꼬맹이의 목소리. 아, 피터 파커. 우리 귀여운 스파이더-키드잖아. 웬일로 먼저 전화를 했대. 아직 어린애를 소년병 징집하듯 먼저 전쟁터로 끌어들인 것에 대한 미안함과 어른으로서의 책임감 반, 스스로 히어로라고 칭하는 소년에 대한 이유모를 친애의 정 반반. 대충 그런 감정으로 연락하고 싶을 때 자유롭게 쓰라고 제 번호만이 들어있는 휴대폰을 자신 명의의 신용카드 한 장과 같이 건네줬던 터였다. 요금 같은 건 다 토니에게로 청구되니 쓰고싶을 때 쓰라고 줬더니 전화도 거의 없는데다- 지나가듯 물어봤더니 자기는 스타크 씨에게 부담을 주고싶지않단다-, 게다가 저번달에 받았던 이 꼬맹이의 카드 결제내역은 환장할 노릇이었다. 맥도날드, 서브웨이, 편의점. 패스트푸드 말고 좀 몸에도 좋고 비싼 거 사먹고 옷도 잘 입고 다니라고 줬더니! 이렇게 피터가 먼저 전화를 한 것도 얼마만인지 몰랐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몇번 목을 가다듬어 잠기운을 털어낸 후 토니는 입을 열었다.

 "어…… 그래, 그래. 스파이더 보이. 듣고 있어. 그런데 왜 이렇게 신난거야?"
 "스파이더 보이라고 부르지마세요! 이래봬도 뉴욕시민들에게 사랑받는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 맨'이라구요!"

 음,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꽤나 하이 텐션인 것이…… 뭐 신나는 일이라도 있었나. 저보다 스무살 가량 어린 소년의 삶에 있어 신나는 일이란 뭐가 있을까. 대충 머릿속으로 생각을 전개했지만 딱히 잡히는 것은 없었다.

 "어, 응, 그래.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 맨 씨. 아빠 낮잠까지 깨우면서 뭐가 그리 신나서 전화를 한 건지 어디한번 들어나볼까?"
 "헉…… 죄송해요. 근데 그게요, 오늘부터 방학했어요!"

 잠깐 헛숨을 들이키는 듯하더니 곧 원래의 텐션을 되찾은 피터가 즐겁게 재잘댔다. 방학했다구요!
 방학. 방학이라. 이미 학생에서 벗어난 지 오래전인 자신에겐 꽤나 낯설게 느껴지는 단어였다. 방학이라, 벌써 그렇게 됐나? 힐끗 달력에 시선을 던졌다. 아…… 벌써 7월이 됐네. 정신없이 살다보니 어느덧 일년의 반절이 지난줄도 몰랐다.
 다시금 소년의 발랄한 목소리가 고막을 경쾌하게 두드렸다.

 "저어, 그래서 가능하다면요, 스타크 씨가 불편하지만 않으시다면……"
 "오케이, 키드. 언제든지 놀러와. 전에도 수트 봐준다고 약속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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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와 A 둘이 지지고볶으며 잘 사귀고있는 어딘가의 평행세계 이야기




 시험기간에 바빠지는 것은 비단 그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 뿐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적절한 난이도로, 오류 없이 문제를 선별하여 출제해야 하는 교수들이야말로 진정 바쁜 것일지도 모른다. 학생 때는 그런 거 별로 신경쓰지 않았는데. 애초에 성적에도 관심 없었는데 학교 교수들 사정 따위 내 알바 아니었지. 겔러트는 카우치 위에 나른하게 드러누운 채 교차해 꼬고있던 발끝을 까딱거렸다. 자신만큼 똑똑하고 잘난 파트너를 두고있는 건 좋은 일이지만 이럴 때마다 조금은 짜증이 났다. 대체 그놈의 시험기간은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는거야?
 그의 파트너인 알버스 덤블도어는 호그와트의 역대 최연소 교수였고, 평소에도 논문이며 국제 심포지엄이며 타국 마법사들과의 학술적 교류 때문에 충분히 바빴지만 학생들 시험기간만 되면 유독 더 바빠졌다. 직접 사무실로 찾아가봤자 지금은 시간이 안되니까 나중에 보자는 상냥하고 완곡한 축객령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 나중이 대체 언젠데? 벌써 며칠째 그 소리만 하고 있잖아. 그런 애들 시험따위, 그냥 아무렇게나 내도 될텐데. O.W.L도 아니고 일개 학기 시험성적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냐고. 그는 불만스럽게 생각하며 반듯한 미간을 찌푸렸다. 알버스가 고작 스무살 밖에 안된 어린 나이로 교수직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많은 것을 증명해보여야한다는 것은 잘 알고있다. 비록 학창시절 내내 화려한 수상경력과 우수한 성적을 자랑하는 우등생이었다 한들, 가르치는 자로서의 소양은 또 별개의 것이니까. 하지만 네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문앞에서 쫓겨나는 내 생각은? 내 생각은 안 해줘? 알버스 너한테는 내가 직장보다, 학생들보다 뒷전인 존재야? 유치한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새삼 억울했다. 쓸데없이 크기만 큰 이 빌어먹을 학교에 애인을 뺏긴 기분이라고! 역시 호그와트에 교수 지원서를 내러가겠다고 했을 때 막았어야 했다. 다른 직업을 찾으라고 할 것을. 아니면 역시 망토자락이라도 붙잡고 늘어져서 어떻게든 내가 널 먹여살릴 테니까 출근하지 말라고 할 걸. 이제와서는 다 부질없는 상상을 하며 그는 불만스레 공중을 노려보았다.
 난 참을 만큼 참았어, 알버스. 다 네 탓이야. 며칠이 지나도록 머리카락 끄트머리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 야속한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겔러트 그린델왈드는 이를 갈았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나.


***
 익숙한 교실, 낯익은 복도, 그리고 친숙한 풍경. 처음 호그와트에 교수 지원서를 낼 때까지만 해도 알버스는 자신의 삶이 그렇게 극적으로 변하리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다. 학생으로서 지난 7년동안 다녔었던 정든 학교에서 다시금 교수로 재시작하는 셈이니까. 하지만 당연하게도, 교수로서의 삶은 또 달랐다.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게다가 시험문제 출제를 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었는지 그는 새삼 실감했다. 적절한 난이도와 학생들간의 고른 성적 분포를 위한 적당한 까다로움, 또한 오류가 없을 것. 이 모든 하위사항을 충족하는 문제를 출제하는 것은 의외로 꽤나 시간을 투자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갓 부임한 신규 교수였을 때, 학생들의 평균 지적 수준과 자신의 지적 수준의 차이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해 호그와트 역사에 길이 남을 악독한 난이도의 시험을 출제했던 경력이 있는지라 더 조심스러웠다. 그 이후 교장 선생님에게 불려가서 꽤나 장시간의 대화를 해야만 했었지…… 별로 회상하고 싶을만큼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그때 이후로 한동안 날 바라보는 학생들의 눈초리도 싸늘해졌던 것 같은 느낌이고. 새삼 되살아나는 최근의 추억들을 되새기며 알버스는 이유없이 치밀어오는 오한에 몸을 떨었다. 그래도 이번 시험은 별 탈없이 끝낸 것 같아 다행이라고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소한 교장실에서 블랙 교장과 불편한 티타임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채점과 성적을 매기는 것 뿐인데 출제하는 것에 비하면 차라리 나은 편이니까.
 그러고 보니, 시험기간 내내 겔러트를 만나지 못했었다는 것에 그때서야 뒤늦게 생각이 미쳤다. 정확히는 자신이 매번 쫓아내다시피한 거였지만… 그래도 네 얼굴을 보고있으면 주의가 분산된단 말이야.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다고. 시험지 채점만 끝내면 빨리 돌아가서 미안하다고 사과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알버스는 제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경악했다.

 "이게, 대체."

 평소 알버스의 사무실은 주인의 성품을 반영한 것처럼 깔끔하고 단정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져있는 광경은 혹시 자신이 다른 문을 열었나 착각하게 만들 정도로 너무나 이질적인 카오스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까까지만 해도 책상 위에 높게 쌓아올려져있던 서류더미와 시험지 뭉치가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다지 넓지도 않은 사무실 바닥 사방에 갈기갈기 찢기고 구겨진 종이들이 잔해처럼 굴러다니고 있었다. 한때는 알버스 자신의 연구논문이었고 학생들이 제출한 시험지였으며 컨퍼런스에 참가하려고 준비했던 자료들이었을테지만, 이제는 휴지쪼가리로밖에 보이지 않는 상태로. 그리고 이 난장판을 만들어놓은 것이 분명한 상대가 천연덕스럽게 책상 위에 앉아서 힐끗 문 쪽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품안에 간신히 들어올만한 사이즈의 벵갈고양이였다. 늘씬하게 쭉 뻗은 몸매와 재규어같은 무늬가 선명하게 새겨진 털결이 매끈하니 꽤나 예쁘장했다. 보석같이 새파란 눈동자 한 쌍이 마치 자신이 이곳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태연하게 알버스를 응시해온다. 건방지고 겁없는 고양이 한 마리가 운좋게 변신술 교수의 사무실에 침입하여 이 아수라장을 만들어놓은 것이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알버스는 이 고양이의 정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겔러트……? 이거 설마 네가 한 짓이야?"

 질문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일반적으로 고양이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고, 대답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냥 평범한 고양이가 아니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지지. 변신한 마법사라던가, 끝내주게 잘생긴 동구권 출신 금발벽안의 마법사라던가, 특히 애니마구스인 내 애인이라던가. 자신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게 느껴졌으나 알버스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 격앙된 감정을 눈치챘는지 알면서도 모르는 체 하는건지 고양이가 나른하게 하품을 했다. 그리고 마치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울음소리를 흘렸다. 야옹. 왠지 그 사랑스러운 울음소리가 익숙한 목소리로 자동 번역되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뭐, 왜, 뭐. 그러니까 진작 나랑 놀아달라고 했잖아. 그 순간 알버스는 폭발했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짓이야?! 겔레르트 그린델발트, 너 미쳤어? 제정신이야? 그렇다고 학생들 시험지에 손을 대면 어떡해! 지금 너랑 며칠 안 봤다고 나한테 시위하는거야? 너 때문에 내가 못 살아, 정말!!"

