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은 아주 오래 전, 그녀가 아직 어렸고 그는 지금보다 더 젊었을 적의 일이었다. 그날이 무슨 요일이었는지, 그 이전까지 뭘 하고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록산느 모튼은 그와 만났던 순간만큼은 바로 어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안녕, 작은 숙녀분. 록산느라니 정말 예쁜 이름이구나. 혹시 괜찮다면 널 록시라고 불러도 되겠니?"
 "록시……?"
 "그래, 록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록산느 모튼이 '록시'라는 또다른 애칭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안경이 잘 어울리던 멀쑥한 젊은 신사는 아버지의 지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고, 허리를 숙여 자신의 허리춤 정도밖에 오지않는 작은 숙녀에게 정중한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는 그 인사와 더불어 그녀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었다. 이제 스스로도 본명인 록산느보다 더 익숙하게 여겨지는 이름, 록시. 이후 그녀는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 스스로를 록시라고 불러달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다름 아닌 그가 불러준 이름이니까. 그리고 처음으로 그와 만난 후 십여년이 지났을 때 신사는 더이상 어린 소녀가 아닌, 훌쩍 성장해버린 그녀에게 다시 찾아왔다.
 킹스맨. 갑옷 대신 수트를 몸에 걸친 현대의 기사들, 젠틀맨 스파이. 안경과 몸의 선에 딱 떨어지는 수트가 유난히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그는 아서왕 전설 속 기사들의 이름을 코드네임으로 가진 유서깊은 비밀조직의 일원이었다. 007같은 건가요?하는 그녀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비슷하지, 하고 고개를 끄덕일 때의 그 기분이라니. 그리고 그의 코드네임은 퍼시벌이었다. 그리스도의 성혈을 담았다는 거룩한 잔, 성배를 찾아 떠났던 세명의 기사 중의 한 사람. 그녀를 방문한 퍼시벌은 어린 록산느를 처음으로 록시라고 불렀던 그때처럼 제안을 해왔다.

 "언젠가 말해준 적이 있었지. 킹스맨이라는 조직이 있단다. 나 역시 그 조직의 일원이지. 이번에 안타깝게도 동료 한 사람이 죽었어. 그래서 그 공석을 메우기 위해 후보생을 모집하고 있는데, 록산느. 나는 너를 추천하고 싶구나."
 "저를요?"
 "그래. 너는 기사를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기사가 되는 게 어울리는 아이니까. 만약 네가 성공한다면- 우리의 일원으로서, 내 동료로서 네게 주어질 코드네임은 랜슬롯이 되겠지."
 "……랜슬롯."
 "미리 말해두자면 그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거란다. 하지만 나는 너를 믿는다, 록시."

 랜슬롯이라하면 가장 유명한 기사의 이름이자 제일 용맹했던 원탁의 기사가 아닌가. 비록 주군의 아내였던 왕비와 사랑에 빠져버리기는 하지만…… 처음으로 그녀를 록시라고 불렀던 남자가 이번에는 또다시 새로운 이름을 주려고 하고 있었다. 다름아닌 그녀를 자신의 동료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자신을 진지한 눈으로 응시하는 퍼시벌을 향해 록시는 한치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추천을 받아 후보생이 되겠다고, 그리고 꼭 모든 과정을 통과하여 당신의 곁에 대등한 동료 한 사람으로서 서겠다고.
 그의 경고대로 훈련과정과 시험들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후보생들이 취침 중이었던 방에 물이 차오를 때도 있었으며 -맙소사, 인명피해는 없을 거랬잖아요, 퍼시벌?- 스카이다이빙 -약한 고소공포증이 있는 록시에게 있어 가장 긴장되었던 순간 중 하나였다- , 필기시험까지 일정은 꽤나 타이트하고 긴장을 놓을 새 없이 빡빡했다. 처음에는 다수였던 후보생들이 하나하나 탈락하며 최후의 3인만 남게되고, 심지어 클럽에서 같은 동년배 여성을 유혹해 침대로 끌어들이라는 미션이 내려왔을 때 록시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래, 그 아가씨 취향이 에그시나 찰리가 아니라 의외로 나일수도 있는 거지 뭐. 약물을 탄 술잔을 받아마시고 의식을 잃었다가 도로 정신을 차렸을 때 차가운 철로에 팔다리가 묶여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록시는 후보생이 된 이래 가장 동요했다. 어떻게 된 거지, 설마 그곳에서 납치된건가? 그 술잔에 들었던 약은? 계획적인 소행인가? 누가? 왜? 소피라고 했던 그 여자는 속임수였나? 아니면 설마 이것도 미션의 일부? 필사적으로 흐릿한 머리를 굴리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중이던 록시 앞에 나타난 낯선 남자는 서릿발처럼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가 들고있는 이 칼만이 널 살릴 수 있다. 내 고용주를 대신해서 묻겠다, 킹스맨이 대체 뭐지? 퍼시벌은 또 누구야? 살고싶으면 어서 말하는 게 좋을걸! 설상가상으로 가깝게 다가오기 시작하는 기차소리까지. 그 순간 그녀는 처음으로 죽음을 실감했다. 하지만 낯선 자에게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모든 걸 말해버릴 수는 없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당신이 내게 보여준 신뢰를 저버릴 수는 없으니까. 나는 당신이 처음으로 록시, 라고 불러준 순간부터 아마-
 기차가 바로 지척까지 다가왔다고 느낀 순간 록시는 눈을 질끈 감았다.

 "Good girl, Roxy."
 "…나, 해낸 건가요?"

 잘 해냈다, 풀어줄테니 가만히 있으렴. 기차가 무서운 기세로 지나가고 난 후 눈 앞에 나타난 것은 다름아닌 그녀의 기사였다. 살아있었다. 그리고 끝까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이것 역시 시험이었구나. 나는 당신도, 당신의 조직도 배신하지 않았어.
 세명의 후보생들 중 록시가 가장 먼저 시험을 치렀기 때문에 록시는 중앙 통제실에서 멀린 그리고 퍼시벌과 함께 에그시와 찰리가 동일한 시험을 치르는 광경 역시 지켜볼 수 있았다. 에그시 언윈은 그녀처럼 통과했으며 찰리 헤스켓은 탈락했다. 이제까지 후보생 개개인의 추천인은 비밀이었기에 에그시의 추천인이 최고의 요원이라던 갤러해드였으며 찰리의 추천인이 다름아닌 조직의 수장 아서였다는 것을 그녀가 알게 된 것은 그때가 되어서였다.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 시험 뿐. 멀린은 전통적으로 마지막 시험 전에는 후보생과 추천인 단둘이 24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통이라며 안내했다. 에그시는 갤러해드와 함께 사라졌고 록시 역시 퍼시벌을 따라 이동했다. 공들였던 화려한 화장을 지우고 머리칼을 포니테일로 다시 묶어올린다. 10년도 더 넘게 알아온 상대라지만 이렇게 둘이서만 꼬박 하루를 같이 보내는 건 처음이어서 살짝 들뜬 상태의 록시에 비해 퍼시벌은 묘하게 수심에 찬 듯한 표정이었다. 저와 같이 있는 게 기쁘지 않아요? 조심스러운 질문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록산느,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난 잘 모르겠구나."
 "뭐가요?"
 "널 추천한 것이 정말 잘 한 일인지. 넌 똑똑하고 유능한 아이니까 당연히 여기까지 올 거라고 믿었단다. 하지만 막상 문턱 하나만 남겨두니…"
 "……퍼시벌은 저와 동료가 되는 게 싫어요?"
 "그런 게 아니야. 킹스맨은 위험한 임무에 자발적으로 뛰어들어야하는 존재다. 하지만 우리 외엔 아무도 우리의 노고를 알아주지 않지. 우리는 그림자 속에서 활동하는 현대의 기사들이니까. 전대 랜슬롯은 홀로 단독임무에 투입되었다가 살해당했어. 나는 만약 네가 그렇게 된다면-"
 "오, 퍼시벌."

 놀랍게도 그는 진심으로 괴로운 듯한 얼굴이었다. 비로소 처음으로 그의 민낯을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 맙소사, 항상 우아하고 여유 넘치는 완벽한 신사같던 그가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안다니. 그것도 다름아닌 나 때문에! 메이크업을 지우면서 이미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던 록시는 냉큼 퍼시벌이 앉아있던 책상 위로 훌쩍 올라가 앉았다. 아버지가 보신다면 모튼 가의 후계자답지 않은 품위 없는 행동이라며 지적하셨겠지만 여긴 잔소리할 부모님도 없고, 우리 둘 뿐인데 뭐 어때.

 "퍼시벌이 날 그렇게까지 생각해주는지는 몰랐어요. 하지만 당신이 날 추천해준 거 잖아요? 난 그저 당신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을 뿐이에요."
 "록산느."
 "죽지 않겠다-라고 맹세할 수는 없겠네요. 하지만 퍼시벌, 난 정말로 당신의 동료가 되고싶어요. 나도 코드네임을 받고 당신과 함께 하고싶어요."

 록시는 환하게 웃었다. 아, 가까이에서 본 그의 눈동자는 이런 색이었구나.

 "그리고 록시라고 불러주세요, 항상 그랬듯이."
 "록시."
 "네, 그렇게요."

 그녀는 그렇게 새삼 각오를 다졌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신의 곁에 서고 싶어. 당신 옆에 대등한 동료의 한 사람으로서.
 24시간을 보낸 다음날 멀린이 그녀를 불러 총을 건네준 후 이제까지 길러온 푸들을 쏘라고 명령했을 때 그녀는 직감했다. 이게 바로 마지막 시험이구나. 기사가 되기 위한 최후의 관문이 약한 동물을… 그것도 무려 자신의 개를 쏘는 것이라니,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기사도는 마땅히 약자를 보호해야하는 것일진대. 그녀의 푸들이 온순한 눈빛으로 동요하는 주인을 바라보았다. 록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나는, 해야만 해, 왜냐면, 그와 약속했으니까- 차마 푸들의 눈을 쳐다볼 수는 없어 눈을 질끈 감고 쥐고있던 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고 큰 소음이 났다. 아마 눈을 뜨면 아끼던 개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을 것이다. 죽지만 않았다면 좋을 것을…… 아니, 죽었을 것이다. 그녀가 건네받은 총의 크기는 꽤나 묵직했으니까. 이렇게 가까이에서 총에 맞았다면 틀림없이 죽었을 거야.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방아쇠를 당긴 자세 그대로 총을 움켜쥐고 얼어붙어 있던 그녀의 귓가에 멀린의 목소리가 스쳐지나갔다.