 아, 정말, 내가 미쳐……! 한때 기적처럼 제 앞에 나타난 금발의 소년에게 눈이 멀었던 적이 있었다. 그는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자신만큼이나 영리했으니까. 당시 유사(流砂)와도 같은 절망과 좌절에 빠져있던 자신의 손을 잡고 수렁에서 끌어내준 나의 구원자. 하지만 그의 미모와 지성에 눈이 멀어서 그가 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들어주고 싶었던 시기는 이미 지났다. 아, 물론 아직도 그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예쁘고 잘생기고 섹시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만큼은 이성이 돌아왔다 이거다. 어떻게 며칠 안 만나줬다고 채점해야할 학생들 시험지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놓을 수가 있단 말인가? 네가 다섯살짜리 어린애야? 관심 안 줬다고 바로 사고치게?
 알버스가 치밀어오르는 분노에 파들파들 떨고있는동안 태연자약하게 제 몸을 그루밍하듯 핥고있던 고양이가 다시 새침하게 야옹, 하고 울더니 가볍게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제가 만들어놓은 지옥같은 수라도 사이를 걸어오는 태도가 마치 탑 위의 공주처럼 도도했다. 어이가 없어서 그대로 보고있자니 태연하게 다가와 발치를 맴돌다말고 아양부리듯 발목에 제 몸을 부벼댔다.

 "겔러트, 나 지금 너한테 화내는 중이거든? 네 애교 받아줄 기분 아니라고."

 분명 알아들었으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싹 무시하는 태도가 얄밉기 짝이 없었다. 이럴 때만 진짜 고양이처럼 굴지 말아줄래? 고양이 상태만 아니었다면 이마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눈이라도 마주보고 잔소리할 요량으로 안아들어올리기 무섭게 고양이가 알버스의 입술을 핥아왔다.

 "그러니까 지금 너한테 화내고 있는 중이라니까……"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쨌든 고양이의 구강구조에서 사람의 말이 나올 리가 없으니까. 이정도로 마이페이스로 나오면 도리어 화낼 기운도 없어지는 법이다. 게다가 겔러트는 영악하게도 본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고 고양이인 채로 버티고 있었다. 아무리 본체는 사람이라고 해도 고양이한테 진지하게 분노를 터뜨리는 것도 영 모양새는 이상하니까. 알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골이 띵할 정도로 화가 나 있는 상태기는 했지만, 엉망진창인 사무실에서 고양이 한마리를 안아든 채 열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제3자의 시선으로 상상하자니 영 기분이 애매해진다.

 "겔러트, 제발. 제발 이러지 마. 응? 물론 널 사랑하지만 나한테도 직업이 있고 사회생활이 있-"
 "드디어 그 말을 해주네. 일주일 만인가? 아니면 이주일?"
 "너……"

 이제까지 안아들고있던 작달막한 고양이가 갑작스레 사라지고 대신 시야를 채운 것은 기분 좋게 웃고있는 낯익은 얼굴이었다. 자신이 화를 내고있었다는 사실마저 찰나 뇌리에서 휘발시켜버릴만큼 화사한 미소를 띤.
 알버스가 뭐라 입을 떼기도 전에 겔러트가 먼저 선수를 쳤다.

 "알버스, 나 사랑하지?"
 "응? 어… 응."
 "근데 왜 자꾸 날 혼자 내버려둬? 사랑한다며. 이역만리에 가족 하나 없이 널 따라 여기까지 온 나한테는 너밖에 없는 거 알면서."
 "그건 미안하게 생각- 아, 잠깐만. 또 이런 식으로 넘어가려고 하지 마. 일단 영국에 먼저 온 건 너고, 백셧 여사는 아직 정정하게 잘 계신데다, 그렇다고 네가 학생들 시험지를 죄다 찢어놓은 게 잘한 건 아니니까!"
 "앗, 안 넘어가네. 너 정말 화났구나. 어쩐지 아까 내 이름도 독일식으로 부르더니."

 태연스럽게 웃는 얼굴이 소년처럼 해사해서 도리어 말을 잃게 만들었다. 인간은 철저히 시각에 약한 생물이다. 비록 세기의 천재라고 해도 알버스 역시 그랬다. 아까 아닌 건 아니라고 할만큼의 이성은 돌아왔다고 생각했던가? 그에게 있어 겔러트 그린델왈드의 면전에서 계속해서 매몰차게 구는 것은 여전히 요원한 일인 모양이었다. 머리 끝까지 치밀어오르던 분노가 정작 그 주범의 얼굴과 마주하고 있자니 서서히 사그라드는 기분은 상당히 오묘했다.

 "겔러트, 네가 교수로서의 내 생활도 조금은 존중해줬으면 좋겠어. 애먼 학생들한테 질투도 하지말고-"
 "노력할게."
 "오늘처럼 시험기간에 조금 너한테 소홀했다고 해서 이렇게 제멋대로 굴지도 말고."
 "음, 노력은 해볼게."
 "…절대 그러겠다고는 대답 안 하지, 너?"

 얄미워 죽겠어. 코앞에서 꽃처럼 예쁘게 미소 짓는 잘생긴 얼굴을 외면할 수 없어 알버스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다시는 이러지 마."
 "노력한다니까."
 "말이나 못하면…… 먼저 내 사무실 원상복귀부터 시켜놔."

 지팡이도 없이 그저 손바닥을 두어 번 딱딱 맞부딪히는 것만으로도 변화는 시작되었다. 엉망진창으로 엎어진 잉크병이며 깃펜들이 언제 그랬냐는듯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고, 바닥에 찢겨진 채로 나뒹굴던 시험지들과 서류들이 일제히 도로 매끈하게 이어붙고 공중에서 저절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5분도 걸리지 않아 아수라장이었던 변신술 교수의 사무실은 원래의 정갈한 모습으로 돌아와있었다. 책상 위에 두툼하게 쌓인 서류뭉치들 역시 아까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정리되어 있었다. 지금 앞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금발미남의 존재만을 제외한다면, 알버스가 나가기 전의 풍경에서 양피지 하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아니… 네가 어지른 걸 치운 것 뿐인데 그렇게 칭찬해달라는 눈빛까지는 보내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낯을 한 겔러트가 먼저 깍지 끼듯 손을 잡아왔다.

 "어차피 애들 시험도 끝났겠다, 같이 호그스미드 안 갈래? 허니듀크 신상품 중에 네가 좋아할 만한 걸 찾았는데."
 "먼저 채점부터 해야하는- 그래, 좋아."

 안 따라가주면 이번엔 고양이로 변해서 난동부리는 것 정도가 아니라 호수 속 대왕오징어라도 소환할 것 같다는 생각에 알버스는 서둘러 말꼬리를 수정했다. 딱히 겔러트가 덧붙인 말에 혹한 것은 아니라. 아마 평생을 본대도 그의 얼굴 앞에서는 약해질 것 같다는 예감이 새삼 엄습했으나 눈을 감고 무시했다. 그렇다고 해도 더 나빠질 것은 전혀 없을 테니까. 비록 학생들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시험지 역시 건드리지 말라는 몇가지 원칙은 확실히 각인시켜놔야할 거 같지만. 알버스는 마디마디 깍지 끼듯이 쥔 상대의 손을 마주 잡았다.
 언제나와도 같은 일상 속의 하루였다. 평온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은.
설정 본 순간 이건 꼭 쵱컾으로 써야해!!!했는데 능력이 딸려서 중셉으로만 남겨두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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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음이 때를 맞아 활짝 피어난 꽃이라면 <노화>는 일종의 특권이며 상징과도 같았다. 나는 이미 소울메이트를 만났으며, 그 혹은 그녀와 같이 늙어가고 있다는 증표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성인이 됨과 동시에 모든 신체적 노화가 멈추며 소울메이트를 만난 후에야 비로소 순리대로 늙어갈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이에 맞지 않는 젊음은 오히려 부끄럽고 미성숙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머글들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마법사들에게는 마법이 있었고, 따라서 아직 소울메이트를 만나지 못한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마녀와 마법사들을 위한 각종 위장용 약물과 주문 등은 활발하게 개발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버스 덤블도어는 언제나 갓 학교를 졸업한 듯한 앳된 소년의 외모를 하고 있었다. 변신술 교수였으며 관련 칼럼을 기고할 정도로 우수한 인재인 그가 스스로의 능력을 믿지 못해 나이들어 보이는 위장을 취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겉모습은 항상 열일곱 -그것도 또래에 비해 더 어려보이는- 소년이었다. 교수일 때도, 그리고 교장이 되고나서도. 학생들은 자라고 늙어가는데도 그는 언제나 영민한 소년의 외모인 채로 교장실에 앉아있었다. 자신의 제자들보다 더 어린 모습을 한 채로. 비록 소울메이트가 없다하여도 그는 혼자서도 그 결여를 차고넘치게 충족할 수 있는 인물이었고 따라서 그것을 문제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그의 면전에서는.
 과연 그가 어쩌다가 소울메이트를 만나지 못했는가는 교내에서도 꽤나 인기있는 가십이었다. 학생들은, 때로 호그와트 밖의 성인 마법사들은 덤블도어가 소울메이트를 찾기엔 너무 바빴다거나 세상 어디에도 저런 유별난 천재의 소울메이트는 없었으리라는 식으로 결론을 내고는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알버스 덤블도어가 이미 자신의 소울메이트를 만난 적이 있으며 그 소울메이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있다고 상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략)


 누멘가드의 풍경은 언제나처럼 살풍경하고 음울했다. 깎아지른 듯한 바닷가 절벽 근처에 세워져있는 높디높은 탑들과 잿빛의 벽돌들은 보는 이에게 위압감을 주고도 남는 것이었기에. 한때 이곳은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었던 마왕이 자신의 정적들을 감금하기 위해 만든 감옥이었다. 지금이야 단 한 사람만이 이 안에 죄수로서 갇혀있을 뿐이지만. 겔러트 그린델왈드, 이 감옥을 세운 몰락한 마왕. 덤블도어 본인이 스스로의 손으로 이곳에 유폐시킨 그는 벌써 몇십년째 이 안에 갇혀있었다. 처음 그를 이곳에 가둘 때는 탈옥의 우려 때문에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으나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린델왈드는 자신의 독방 안에 얌전히 틀어박혀있었다. 그리고 1945년 이후 그가 이곳에 직접 방문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아마 다시는 이 음침한 풍경과 그의 얼굴을 볼 일이 없으리라 믿었었는데.
 누멘가드에는 간수도, 관리인도 없었다. 만약 있었다한들 그들이 감시해야하는 것은 다름아닌 이 누멘가드를 설계하고 건설한 마왕이었다. 아무리 독방에 갇혀있는 신세라 할지라도, 그가 자신의 손바닥 보듯 훤하게 누멘가드의 약점과 지리를 꿰뚫고 있다면 사실상 별 의미가 없지않은가. 그렇기에 대신 이곳을 에워싼 것은 덤블도어 본인이 고안해낸 특수 보안마법이었다. 덤블도어와 바로 연결되어있어 혹시나 살아있는 뭔가가 밖으로 빠져나간다면 바로 그가 느낄 수 있도록. 촘촘하게 건물 전체를 둘러싼 보안마법을 통과하는 기분은 시전자인 그에게도 별로 좋지는 않았다. 한때 수감자들의 고통과 눈물, 한숨으로 얼룩졌을 누멘가드의 벽은 오랫동안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것을 티내듯 온통 뿌연 거미줄과 먼지로 덮혀있었다. 그린델왈드가 갇혀있는 곳은 가장 높은 탑이다. 손쉽게 비행마법으로 날아갈 수도 있었지만 덤블도어는 굳이 걸어올라가는 것을 택했다. 한발짝 한발짝 계단을 오를 때마다 음산한 공기가 몸을 휘감는다. 그가 있을 곳과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복잡해져왔다. 다시 볼 수 없으리라 예상했던 이와 조우한다는데서 오는 불편함도 있었으나 덤블도어가 새삼 신경쓰고있는 것은 그의 앳된 외모였다. 그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이제껏 단 한번도 신경쓴 적 없던 어린 겉모습이 새삼 숨기고 싶은 치부처럼 느껴졌다. 그린델왈드와 처음 조우했던 1899년에도, 그와 싸웠던 1945년에도, 몇십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는 여전히 열일곱 소년이었으니까. 겔러트, 난 너와 헤어진 그날 이후로 전혀 나이를 먹지 않았어. 네가… 나의 소울메이트, 파트너였으니까. 그동안 너는 그 안에 홀로 머물며 얼마나 나이가 들어있을까.
 드디어 최상층에 도착했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결코 다시 볼 수 없으리라 생각해왔던 상대와의 재회. 덤블도어는 여전히 1899년의 여름 , 그린델왈드와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소년의 모습이었지만 과연 그는 어떨까?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순리대로 나이먹어버린 그를 기대하는 것인지 아니면-

 "안녕, 알버스. 네가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겔러트……"

 겔러트 그린델왈드가 쓰고있는 독방은 어둡고 비좁았다. 한때 유럽 전역을 공포에 떨게하던 마왕이 여생을 보낼 거처라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것이 그에게 마땅한 장소라고 하겠지. 덤블도어는 쇠창살 앞에 서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낡아빠진 담요와 역시 낡은 침상, 죽은 벌레들의 시체들이 즐비하고 구석구석 먼지가 뽀얗게 끼어있는 습기찬 감옥의 내벽. 그린델왈드는 제 독방 구석의 그늘에 웅크린 채 앉아있어 덤블도어가 서있는 위치에서 그의 얼굴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새삼스레 입안이 말랐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을까. 내가 보고싶어지기라도 했어?"
 "너-"

 나지막한 웃음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킨 그린델왈드가 쇠창살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두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경악과 담담함, 그리고 약간의 장난기. 그린델왈드의 모습은 그가 기억하고있던 첫만남 그대로였다. 외모도, 특유의 분위기도. 제대로 다듬지 못해 그 길이는 길어졌으나 여전히 화려한 금발과 생기 넘치는 열여섯 소년의 이목구비. 유리조각처럼 반질거리는 새파란 눈동자가 덤블도어를 유쾌한 듯 응시하고 있었다. 겔러트 그린델왈드 역시 나이를 먹지 않았다. 알버스 덤블도어가 그랬듯이.

 "왜? 그때 분명 너는 나이든 모습을 하고 있었어. 분명히,"
 "아, 45년에? 그거야 당연히 변신술로 위장하고 다녔던거지. 나름 마왕씩이나 됐는데 계속 어린애 얼굴을 하고 있으면 무시당할테니까."
 "그럴 수가……"
 "하지만 이 안에선 마법을 전혀 쓸 수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겠다. 이거 네 작품이지? 너도 여전하구나. 그대로야, 알버스."

 쇠창살 너머로 그린델왈드의 손이 뻗어져왔으나 덤블도어는 피하지 않았다. 뺨에 와닿은 그의 손바닥은 건조했고 손끝은 싸늘했다. 그린델왈드는 항상 그랬다. 성정은 불같고 언변 역시 타오르는 불꽃처럼 열정적이고 과격했으면서도 그 체온만큼은 항상 어울리지 않게 서늘했다. 마치 깨지기 쉬운 물건을 다루는 것처럼 그의 손이 턱의 경계선과 뺨을 느릿느릿하게 매만졌다. 뒤로 물러서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덤블도어는 어느새 홀린 듯 그린델왈드의 손에 제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백조처럼 길고 우아한 손가락이 붉은빛이 감도는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다가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왠지 기쁜걸. 네가 나를 다시 찾아와줘서."
 "……"
 "그리고 네가 여전히 나이를 먹지 않아서."
 "겔러트."
 "이제와서 무슨 소용이겠냐만은, 알버스 네 소울메이트는 나였잖아?"

 널 떠나고나서야 알았지. 내 소울메이트 역시 너였다는 것을. 그가 손을 거두며 마저 덧붙였다.
 그린델왈드의 목소리는 여전히 매끄럽고 유려했으며 외모는 한결같이 젊고 매력적이었다. 처음 그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렸던 그 해 여름처럼. 오랜 독방생활도 그에게서 특유의 아름다움을 앗아가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내 하나뿐인 소울메이트, 내 손으로 직접 이 황량한 감옥안에 가두고야 만 나의 메피스토펠레스. 그린델왈드가 비밀스러운 화제라도 꺼내듯 천연덕스러운 태도로 한쪽 눈을 찡긋해보였다.

 "너는 항상 착한 모범생이었으니까. 이제와서 지금이라도 탈옥시켜 줄테니 같이 멀리 도망가자거나 그런 종류의 달콤한 밀어를 기대하는건 무리겠지?"
 "그건……"
 "농담이야. 나도 알아, 내가 아는 넌 그런 짓 따위 하지 않을테니까. 아무리 우리가 서로의 소울메이트라고 해도 말이지."

 10대 소년 특유의 명랑한 웃음소리가 좁은 누멘가드의 감옥안에 울려퍼졌다. 여전히 복잡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덤블도어에게 그린델왈드는 입을 열었다.

 "돌아가, 알버스. 이미 우리는 서로를 구원하지 못할 테니까. 볼드모트 때문에 왔지? 그는 머지않아 파멸할거야. 내 조력이 없더라도."
 "겔러트-"
 "그러니까 돌아가."


(중략)


 그는 고드릭 골짜기를 떠난 열여섯 살 이후로는 나이를 먹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몇년이 지나고 나서의 일이었다. 아, 알버스. 네가 내…… 후회해도 이미 돌아갈 수는 없었기에 그는 변신술로 스스로를 위장하는 길을 택했다. 열여섯 살 때부터 몸을 숨기기위해 투명망토가 필요없었던 겔러트에게 있어 그런 위장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변장 아래 존재하는 열여섯 소년의 얼굴로 살아가면서 그는 몇번이고 다시 생각했다. 그때 만약 알버스의 여동생을 내버려두고 가자고 했다면, 그냥 장례식 이후에도 뻔뻔하게 그곳에 눌러앉았더라면. 흐느껴우는 알버스를 그대로 끌어안고 미안하다고 사죄했더라면. 아니면 내 소울메이트가 너라고, 그렇게 고백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달라졌을까, 전혀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제와서는 무의미한 가정들이었다. 그는 이 좁고 습기찬 감방에 갇혀있었고 그의 소울메이트는 누멘가드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게 언제였더라, 알버스가 다시 찾아왔었지. 여기 갇힌 후로 다시는 못 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똑같았다. 그 섬세하면서도 온화한 인상도, 고심에 빠지면 눈썹을 찌푸리는 버릇도, 날 응시할 때 흐릿해지는 듯한 눈빛까지 기억 속의 그대로였지. 솔직히 조금 기뻤다면 이기적인 것일까. 너 역시 겉으로는 전혀 나이를 먹지 않아서, 나를 두고 또다른 소울메이트를 만나지 않아서. 그린델왈드는 어둠 속에 앉아 눈을 감았다. 학창시절 내내 우등생이고 모범생이었다던 알버스 덤블도어는 여전히 책임감이 강했다. 아무리 새삼 서로의 소울메이트임을 확인했다고 해도 제 손으로 가둔 저를 이제와서 내보내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하긴 그 정도는 되어야지. 내 소울메이트라면.
 하지만 그 환영을 본 순간 그린델왈드는 자신의 선택을 다시 후회했다. 그날 그렇게 돌려보내지말걸. 그냥 같이 도망가자고 할걸. 사실 널 사랑한다고, 이제 너만을 위해서 살 테니까 제발 여기서 내보내달라고 할 것을. 여전히 앳되고 어린 열일곱 소년의 외모를 한 덤블도어가 높은 탑 위에 서 있었다. 모종의 이유로 인해 기운을 소비하기라도 했는지 한없이 약한 모습을 한 채로, 흉하게 불탄 것처럼 보이는 한쪽 손을 치켜든 채. 환영 속의 소년은 가슴에 주문을 맞고 그대로 탑 아래로 추락한다. 아주 느린 속도로. 차분하고 침착한, 자신이 잘 알고있는 소년의 얼굴을 한 채로. 그린델왈드는 몸서리를 치며 환영에서 깨어났다. 그는 환영을 보는 자였고, 이것은 꽤나 유용한 재능이었다. 이제껏 스스로를 위해 잘 써먹어온 재능이었으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차라리 방금 본 것이 거짓이었으면, 이 탑에서 빠져나가 그를 구할 수만 있다면 소원해도 소용 없었다. 비록 단 한사람의 마법사도 지키고 있지 않았으나 그를 가두고 있는 덤블도어의 마법은 마치 철옹성과도 같이 견고했으므로. 알버스, 아. 어째서. 몇번이고 무의미한 파훼 시도를 반복하며 그린델왈드는 누멘가드에 갇힌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덤블도어를 원망했다.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그가 여기 하릴없이 갇혀있는 동안 그의 유일한 소울메이트는 곧 때이른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중략)