 "마지막 시험을 통과한 것을 축하한다, 록산느. 이제 눈을 떠봐."
 "아……?!"
 "그건 빈 총이었어."

 눈을 떴다. 그녀의 푸들은 어디 하나 다친 곳 없이 멀쩡하게, 순한 눈망울로 주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빈 총이었구나. 이것이 마지막 테스트. 차갑게 식어버린 것 같았던 심장이 다시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그럼 나는…?

 "아직까지 조용한 걸 보니 에그시는 통과하지 못한 모양이군."
 "멀린……"
 "이젠 네가 새로운 랜슬롯이야. 킹스맨의 일원이 된 걸 축하한다, 랜슬롯."

 그렇게 한동안 비어있었던 원탁의 공백을 메울 새로운 기사가 한 명 탄생했다. 그 중 가장 어리고 유일하게 성별이 다른 기사가.
 그리고 그녀가 받은 축하인사 중 가장 기쁜 것은 역시 그녀의 추천인이 건넨 인삿말이었다.

 "랜슬롯, 축하한다. 언제나 네가 해낼 거라고 믿고있었어."
 "언제는 날 추천한 게 잘 한 일인지 모르겠다면서요?"
 "사실 그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란다. 네가 중간에 탈락할 거라고 한번도 생각한 적 없었지만 그렇기에 더 내 선택을 곱씹고는 했지. 아끼는 너를 터무니없이 위험한 곳으로 끌어들인 것은 아닌지……"

 퍼시벌의 차분한 눈매는 평소처럼 진중했으나 그를 오랫동안 알아온 록시는 눈치챌 수 있었다. 이 사람, 진심으로 기뻐하면서도 나를 걱정하고 있구나.

 "널 끌어들인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다만, 사실 나는 네가 이런 위험한 삶이 아닌 평범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길 바랬어. 랜슬롯이 아닌 록산느의 삶. 하지만 넌 너무나 뛰어난 아이였지. 각자 후보생을 추천하라는 오더가 내려왔을 때 그 자리에 어울릴만한 사람은 오직 너밖에 떠오르지가 않더구나."
 "퍼시벌."
 "그리고 너는 결국 해냈지. 이제 랜슬롯으로 살아가게 될 네게 내가 해줄 말은 이것밖에 없구나. 부탁이다. 꼭 살아남거라, 록시. 가능하면 나보다 더 오래."

 아직 수트와 안경도 지급받지 못한 신규 기사의 어깨에 그녀의 추천인이었던 기존 기사의 손이 올려졌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매는 한없이 자랑스러워하는 동시에 어딘가 서글프기도 해보이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랜슬롯 네가, 너 자신을 잊지 않고 끝까지 록산느 모튼일 수 있기를."
 "약속할게요, 퍼시벌. 하지만 당신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홀로 남는 건 싫어요. 그러니까 나하고도 약속해요. 당신도 역시 살아남을 거라고."

 이미 그는 충분히 검증된 실력을 지닌 기사이다. 퍼시벌의 코드네임을 가지고있는 채 이제껏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그의 유능함을 의미하므로. 하지만 전대 랜슬롯 역시 혼자 아르헨티나에 파견될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이었지 않은가. 만약 퍼시벌이 자신을 두고 그렇게 죽어버린다면? 우습게도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보다 그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이 훨씬 더 숨이 막혀왔다. 자신이 없는 삶이, 당신 없이 기사로서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당신이 아니었으면 이 자리까지 오지도 못했을 텐데. 그러니까 당신도 죽지 말아요. 나도 노력할 테니까. 새로운 랜슬롯, 록시, 록산느 모튼, 여러 이름으로 불리게 된 소녀는 과감하게 발뒤꿈치를 들어올려 저를 내려다보는 세례자의 뺨에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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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레 생일이라길래 서두만 써놨던 옛글 급하게 재활용
 

-
 10년이라는 세월은 길었다. 홀로 덩그러니 빈집에 남겨진 어린애가 어설프게나마 귀족다운 품위를 갖춘 계집으로 성장하기에 충분한 시간이기도 했다. 자신을 새초롬하게 올려다보는 비취빛 눈동자와 마주할 때마다 그는 종종 소녀를 박제하는 상상을 했다. 자신의 두 손으로 가느다란 목덜미를 움켜쥔 뒤 단번에 비틀고, 여린 몸뚱아리를 절개하여 대신 포르말린과 나프탈렌을 채우고, 제 사제관 한 켠에 박제되어버린 소녀를 세워놓는 상상을. 할 수만 있다면 그 찬란하게 느껴지는 생명력까지도 모두. 숨이 끊어지는 순간 스러져버릴 소녀의 한 줌 생기마저 공기 중으로 헛되이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그는 소녀를 사랑했다. 그 나름대로의 사랑이었다. 그는 스승으로서, 또한 후견인으로서 더할 나위 없는 친애의 정을 소녀에게 품고있었던 것이다. 그가 이제까지 손아귀에 쥐었던 것들 중 가장 연약하며 동시에 가장 강인하고 또한 가장 아름다운 예술품. 제 아버지의 등을 느찌른 검을 끌어안으며 끝내 울음을 터뜨릴 듯 파르르 떨리던 어린 입술의 모양새를 기억한다. 그 순간 그의 척추를 찌르르 울리며 관통하던 날선 쾌감 역시도.
 린, 나는 정말이지- 네가 좋다. 당차고 야무진 계집아이, 토오사카의 어린 여당주. 되바라졌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는 그만의 사랑스러운 피후견인. 그렇기에 그는 그녀를 돌아오는 성배전쟁의 제물로서 선택했다. 소녀는 성배의 핵이 될 것이고, 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세상에 종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정성을 다해 고이 길러온 순결한 어린양을 번제에 바치는 목자의 심정이 이러하였을까. 조금만 더 있으면 성배전쟁이 시작된다. 겨울로 접어든 이후 그는 답지않게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소녀가 제발로 저를 찾아온 날 당일까지 역시.


 "키레이."
 "네가 먼저 나를 찾아오다니, 감동이군. 린. 용건이 있다면 전화라도 먼저 했으면 좋을 것을…… 아아, 너는 심각한 기계치였지. 잊고 있었다. 방금의 실언에 대해서는 사과하마."
 "이익……!! 기껏 찾아온 사람한테 그게 무슨 실례야! 역시 당신이란 남자는!"


 정말 싫어! 하는 환청이 그 뒤로 이어진 것 같다면 착각이겠지. 그는 뒷짐을 진 채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열을 내는 소녀의 모습을 잠자코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 네가 여기까지 친히 방문한 이유가 있을 터인데."
 "…으,우, 그러니까. 당신 말이야. 오늘이 생일이잖아. 당신같은 괴팍한 신부 따위가 자기 생일 같은 거 챙길리도 없지만…… 어쨌든 사와 봤어. 예의상."
 "호오."


 소녀가 여태껏 등뒤로 숨기고 있던 오른팔을 쑥 내밀자 그곳에는 케이크 상자가 어울리지 않는 물건처럼 들려있었다.
 그는 과장되게 눈썹을 치켜올리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린, 아아… 이럴 수가. 날 위해서 네가 이런 갸륵한 짓을 하다니 믿을 수가 없군. 주님께 감사드려야겠어."
 '흥, 됐네요! 키레이 당신이 밉살스럽긴하지만 어쨌든 내 후견인이니까, 그러니까 챙겨온 거 뿐이야."
 "고맙다, 린."
 "감사인사 따윈 됐다니까!"


 냉큼 쥐고 있던 상자를 그에게 떠안기다시피한 소녀는 목적은 달성했다는 듯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돌아섰다. 하여튼 귀염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제자였다. 그게 더 귀여운 면이지만. 그는 잠자코 소녀의 뒷모습을 응시하다 그녀가 묵직한 교회문을 열고 나가버리기 전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린."
 "……왜? 사이비 신부."
 "챙겨줘서 고맙군. 이왕 네가 사온 건데 좀 들고 가겠나?"
 "……됐어. 그런 거 먹어봤자 군살만 늘어날 뿐이라고. 어쨌든 생일 축하해, 키레이. 그리고 연말 잘 보내."
 

 묘하게 한 풀 꺾인 듯한 기세의 목소리를 남기고 다시 문이 닫혔다. 이 어찌나 사랑스럽지 않은 아이인가. 동시에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인지. 정말이지, 그의 소녀는 앞으로의 계획에 있어 더할나위 없이 안성맞춤인 보석이었다. 그는 한동안 빈 교회에 홀로 서서 자애롭게 웃음을 터뜨렸다. 가장 멋진 생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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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지나고 올리는 크리스마스 연성
아리아나가 죽지않은 해피월드AU



-
올해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가 돌아왔다. 거룩한 아기예수의 생일. 마법사들도 이 날을 즐긴다는 것은 모순일까? 머글과 마법사 마을 가리지 않고 크리스마스와 연말 특유의 묘하게 들뜬 듯한 분위기가 고드릭 골짜기의 대기 중에 온통 충만했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실내에 들어와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까 진눈깨비와도 같은 눈송이가 내리는 바람에 화려한 금발이 살짝 젖어 짙은 빛깔로 변한 겔러트는 덤블도어 가에 들어서자마자 품 안에서 지팡이를 꺼내 머리칼과 옷깃을 말렸다. 그린델왈드 넌 또 왜 여길 왔어, 하는 타박이 옆에서 들려왔으나 자연스럽게 무시했다. 벌써 몇 해째 이곳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었으나 매번 들어올 때마다 겔러트를 바라보는 애버포스의 눈초리는 결코 곱지 않았다. 사실 크리스마스에만 유난스러운 게 아니라 알버스와 같이 붙어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는지라 이미 익숙해졌지만. 뭐, 자기 딴엔 내가 순진한 형을 훔쳐간 날강도라도 되나보지? 이번에도 처남이라고 불러서 살살 약올려줄까 고민하던 도중 날렵한 발소리가 도도도 들려오더니 곧 자그만 실루엣이 겔러트의 품에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겔러트 오빠! 기다리고 있었어!"
 "안녕, 아리아나. 그동안 잘 지냈어? 알버스는?"
 "응, 알버스 오빠는 지금 부엌에 있어! 저녁 준비한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 말랬어!"