 변화는 갑작스러웠다. 오감이 해방되었다. 신체를 속박하고 있는 듯한 마법의 흐름이, 이제껏 반세기 넘게 제2의 중력처럼 그를 통제하고 짓눌러오던 감각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린델왈드는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덤블도어의 보안마법이 그동안 외부와 감옥 내부를 차단시키는 역할 역시 했었던건지 외벽의 틈 사이로 미미한 소음이 새어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파도의 소리였다. 참, 내가 이걸 바닷가 근처에 지어놨었지. 이미 피부에 직접 와닿는 공기의 흐름마저 다르게 느껴지고 있었다. 아마 원한다면 이런 감옥 벽따위는 쉽게 부숴버리고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느끼지 못한 햇살과 공기를 온몸으로 느낄 수도 있을 것이고, 아무도 그를 모르는 곳으로 잠적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린델왈드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애끓듯 비통했다. 누멘가드 전체를 철통처럼 감싸고 있던 보안마법이 사라졌다는 것은 단 한가지의 의미밖에 없었다. 그 마법을 펼친 시전자의 죽음.

 "알버스……"

 그의 환영은 거짓을 보여주지 않는다. 환영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알버스 덤블도어는 이 시각 사망했을 것이다. 주문을 맞고, 높은 탑 위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대체, 왜……"

 왜 너는 항상 나를 낙담하게 만들어. 소년의 모습을 한 몰락한 마왕은 메마른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너를 잃는 건 그때 한번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다시 잃게 될 줄은 몰랐어. 후회는 언제나 늦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지독한 무기력함을 느끼며 낮게 신음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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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ㄷㅗㅇ과 날ㅈㅗ 주의. 결투썰 풀때는 참 마음에 들었는데……



 심장이 뛰었다. 지팡이를 쥔 손끝이 떨렸다. 참을 수 없는 흥분감에 호흡이 저절로 가빠왔다. 짜릿한 쾌감이 척추를 전류처럼 거세게 관통한다. 그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 하나하나마저 환희하는 듯한 강렬한 고양감. 겔러트 그린델왈드는 이제껏 그 어느 때보다 희열에 차 있었다. 그 스스로도 왜 이렇게 기쁨에 어쩔 줄 몰라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하면서도, 그는 트랜스 상태에 가까운 환락의 감정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드디어 날 막으러 나타난 나의 오래된 벗, 나의 알버스. 유일하게 나와 동등히 어깨를 겨눌 수 있을 만한 사랑스러운 친우.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46년만인가? 좋든 싫든 우리 둘다 신문 1면에 이름이 언급되는 거물들인지라, 어쩔 수 없이 서로가 어떻게 살고있는지 파악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야! 알버스 너는 어땠는지 몰라도 나는 그랬으니까. 처음 호그와트의 교수가 되었다고 들었을 때 축하의 꽃이라도 보내고 싶었지만 참았지. 감히 다른 애송이들을 예뻐해주느라 바쁘다는 소식을 전해들을 때마다 당장이라도 네 곁으로 달려가고 싶었어. 그 망할 놈의 애제자들은 왜 그리 많은지! 어디 지금 당장이라도 하나하나 나열해볼까? 스캐맨더, 해그리드, 그리고 또 누가 있었더라……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네 애정의 방향이 향해야 하는 건 오직 나 뿐인데! 너는 날 사랑하잖아. 그래야만 하고. 아, 네가 신문에 기고한 변신술 칼럼들은 당연히 모두 읽어봤다고. 가끔씩은 네 아이디어를 보완해줄만한 편지라도 보내고싶었지만 네가 나를 알아챌까봐 참았지. 나의 유일무이한 붕우여. 내 인생에 있어 벗이라고 할만한 상대는 너 밖에 없을 것이다. 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비록 너는 나를 친구로만 생각한게 아닌 것 같지만 말이야.
 한때 흘러넘치는 연심을 채 갈무리하지 못한 채 자신을 올려다보던 해사한 소년의 얼굴을 기억한다. 너는 영리하고 명민하며 똑똑한 아이였지, 알버스. 다만 티를 안 내는 법은 좀 배워야했을 것만 같았지만 말이야. 대체 그런 넋나간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누가 눈치를 채지 못하겠어? 응? 트롤이라도 알아챘을걸- 정말이지, 유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린델왈드는 씩 웃으면서 매섭게 날아오는 공격을 그대로 튕겨내버렸다. 

 "그래, 다 좋은데 말이지. 내게 너무 잔인하게 굴지 마, 알버스."
 "……"

 역시나 덤블도어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냉정해졌구나. 조금 슬퍼지는걸. 언젠가 사랑에 빠진 눈으로 그린델왈드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소년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성인이 되었고, 이제 그린델왈드를 물리치기 위해 그 앞에 서 있었다. 금세기 가장 뛰어난 마법사라 일컬어지는 알버스 덤블도어. 그리고 나는 역대 가장 위험하고 사악한 어둠의 마법사 정도일까? 꼭 싸구려 촌극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에 그는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언젠가 우리 둘이 가장 위대한 마법사가 되어 역사에 이름을 남기자고 약속한 때가 있었다. 마법사회에 큰 변혁을 가져온 젊은 혁명가들, 그리고 죽음의 지배자- 그린델왈드와 덤블도어! 벌써 40년도 더 된 이야기였다. 이제 후대는 우리의 이름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마약처럼 강한 기쁨 뒤켠으로 새삼 몇십년간 누적되어온 피로가 엄습하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한때 반짝거림을 품고 그를 응시하던 하늘빛 눈동자는 얼어붙은 겨울호수처럼 고요했다. 아무 생각도 읽어낼 수 없는 가라앉은 눈빛. 설마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상봉할 거라고는 상상도 안 했지만 이토록 무심하다니 조금 안타까운걸. 나는 네 곁을 떠난 후로 단 하루도 널 잊은 적이 없는데. 그렇게 너 없이 살아왔지. 그 오랜 시간을. 왜 네 곁으로 돌아오지 않았냐면 대답은 간단해. 알버스 네 여동생이 죽은 순간 난 깨달았거든, 이제 결코 너는 날 받아주지 않을 거라는 걸. 네가 아무리 나를 사랑했어도, 내가 설령 무릎을 꿇고 빈다고 해도.

 "어라. 내가 졌네?"

 비록 찰나라 하더라도 마법사 간 결투 중의 잡념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바로 지금처럼. 어느새 자신의 목울대를 찌를 듯 바싹 가져다대진 덤블도어의 지팡이 끄트머리가 날카로운 비수처럼 느껴졌다. 지리한 몇시간에 걸친 결투 끝에 드디어 승패는 갈려졌다. 여기서 무슨 술수를 부려봤자 그 전에 머리가 통째로 날아가겠지. 무엇보다 날 패하게 만든 것이 너라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항상 생각했었지, 날 유일하게 막을 수 있는 존재라면 너 뿐일 거라고. 그리고 어쩌면 그는 줄곧 이 순간을 기다려왔을지도 모른다. 겔러트 그린델왈드는 산뜻한 얼굴로 깔끔하게 결과에 승복했다. 패자의 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였다.

 "내가 졌어, 알버스."
 "……"
 "축하해. 네 승리야."

 그러니까 무슨 말이라도 해봐. 목소리를 들려줘, 친구여. 그린델왈드는 지팡이를 들지 않은 왼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덤블도어가 미미하게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으나 그는 제 목에 겨눈 지팡이를 쥔 상대의 손 위에 그대로 자신의 손을 겹쳐쥐었다. 두 마법사의 체온은 싸늘했다. 언젠가 이렇게 네 손을 잡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너도 지금처럼 괴로운 표정을 짓고있지 않았지. 잠깐, 괴로운 표정? 덤블도어가 오히려 괴로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그가 눈치챈 것은 그때서였다. 어째서인지 알 수 없었다. 왜?

 "그런 얼굴 하지마, 너는 오늘 승리자니까."
 "-겔러트."
 "드디어 목소리를 들려주는구나."

 감동적인걸. 그린델왈드는 다시 웃었다. 그는 결투에서 패배했고, 지금 목에는 덤블도어의 지팡이가 겨누어져있었다. 내 모가지를 못 따서 안달일 놈들이 한둘이 아니니 아마 사형당하거나 사형당하지 않더라도 평생 독방에 갇히는 신세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충분히 즐거웠다. 왜일까, 나를 패배시킨 상대가 다름아닌 너여서겠지.
 전쟁에서 이긴 승자에겐 역시 그에 마땅한 전리품이 필요한 법이다. 자신이 들고 있는 지팡이에 새삼 생각이 미친 것은 그때서였다. 딱총나무 지팡이, 세가지 죽음의 성물 중 하나. 언젠가 나이든 지팡이 제작자에게 훔쳐냈던 그것. 그순간 솔직히 아쉬웠었다. 내 곁에 알버스 네가 없었다는 것이. 분명 너도 기뻐해줬을텐데. 그 해 여름 너와 머리를 맞대고 죽음의 지배자가 되기 위한 계획을 세우던 때를 기억한다. 그린델왈드는 자신의 지팡이를 들어올렸고 -상대가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으나 신경쓰지않았다- 그대로 덤블도어에게 그것을 건넸다.