 그에게 안긴 것은 하늘하늘한 금빛 머리채와 순진무구해보이는 눈망울이 언제봐도 애버포스와 피가 섞인 남매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덤블도어 가의 막내, 아리아나였다. 네 작은오빠가 여동생의 귀염성을 반만 닮았다면 좋았을 것 같은데 말이지…… 아직 어린아이답게 오늘이 크리스마스라서 몹시 신난 기색이었다. 잠깐 네 큰오빠 좀 보고올게, 속삭인 후 동글동글한 아리아나의 정수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준 겔러트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걷지않아 역시 자신이 온 것도 모르고 지팡이를 든 채 부엌에 서서 열중해있는 낯익은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뭘 저렇게까지 열심히 하고있을까.

 "안녕, 알버스."
 "아, 겔러트! 생각보다 일찍 왔네."
 "사랑하는 네 덕분이지. 메리 크리스마스."
 "응. 너도… 메리 크리스마스."

 저를 돌아보는 소년의 뺨은 그동안 요리에 열중해있던 탓인지 붉게 상기되어 보였다. 하얀 레이스 식탁보가 깔린 식탁에는 통째로 구운 칠면조 구이부터 시작해서 부쉬 드 노엘, 민스파이, 붉은 포도주까지 다채로운 요리들이 차려져있었다. 오늘이 성탄절이라고 나름 준비한 건가. 혼자 고생 많았겠네, 말을 건네자 알버스는 고개를 저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별 거 아냐, 이 정도면 금방 하는걸. 아무래도 애버포스나 아리아나가 도와주는 것보다 나 혼자 하는 게 빠르니까."
 "수고했어. 마무리는 내가 할 테니까 이제 쉬어도 돼."

 어차피 알버스가 거의 다 차려놓은지라 마무리할 것도 거의 없었지만, 지팡이를 가볍게 흔들어 한켠에서 끓고 있던 스튜를 마무리한 후 겔러트는 여유있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보니, 크리스마스인데도 이 집안에는 겨우살이 장식 하나 걸려있지 않았다. 아마 들이닥칠 불청객 -자신- 을 예상해서 애버포스가 기를 쓰고 치워버린 거 같은데…… 날 너무 저평가한 거 아냐, 처남? 그렇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전혀 없지. 입매에 장난기어린 미소를 머금은 채, 겔러트는 여동생과 똑 닮은 선량한 벽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알버스의 머리 위쪽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알버스, 거기 겨우살이."
 "응? 어디에?"

 뜬금없는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뜬 상대를 향해 겔러트는 성화 속에나 등장할 법한 천사처럼 상냥하게 웃어보였다.

 "여기 있네."

 어느새 알버스의 머리 위에는 겨우살이 리스가 엔젤헤일로 마냥 한 뼘 정도의 거리를 두고 둥둥 떠 있었다. 마법으로 불러낸 리스를 공중에서 낚아채 붉은 머리칼에 화관처럼 씌워주며 겔러트가 나른하게 속삭였다.

 "오늘같은 날 겨우살이 아래에 있는 상대를 무시하고 그냥 지나쳐버리면 벌 받겠지?"
 "아……"
 "눈 감아, 알버스."

 눈을 감으라고는 했지만 사실 안 감아도 별 상관은 없으니까. 그는 알버스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그대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분명 처음으로 같이 보냈던 크리스마스 때만 해도 이렇게 입을 맞추자 완전히 얼어붙어서 어쩔 줄 몰라하며 꼼짝도 못 했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몇년간 함께 지내며 익숙해지긴 한 모양이었다. 자신의 목에 어설프게나마 팔을 둘러오는 서툰 모양새가 눈물나게 귀여웠다. 정말이지 어쩌면 좋을까, 너를.

 "아, 형!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아리아나가 배고프다는데 대체 그 자식이랑 부엌에서 뭘 하길래 이렇게 소식이 없……"

 누군가에게는 사랑이 가득한 성탄절이었을지 몰라도 마침 타이밍 좋게 형과 형의 남자친구가 키스하고 있는 풍경을 코앞에서 고스란히 목격해버린 애버포스에게는 이제까지 쌓아온 인간에 대한 신뢰와 자신의 시력을 모두 부정하고 싶어지는 끔찍한 크리스마스였다는, 그런 짧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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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Grindeldore: 변주곡 #1  (1) 2016.12.24
-살아남은 자들에 대하여.

 솔직히 말해서, 해리가 느끼기에도 그린델왈드의 성정은 다소 괴팍했다. 몇십년 동안 자신이 세운 감옥에 홀로 갇혀있었다면 그 누구라도 -그 대단한 멀린이라도해도- 성격이 괴벽스러워질 것 같기는 했지만 그가 유난히 까탈스러워지는 부분이자 스위치가 눌리는 화제는 하나였다. 덤블도어.
 알버스 덤블도어. 금세기 가장 위대한 대마법사이자 현자였으며 호그와트의 하얀 무덤에 묻혀 영원한 안식을 찾은 전 교장. 그가 사망한 직후 마법부는 발칵 뒤집혔다. 볼드모트가 돌아왔다는 사상 초유의 사태에서 마법세계를 수호할 만한 능력을 갖춘데다 유일하게 그 사람이 두려워하는 인물인 덤블도어가 사망하다니? 호그와트가 가장 안전한 장소라는 것도 다름아닌 그가 교장으로서 버티고 있기에 나온 말이 아니었는가. 그 와중에 덤블도어의 충실한 애제자인 해리마저 마법부의 마스코트가 되길 거부하며 그들이 내민 손길을 뿌리쳐버리자 마법부는 정말로 다급해지고 말았다. 그렇기에 정신 나갔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와일드카드를 꺼내드는 초강수를 두었고 그들이 소환한 조커는 다름아닌 지금 해리의 눈앞에 있는 그린델왈드였다. 이이제이, 현 어둠의 마왕은 전대 어둠의 마왕으로 제압한다. 정말이지 평상시라면 그 누구도 찬성하지 않았을 만한 미친 계획이었다. 그린델왈드는 후배격인 볼드모트에게 왕좌를 빼앗겼을 뿐이지 역대 가장 위험한 어둠의 마법사 중 하나였으며, 아무리 오랫동안 누멘가드에 갇혀있었다고 해도 그런 그를 외부에 풀어놓는다는 것은 사나운 맹수를 도시 한가운데 풀어놓는 것과 진배 없는 행위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그것을 스크림저는 해냈다. 호위 한 사람 없이 홀로 누멘가드로 향한 스크림저는 1시간 가량 독방에 있던 그린델왈드와 독대를 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무슨 제안을 했고 무슨 거래를 했는지는 그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렇게 볼드모트를 쓰러뜨리는 것을 조건으로 한 그린델왈드의 조건부 일시 석방은 마법부 장관의 단독승인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린델왈드는 풀려난 이후 바로 호그와트로 찾아왔다. 정확히는 해리에게. 오랜 독방생활로 인해 성마르긴 했으나 유난히 형형한 벽안의 노신사, 그것이 해리가 본 그의 첫인상이었다.


 "해리 포터… 너를 안다. 살아남은 소년."
 "당신은……"
 "상황이 별로 여유롭지 않으니 긴 말은 하지 않으마. 나는 겔레르트 그린델발트, 너희 영국인들은 그린델왈드라고 부르더군. 그건 그렇고 덤블도어가 네게 유지를 남겼다고 들었는데."


 그와 조우한 이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헤르미온느와 론은 해리가 그린델왈드와 단둘이 떠난다는 것에 매우 우려를 표하며 자신들도 함께하겠다고 했으나 해리는 친구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미 시리우스와 덤블도어를 잃었고 더이상 아무도 잃고싶지 않았다. 특히 절친한 친구들이라면 더욱 그랬다.
 볼드모트를 처리하기 위해 풀어야할 수수께끼는 총 7개중 아직 남아있는 호크룩스들, 그리고 세가지 죽음의 성물이었다. 비록 반세기 가량 감옥에 홀로 갇혀있었다고 하나 그의 지성은 매우 비상했으며 날카로웠다. 만약 그린델왈드 없이 해리 혼자 혹은 친구들과 여정을 떠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매우 막막했겠지. 벨라트릭스의 금고에서 황금 잔을 훔쳐내고 로켓을 비롯한 호크룩스를 하나하나 파괴할때마다 해리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점점 끝에 가까워지고 있다. 태어났을 때부터 이어져온 질긴 악연을 청산할 때가. 나는 끝에서 열린다, 스니치에 새겨져 있던 문구의 뜻을 실감했을 때의 기분을 아직도 기억한다. 자신이 죽어야만 볼드모트를 진정으로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그건 아플까요? 죽는 거요."
 "아직 죽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만, 한 가지는 약속해줄 수 있겠구나. 포터. 나는 사실 이제까지 네가 7번째 호크룩스가 아닐까 생각해오고 있었다. 그가 네게 살인저주를 쓴다면 아마 너는 죽겠지만 그건 너만의 죽음이 아니라 네게 들러붙어 있는 그자의 추악한 영혼쪼가리의 죽음이기도 하겠지. 전에 너는 전에 그자가 네 피를 뽑아갔다고 말했었어. 알다시피 너와 그자의 혈관에 흐르는 것은 고대의 보호 마법이다. 그렇다면 그자가 살아있는 한, 포터 너 역시 진정으로 죽지 않을 거다."
 "그게…… 정말인가요?"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지만 내 생각은 그렇단다. 아마 알버스도 나처럼 생각했을 게야. 하지만 네가 한번 죽음을 맞이해야한다는 것이 달라지지는 않는단다, 살아남은 소년. 지금 네가 여기서 도망친대도 나는 널 말리지 않을 거다. 그럼 각오는 되었나?"
 "-되었습니다, sir."


 그렇게 해리는 그 숲에서 한번 죽음을 맞이했고, 1살 때부터 그에게 들러붙어있던 영혼 쪼가리를 털어낸 채 다시 옛 은사님의 불사조처럼 도로 부활했다.
 그리고, 그날밤 볼드모트는 죽었다.


 "…저는 딱총나무 지팡이를 도로 제자리에 가져다 놓을 계획입니다."
 "아주 현명해. 제자 하나는 잘 키웠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알버스?"


 감격에 찬 얼굴로 눈물을 흘리고있던 덤블도어의 초상화가 두 사람을 향해 환하게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리가 딱총나무 지팡이를 꺼내 원래 자신의 지팡이를 고치는 동안 그린델왈드는 초상화를 향해 앞으로 한발짝 내딛었다.


 "내가 너무 늦었지, 나의 오래된 벗이여…… 그동안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해왔어. 내가 네게 상처를 준 것들, 그리고 내가 했던 이기적인 행동들에 대해."
 "……겔러트."
 "이렇게라도 늦게나마 너와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알버스, 나는 그날 이후 너를 한번도 잊은 적 없어."


 그를 알게 된 이후로 해리가 들은 가장 절절한 목소리였다. 그린델왈드의 목소리에서는 여러가지 감정들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깊은 회한, 후회, 미련, 그리고 미안함. 해리가 알고 있는 두 사람의 관계란 고작 소년시절 두어달 정도 함께 여름을 보냈다는 것 뿐인데, 서로를 응시하는 둘의 눈빛은 한없이 깊어 보였다. 마치 그들만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어쩌면 해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그들의 관계에 심오한 뭔가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미안해, 알버스."


 다름아닌 덤블도어에 의해 반세기간 유폐되어있었던 전대 마왕은 그 초상화를 향해 끓어오르듯 잠긴 목소리로 사죄했다. 아까까지 해리를 향해 한없는 애정과 자랑스러움이 담긴 눈빛을 보내고 있었던 교장선생님의 초상화는 어느덧 도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미 교장실은 오직 그와 그만이 존재하는 공간과도 같았다. 해리는 조용히 지팡이들을 챙긴 채 뒷걸음질치듯 교장실을 빠져나왔다. 문을 닫는 순간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나지막한 흐느낌이 한숨처럼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그 이후 덤블도어의 초상화와 그린델왈드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는지 해리는 알 수 없었다.
 결국 마왕은 패배하였으며 살아남은 소년은 이번에도 역시 살아남았다. 또한 볼드모트를 쓰러뜨린다는 조건으로 일시 가석방되었던 그린델왈드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마법부의 사면을 통해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되었다. 다시 그를 누멘가드로 돌려보내야한다는 의견 역시 분분했던 가운데 그린델왈드가 온전히 사면되기까지는 볼드모트를 패퇴시킨 장본인인 해리의 발언 역시 한몫하였다. 국제 요인들도 다수 모인 마법부 주관 회의에 출석한 해리는 그린델왈드가 얼마나 큰 도움을 주었는지, 함께하는 동안 그가 어떤 태도를 보였으며 이미 그는 더이상 마법세계를 위기에 빠지게 할만한 위험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살아남은 소년이자 선택받은 자, 그리고 석방된 상태의 그린델왈드와 오랜기간 함께 지냈던 해리 포터의 발언은 반대파를 수그러들게 할 정도의 무게를 충분히 지녔다. 몇시간 가량 지속된 회의가 끝나고 비로소 자유인으로 풀려난 그린델왈드는 다소 개운한 표정이었다.


 "내 편을 들어줘서 고맙구나, 포터. 이 얼마만에 만끽하는 자유로운 햇살과 공기인지!"
 "그동안 저를 많이 도와주셨으니까요. 만약 없으셨다면 쉽게 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때, 교수님이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해도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되길 바라실 것 같았어요."
 "…그러고 보니 너는 그의 애제자라고 들었는데 정작 포터 네 입에서 그와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구나. 이제 내게 남는 것은 시간뿐이니, 종종 이 늙은이와 말벗이라도 해주는 건 어떻겠느냐?"


 그것이 그린델왈드와 해리가 맺은 기묘한 관계의 시작이었다. 거의 증조부와 증손자 수준의 나이차, 국적, 상이하게 다른 살아온 경험 등 너무나 다른 두사람의 관계는 우정이라기에도 미묘하고, 동지애라고 하기에도 애매했지만 그들은 알버스 덤블도어라는 하나의 연결고리를 공유하고 있았다. 그리고 그들을 연결해주는 공통분모는 해리와 그린델왈드의 인생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2,3일에 한번씩 그린델왈드는 해리를 찾아왔다. 그의 방문은 오전일 때도 있었고 오후일 때도 있었으며 늦은 저녁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주로 버터맥주를 마시며 앉아서 수시간동안 대화를 나눴다. 주된 화제는 역시 덤블도어와, 그들이 덤블도어와의 사이에서 있었던 일들이었다. 해리가 아는 은발의 현자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가 알고 있는 소년 덤블도어는 서로 다른 시간축의 인물이었으므로 항상 이야기는 새로웠다.


 "그래서 제가 처음 입학했을 때의 일인데요, 글쎄 처음 일어서서 그분이 뭐라고 말씀했는지 아세요? 바보, 울보, 떼쟁이 다 환영한다고 하셨다구요! 솔직히 전 그때 교수님이 좀… 미친 줄 알았어요. 반장이었던 퍼시 형도 제게 그랬었다구요 살짝 미쳤지만 그래도 위대한 분이랬나."
 "허, 놀랍구나. 알버스가 그런 말을 했다고?"
 "그렇다니-"
 "그런데 미쳤다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아는 그는 미치지 않았어!"


 다시 반복하지만 그린델왈드는 평소의 여유있는 모습과는 다르게 덤블도어와 관련된 화제에 있어서는 괴악하다 싶을 정도로 까탈스러웠다. 특히나 약간이라도 부정적인 소리가 나오면 참을 수 없어 했으며 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생전에 누군가와 가깝게 지냈다는 이야기를 가장 싫어하는 듯 싶었다.


 "선생님 -여러번의 애매한 호칭 정리 끝에 해리는 그를 이렇게 부르게 되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제가 정말로 교수님이 미쳤다고 한 게 아니라니까요? 제 친구인 론은 교수님이 좀 맛이 갔다고 항상 주장했지만, 아차."
 "그녀석 여기로 불러라. 당장."
 "제발 좀 진정하세요……"


 해리는 절친이 눈앞에 나타나면 당장 용서받지 못할 저주라도 쏴버릴 것처럼 언짢아보이는 그린델왈드를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2학년 때 비밀의 방 사건으로 인해 덤블도어가 물러난 적이 있었다고 하니 노발대발한 적도 있었고, 교수님의 불사조가 바실리스크에게 물린 자신을 치유해줬다고 한 순간 그가 던진 말은 걸작이었다.


 "왜 알버스의 불사조가 널 구해줬지? 포터 넌 그와 아무 사이도 아닌데?"
 "아무 사이까지는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제자입니다만."
 "그놈의 제자, 제자, 제자! 지겹구나! 예전에 뉴욕에서 만난 알버스의 제자 놈도 꽤나 마음에 안 들었지! 이름이 스캐맨더였던가? 이래서 애초에 교수직을 맡지 못하게 했어야했는데! 원 사방에서 다들 그의 제자라고 우기니!"


 5학년 때 D.A클럽 이야기를 하자 그는 뭔가 나름대로의 상념에 빠진 듯했으며('그래, 그 클럽명이 덤블도어의 군대였단 말이지…?'), 6학년 때 있었던 해리와의 개인 교습 이야기를 할 때 그는 안타까울 정도로 괴로워했다('그래서 그의 기억도 같이 들여다보았다는 게냐? 젊은 시절의 그도 보았어?').
 그리고 마침내 덤블도어의 죽음에 대해 해리가 입을 열었을 때 그는 보기 드물게 침통한 표정으로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해리 역시 누군가에게 은사님의 마지막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인페리우스들이 가득찬 호수와 그것들이 호위하고 있던 볼드모트의 호크룩스…… 그리고 그 물을 마시고 괴로워하며 헛소리를 하던 난생 처음 보는 덤블도어의 약한 모습, 그리고 그 높은 탑에서 떨어져내리던 마지막 최후까지.


 "아마…… 그는 그것을 마시고 열일곱 살 때의 환영을 보았던 것 같구나. 내가 그와 그의 남동생을 공격했던 그 순간으로."
 "……"
 "내가 어리석었지. 열여섯 살 때의 나는 성급했으며 부족하기 그지 없었어. 전부 다 내 잘못이다. 그가 살아있을 때 한번도 이에 대해서 사과한 적이 없구나…… 그 일이 있은 후 바로 영국을 떠나버렸으니."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고 참회하듯 읊조리는 그린델왈드는 그 순간 평범한 노인처럼 지치고 괴로워보였다.


 "그렇게 갔구나, 알버스는. 그 반지만 끼어보지 않았더라도 그는 아직까지 살아있었을 텐데. 부디 그의 마지막이 너무 고통스럽지 않았다면 좋으련만……"
 "저도 그랬기만을 바라고 있어요. 지금까지도."


 해리 역시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호크룩스가 된 마볼로의 반지를 껴본 순간 이후로 이미 각오한 죽음이라고는 하나, 스네이프의 주문을 맞고 탑에서 추락하면서 덤블도어는 과연 무슨 기분이었을까? 새삼 심장 한구석에 묵혀두었던 슬픔이 북받쳐오르는 기분이었다. 덤블도어와 가장 깊은 관계를 유지했었던, 살아남은 두 사람은 한동안 깊은 침묵 속에서 오래전에 떠난 자를 애도했다.


 "그러고보니 선생님은 그분의 무덤에 아직 찾아간 적 없으시겠네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구나."
 "괜찮으시다면 이번 주말에 함께 찾아가지 않으실래요…? 그분은 호그와트에 묻히셨어요."


 덤블도어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았던 애제자가 제안했고 덤블도어의 열일곱 여름을 공유했던 전대 마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리와 그린델왈드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각자의 버터맥주 잔을 들어올려 부드럽게 부딪혔다. 언제나와도 같은 저녁이었다.


*다소 가학, 성적인 묘사 주의.