 "승리자가 된 걸 축하해, 이건 전리품 혹은 내가 네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둬. 오래전 우리가 찾아헤매던 바로 그거니까."
 "설마 이게……"
 "그래. 그러니까 웃어줘. 오늘은 네가 웃어도 되는 날이니까."

 3시간 가량 지속되었던 결투의 끝, 그 승리자가 된 덤블도어는 현존하는 최강의 지팡이와 역대 가장 위험한 어둠의 마법사의 목숨을 양손에 쥐게 되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승리인가? 나는 모르겠지만 알버스 너는 확실히 역사책에 이름이 남겠지. 사악한 마왕을 물리친 위대한 현자라고. 어쩌면 이것이 네 가장 빛나는 업적이 될지도. 그런데도 덤블도어는 그린델왈드의 부탁대로 미소를 지어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낯빛에서는 채 지우지 못한 고통스러운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났으며, 이제껏 동요 하나 엿보이지 않았던 눈빛마저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기에 그린델왈드는 다소 의아해졌다. 마땅히 기뻐해야할텐데 왜 너는 도리어 버거워하고 있는거지. 설마.
 이제까지 당연히 그에게서 원망받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왔다. 남동생에게는 크루시아투스 저주를 썼고 삼자간의 다툼 끝에 네 여동생은 죽었으니까. 내가 직접 죽인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 이후 단 한번도 네게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적 없었어. 그래서 참담한 심정으로 영국을 떠났고 이제껏 네 곁에 돌아오겠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 없었지. 찾아가봤자 거절당할까봐. 어쨌든 그 후로 다시는 상처주고싶지 않았는데 또다시 상처줘버렸네. 내가 네게 패배하게 된다면 그건 나름대로 빚을 갚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역시 오산인 모양이었다. 어쩌면 승패 이전에 자신과 마주하는 것 자체가 고통일 수도 있었다는 것에 뒤늦게 생각이 미쳤다. 아, 알버스. 너는 끝까지 나를 잔혹하게 만들어. 이기적이겠지만 이게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라면 네가 웃는 얼굴 정도는 보고싶었는데.

 "아마도 이제 널 평생 못 볼 텐데 마지막은 웃는 얼굴을 보여줘도 좋잖아? 벗으로서의 마지막 부탁인데, 안 웃어줄거야?"
 "……미안."
 "알버스."
 "역시 못 하겠어. 겔러트. 그건…"

 눈물이라도 떨어뜨릴 것 같은 표정이 낯설다고 그린델왈드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제가 알고있는 열일곱 소년은 단 한번도 저런 얼굴을 한 적 없었으니까. 하루종일 붙어다니며 열정적으로 토론하던 때를 기억한다. 그들이 대화에 올리는 소재들은 폭넓고도 다양했다. 현학적인 내용부터 다소 피상적인 이야기들까지. 그러고도 모자라 동이 틀 때까지 부엉이를 날려보내며 서로 편지를 교환했던 나날들. 그시절 우리는 얼마나 열렬하며 야망에 차 있었던가. 짧았던 1899년의 그 여름. 하나뿐인 나의 벗, 친애하는 나의 알버스. 그때만 해도 우리가 이런 식으로 마주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지.
 몇번 경련하듯 기계적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려다 실패한 듯 덤블도어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울대에 겨눠진 지팡이가 미묘하게 떨리는 것이 얇은 피부 너머로 느껴졌다. 못하겠어, 속삭이는 목소리는 승리자의 당당함이라기에는 한없이 처연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더 참을 수 없어졌다. 너무 늦었고, 이제 와서 용서받을 수도 없으며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일들이라고 해도 지금 여기서 내뱉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

 "알버스, 미안해."
 "……"
 "미안해. 전부 다."

 그는 언젠가부터 멈춰야할 때라고 생각해왔던 것일지도 몰랐다. 다름아닌 네 손에 의해서. 네가 나를 가로막으러 오기 전까지만이라고 결심했던 것이 어느덧 40년 가까이 흘렀다. 네가 나를 멈추러 오는 상황은 수십수백번도 더 상상했지만 단 한번도 지금 같은 상황은 가정한 적 없었기에. 그린델왈드는 만약을 상상했다. 만약 그때 네 여동생이 죽지 않았더라면, 내가 너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가정들은 무의미했다. 지금 이 상황만이 현존하는 현실이었으므로. 
 열일곱 해 동안 소년의 세상은 흑백이었으나 그는 그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눈으로 보이는 것이 흑과 백, 그리고 회색 뿐이라고 해도 그의 눈부신 지성을 발휘하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으므로. 오직 무채색밖에 보지 못한다해도 그는 우수했고 탁월한 천재였다. 하지만 소년도 역시 색깔이라는 개념이 궁금해질 때는 있었기에, 그럴 때마다 책장을 넘기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는 했다. 붉은색, 푸른색, 녹색, 노란색, 보라색. 그밖에도 헤아릴 수도 없는 무수한 색깔들이 존재한다고 했다. 과연 색깔이 있는 세상이란 무슨 느낌인 것일까? 소울메이트를 만나야만 비로소 이 흑백의 세상에서 탈출할 수 있다고 들었었다. 하지만 소울메이트를 찾아헤매는데 시간을 쏟기에 소년은 너무나 바빴다. 각종 상장과 트로피를 쓸어모으면서도, 영광을 안고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알버스 덤블도어는 여전히 색이 존재하는 세상을 알지 못했다. 여전히 어린 천재에게 있어 색깔이란 활자로 된 두루뭉실한 묘사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던 중 그가 나타났다. 바다를 건너온 베르길리우스이자 베아트리체. 겔러트 그린델왈드를 만나게 된 날도 언제나와 같은 오후였다. 학교를 졸업하고나서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여동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발이 묶인 소년가장의 하루일과는 단조로웠다. 여동생, 그리고 여동생, 다시 여동생. 여동생을 달래가며 세끼 식사를 꼬박꼬박 시키고 안정시켜준 후 밀린 집안일을 대강 처리하고나면 어느새 하루가 훌쩍 지나가있었다. 날카로운 지성을 자랑했던 천재가 그밖에 하는 일이라고는 무기력하게 침실에 놓아둔 책들을 들추어보거나 가끔씩 찾아오는 이웃집 백셧 여사를 맞이하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더이상 미래는 전처럼 아름다워보이지 않았다. 알버스는 가만히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며 자신의 무채색 시계(視界)가 마치 자신의 처지 같다고 생각했다. 더이상 영광도 명예도 없었다. 아마 그는 이 집안에 갇혀 평생 여동생의 뒷바라지만 하면서 살아야할테니까. 가끔씩 알버스는 만약을 생각했다. 만약 그때 아리아나가 머글소년들에게 공격받지 않았더라면, 만약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그러나 가정은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었으며, 눈을 감았다가 떠도 여전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흑백의 세계는 너무나 그의 우울한 미래와 잘 어울렸다. 벽에 걸려있던 시계가 둔중한 소리로 세번 울렸다. 벌써 세시라니. 혼이 나간 것처럼 멍하게 침실에 앉아있던 알버스는 자리에서 느리게 일어났다. 아까 백셧 여사에게 편지를 받았던 것이 한박자 느리게 기억났다.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으니 방문해달라고 하셨던가. 누굴까. 기계적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대문을 밀자 오후의 햇살이 따사롭게 쏟아졌다. 언제나와도 같은 익숙한 무채색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와 만났다. 먼발치에 익숙한 실루엣의 백셧 여사 옆에 서 있는 길쭉하고 호리호리한 낯선 실루엣을 인식했을 때까지만 해도 아, 소개시켜준다는 것이 저 사람이구나 생각했을 뿐이었다. 한 발짝 한 발짝 가까워지면서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진 순간, 알버스의 빛바랜 세계가 돌연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한 소년이 있었다. 마치 맑은 물 위에 떨어뜨린 물감이 천천히 번져나가는 것처럼, 소년을 중심으로 다채로운 색채들이 밀물처럼 주변부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알버스는 홀린 듯 오색찬란하게 물들어가는 세계를 응시했다. 소년은 금발이었다. 금속성이 감돌 정도로 쨍하게 화려한 황금색. 알버스는 본능적으로 알아보았다. 저게 바로 금빛이구나.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짙은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파랑, 푸른색. 벽안. 소년이 입고있는 코트는 여전히 검은색이었지만 알버스의 세상은 더이상 흑백이 아니었다. 하늘은 푸르렀고, 주변에 피어있는 꽃들은 붉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색깔'이 무엇인지 실감했다. 각종 색채로 덧입혀진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고 황홀했다. 이제까지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그리고 색깔이 있는 세상에서 가장 눈부시고 아름다운 것은 다름아닌 눈앞의 낯선 소년이었다. 네가 나의 소울메이트였구나. 열일곱 소년은 난생 처음으로 마주하는 색채의 향연과 그 중심에 서 있는 소년에게 그대로 마음을 빼앗겼다. 알에서 갓 깨어난 새끼새가 제일 처음으로 보는 상대를 어미로 인식하듯, 이제까지 무채색밖에 몰랐던 알버스는 제게 색깔을 처음으로 보여준 동년배 소년에게 본능적으로 매혹되었다. 열병과도 같은 첫사랑의 시작이었다.
 두 소년은 빠르게 가까워졌고, 겔러트와 함께 보내는 시간들은 우울했던 지난 몇 주를 잊어버리게 만들 정도로 즐거웠다. 세가지 죽음의 성물, 그리고 죽음의 지배자- 처음에는 다소 허무맹랑해보였던 이야기였으나 알버스는 곧 겔러트의 주장에 수긍했다. 사실 그가 극히 개인적인 대의를 위해 이 세상을 구원해야만 한다고 했어도 믿어주었을 것이다. 비들의 <삼형제 이야기>가 유년시절 알버스가 제일 좋아하던 동화책이었다는 것 역시 흥미를 부추기는 요소였다. 아주 오래전, 어린 시절 남동생 애버포스와 같이 어머니 옆에 누워 잠들기 전 서로 원하는 책을 읽어달라 경쟁하던 때를 기억한다. 그저 동화라고만 생각했던 세 형제와 그들이 지닌 딱총나무 지팡이, 부활의 돌, 투명망토가 정말 실재한단 말인가?