 저, 항상 언니를 질투하고 있었어요. 저는 이토록 추악하고 더러운데…… 알고 계셨나요? 저는 오래전부터 처녀가 아니었어요. 게다가 할아버님이 마술사의 정을 원하지않으면 견딜 수 없는 몸으로 제 몸을 바꿔놓으셨죠. 그런데도 언니는 항상 토오사카의 가훈대로 우아하고 빛이 나서. 저는 이렇게 진창 속을 구르고 있는데 언니만 고고한 건, 그런 건 너무해요. 그래서 언니를 죽이지 않은 거에요. 지금의 저라면 얼마든지 언니를 죽일 수도 있지만, 그럼 너무 쉬우니까, 언니도 같이 더러워져야 공평하지 않겠어요? 저처럼.
 후,후후. 언니, 정말로 처녀였군요. 네에, 제가 마토 가에서 괴롭혀지는 동안 언니는 혼자 순결하게 살아왔던 거였어요. 그런데도 이렇게도 여기가, 잔뜩 젖어버려서, 벌써 물소리가 날만큼 질척질척해져 있어요. 여동생의 손에 괴롭혀지면서도 좋아하는 언니라니 아무리 사람 좋은 선배라도 이런 언니의 엉망진창인 모습을 본다면 틀림없이 경멸했을 거라구요? 저에게 감사히 여기세요. 선배는 절대 언니를 구하지 못해요. 구해서도 안되죠. 저도 구해주지 않았으면서 언니를 구하러 온다니 용납할 수 없어요. 싫어, 하지마, 사쿠라─라뇨. 처음이라면서 제 손에 있는대로 느껴버려서 좋아하고 있으면서. 평소라면 생각치도 못했을 그런 들뜬 눈을 하고, 저를 죽이겠다고 할 때는 얼음같은 얼굴을 했던 주제에 그런 열기오른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군요. 저, 언니. 제가 만약에 남성 분이었다면 말이죠─── 언니에게 지금 당장이라도 제 아이를 배게 하고싶을 정도인걸요. 아쉬워요. 제 아이를 가진 언니가 정말로 보고싶은데, 안되는 걸까나.
 음, 이건 좀 더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아요. 언니와 저의 아이라. 언니도 그렇게 생각하죠? 네? 잘 안들리는걸요…? 언니는 제게서 선배를 빼앗아갔잖아요. 제겐 선배밖에 없었는데. 제가 마토 가에서 독이 타진 음식과 물에 괴로워하며 벌레들에게 시달리고 있을 때 언니는 우아하게 토오사카의 당주로 있었을 거잖아요. 언니는 몰라요. 원래 가지고 태어났던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이 점점 변해갈 때의 그 절망감과 공포를. 더이상 내가 토오사카의 딸이 아니라는 것을 몸이 직접 보여주는 듯한 절망적인 기분을. 이건 너무 불공평해요. 언니는 제게서 뭐든 빼앗아갔어요. 토오사카의 성도, 이젠 선배마저도…… 그러니까 저도 뭔가 한 가지 정도는 가져야할 거 같아요. 네에, 예를 들면 언니라던가. 언니라던가. 토오사카 린 이라던가. 저는 언니를 원해요. 제게서 선배를 빼앗아간 언니라도 제 것이 되어줘야 좀 공평해지지 않겠어요? 후후. 그러니까 좀 더 귀여운 목소리로 울어보세요- 그럼 혹시 더 다정하게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네에? 방금 뭐라고 한 거죠, 언니? 언니가 자꾸 제 마음을 아프게 하면 저도 언니를 아프게 할 수밖에 없는데,에. 어쩔까나. 혹시 저보다 마토의 충장에 있는 아이들을 더 만나고 싶다면…… 앗, 역시 언니도 그건 싫은거죠? 역시 제가 더 좋은 거죠? 하나뿐인 언니의 소원인데 당연히 들어드려야죠. 전 착한 여동생인걸요. 사랑하고 경애하는 나의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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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러트가 마왕길 걷지 않고 알버스의 트로피허즈번드되어 행쇼했다면 본편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보고싶은 부분만 부분적으로 연성하는 글



*1권에서 해그리드를 대신해서 해리 데리러 오는 겔

 해리의 열한번째 생일 정각이 되기가 무섭게 쾅, 다시 거세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바람에 두들리가 잠에서 깨어나고 -누가 대포라도 가지고있어? 졸음에 겨워 그가 멍청하게 말했다- 손에 라이플을 든 버논이 침실에서 뛰어나왔다. 거기 누구야? 경고하는데 이쪽은 무장했다고! 그가 문밖을 향해 위협하듯 소리쳤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응답하듯 거대한 파열음이 진동했다.
 문은 거의 경첩 째로 뜯겨나가다시피한채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그리고 쓰러진 문 너머 현관에 서 있는 것은 놀랍게도, 이런 파괴적인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반백의 노신사였다. 아마 젊었을 때는 꽤나 화려한 미남이었을 것 같은 인상이었다. 단정하게 빗어넘긴 희끗희끗한 머리칼, 그리고 세월의 흐름으로 인해 주름이 패인 뚜렷한 이목구비에는 음영이 진하게 드리워져있었다. 그에게서는 알 수 없는 강한 이질감이 풍겼다. 무릎 너머까지 길게 늘어뜨린 검은 망토라는 낯선 의복 -그의 왼쪽 어깨에는 무려 자그마한 부엉이 한마리도 앉아있었다- 때문일지, 아니면 멀리서도 해리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날카로운 눈빛 때문일지는 알 수 없었다.


 "그의 부탁만 아니었어도 내가 여기까지 직접 올 일은 없었을 것 같지만…… 안 그런가, 해리 포터."
 "저, 저를 아세요?"


 낯선 침입자가 자연스럽게 입에 올린 자신의 이름에 해리의 심박수가 순간 치솟았다. 어떻게 이 사람이 내 이름을 알고 있는거지.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듯한 떨리는 목소리에 노신사가 피식 웃었다.


 "당연히 알지. 너를 모를리가 있나?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아주 잘 알고 있단다, 포터. 마지막으로 너를 봤을 때는- 넌 고작 포대기에 싸인 갓난아기였어."
 "……저를?"
 "그동안 많이 컸구나, 살아남은 소년."


 그순간 냉막하던 푸른 눈동자에 처음으로 미소 비슷한 것이 스쳐지나간 것 같다고 해리는 생각했다.
 현관에 서 있던 그는 천천히 걸음을 떼어 버논이 뭐라 막을 새도 없이 쓰러진 문을 타넘고 안으로 들어왔다. 아까도 느꼈지만 그는 정말 놀라울정도로 주변 사물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느닷없이 정오의 킹스 크로스 역에 야생 재규어 한 마리가 등장한다면 저런 느낌일까. 영 내키지 않는다는 듯 비린내 풍기는 벽들과 낡아빠진 가구들을 둘러보던 노신사는 경첩에서 통째로 뜯겨나가버린 문을 향해 우아하게 두 팔을 벌렸다.


 "레파로."


 그 순간 마법이 일어났다. 마법, 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기적이었다. 산산조각나다시피 부서져있던 문이 되감기하듯 스스로 제 자리를 찾고, 언제 뜯겨져나갔냐는 듯 멀쩡한 상태로 되돌아갔다. 불과 몇 초만에 해리의 눈 앞에서 바닥에 쓰러져있던 문짝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원상태로 돌아가있었다. 애초에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그 기적을 불러일으킨 듯한 노신사는 여전히 해리의 눈앞에 존재했으며 조간신문이라도 읽는 듯 태연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
 이제까지 알아왔던 세계가, 낯선 균열을 내보인 채 전복했다. 그 파장을 불러일으킨 존재를 향해 해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누구세요…? 저건 또 어떻게…?"


 노신사가 미소지었다.


 "겔레르트 그린델발트. 여기 식으로는 겔러트 그린델왈드인가. 네 마음대로 부르거라. 호그와트의 교수직을 맡고 있지."
 "호그-?"
 "나는 너를 데리러 왔단다. 포터."
 "저를요……?"


 단정한 외모의 노신사, 그린델왈드에게서는 좌중을 압도하는 듯한 강렬한 존재감이 풍겼다. 딱히 체격이 크다거나 우락부락 위협적인 인상인 것도 아닌데 마치 날선 발톱을 숨기고있는 맹수와도 같은 위압감이었다. 그가 이 집 안에 들어선 후, 평소답지 않게 뱀 앞의 생쥐처럼 찍 소리도 못하고 얼어붙어있는 더즐리 가족 세 사람이 그 증거와도 같았다. 아마 해리가 그를 쳐다보며 입을 열어 질문이나마 던질 수 있는 것은 노신사가 묵시적으로나마 허락했기 때문이 아닐까. 해리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매가 살짝 부드러워졌다.


 "그래. 해리 포터, 살아남은 소년…… 너는 마법사란다."


 염분기를 고스란히 머금은 공기중에 침묵이 흘렀다. 옆에서 버논과 페투니아가 헉, 하고 낮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지만 해리는 입을 반쯤 벌린 채로 얼어붙어 있었다. 방금 저분이, 내가, 뭐라고?


 "방금 뭐라고 하셨……?"
 "마법사라고 했다, 포터. 보아하니 네 이모와 이모부는 그동안 네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렇다고해도 너는 나의 세계, 그리고 네 부모가 속해있던 세계의 일원이니 말이다."
 "네? 저희 부모님을 아세요?"
 "네 부모는 유명하단다. 포터 너 역시도 매우 유명하고. 우리들의 세계에선 말이지. …그리고 이건 네 편지다. 이제서야 전해주게되는구나. 뜯어보거라."


 유려한 동작으로 망토 안에서 작은 편지봉투를 꺼낸 그린델왈드가 해리의 손에 약간 구겨진 봉투를 내려놓았다. 해리는 밝은 초록색 잉크로 포터 씨에게, 라고 쓰여있는 봉투를 뜯어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제일 상단에 써있는 글귀는 그것이었다. 마법사와 마녀들을 위한 호그와트 마법학교. 편지의 내용은 간결했다. 귀하가 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을 축하드리며, 필요한 교과서와 물품들은 따로 동봉된 리스트를 참조하라는 내용이었다. 해리는 마지막에 서명된 이름을 천천히 입안으로 굴렸다. 교감 미네르바 맥고나걸.
 머리 위로 불꽃놀이가 어지럽게 터지는듯한 혼란스러움을 느끼며 해리는 무엇부터 질문해야할지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저어, 제 부엉이를 기다린다는 말은 뭐죠?"
 "아, 잊고 있었군."


 다시 그가 여유로운 동작으로 손뼉을 두어번 치자 바로 앞 허공에 양피지와 깃펜이 나타났다. 그것에 놀랄 새도 없이 깃펜은 둥둥 떠있는 채로 혼자 글씨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매우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글씨체였다.
 「알버스에게, 방금 포터에게 편지를 전해 주었어. 부탁받은 대로 그 아이를 데리고 물건들을 사러갈 생각이야. 오늘따라 날씨가 끔찍한 것 같군. 네 눈동자가 벌써 그리워질 지경이야. 애정을 담아, 겔러트.」
 마지막 서명이 끝나자 양피지가 저절로 돌돌 말렸고, 신호라도 받은 것처럼 이제껏 노신사의 어깨 위에 얌전히 앉아있던 작은 부엉이가 파드득 날개를 쳤다. 그린델왈드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양피지를 부엉이의 다리에 매달았고 몇발짝 더 걸어나가 태풍 치는 밤바다로 부엉이를 날려보냈다. 그는 그 기이해보이는 일련의 행위를 마치 벨이 울리는 수화기를 집어드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해냈다. 묘하게 상쾌해진 듯한 표정을 지으며 노신사가 다시 돌아섰다.


 "부엉이를 기다린다는 것은 이런 의미지. 우리들은 머글과 다르게 부엉이로 소식을 전한단다. 그럼 가볼까, 포터?"
 "네…? 지금 이 시간에…… 어디로요?"
 "당연히 다이애건 앨리지. 설마 이 내가 이 누추한 곳에서 밤을 보내야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살아남은 소년?"


 다이애건 앨리? 해리로서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었다. 그건 또 어디란 말인가. 당장 호그와트- 아마 학교인 것 같지만- 가 뭐하는 곳인지도, 그리고 자신이 마법사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도 채 파악하지 못했는데 설명도 없이 이 밤중에 또 다른 곳으로 데려가겠다니? 아마 고아한 분위기의 노신사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성격이 급한 모양이었다. 하긴 애초에 들어오는 것조차 경첩 째로 문을 부숴버리고 들어오지 않았던가.
 그린델왈드가 해리의 어깨에 손을 얹은 순간, 뒤에서 그의 위압감에 눌려 침묵하고 있던 버논이 최면에서 깨어난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 함부로 침입해서 왜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애는 어디도 가지 않을 거요! 허 참, 마법사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 그 녀석에게 조금 별난 구석이 있긴 하지, 그렇게 두들겨패줬는데도 그 모양인 걸 보면!"
 "버논 더즐리. 언제 내가 당신에게 발언을 허락했지?"
 "……!"


 느닷없는 방해에 기분이 언짢아진 듯한 노신사가 독 오른 독사처럼 매서운 눈초리로 더즐리 가족을 쏘아보자 버논은 다시 얼어붙은 것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그린델왈드는 다시 해리의 어깨에 올린 손에 힘을 주었다.


 "하, 하지만 어떻게 저 폭풍우를 뚫고가죠…? 배도 없는걸요. 그린델왈드… 씨?"


 조심스레 입을 연 해리를 향해 노신사가 입꼬리를 느슨하게 끌어올렸다.


 "아까 말하지 않았느냐. 너는 마법사라고. 널 데리러 온 나 역시 마법사란다. 그리고… 나를 부를 때는 교수님이라고 부르거라. 네가 가게 될 학교에서도 만날테니."
 "네, 네. 교수님."
 "좋아. 그럼 갈까. 내게 가까이 붙는 편이 좋을게다, 포터. 순간이동은 처음 겪을 때는 조금 불쾌한 기분이 드니까-"


 순간이동? 뭐라 반문할 새도 없이 그린델왈드의 손이 해리의 어깨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가 한 발짝 걸음을 내딛는 순간 다시 세상이 뒤집혔다. 이번에는 물리적인 의미였다. 마치 좁은 병 안을 요동치면서 억지로 통과하는 느낌이었다. 노신사의 성마른 손이 그를 단단하게 붙들고 있지 않았다면 구역질이라도 했을지도 모른다. 얼굴 위로 스쳐가는 찬 공기에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마른기침을 내뱉으며 해리는 그린델왈드를 올려다보았다.


 "뭐, 뭐였죠…?!"
 "순간이동. 너도 6학년 즈음이 되면 학교에서 배우게 될 게다. 자, 그럼 다이애건 앨리에 온 걸 환영한다."


 그때서야 해리는 주위 풍경이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아까까지 그가 있었던 바닷내음 풍기는 작은 오두막이 아니었다. 더즐리 가족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서와 동일한 것은 오직 그린델왈드가 곁에 있다는 것 뿐이었다. 비록 밤의 어둠에 묻혀있기는 했으나 자갈길 양옆으로 펼쳐져있는 수많은 상점들은 겉보기에도 이제까지 해리가 봐왔던 평범한 상점들이 아니었다. 냄비 가게, 부엉이 백화점, 빗자루 상점… 이곳이 정말 '마법사'들의 거리일까?


 "조금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숙소 정도야 찾을 수 있겠지. 따라오거라."


 긴 망토자락을 휘날리며 성큼성큼 멀어져가는 노신사의 뒤를 쫓아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며 해리는 생각했다. 아직 자신이 직면한 상황- 마법사, 호그와트, 부엉이, 그린델왈드, 부모님, 순간이동- 에 대해 절반의 반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지만 이번 11번째 생일은 이제까지의 생일 중 단연 최고일 것 같다고.
14년에 쓰려고 했던 글 도저히 안 쓸 거 같아서 그냥 백업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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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드문의 수장이 바뀌었다.
 그 소식을 사혁이 느지막히 전해들은 것은 어느 저녁이었다. 국내에서 흡혈귀들 주도로 운영되는 기업체 중 플렉스 메디컬 다음가는 규모로 손꼽히는 골드문ㅡ 그 전대 회장이었던 석동출 사후, 후계별로 파벌이 나뉘어 꽤나 어지럽다는 내부사정을 여러 소식통을 통해 알음알음 전해 듣고있었는데도 새 회장의 이름 석글자는 그에게도 꽤나 낯선 것이었다.

 이자성. 

 명목상 서열 1위였던 장수기와 서열 2위 정청, 서열 3위 이중구 중 한 명이 다음 회장 자리를 차지하리라 예상했건만 지금 언급된 이름석자는 다소 생경했다. 이자성, 얼마전까지만 해도 북대문파 오야 정청의 충성스러운 오른팔이자 골드문의 영업이사였던 '인간.' 그동안 전혀 헌터들 새에서 언급이 없었던 것을 보면 아마 진마도 흡혈귀도 아닌 평범한 인간이었으리라. 애초에 일개 인간이 어느정도 지위를 가진 채 그들 무리에 끼어있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기는 했다. 물론 정청 생전 이자성과의 관계가 유난히 돈독했다니, 비밀스레 제 혈족으로 만들어 끼고돌던 에스콰이어였을지도 모른다는 추측 역시 배제할 수는 없기는 했으나…… 어쨌든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최근 제일파의 장수기가 수술당하고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되었다고는 하나, 쟁쟁한 진마 셋을 제치고 웬 듣도보도 못한 뉴페이스가 회장직에 앉을 줄은. 사혁은 익숙하게 제 품안에 있던 담배갑을 꺼내 자연스럽게 불을 붙였다. 길쭉하고 마디진 손가락 새에 끼워진 담배꽁초가 독한 연기를 내며 서서히 타들어갔다. 연기를 후욱 내쉬며 그는 히죽 웃었다. 이거 엄청 재밌네.


 "흡혈귀도 아닌 인간이 저 골드문의 회장이 될 수 있었을리는 없고. 그럼 최소 진마 셋의 피를 마셨단 얘긴가……"


 엄청난 거물이잖아. 그럼 추정 VT가 대체 몇이야, 그럼. 저절로 비죽이 끌려올라가는 입꼬리를 참을 수 없어 실실 웃음이 나왔다. 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갓 진마가 된 신생 진마처럼 사냥하기 쉬운 먹잇감이 어디 있을까. 물론 회장님이시라니 자식들에게 꽁꽁 보호받고 계시겠지만 원래 적절한 난이도는 사냥꾼의 승부근성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그리고 알케미스트, 사혁은 그런 도전 정도는 기꺼이 즐기며 받아들여줄 수 있는 남자였다. 아까 보고받으며 확인했던 이자성의 표정없는 얼굴이 눈앞에 잔상처럼 아른거리는 바람에 문득 하복부에 저릿한 감각이 몰려왔다. 어린 진마의 흰 목덜미를 새모가지처럼 비틀어버리는 상상을 하며 그는 마음껏 고양감을 만끽했다.
 사진으로 본 남자는 꽤나 건조하고 냉막한 표정을 짓고있었다. 사신같은 시커먼 정장차림과 대비되던 창백한 낯빛은 이미 오래전에 미소짓는 법 따위 잊어버렸다는 것처럼 메말라보였다. 아, 원래 저런 도도한 인상이 더 남자의 흥미를 땡기지. 지금 그의 공장에서 사육되고있는 흡혈귀들처럼 그 회장님을 비참하게 바닥에서 굴린다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자성. 이자성. 이자성. 사혁은 천천히 입안으로 목표의 이름을 굴리며 담배꽁초를 재떨이 위에 비벼 껐다. 여전히 심장은 요동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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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왜 나를 구해준 겁니까."

 뒤돌아선 남자의 뒷모습은 온통 칠흑이었다. 부러질까 위태로울 정도로 꼿꼿하게 세워진 등은 던져진 질문에도 미동없이 고요했다. 마치 장례식장의 상주마냥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까만 정장, 새까만 머리칼, 그리고 고개를 돌려 저를 응시하는 표정 없는 눈동자마저도 온통 칠흑인 가운데 오직 그 흰 낯만이 유령처럼 창백했다. 마치 물에 빠져죽은 익사체처럼 핏기없는 낯빛. 호리호리한 허리춤 근처에 늘어뜨려진 손목에 매인 조잡한 짝퉁 명품시계로, 반들반들 윤이 나는 검은 구두코로 제임스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최후로 시선이 안착한 곳은 책상에 올려져있던 명패였다. 금박으로 새겨진 황금성의 새 주인의 이름이 시커먼 명패위에서 어슴푸레 빛을 반사했다. 골드문 회장 이자성. 제임스는 나지막히 입안으로 제 앞에 서 있는 상대의 이름을 굴렸다. 단순히 마주하고 있을 뿐인데도 마치 끝을 모르고 아가리를 쩍 벌린 심연이나 늪 앞에 맨몸으로 서 있는 것 같은 감각이 전신을 엄습한다. 잠깐 방심하면 바로 그 바닥없는 무저갱으로 빨려들어갈 것 같은 착각. 고작 백년을 사는 인간이 마치 천년의 권태 속에서 살아온 듯한 허무한 눈알을 하는 것이 가능할까, 입이 저절로 바싹 메말랐다. 전대 회장 석동출 사후 서열 3위까지 고스란히 다 잡아먹고 철왕좌에 오른 불길한 인간이라는 흉흉한 소문을 들었을 때부터 깨달았어야했는데. 감정을 담지 않은 채 저를 향한 이자성의 무심한 눈빛이 오늘따라 유달리 안면을 저미는 칼날처럼 서늘했다.