 "신기하네, 단 한번도 정말로 존재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그랬으면 좋겠다고는 생각한 적 있었지만."
 "날 바라보는 네 눈동자만큼이나 분명한 사실인걸, 알버스. 우린 해낼 수 있어."

 그의 혀는 머글들의 경전 속에 등장하는 뱀처럼 유혹적이고 또 유려했다. 사탄이라기보다는 한없이 천사에 가까운 외모였지만. 가끔씩 겔러트 그린델왈드가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불길함이 선듯하게 스쳐지나가기도 했으나 알버스는 애써 그 감각을 무시하고 눈을 감았다. 그는 17년간 살면서 단 한번도 틀린 판단을 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역시 틀리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단순한 언쟁이 삼자간의 싸움으로 발전하고, 난입한 여동생이 눈앞에서 끈 떨어진 인형처럼 쓰러져내리는 그 순간까지만 해도.

 "아- 아리아나."

 순간 세상이 다시 새까맣게 번아웃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왜. 어째서. 어린 여동생은 눈을 감은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린 알버스를 밀치고 달려든 애버포스가 가냘픈 아리아나의 몸을 끌어안았다. 아리아나? 아리아나! 어깨를 조심스레 흔들던 손길이 점점 격해지고, 반복해서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에 오열이 섞일 때까지 알버스는 얼어붙은 듯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현실감이 없었다. 왜 내가, 우리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거지?

 "……형. 아리아나가 죽었어."

 울음섞인 목소리가 힐난하듯 잔혹한 현실을 전달했다.

 "형 때문이야. 형이 그애를 그 잘난 여행길에 데려간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저 자식이랑 놀아나느라 뒷전으로 밀어놓지만 않았어도! 아리아나는 안 죽었어!"
 "나, 나는……"
 "형이 죽인 거나 다름 없다고!"

 슬픔과 분노가 뒤범벅되어 한데 엉킨 듯한 남동생의 눈초리가 매섭게 쏟아졌다. 차라리 색깔이 보이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마주한 애버포스의 눈은 너무나 자신과 똑같았고, 알버스는 어딘가 도망치고 싶으면서도 이대로 주저앉아버리고 싶었다.
 아리아나가 죽었다. 네 살 터울의 어린 여동생이, 이제까지 그를 고드릭골짜기에 붙잡아 놓던 가련한 족쇄는 혼란스러운 와중 누구의 지팡이에서 쏘아졌는지 모를 주문에 맞아 사망했다. 어쩌면 알버스 본인의 지팡이였을 수도 있고 겔러트의 지팡이였을 수도 있었다. 그 둘 모두일 수도 있고.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영원히 알고싶지 않았다. 분명 그를 묶어둔 여동생이 없어졌으면, 하는 은밀한 바람을 단한번도 품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길 바랬던 것은 아니었어. 나는, 그저…… 해방 아닌 해방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더한 무형의 굴레를 남기고.
 아리아나 덤블도어의 장례식은 소규모로 간단하게 진행되었다. 불안정한 여동생은 학교도 가지 않은 채 주로 집안에서 시간을 보냈고, 이웃들조차 아리아나를 아는 사람은 적었으니까. 여전히 반쯤 정신이 나간 듯 망연자실하게 서 있던 알버스는 시야의 변화를 그때서야 깨달았다. 생생한 색감으로 가득차 있던 세상이, 퇴화하듯 천천히 흑백으로 바래져가고 있었다. 알버스가 주위에 겔러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때서였다. 어제 세 사람간의 결투 이후 여동생의 사망에 충격받아 그의 존재를 잊고 있었는데, 장례식장 어디에도 익숙한 소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소울메이트의 존재가 멀어지면 다시 흑백의 시야로 돌아간다고 했었던가? 떠났구나. 언제 떠난거야? 겔러트?

 "형 때문이라고! 전부 다!"

 울먹이면서 제게 주먹을 휘두르는 남동생의 모습마저 빠른 속도로 무채색으로 물들어간다. 명확히 얼굴을 겨냥한 주먹질에도 알버스는 방어하지 않았다. 곧 코뼈가 내려앉는 듯한 통증과 함께 핏방울이 후두둑 떨어져내렸다. 이미 그의 눈에 보이는 핏자국의 색깔은 더이상 붉지 않고 검었다. 지난 두달을 제외한 17년간 항상 그래왔듯이. 겔러트, 그 순간 생각나는 이름은 하나뿐이었다.


***
 알버스 덤블도어는 금세기 가장 위대한 마법사였으며 누구도 그 사실을 부정하지 못했다. 그는 현명했고 고결하며 탁월했으므로. 그러나 그가 흑백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줄곧 색깔을 몰랐다면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색깔이 있는 세상을 경험한 적 있었고 가끔씩 색의 부재는 예고치 못한 순간에 기습처럼 그를 덮쳐왔다. 그에게 있어서 색채란 일종의 노스탤지어인 동시에 회상하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과거의 파편이었다.
 알버스 덤블도어가 일개 소년가장에서 가장 영향력있고 명망있는 마법사로 성장하는 동안 오래전 곁을 떠난 그의 색채, 겔러트 그린델왈드는 착실히 세를 불려갔다. 그린델왈드의 영향력을 무시하던 마법부 장관이 경질되었고, 그린델왈드는 반대자들을 감옥에 가두는 등 공포스러운 행보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누멘가드라는 이름의 그 감옥의 입구에 새겨져있다는 글귀를 처음 들은 순간 덤블도어는 그답지 않게 동요를 내비쳤다. 더 큰 선을 위하여. 열일곱의 여름, 언젠가 자신이 편지에 적어보냈던 글귀는 이제 사악한 프로파간다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무슨 생각이었던가? 처음으로 마주한 색에 홀렸던 것인지 아니면 소년 자체에게 홀렸던 것인지 몇십년이 흐른 지금은 그것조차 알 수 없었다.
 그린델왈드는 교활하고 지능적이며 천재적인 마법사였다. 그는 사람을 조종하고 이용하며 철저히 통제하는 것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다수의 군중 사이에 불안감과 공포를 심는 것 역시. 그리고 그의 존재감과 그 군세가 점점 거대해져가면서 덤블도어는 초조감을 느꼈다. 20년대부터 각종 테러로 인해 각국 신문 헤드라인에 이름을 올렸던 그린델왈드는 이제 거의 마왕 취급을 받고 있었다. 각종 혼란과 재난, 테러, 실종과 사망 등이 전 유럽을 어지럽히고 있었고 마법 세계는 제발 그를 멈춰달라며 간청했다. 현대 가장 뛰어난 마법사라고 칭송받는 덤블도어에게. 그러나 지속적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지난 5년동안 덤블도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를 망설이게 한 감정의 기저에는 다름아닌 두려움이 깔려있었다. 그린델왈드 본인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그린델왈드가 몇십년전 여동생의 죽음의 진실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망설임이 발목을 진득하게 붙들었다. 과연 그날 여동생이 맞고 쓰러진 주문이 누구의 지팡이에서 나간 것인지 그는 알고 있을 것 같다고.
 그린델왈드가 불러일으키는 공포가 전염병처럼 전 유럽을 뒤덮었을 때 그나마 그 기세에서 안전한 곳은 영국 뿐이었다. 희한하게도 그는 영국에는 마수를 뻗치러 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그 이유로 덤블도어가 있기 때문에, 유일하게 그를 대적할 수 있을 만한 마법사가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거라고 지레 짐작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덤블도어는 사무실 창밖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흑백의 세상에서 불현듯 기적처럼 나타난 소년을 사랑했던 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묻어둔 고통은 부유하는 망령처럼 불쑥불쑥 그 모습을 드러내고는 했다. 아리아나, 그리고 겔러트. 이제껏 미뤄왔지만, 때가 되었다는 것을 덤블도어는 실감했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이라해도 결착을 지어야만 했다. 어린 시절 그에게 동의했던 것도, 그를 부추겼던 것도 나였으니까. 덤블도어가 드디어 그린델왈드와 맞서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다음날의 일이었다.
 그리고- 알버스 덤블도어는 약 40여년만에 한때 사랑했던 소년과 처음으로 대면했다. 막으려는 자와 나아가려는 자, 그리고 위대한 현자와 사악한 마왕이라는 대척점에 나란히 선 채. 육안으로 그린델왈드의 모습을 확인하기도 전 그가 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시각이 먼저 느끼고 반응했다. 무채색의 세계가 느린 속도로 다채로운 형형색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한다. 뿌옇게 구름이 끼어있는 하늘과 오래된 건축물들로 가득찬 도시. 열일곱 살 때 보았던 고드릭 골짜기의 풍경과는 전혀 달랐으나 46년만에 보는 색깔들의 향연은 아름다웠다.

 "안녕, 알버스. 네가 언젠가는 올 거라고 생각했어. 생각보다 많이 늦어지기는 했지만."
 "……"
 "오랜만에 보는건데도 넌 매정하구나."