 "왜 당신을 구해줬는지 아직도 궁금하오?"
 "당연한 거 아닙니까."

 -허울이나마 기업의 수장인 당신과 달리 이쪽은 엄연한 뒷세계에 속한 인간이니까.
 이어질 뒷말이 혀끝에서 맴돌다 스르르 꼬리를 감췄다. 골드문이 알음알음 조직폭력이니 사채니하는 음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는 기업이라고는 하나 엄연히 법인 명패를 달고 양지에서 운영하는 기업이었다. 그에 비해 자신은 장기말들 뒤에서 움직이며 은행을 털고, 필요하다면 살인마저 불사하지않는 그런 뒷세계에 속해있는 인간.
 처음에는 꼼짝없이 경찰 측에게 붙잡힐 거라고 생각했었다. 적어도 그 어두침침한 터널에서 저를 붙잡았던 앳된 계집애를 내팽겨치고 활로를 찾아 허위허위 발걸음을 뗄 때까지만해도, 제 말로를 내심 각오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치 않은 구원의 손길은 난데없이 찾아왔다.

 "타시오."
 "……?!"
 "어서! 이대로 죽고싶은 거요?"

 처음에는 이것마저 자신을 잡기 위해 교묘하게 배치된 함정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다급한 상황에선 눈앞에 디밀어진 동아줄이 멀쩡한 것이든 썩은 동앗줄이든 우선 붙잡고 보는 것이 인간의 본성 아니겠는가. 제게 뻗은 남자의 손을 부여쥐고 그 안에 몸을 싣는 순간 차는 빠르게 출발했다. 마치 관을 운반하는 장의사의 것처럼 불길하도록 새까만 밴이었다. 그리고 구원의 손길처럼 느껴졌던 그 손의 주인 역시 갈가마귀처럼 새까맣고, 또 생령처럼 창백한 남자였다. 그가 타고 있는 밴을 인간의 형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처럼.

 "…그래서, 당신은 누굽니까? 여긴 어떻게 알고 나타난 거죠."
 "궁금합니까?"
 "그럼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만년필 하나로 사람도 서슴없이 도륙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자라 들었는데 감사해야 하는 사람은 알아보는 모양이오."
 "누굽니까, 당신."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을 태워 사라질 때부터 이미 자신이 누군지 알고있는 인간이란 걸 파악했어야 했다. 살려놓고 이제와서 뒤통수를 후려치겠느냐만은, 그래도 자신이 모르는 인간이 자신을 알고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언짢아졌다. 제임스는 도시를 배회하는 그림자였다. 사람을 죽이고, 때로 은행을 털더라도 그의 존재를 인식하는 인간은 없어야만 했다. 그런데도 이 자는 자신을 잘 알고있다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죽여야 하나. 죽일까. 갈등이 찰나 뇌리를 섬광처럼 관통했다. 그런 제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했는지 시커먼 정장 차림의 남자가 희미하게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왜, 날 죽여야겠다는 생각이라도 들었소?"
 "……"
 "나는 골드문 회장 이자성이오. 당신이 이 자리에서 나를 찌르고 뛰어내릴 수는 있겠지만, 그게 별로 바람직한 선택지는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떻소?"

 이자성. 골드문.
 낯설게 느껴지는 명사들은 아니었다. 깡패들이 세우고 운영하는 기업이라고 은근히 홀대당하고 있다는 바로 그 기업. 그리고 얼마 전 사망한 전 회장의 뒤를 이어 그 자리에 올랐다는 이자성. 피튀기는 계승싸움 후 즉위한 신왕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현 회장의 뒤로는 항상 호사가들의 입방정이 따라다녔다. 그 중에는 한없이 사실에 가까운 것도 있을 것이고 날조에 가까운 헛소리도 있겠지. 하지만 이런 인상의 인간일줄은 몰랐다. 이자성은 묘하게 삶과 죽음의 경계에 양발을 걸치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린 것 같기도 했고 살아있는 시체 같기도 했다. 특히 박제된 동물의 것을 연상시키는 그 유리알같은 냉막한 눈동자. 그에게서는 무미건조한 동시에 위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음지에서 구를만큼 구르며 살아온 제임스이기에 더 날카롭게 느낄 수 있는 감각이었다. 이자는, 그와 동류였다. 혹은 더 악랄할지도 모르는.

 "좋습니다. 회장님을 죽이는 건 일단 접어두기로 하지요."
 "언제라도 날 다시 죽일 수 있다는 말투로 들리는데…… 좋소. 마음에 드오. 어차피 나도 당신을 내 조커로 사용하기 위해 살려준 것 뿐이니까."

 언제든지 자신의 경동맥을 따버릴 수 있는 위험한 맹수를 앞에 앉혀둔 채로도 이자성은 더할 나위 없이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내 그림자가 되어주시오. 보수는 아쉬울 것 없이 챙겨주겠다고 약속하지."

 위험한 분위기의 인간이 위험한 제안을 건넸다. 독이 든 잔과 같은 약속을 그는 승낙했다.

 "좋습니다. 이회장님의 그림자가 되어드리죠. 다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뭡니까?"
 "나를 왜 살린 겁니까? 당신이 명색이 골드문의 회장이라면 나보다 유능한 말들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텐데요."

 이자성은 침묵했다. 어찌보면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날 제임스의 물음에 끝내 답을 주지않았으며, 그 침묵은 제임스가 본격적으로 이자성의 숨겨진 히트맨으로 활동하게 된 후에도 지속되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내가 당신을 배신할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반쯤 치기로 내뱉은 말이었다. 그는 왜 자신을 살렸단 말인가. 그리고 왜 지금까지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 것인지. 그 순간 가면처럼 무표정하던 이자성의 얼굴 위로 실금같은 균열이 미세하게 떠올랐다. 죽어가는 여인의 얼굴에 떠오른 최후의 이지러짐같은 웃음을 머금은 채, 이자성은 대답했다.

 "괜찮소, 이미 이쪽도 배신이라면 이골이 난 몸이니까."

 그러니 제임스 당신이 날 배신한다해도 상관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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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검은 물속에 잠겼는지, 지층으로 걸어 들어갔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꿈으로도 알 수가 없습니다. (허연_ 목련이 죽는 밤)

#당신을위한시 https://kr.shindanmaker.com/570317 기반 연성.

사쿠라가 아처를 소환했다는 설정, 사쿠라의 전반적인 감정선이 시로가 아닌 아처를 향해있음 주의.

 


 


 

  친애하는 당신에게. 


 당신께서 제 곁을 떠난지도 벌써 반년이 흘렀습니다. 당신과 만났던 계절인 추운 겨울이 가고, 벚꽃피는 봄이 오고, 이제 쓰르라미가 우는 여름이 되었습니다. 이미 우리가 함께할 시간은 2주 남짓으로 정해져있었는데도 당신과 함께했던 시간은 유독 짧게 느껴졌고 또 그만큼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아마 평생토록… 제가 할머니가 되어버린대도 잊지 못할 추억이겠지요. 아직도 가끔씩 생각합니다. 처음 소환되었을 때 충장에 맨몸으로 서 있는 저를 보고 당황하던 당신의 얼굴을, 제 이름을 듣자 '사, 사쿠라……?'하고 의혹에 찬 듯한 음성을 내뱉던 당신의 눈동자. 자신의 연고지도 진명도 기억하지 못하는 무명의 영령을 소환하였다고 할아버님은 매우 화를 내셨었지요. 제게 형편없는 삼류 영령을 소환한 것에 대한 '벌'을 주시려는 할아버님을 막아주신 것도 당신이셨습니다. 저와 할아버님 사이를 가로막으며 제게 보여주셨던 그 뒷모습.


 '내 마스터를 내 눈앞에서 학대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어디 령주로 명령해보라고, 늙은이.'


 네, 아마- 그런 말씀이셨을까요. 아마 저는 그때부터 당신에게 설레기 시작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당신의 든든한 등 뒤에서, 양녀로서 이 집에 온 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받으면서요. 

 이미 마스터로 선택된 선배와 싸우는 것이 부담스러워 오라버니께 령주를 양도할 생각이었지만 제가 계속 당신의 마스터로 남아있기로 한 것도 당신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당신이 아닌 할아버님이 원하셨던 으리으리한 영령이 소환되었다면 글쎄요, 저는 예정대로 마스터의 지위를 포기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당신의 마스터였지만 저를 지켜준 것은 다름아닌 당신이었습니다.

 제가 홀로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 먼저 다가와준 것도 당신이셨습니다. '흐음. 제법 괜찮게 만들기는 한다만, 된장국이 이렇게 진해서야 안되지.' 그렇게 말씀하셨던가요? 저, 이래봬도 당신께서 하신 말씀과 그때의 표정은 전부 기억하고 있답니다. 아마도 대견하다는 듯, 하지만 특유의 그 비딱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계셨었죠. 언니처럼 우등생은 아니지만 제 머리가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라구요. 홀로 이 저택에 남아 매일 당신의 얼굴과 당신의 눈매와 당신의 목소리와 당신의 뒷모습을 빠짐없이 되새기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아, 이런 말을 해도 될까요. 솔직히 조금은 놀랐었습니다. 서번트라고 한다면 천지간을 호령했다는 역사 속의 영웅들. 그런 영령이 요리를 저보다 잘 할 줄은 정말 몰랐었으니까요. 요리라는 게 흔히 생각하는 영웅의 필수덕목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당신께서 손수 요리하신 아침식사에서는 왠지 모르게 익숙한 맛이 나서- 누군가를 떠올려버리고 말았더랬죠. 그래서 그때 당신 앞을 가로막았던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서, 선배를 해치지 마세요……!'

 '왜냐, 마스터. 이것은 전쟁이고 저 애송이 역시 이 전장에 기꺼이 발을 디딘 마스터다. 제거해야할 적이란 거지.'

 '하지만……!'


 선배에게 흉흉한 기세로 달려들려던 당신은 제가 끼어들자 그렇게 울분을 터뜨리듯이 말씀하셨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제일 소중히 여기는 두 사람인걸요. 이상하게도 제 눈에는 서로 닮아보이는 그 두사람이 서로 싸우거나 다치는 것만은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비록 선배에게 제가 마술사라는 사실이 드러나버리고 말았지만.


 '내 마스터는 정말이지 이해하기가 힘든 인간이군. 그런 얼빠진 놈이 대체 왜 좋다는 건가. 마스터는 어리니까 하루빨리 마음을 고쳐먹는 게 좋을텐데.'


 그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은 소환 이후 가장 당신이 강렬하게 내보인 감정이었는지라 심각한 상황에서도 슬핏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날 이후로도 선배 그리고 세이버 씨와 종종 마주쳤지만 당신은 으르렁대기만 했을 뿐 선배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하지는 않으셨지요. 내심 제 말을 들어주신 게 기뻐서 당신이 함께하는 저녁식사 때마다 솜씨를 발휘하고는 했습니다. 성배전쟁, 이름부터 '전쟁'이라는 흉흉한 단어가 들어가있고 저는 그 전쟁에 참여한 마스터인데도- 솔직히,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나 행복했었습니다. 당신과 같이 있으면 할아버님에게 더이상 '훈육'을 받지 않는다거나 오라버니가 손을 올리지 않으신다는 -당신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제 뺨을 때리시려다가 당신이 불같이 화를 내신 이후 더이상 제게 다가오려고도 하지 않으셨었죠-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저 당신이 좋았습니다. 이상하게도 오래전부터 알아온 것처럼 느껴지는 나의 서번트. 나의 아처.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와 비뚜름한 미소가 너무나 잘 어울리던 당신. 이미 우리에겐 정해진 기한이 있다는 걸 똑똑히 알고 있으면서도 최대한 오랫동안 당신과 함께 있고 싶었습니다.

 아마 그래서 저는 어리석은 망집에 빠져들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원래 뿌리는 다르다지만 저 역시 엄연한 마토의 일원. 마키리의 오래된 망집은 그 딸인 제 혈관에도 흐르고 있었습니다. 당신과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욕망. 당신을 잃고 싶지 않다는 집착. 차마 미움받을까봐 령주로 날 좋아해달라는 명령을 내린다거나 하는 행위는 엄두도 못 냈으면서. 사실 저, 보았었어요. 당신이 언니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풍경을. 실례되는 일인 건 알지만 말소리 역시 엿듣고 말았었지요. 


 '…그녀가 괴물이 된다면 죽일 수 밖에 없지. 너무 염려하지 마라, 린. 내 마스터의 목숨은 그녀의 서번트인 내 손으로 기꺼이 거둘 테니까.'


 그 순간 현기증이 날 것만 같았습니다. 피를 나눈 친언니가 저를 죽이는데 동의했다는 것보다 당신의 한 마디가 더 묵직하게만 느껴졌습니다. 당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저를 보호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할아버님이나 오라버니 앞에서 저를 감쌌던 것처럼. 왜 저를 둘러싼 이 세계와 제 운명은 이토록 가혹하게 느껴졌을까요. 저는 한번도 괴물이 되고 싶었던 적 없었습니다. 그저 제 인생에 처음으로 나타난 등불같았던 당신에게 사랑받고 싶을 뿐이었는데. 이 얼마나 어긋나며 뒤틀린 연정이었는지.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제가 먼저 당신에게 부탁할 걸 그랬어요. 제가 사람을 해치는 괴물이 되면 꼭 죽여달라고.

 그러던 중 집에 귀가했을 때 오라버니가 난폭하게 저를 몰아붙이며 윽박질렀었지요. 제가 오라비와 몇번씩이고 붙어먹는 난잡한 짓을 했다는 걸 당신께 폭로해버리겠다고 하셨었습니다. 언제는 자기 친구에게 호감이 있는 것처럼 바지런히 그 집에 그나들더니 이제 꼭두각시 나부랭이한테도 대줄 생각이냐고, 가벼운 계집애라며 저를 비난하셨습니다. 그때 제가 왜 그랬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오라버니의 말대로 십수번도 더 경험한 일이었고 언제나 그래왔듯이 그냥 잠깐 참아주면 되는 일이었을텐데, 저는 저를 욕보이려는 오라버니를--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라버니가 당신께 모든 사실을 알리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아무리 당신이 저를 죽이고자 마음먹었다고 하더래도, 또 온세상이 저를 손가락질하고 비난한대도 당신께만큼은 마지막까지 온전한 저 자신으로 보이고 싶었었으니까요. 그 후의 일은 마치 제가 아닌 타인이 대신 겪었던 일처럼 기억이 몽롱합니다. 방향감을 잃은 나비처럼 가벼운 맨발로 길을 배회하며, 부유하는 악몽처럼, 그렇게. 당신을 잃고 싶지 않다는 그 망집만으로 저는 밤길을 정처없이 떠돌아 다닐 뿐이었습니다. 잃고 싶지 않아. 곁에 있어줬으면 해. 나를 돌아봐줬으면…… 나를 떠나지 말아줬으면 해. 조금만, 조금만 더-

 어느덧 저는 어두운 지하 대공동에 홀로 서 있었습니다. 제게서 흘러나온 불길한 마력이 대기중에 꿈틀거리고 저는 난생 처음 실감하는 충만함과 고양감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지난 수년간 저를 괴롭게 했던 할아버님의 본체를 두 손가락으로 일그러뜨려 죽이고, 당신을 맞이할 준비를 했습니다. 제가 사모하는 당신을. 공기의 흐름에서 당신의 존재감이 묻어났을 때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솔직히 기뻤습니다. 대체 무엇이 기뻤던 걸까요. 내 목숨을 거두러 온 나만의 사신을 기꺼이 맞이하게 된 것? 어쨌든 내 마지막은 당신의 손으로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짧은 기간동안이었지만 그 동안이나마 당신은 제 전부였습니다. 그런 당신이 저를 위해 여기까지 와주신 것에 대한 기쁨이었을까요.

 그때 저는 이미 선배의 서번트였던 세이버 씨를 제 수족처럼 부리고 있었습니다. 세이버 씨로 당신과 함께 온 선배의 발을 묶어두고, 저는 저를 막으러 온 언니와 당신을 동시에 상대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솔직히 당신과 언니는 너무나 협업이 잘 맞아서 그 와중에서도 질투가 날 정도였어요. 당신은 언니가 아닌 제 서번트잖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 손발이 잘 맞은 거였냐구요. 곧 언니의 보석검에 의해서 방어막이 뚫리고, 그 순간 당신이 제게로 뛰어들었습니다. 사실 그때 저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답니다. 그래도 당신의 손에 죽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쇄도하듯 다가오는 당신을 망막에 또렷하게 새기며 저는 눈을 감았습니다. 제 심장을 꿰뚫을 날붙이의 감각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느껴진 것은 고통이 아닌 부드러운 촉감이었습니다.


 '……아?'

 '사쿠라.'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저를 끌어안은 당신의 모습이었습니다. 분명 저를 죽이러 왔을 당신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제가 멍하게 안겨있는 사이 당신이 더욱 제 몸을 품 안으로 강하게 끌어안았습니다.


 '사쿠라, 미안하다. 진작 구해주지 못해서. 널 그런 지옥에 내버려둬서 정말로 미안해.'

 '아처 씨…?'

 '바로 곁에 있었으면서도…… 구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저를 끌어안은 당신이 사과하는 것이 최근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최근이 아니라면 대체 언제? 제가 얼이 빠진 상태로 당신에게 안겨있는 동안 당신은 소환 후 처음 듣는 절절한 목소리로 제게 말했습니다.


 '네가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걸 진작 알았다면……'


 분명 당신에게 끌어안긴 것은 저였지만 이상하게도 제가 당신을 안아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낯설고도 낯익은 느낌이었습니다. 당신을 소환하기 이전부터 훨씬 오래전부터 알아온 기묘한 느낌. 제가 뭐라 입을 떼려는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저의 그림자가 당신의 가슴팍을 꿰뚫고 있다는 것을. 아까 당신이 제게 달려드는 순간 제 그림자가 주인 격인 절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당신을 공격한 모양이었습니다. 그렇다고해도 그림자는 저의 일부. 결국은 제가, 당신을 공격한 셈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이후 그렇게 펑펑 울어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당신의 몸을 끌어안고 저는 아이처럼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아처 씨, 죽지 말아요, 이런 말도 안되는 투정을 부리는 제게 당신은 소멸 직전 환하게 미소를 지어보였습니다.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그런 미소를. 그때 본능적으로 깨달았습니다. 당신 스스로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셨던 당신의 진명을, 제가 소환한 서번트가 누구인지를. 


 '괜찮아, 사쿠라. 이제 넌 자유야. 내 손으로 널 자유롭게 만들어주지 못한 게 걸리지만……'

 '아처 씨.'

 '네가 행복해졌으면 해.'

 'ㅅ--'


 그렇게 당신은 떠났습니다. 아니, 영령의 좌라는 곳으로 돌아갔다는 표현이 더 옳겠네요. 제가 갈 수 없는 곳에 이르러있을 당신을 오늘도 하염없이 생각합니다. 언제쯤 당신과 재회할 수 있을까요, 이미 영령의 반열에 이른 당신과 제가 다시 만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몇번이고 여러 생을 헤매다보면 당신을 만날 수 있을지. 당신이 떠나고 이 세계에 홀로 남은 저로서는 제게서 떠난 그대가 검은 물속에 잠겼는지, 지층으로 걸어 들어갔는지 알지 못합니다. 제 꿈길로조차 저를 방문해주지 않는 야속한 당신 탓에 꿈에서조차 당신의 안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저는 당신과의 기억을 가지고, 당신이 없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든 터를 잡고 살아가겠지요. 오늘도, 내일도.

 당신은 이미 오래전 제 곁을 떠나셨습니다. 그 후로 계절이 바뀌고 또 바뀌었습니다. 겨울의 눈송이가, 봄날의 벚꽃이, 여름의 빗물이, 가을의 낙엽이 목숨처럼 떨어져나갈 때마다 당신을 그리워할 듯 합니다. 하지만 이 말만은 뒤늦게나마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아직도 많이 좋아하고 있어요. 그리고 단 한번이나마 당신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부르고 싶었다고.

 

 아처 씨.


 사랑하는 나의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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