 바로 어제 헤어진 친우를 대하듯 여상스러운 말투로 화두를 꺼내며 그린델왈드가 웃었다. 잊혀진 향수 속에 묻혀있던 친근한 소년의 웃음소리였다. 나이를 먹었어도 그린델왈드는 여전히 화사한 금발의 소유자였고, 아직까지도 아름다웠다. 최초의 여인을 유혹하여 죄를 범하게했다던 시원의 뱀처럼. 덤블도어는 대답하지 않고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오랫동안 회자될 결투의 시작이었다.
 3시간 가량 지속되었던 결투가 끝나고 최후에 승리한 것은 덤블도어였다. 언제나 그보다 자신이 조금 더 우위라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결투 자체가 두려웠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겔러트 너를 다시 만나는 것. 그리고 그날의 진실을 알게 되는 것. 또한 다시 색이 존재하는 세상을 보게 되는 것. 알버스 덤블도어가 흑백에서 벗어나 색깔이 있는 세상에서 살았던 것은 겨우 두달 남짓 뿐이었다. 처음으로 색을 보여준 열여섯 소년에게 깊이 매료되었던 꿈같은 시간들. 너를 만나면 이렇게 무채색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또 그런 세계를 느끼게 되면 이제 정말 다시는 잃어버리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 이번에야말로 너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 식물이 본능적으로 일광의 방향에 따라 머리를 돌리듯이 덤블도어 역시 흑백의 세계보다 컬러로 이루어진 세계를 사랑했다. 오직 두 달밖에 느끼지 못했다고 해도,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 색이란 더 강렬한 기억이고 향수였다. 하지만 그의 하나뿐인 소울메이트는 이미 너무나 먼 곳으로 가버린 후였다. 열일곱의 여름, 그때 그를 붙잡았다면 계속 함께할 수 있었을까? 덤블도어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패배한 마왕은 반대자들을 가두기 위해 제 손으로 세웠던 감옥, 누멘가드의 가장 높은 탑에 홀로 유폐되었다. 반대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그를 죽이지 않고 유폐한 이유는 덤블도어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한때나마 사랑했던 상대를 죽일 수 없어서? 그가 홀로 갇힌 채 참회라도 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게 아니면- 혹시나 모를 탈옥에 대비하기 위한 보안마법을 누멘가드 전체에 섬세하게 펼친 덤블도어는 그의 색채가 유폐된 잿빛 탑을 올려다보았다. 아직까지 그의 시야는 흑백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서 멀어지게 되면 다시 흑과 백의 세상으로 변할 것이다. 항상 그래왔듯이. 잠시 탑을 올려다보던 덤블도어는 음울한 풍경에서 등을 돌렸다. 겔러트 그린델왈드가 없어도, 이제 죽을 때까지 무채색뿐인 세상에서 살아야한다해도 그는 아마도 괜찮을 것이다. 지난 40여년간도 그랬었으니까.

 나의 색채는 누멘가드에 영원히 갇혔네.


탐라에서 본 E메레ㅅ가 넘 취향이라 썼는데 알고보니 7ㅣ숙사별 반응인듯ㅠㅅㅠ 그래도 그냥 올린다

1.난 너를 위해 죽을 수 있어

 가끔 생각하는건데 난 너를 위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진지한 눈빛으로 고백하듯 말해오던 소년의 표정을 기억한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야, 사실 너처럼 마음이 맞는 사람은 처음 만나거든. …농담이야, 그냥 농담이라니까! 겔러트 그린델왈드는 어릴 때부터 주위의 사람들을 체스말처럼 이용하는 데에는 충분히 도가 튼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상대가 수줍은 듯 하면서도 막힘없이 속내를 고백해왔을 때 드디어 됐다, 하고 쾌재를 불렀다. 농처럼 말하는 척 했지만 아마도 진심이겠지. 언젠가부터였을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 묘한 들뜸이 섞여있었다는 것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으니까. 열일곱 소년은 자신을 응시할 때마다 무장해제된 듯한 민낯을 얼핏 내비치고는 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약간이나마 감정의 조각들을 내어준다면, 역시 나도 널 사랑한다고 믿게 만든다면 틀림없이 제 몸을 타오르는 불길에 던지고도 남겠지. 불사조는 스스로 불타오르고 새로이 태어나지만 소년은 불사조가 아닌 한낱 사랑에 눈먼 인간이었다. 자신이 원한다고 말하면 자신의 목덜미를 순순히 내어주고도 남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당장 이 자리에서 사랑해, 라고 거짓으로 속삭인 후 가느다란 목줄기를 두 손으로 감싸쥐고 조른다 해도 기꺼이 받아들일 거라고. 너는 날 위해서 죽을 수 있을만큼 나를 사랑하니까.
 그렇게 생각했을 때가 있었다. 너는 기꺼이 날 위해서라면 죽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그저 앞으로의 청사진을 위해 너를 이용하는 것 뿐이라고. 하지만 되돌아보면, 지금 다시 생각하면 정말 그랬나?
 자신이 세운 탑에 반세기 가까이 유폐되어있던 몰락한 마왕은 눈을 떴다. 언제나처럼 환영을 보았다. 그래, 오고 있구나. 네가 올 줄 알았다. 언젠가는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지. 한때 아름다웠던, 지금은 너무나 노쇠해버린 전대 마왕은 제게 다가오고 있는 죽음을 반가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가 왜 굳이 자신을 방문하는지 이유는 뻔했다. 하지만 알려줄 수는 없었다. 그로 인해 자신이 죽게 된다고 하더라도 차라리 반가운 일이다. 곧 너를 만나러 갈 수 있으니까. 나는 너무나 오래 기다려왔다. 언젠가 널 위해서 죽을 수 있다고 속삭이던 소년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는 죽음을 팔벌려 환영했다.



2.너를 위해서 내가 죽여줄 수 있어

(AU)
 한때 톰 마볼로 리들이라는 이름을 지녔던 소년은 이제 더할 나위 없이 위험하고 잔인한 존재가 되었다. 이제 아무도 그의 본명을 부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대신 다른 이름으로 그를 불렀다. 볼드모트 경, 그리고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의 스승이기도 했던 호그와트의 교장 알버스 덤블도어는 아직도 볼드모트를 본명으로 지칭하는 몇 안되는 소수였으며, 그의 파트너이자 호그와트의 교수인 겔러트 그린델왈드 역시 그러했다. 아직 볼드모트 경이 10대 학생이었을 때 그린델왈드는 종종 소년에게서 자신을 보고는 했다. 리들에게서는 위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한때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소년은 어둠의 마법에 깊이 탐닉되어 있었으며 사람들을 홀려 제 수족처럼 조종했고 자신의 출중한 매력을 무기처럼 활용했다. 비슷한 자들은 거울을 들여다보듯 동족을 알아본다. 소년은 그와 동류였다. 아마 알버스가 없었다면 자신 역시 소년과 비슷한 길을 걷고 비참한 말로를 맞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역시 그가 말리든 말든 진작에 죽여버렸었어야 했어. 그랬다면 소년이 커서 사람들을 위협하는 마왕이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의 파트너는 아닌 것 같으면서도 은근 무른 구석이 있었다. 누군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아도 한번 더 믿어주고 감싸주는. 네 방식은 잘 알지만 그 녀석에게만큼은 예외였어야했어.

 "겔러트."
 "알버스, 널 위해서 내가 죽여줄 수 있어. 한 마디만 해. 그 꼬맹이 죽여버릴 거니까."
 "겔러트. 진정해."

 폭풍처럼 교장실에 들이닥친 그린델왈드는 사납게 말을 토해냈다. 손끝을 모으고 제 책상에 앉아있던 덤블도어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진정하라고?

 "당장 가서 놈의 모가지를 따버리겠어. 그 잔당들도 같이."
 "전에도 말했었지. 이미 기사단원들도 몇 잃었는데 겔러트 널 혼자 보낼 수는 없어."
 "내 실력을 못 믿는거야?"
 "믿어. 하지만 너까지 잃으면 나는?"

 폭풍전야와도 같은 침묵이 찰나 교장실을 맴돌았다. 그들이 이렇게나 팽팽하게 대립하는 것은 별로 있지 않은 일이었기에, 갈등은 더욱 첨예하게 느껴졌다.
 결국 백기를 든 것은 그린델왈드 쪽이었다.

 "좋아. 네 말대로 할게. 하지만 내 말은 진심이야."
 "고마워."
 "천만의 말씀을."

 웃어보이는 낯빛이 더없이 온화했다. 내 세계에서 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이미 그 땅을 밟은지 몇십년은 된 듯한 조국이든, 이 학교든, 학생들이든, 이 세상이든. 내가 볼드모트를 신경쓰는 것 역시 네가 신경쓰니까, 네가 그를 막고싶어하니까. 볼드모트가 머글들을 학살하든 말든 사실 그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알버스 덤블도어가 그 행위를 중요한 위협으로 받아들이는순간 그에게도 위협이 되었으며 상대는 적이 되었다. 네가 부탁만 한다면 누구든 죽일 것이고 또 누구든 살릴 것이다. 설령 자칭 죽음을 먹는 자들이 되었든 동료라는 자들이 되었든. 그린델왈드는 본디 자아가 강했다. 야생마같은 성정의 그를 이 곳에 묶어두고 있는 것은 연대의식도, 얄량한 정의감도 아닌 단 한 사람의 존재 뿐이었다. 불사조조차 길들이는 데 성공한 단 한 명의 대마법사에게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목줄을 내어주고 있었으니까.
 sed tantum dic verbo, et sanábitur ánima mea.



3.우리 둘다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을게

(if)
 세상이 정지했다. 쉴새없이 쏘아지던 주문들이, 맹렬하게 흩날리는 공기의 흐름이, 용솟음치는 불꽃이, 아래서 부서져내리는 오래된 건축물들의 부식 역시 멈춰버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오직 단 한마디의 말 때문에.

 "…뭐라고?"
 "사랑한다니까. 널."

 그 자연스러운 한 마디가 가장 위대하다고 칭송받던 마법사의 손끝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네가? 날? 왜? 그럴리가 없는데.

 "거짓말이지."
 "내가 이런 상황에서 거짓을 입에 올릴 인간으로 보여? 알버스?"

 그렇지 않아, 라고 말하고 싶어도 입이 쉽게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와 함께 보냈던 불과 두 달간의 여름은 벌써 40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그때는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었지. 한때 아도니스처럼 아름다웠던 소년은 어느덧 성장하여 성인이 되었고, 가장 위험하고 사악한 어둠의 마법사로 이름을 날리며 유럽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는 교활한 마왕이었으며 따라서 지금의 발언 역시 결투 중 상대를 혼란스럽게 하려는 술수여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자신을 바라보는 표정과 눈빛에서 거짓이 읽히지 않았기에 그는 더욱 동요했다.

 "그동안 많은 생각을 했지. 그리고 나는 네게 사과할 게 너무나 많다는 생각도 했어."
 "……"
 "그래서 네게 한가지 선물을 주려고 해."
 "-잠깐, 안 돼! 겔러트…!"

 겔러트 그린델왈드의 손이 쥐고있던 지팡이가 슬로모션처럼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그는 40여년 전의 소년처럼 매혹적으로 웃으며 느리게 팔을 벌렸다. 희극배우처럼 과장된 듯 하면서도 우아한 동작이었다.

 "네 승리야, 알버스. 내가 네게 줄 것은 내 패배 그리고 내 목숨줄."
 "무슨……!"
 "날 막을 사람은 너밖에 없다고 언제나 생각해왔으니까. 오늘 네 손에 죽는다면 영광이겠지."

 마법사들 사이의 결투에서 지팡이를 내려놓는다는 것에 대체 다른 의미가 또 무엇이 있을까. 함정인가 싶기에 눈앞의 그는 너무나도 태연했고 또 자연스러웠다.

 "……이러지 마. 우리 둘다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을게, 제발."
 "이미 늦었어. 너도 잘 알잖아."

 그린델왈드는 얼어붙은 듯 굳어버린 옛 벗에게 못박듯이 다시 속삭였다.

 "승리자가 된 걸 축하해. 알버스."
 


4.난 너와 함께 죽을게

 이대로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너 없이 계속 살아가느니. 저절로 울음이 터져나올 거 같아 이를 악물었다. 그가 떠났다. 싸늘하게 식은 여동생의 시신이 담긴 관이 집 밖으로 운반되어 나가고, 소규모의 장례식이 치러진 지 24시간도 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었다. 대체 언제 떠난걸까, 그 일이 벌어진 당일? 아니면 장례식 당시? 혼란스러운 가운데 최초의 충격이 가시자 그의 생각부터 하는 자신에 대한 지독한 자괴감이 밀려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남동생에게 크루시아투스 저주를 쏘고, 나아가 여동생을 죽게 만든 주문을 지팡이 끝에서 쏘았을 지도 모르는 존재였다. 왠지 알버스는 그가 진실을 알고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여동생을 죽인 주문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그 비밀을 품은 채 이 나라를 떠난 것만 같다고. 아마 겔러트 그린델왈드는 다시는 이 나라에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막연한 예감이 불길하게 엄습했다. 여동생의 죽음에 충격받고 슬퍼하면서도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 것만 같다는 느낌이 더욱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내가 네 손에 죽었다면 좋았을텐데. 아리아나가 아니라 차라리 내가 죽었다면 좋았을거야. 차라리 그 자리에서 너와 함께 죽었다면 이렇게까지 괴롭고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너는 나의 유일신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네가 없이 살아가야 하는 삶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돌아와 줘, 겔러트. 너 없이 홀로 백년을 사느니 여기서 죽어버리는 것이 나아. 아직 어린 여동생의 심장이 멎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에 대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하지만 한번 밀물처럼 밀고 들어온 감정의 폭포수는 알버스를 걷잡을 수 없게 만들었다. 떠나버린 그가 보고싶었고 동시에 아직도 그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이대로 죽고 싶어. 네 곁에서. 치밀어오르는 슬픔을 참으며 소년은 고요히 오열했다.
For the Greater Good.



  모든 사람은 소울메이트의 이름을 신체 어딘가에 지니고 살아간다. 태어날 때부터 그 이름을 지니고 태어나는 사람도 있으며, 유소년기를 보내며 피부 표면에 떠오르기도 하고 드물게는 성인이 되고나서야 뒤늦게 소울메이트의 이름을 알게 되는 케이스 역시 존재한다고 했다. 그 형태 또한 다양하여 풀네임일 때도 있고 단순한 성씨나 이름일 때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이니셜만이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 그의 몸에는 글자 비슷한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소울메이트의 존재같은 뜬구름에 얽매이기에 소년에게는 지나치게 신경써야할 것들이 많았었다. 반 머글주의자라는 오명 하에 아즈카반에 수감된 아버지,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시한폭탄같은 여동생. 철없는 남동생, 여동생에게 하루종일 매여사는 어머니. 소년은 호기심어린 시선과 악의가 깃든 수군거림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항상 고결하고 완벽해야했으며 타의 모범이 되는 우등생이 되어야만 했다. 처음에는 그런 목적이었다해도, 곧 머리를 쳐든 자아실현과 명예에 대한 욕망은 어린 천재에게 수없이 많은 상장과 트로피를 안겨주었다. 그는 세기에 한번 등장할법한 천재였으며 자신의 능력과 지성을 세상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도록. 반장과 학생회장 타이틀을 거머쥐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국내외 대회를 석권하며 영예와 영광을 누리던 그는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몸에 알파벳 한글자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세상에는 한낱 파트너를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들로 가득했으므로. 적어도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불의의 사고로 인해 발이 묶이게 될 때까지는 그랬다. 본디 어머니의 것이었던 굴레는 이제 소년의 목을 뱀처럼 휘어감고 조여왔다.
 미래에 대한 꿈마저 접어버린 채 가장이 된 첫날밤, 불안정한 여동생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나서던 순간 갑작스레 쇄골 부근에 화끈거리는 통증이 일었다.

 "아……"

 알파벳 G.G, 우아하고 화려한 글씨체로 휘갈겨 쓴 듯한 이니셜이 쇄골 아래에 화인처럼 떠올라 있었다. 신체에 새겨지는 소울메이트의 이름은 다름아닌 소울메이트 본인의 글씨체라고 했었던가. 하지만 이제서야 왜? 어차피 나는 여기에 평생 묶여서 벗어나지도 못할 몸인데. 한평생 집에 틀어박힌 채 누굴 어떻게 만나란 말이야. 거울을 무기력하게 응시하며 그는 다시 한번 누구인지도 모를 소울메이트의 이니셜을 입안으로 발음했다. G.G. 과연 풀네임은 뭘까. 상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어떻게 생겼을까. 그 의문들이 풀리게 되는 것은 몇 주가 흐른 이후의 일이었다.

 "-그래서 네게도 소개해주고 싶었단다. 이쪽은 덤스트랭에 다니고 있는 내 대조카란다. 겔러트, 너도 인사하렴."
 "안녕, 겔러트 그린델왈드라고 해."

 G.G. 겔러트 그린델왈드(Gellert Grindelwald). 그는 그답지않게 동요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눈앞의 또래 소년을 홀린듯이 응시했다. 마주한 눈동자는 푸르렀다. 같은 벽안이어도 하늘색에 가까운 자신과 다르게 심해처럼 깊고 진한. 일광을 받은 금발이 마치 순금을 녹인 것처럼 화려하게 빛을 발했다. 여름철 햇살 아래의 열여섯살 소년은 더할 나위없이 찬란하고 황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에 찰나 숨이 막힐 정도로. 한때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던, 소년의 하나뿐인 소울메이트가 기적처럼 제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소년의 세계는 뒤바뀌었다. 삶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아직 겔러트 그린델왈드를 알지 못했던 순간들과 이제 겔러트 그린델왈드가 존재하는 삶. 17년간 이성과 지식이 지배하는 상아탑에서만 머물다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낯선 외부 세계에 발을 디딘 그에게 있어 사랑은 그저 어렵기만 했다. 사랑이 주문을 암기하고 활용하는 것처럼 쉽기만 했다면. 예민한 어린 천재는 밤마다 연정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눈을 지새웠다. 비밀스러운 나만의 소울메이트, 네 몸에도 내 이름이 새겨져 있을까? 소년은 끝내 그 질문만은 물어볼 수 없었다. 만약 내 소울메이트가 너라고, 내 몸에 네 이름이 있다고 고백해버리면 그의 사랑이 이대로 날아가버리기라도 할까봐.
 우리는 '더 큰 선을 위하여(for the greater good)' 권력을 잡는거야, 그는 상대에게 보낼 편지에 천천히 문장을 써내려갔다. 이 글귀를 생각해낼 때까지 며칠이 걸렸고, 편지지에 실제로 문구를 적어서 보내기로 결심할 때까지 또다시 며칠이 걸렸다. 더 큰 선을 위하여(For the Greater Good). 혹은 겔러트 그린델왈드를 위하여(For the Gellert Grindelwald). 나의 아름다운 소울메이트에게, For the G.G. 그가 상대에게 건넬 수 있었던 연심의 최대치는 그렇게 활자 한가운데에 잉크와 같이 녹아들었다. 너무나 조심스럽고 서툴며 비밀스러운 고백이었다. 눈치채면 어떡하지 마음 졸이면서도 눈치채줬으면 하는 모순된 감정이 공존했다. 네가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해, 하지만 네가 내 마음을 끝까지 알지 못했으면 좋겠어. 겔러트. 너를, 사랑해. 사랑. 이게 사랑이라는 것이라면. 열일곱 해가 지나서야 뒤늦게 지각하게 된 감정의 여파는 지독했다. 낫고 싶지 않은 열병이었고 영원히 깨고 싶지 않은 환상이었으며 차라리 그 안에 잠겨서 죽어버리고 싶었다.
 
 "그럼 더 큰 선을 위하여."
 "더 큰 선을 위하여."

 화사하게 웃는 얼굴이 그날따라 유난히 눈부시게 느껴져 소년은 눈을 감았다. 내가 위하고 싶은 선은 다름아닌 너야. 불완전하게 전해진 고백 뒤에 숨겨진 진심은 혀 밑에서만 하릴없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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